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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박과 느슨 사이( 행13:24-31 ) 본문

신약 QT

강박과 느슨 사이( 행13:24-31 )

주하인 2007. 10. 8. 09:39

제 13 장 ( Chapter 13, Acts )

24.  그 오시는 앞에 요한이 먼저 회개의 세례를 이스라엘 모든 백성에게 전파하니라  
25.  요한이 그 달려 갈 길을 마칠 때에 말하되 너희가 나를 누구로 생각하느냐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있으니 나는 그 발의 신 풀기도 감당치 못하리라 하였으니 
31.  갈릴리로부터 예루살렘에 함께 올라간 사람들에게 여러날 보이셨으니 저희가 이제 백성 앞에 그의

     증인이라 


 

 오늘은 눈에 들어오는 구절이 이렇다.

 

( 병원에 온 아기인데 어찌 이리 눈에 이쁘게 들어 오는 지요..ㅎㅎ)

 

 

 

 그 오시는 앞에

 

 그 달려 갈 길을 마칠 때에 

NIV에서는 '그의 일을 온전히 마친 후에'라고 되어 있다.

  그의 사명을 끝냈을 때.

개인적으로 죽을 때.. 라고 받아진다.

 

 그의  증인

 

 주님 오실 때에

내 인생 마치고

그 분 앞에 서게 될 때

나는 과연 나의 일을 온전히 마치고 서게 될까?

그런 자신감이 있게 될까?

 

그의 앞에서

그 분의 증인으로 난 과연 어떤 일을 하여야 할까?

 사람들에게 어찌 하여야 증인이 될 수 있을까?

어찌해야 나같은 자가 예수님의 증인 역할 할 수 있을까?

증인이 아니면

주님께 칭찬 받지 못할까?

 

 

 오랜 묵상으로

강박관념처럼 달라 붙던

무엇을 해야지 칭찬 받을까 ..하던 의무감 으로 부터

벗어난 것은 사실이지만

이제 한번씩

주님이 모든 걸 다 이해하신다는 것을 빌미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느슨하게 살지도 못한다.

 

 특별히

잘 가다가도

계기가 되면

강박과 느슨 사이에서 흔들리는 때가 있다.

 

 오늘이 그렇다.

 

마음이 흔들린다.

흔들릴 때는

틀림없이

다양한 생각과 더불어 끼어 들어오는 생각 중의 하나가

' 난 무언가.

 살면서 무엇인가 주님 앞에 이루어야 하는 것 아닌가?

 이렇게 무미 건조하게 살다가

 그 분 만나뵐 때 난 어떻게 말씀 드릴 수가 있다는 말인가

 이 세상을 잘 살았다고..

 주님 앞에 증인된 삶을 제대로 살아 냈다고..

 내 인생을 달려가듯이 최선을 다해 완성해 냈다고...'

 

 맞는 얘기다.

오늘 말씀을 보면

요한의 그 처절한 광야의 삶이

오직 주님 앞에 헌신된 개념을 가지고 살았던 것을 보면서

나를 돌아보면

아~~ 무~~ 것도 없다.

솔직히 아무것도 없는 것이 느껴진다.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것만 같고..

 

그러다 보면

한번 씩 성경의 말씀이 버거워 지는 경우가 없지 않아 있다.

오늘이 그렇다.

 

누가 그런다.

정신 차리라고.

열심히 살라고..

다시 회복하라고.

 

 그 안에서 발견 되려 함이니.. 이는 내가 가진 율법 때문이 아니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때문이라고 나와 있는 말씀과

주님과 동행한 아주 짧은 시간이지만

그 체험으로 인하여

그리 크지 않은 내 인생의 올바름이지만

난 그 성경이 사실임을 깨닫고

마음 편하게 살고는 있지만

간간히

저런 흔듦이 오면

또 흔들리기 쉽상이다.

 

이제

다시 한번 정리하라는 주님의 뜻이신가 부다.

( 혼란 속에서 주님을 생각함으로 옳은 선택함은 심령천국의 첫걸음입니다. )

 

 그런 혼란으로

아침 큐티 실을 찾아드는데

메시지가 온다.

오늘 찬양 인도할 형제가 '차'가 너무 막혀 못한다고 대신 해 줄 수 없겠냐는 메시지다.

 

무거운데

더 무겁게 할 모양이다.

 

그러나

그 마음 탐을 생각하니

- 참 희한하다.

 솔직히 고백하면

 남 입장에서 생각할 능력이 생긴 것은 얼마 안된다.

 놀라운 주님의 역사로 스스로 생각한다.

 진짜의 고백이다. -  속에서 '나 이렇게 혼란한데 이런 분위기로 내가 어떻게... '라는 생각을 앞선다.

 

'그래.

 악보도 준비도 안되어 있구

 키타도 없다.

 마음은 뒤죽 박죽이고

 또 예전의 죄책감이 습관처럼 들려한다.

 그래도 선다.

 그 사람의 입장을 완화시켜 주는게 주님의 뜻이다.

 내 올바로 서지 못하는 입장은 내 입장이고 도우는 것은 주님이 좋아하시는 입장이다'

 

너무 당연하지만

이런 흔들림을 올바르게 생각하는 것이 참 어려웠었다.

 

그냥

샘누리 홀 구석에 있는 키타를 찾아 잡아 들었다.

얼른 피아노와 조율하고

찬송가를 찾았다.

찬송가에 책갈피가

'찬송합시다~~ 찬송합시다'하는 데 꼽혀 있고

다시 들추니

308장 (새로 개정 된 찬송가)이 보인다.

 

피아노 반주자와 맞추어 보지도 못하고

마이크를 잡으니

벌써 30여명이 와 있다.

 

참..

이것도 응답이다.

아침 묵상을 혼자하다가 30명 두고 기도하자 마자

대표이사님의 리더로

아침 큐티가 전격 부활되어

반 강제적이지만

부활되어 버렸다 .

 

생각지도 못하던 자들이

모여 들어

그들의 표정이

오랫동안 갈급이 해갈 된 듯

두세달 동안 거의 매일 같이 빠지지 않고 온다.

 

어찌되었던

그 응답 받은 인원이

마이크 잡고 고개를 드는 순간 앉아 있다 .

 

준비 되지 못한 뒤흔들리는 심령을 가진

오늘 아침의 나는

그냥 키타를 두드렸다 .

 

그리고 인도했다.  

솔직히 은혜로왔다.

마침 기도를 하시는 'H'님의 목소리가

유난히 윤기가 흐른다.

 

묵상의 주제는 아니나 다를 까

강박과 느슨 사이에서

중심을 잡고

감격적으로 하는 주님과의 조우이다.

 

다시 처음의 물음으로 돌아가게 된다.

흔들리는 내 마음은

머리 속의 지식과

그간의 미천한 주님과의 경험을 여지없이 흔들려 한다.

 

 

무엇때문에 사는가?

주님 재림을 대망하며 산다.

 정말인가?

머리 속으로

논리적으로

주님이 인도하셨던 은혜를 생각해서라도 그런 것 같다.

하지만 마음으로는 확실히 깨닫지는 못하고 있다.

그렇다면

주님의 대림 시 난 정말 무얼 바라는가?

그 분 옆에 휴거 되어 달랑 앉는게 현실감이 있는가?

아니다.

난 평강을 원한다.

샬롬을 원한다.

오랫동안 누리지 못하며 살아왔던 이 땅의 삶이 주지 못하던

주님이 주시는 이 평강의 폭팔적 확대를 원한다.

그 평강이 영원토록

주님 앞에서 누리길 원한다.

그게 시작점이 그 분의 재림이 되게 될 것이다.

그래서 난 이치적으로 생각해도 주님의 재림을 대망한다.

그런데

대망하는 그 삶은 돌아보면

아침의 흔들림의 원인처럼 보람차지 못하지 않은가?

 

난 왜인가?

정말 내가 보람차지 못한가?

어떻게 생각하면

전도도 많이 했다.

주님 말씀대로 살려고 몸부림 치는 때도 가끔 있었다.

비록 바램이지만.. .

찬양으로 -내 가진게 그거밖에 없다는 마음으로 -주님 앞에 바치려고 노력도 했다.

그럼에도 왜 난 늘 부족한 감을 느끼나?

이게 진실인가?

 

정말

사도 바울처럼

요한 사도 처럼

몸을 불태워 주님의 일을 해내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나,

주어진 일반적인 삶에서도 부대끼는 에너지의 고갈을 경험하며

저녁 만 되면 몸이 파김치가 되어가는 이 상황에서

어찌 난 그럴 수가 있는가?

 

아주 오래된

감정의 에너지 소모로 인하여

자주 피로를 느끼는 난,

이런 부족감에 시달릴 때면

여지없이 힘이 든다.

'그래.. 난 역시.. '하며

주저 앉고만 싶기도 하다 .

그러나,

그러나,

주님은 다르다.

그것은 내 인지의 영역이 아니고

오랜 주님의 주신 평강이 그런다.

그래도 할 게 있다.

제일 좋아하는 구절이

고후 12:10 "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때에 곧 강함이니라"
벧전 4:16)  "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은즉 부끄러워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 이다.

 

내가 약해질 것을 그 분은 안다.

내가 궁핍감을 가질 것을 그 분은 아신다.

내가 핍박을 받을 것, 아니 핍박 받는다고 잘못생각할 줄 도 아신다.

내가 곤란할 것도 그 분은 아신다.

그러면서

그것을 주님의 영광으로 돌리면서

주님이 그것을 '고난' 다음에 오는 '은혜'의 기회임을 알고

의도적으로 감사하고 영광 올리는 것을 주님 그리스도를 위한 행위로 받겠다고 하시는 것이다 .

 

이런 것을 서서히 내 영혼에 각인 시켜 감에도 불구하고

가끔은

흔들려 버리는 것이다.

 

주님께서 일상의 삶을 사는 모든 기독교인 들이

모두 한결 같이 '사도바울'이 되기를 바라시지 않으실 것은 너무도 명백한 일이면서도

난 왜 헷갈리는가?

왜 해야만 하는 강박에 시달리는가?

왜 내가 하던 일을 다 마친 후에 '를

순교로만 생각하려 하는가?

일상에서의 약함을 주님에게 맡기고

그 분이 인도하심을 기다리고

그럴 수 없는 과정에서

그 분에게 올리는 영광의 찬송이 되면

그 분 하나님은

그 과정에 겪을 당신의 자식들의

가슴 찢어지는 아픔에도 불구하고

드리는 용기를

정말 가상하게 보시는 것이시다.

 

 내 자식이

넘어져 얼굴이 먼지에 쌓이고

다리는 바지가 뚫어지는 상처를 입었음에도

아버지를 걱정하는 눈초리로 한번 쳐다보며

아픔을 삭이는 과정을

가슴아프게 기쁘게 받게 되는 것이다.

 

 넘어지지 말자.

내 일상이

내 스스로 보기에 흐뭇하지 않아도

주님이 날 보시기에 아무런 자괴의 판단을 하지 않고

이룬 것이 아무 것도 없음에도

그냥 주님이 해주실 것을 믿으며

주님께서 일용할 양식 주신다는 말씀을 믿고- 믿지 않고 기다림은 방종이고 게으름이다.-

기다리는 것이 진실한 믿음이다.

 

 수술이 많다.

정신이 하나도 없이 바빠

회의까지 겹쳐

아침에 점심까지 굶고 수술 들어갔다 나오려 하니 몸이 파김치다.

옷을 갈아 입으려다

번뜩

지난 달

수술이 거의 - 정말 거의..다- 없어

걱정하며

'주여 지금같아서 믿겨지지 않으려지만

작년의 그 폭팔적 환자 수의 증가처럼

또 기적을 보이소서.

하루 한 두개의 수술 환자를 보내시면 안될까요..'

하며

믿음 부족하고

성장이 부족한

이 주하인이

지나가듯이 - 난 부탁을 못한다.   누구에게도...  아버지에게 거부를 많이 당하며 자란 탓이다. ^^;;-

기도를 한 기억이 번득 났다.

 

다음 2주 후까지

거의 매일 수술이 한두개씩 있다.

주님은 기도하는 것만 들어주시는 훈련을 시키신다는 생각이 든다.

 

'아..

나의 고질적 습관인

장래에 대한 번듯한 계획과

스스로 생각하기에 그럴 듯하다고 인정되는 것만 믿으려 하는

이 어리석음과

까마귀 밥 같은

응답의 원리를 체험시키기 위해서 그러시구나.'라는 것을 깨닫는다.

 

물론 과거에도 깨달았었었다 .

깨닫고는 영혼 속으로 믿음이 들어오지 못해서 그랬지.

늘 의심이 내 주특기 였다

과학자로서의 자질을

잘도 길러왔었다  ~~ ^^;;;

 

이제는

얼마 후 이렇게 고백할 수 있을 것도 같다는 생각이 든다.

 

( 예수 인도하셨네- 양문교회 찬양대 연습곡 06)

 

'내 일생 여정 끝내어

 강 건너 언덕 이를 때

 하늘 문 향해 말하리.

 오..

 예수 인도 하셨네.

 매일 발걸음 마다

 예수 인도하셨네

 나의 무거운 죄 짐을 모두

 벗고 하는 말

 예수 인도 하셨네'

........

 

 

 

 난

비록

내 인격의 변화에 만 모든 관심이 집중되어

아직은

그들 사도처럼

하나님을 증거하고

예수님을 전도하고

폭넓은 사명으로 과업을 완수하지 못할 지 몰라도

내 가진

변화의 경험을

드러나는 예수님의 도우심의 흔적을 나타낸

향기로운 인격으로

살아계신 하나님을 영광 올리는 그런 삶을 살 수도 있을 지 모른다.

 

그 때쯤

주님이 원하시면

이 부족한 주하인

월하랑 이었다가

그나마 사람 노릇하는

월하인으로 바꾸시고

주하인으로 승격시키셨음을

세상 모든 이에게

드러내게 하실 줄도 모른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그것 모두

주님이 하실 일이다.

 

내가 내

달려 갈 길을 마친 후

주님은

내 부족한 충성을 귀히 보시고

네가 증인의 삶 사느라 수고했구나... 할 지도 모른다는 얘기다.

그것 조차 주님의 뜻이다.

 

내려 놓아야 한다 .

모든 걸 주님 앞에 내려 놓아야 한다 .

 

강박이 전혀 필요 없다.

그냥 기다린다.

 

그러다가 생기는 느슨은

또 오늘 같은 마음의 혼란을 통하여

말씀으로

인도하시는 그 분이 계실 것이다.

 

느슨하는 단계는

내 성장의 정도에 따라 결정이 될 것이다.

 

어느 순간에

커 있는 몸에

어린 옷이 맞지 않듯

느슨하게 비만해져가면

그 분이 옷을 적다고 갈아 입으시라 하실 때가 있을 것이다.

 

그 분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을 놓치지 않고만 있으면 말이다.

 

그 분 이외에 누가 날 판단할 것인가?

나도 날 판단하지 못한다.

주님 오시는 그 날까지..............................................

 

 

 

 

 

 

적용

 

1. 말씀 다섯 장 읽겠다.

  주님 말씀은 생명의 끈이다.

  성장하기 위한 옷갈아 입음에 필수 적인 과정이다.

 강박과 느슨을 구분하기 위해서는 말씀이 필수다.

 

2. 아버지 학교 간다.

 가기 싫다.

그러나 간다.

 그곳은 날 필요로 한다.

 나도 중보의 훈련을 한다.

 남을 위한 삶의 현 장소다.

  주님의 말씀을 준행하는 최소한의 기회이다.

 

3. 주님 감사합니다.

   다섯 번 소리내서 외치겠다.

 

4. 수술 환자들에게 최대한 성의껏 하겠다.

 주님이 보내신 분들이다.

 

5. 주님이 원하시는 내 후반전의 삶을

 

기도

 

주여

감사합니다.

부족한 이 죄인

깨달음 또 허락 하시는 군요.

느슨함과 강박 사이에서

주님께서 일깨워 균형 잡힌 삶을 허락하실 줄 압니다.

흔들리지 않도록 하여 주세요

아울러

제 가지고 있는 장해물을 아실 줄 압니다.

주여

없이 하여 주소서.

도우소서.

 

주님

제  필요 아시리라 압니다.

도우소서.

기도가 들려졌으면 합니다.

 

이 힘든 삶의 여정을

주님의 뜻 안에서

잘 조율하고

주님 뜻대로

맡기고

포기하고

부인하고

약함을 기뻐하는 삶을 살 수 있도록도 해주소서

주님이 원하시면

부족한 부분

풍성히도 채우소서.

오시는 모든 분들 축복 하소서.

제가 빠드린 중보의 분들도 기억하시고

특별히 제 가족 기억하세요

 

예수님

들어주실 줄 믿사오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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