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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시여 나도 보아주세요[막2:13-28]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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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시여 나도 보아주세요[막2:13-28]

주하인 2024. 2. 13. 06:44

부제) collector's booth 안에서 바라본 세상, 그리고 다가오시는 빛

(펌) 아쉽다. 저요..?.. 하며 묻는 듯한 레위의 모습으로 그려짐이 ..
(펌) 조금 더 아쉽다.ㅠ.ㅠ; 부스 안의 레위가 화사한 얼굴로 웃고 있다 .. 번민하던 자의 인사이트로 표현되었더라면 명작의 그림이 되었을 것을...아 그러고보니 예수님 얼굴도 마치 여자에게 윙크하는 듯 ㅎㅎ ..

.

 

13 예수께서 다시 바닷가에 나가시매 큰 무리가 나왔거늘 예수께서 그들을 가르치시니라

 당연하지만 '큰 무리 '가 주님을 따랐을 것이고

 

14 또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NIV; collector's booth 세리들의 부스)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인파에 쌓여 '지나가시다가'

15절에도 나오듯 '많은 세리' 무리 중에서도

그냥 '평범히도' 

세관(NIV에서는 collector's booth, 세리들의 부스라 나온다.  그가 부스 안에서 어떠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을 지 그림이 그려지는 듯하다 ^^;)에 

아마도 '멍히' 앉아 있었을 '레위(훗날 마태복음을 쓴 마태)'를 

보시었다.

 그리고는 '나를 따르라' 하시니

마치 미리 약속이나 한듯이 

주섬주섬 일어나 따랐다 (따르니라..라는 표현이 그의 일말의 망설임 없이 그냥 툭툭 털고 따랐다는 뉘앙스로 들려온다).

 

 무엇인가?

'또 지나가시다가'라는 표현처럼

그 지나가심이 '우연'이었을까?

하나님이 우연히 지나시다 그냥 집어든 ...

마치 복권 당첨 된듯 지금의 우리가 알던 그 마태복음의 저자이자 사도인 그가

'확률'의 소산이라시는 말씀이시던가?

 

 아니시라면?

 

 우리가 '예정론'이다 아니다.. 수없이 많은 논쟁 중의 한 부분에 속한 거 아닌가?

하나님께서 태초부터 '예정'하셨던 

그 시간, 그 순간, 그 마음으로 허탈하게 앉아서

그 세리 일에 재미를 느끼지 못하던 세리 레위를 

마침내 들어올리셔서

하나님의 사도로 삼으신 것 말이다. 

 

하지만.. 여기에

당연한 우리의 '선택'이 주어지고

만일 

그때 지나가시고

그때 보시고

그때 '따르라' 하셨지만

그때 레위가 망설이고 시간 끌었거나

잠시 그 갈등에서 , 영적전쟁에서 

'세리', 세관, collector로 대치되는

세상의 재리에 대한 욕심과 편안함과 익숙함에 대한 아쉬움으로 망설였다면

그 세리가 '사도'가 될 수 있었을까?
레위가 마태가 될 수 있었을까?

 

 하나님 안에서는 수없이 많은 '선택'의 길이 놓여 있음,

'갈등'은 필연이며

우리에게 '선택'을 원하시는 

주님의 뜻이 읽혀지지 않는가?

 

 

 그리고 그 시간,

우리가 그 앞,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손을 내미시던

그 첫사랑, 구원의 시간에 

내가 바로 그 장소에 있었음도 놀라운 확률이었고

그때 마침 내가 

세상과 진리 사이에서 갈등을 하고 있었음도 

정말 놀라운 일이었으며

그 순간.. 나를 따르라.. 하신 주님 예수님의 소리에 

과감히 모든 세상의 덫을 벗어던질 결심을 하고 

내미신 주님의 손을 잡고 

훌훌 털게 된것도 절묘한 '순간'과 '결심'과 

그러한 '갈등' 자체를 할 수 있었다는 

내 귀한 심성의 조합의 결과이기도 하다. ^^:

 

 마태.

레위의 시절 .. 무슨 고민을 하고 있었을까?

 

 어쩌면 '돈'과 '손가락질 '사이에서의 갈등으로 촉발되어

오랫동안 가슴에 쌓여있던 

이렇게 사는 것이 맞는 것인가? .. 고민하던 결과는 아닐까?

 그리고 이어진 '삶의 목적'... 

'산다는 것의 너무도 의미를 찾기 힘듦'.. 

찾을 수 없는 이땅에서의 삶의 이유.......를 고민하게 되었을 것이고

비록 '습관'처럼

산다는 것의 어쩔 수없음의 틀에 묶여

매일을 똑같이 똑같이 남들처럼 흘러가지만

시간이 갈수록 점차로 흥미를 잃어가던 

바로 그러한 순간... 

그러한 순간에 

정말 '카리스마'로 다가오시는.. 

그 큰 무리 속에서도 

온통 세상의 바글거림.. 

군중 속에서도 튀어나 눈에 띄여 보이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눈앞으로 다가오심'에

아마도 그는 전율어린 시선으로 

그 분을 바라보고 있던 차 일거다. 

 

 아마도 그의 동공의 커져 있었을 것이고

그의 눈은 깜빡이지도 않았을 것이며

어쩌면 숨조차 멈추었을것이다. 

잠시지만... 

그리고 그의 이러함은

당연하시지만

예수님의 눈에 

그 많은 군중, 

그 많은 세리 중에서도 

그리 특별치 않게 '부스'에 앉아있던 

한 '세리'가 눈에 들어왔을 것이고

그가 당신의 '제자'로 예정되어 있을 자이심을 쉬이 알아서

손을 내미셨을 것이다.

그리고는' 나를 따르라'...........

 

 

28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이러한 일련의 흐름,

마침 쏜살같이 지나가는 세월과 삶의 흐름 속에서 

그 순간 

그 곳에서

그렇게 마주하게 된 두 사람과 

그 짧은 순간을 결정하게 된 본질이 무엇인가?

 

 당연히도 '하나님의 예정'이 전제가 되었지만

위의 예상한 전개도 처럼

'마태'의 인생내내 그 삶을 이끌어오던 의문,

갈등........

그리고 그 갈등에 대하여 

대부분.. 거의 모든 이 땅의 사람들이 그렇듯

그냥 무시하고 

살아온대로 살아오고

살아갈대로 살아가며

마음의 갈등,

반드시 살아있는 자는 죽어야 한다는 사실과

그러하기에 '본향'에 대한 생각 자체를 

망각으로 묻어 버리고 살거나

다른 방향, 

하나님의 원하심이 아닌 .. 인생의 오류들로 향하는

그 어이없는 자들이 아닌

끝까지 진중하게 진리를 사모하는데 있었다는 거다 

 

그의 '진리에 대한 갈등'과 

그 사모가 

주님의 선택의 손을 내밀게 되었고

그 결과 

그가 누리게 된 것은

'진리'가 아니던가?
 진리로 인한 '자유'..........

 

 안식일.. 로 대표되는

세상의 거대한 규칙,

공중의 권세잡은 자, 

세상의 권세로 대표되는 영적 오류로 부터의 '자유'......말이다. 

 

 그는 '사는 이유'를 확실히 깨달았으며

그것은 더 이상 논리적 꼬임이나 

생각의 유희등이 필요없음이다. 

그냥.. 성령 안에서 (아직 성령께서 임하실 때는 아니지만, 대신 예수 께서 현존하시던 그 안의 자유)

주님이 말씀하시는 대로 만 살아가면 될......

그 자유 말이다. 

 

 어제 묵상 중.....

'예수 안의 도'라 표현되던...

 

 그렇다면 오늘 내게 무슨 말씀 하시려는가?

 나.

분명코 매일 말씀 묵상을 하고 

그때마다 허락하시는 '깨달음'과 '은혜'로 인하여

당연히 '은혜' 안에 매일 거하는 자.. 

주님께서 인정하시는 지 잘 모르겠지만 ^^; 

난.. '제자'의 길을 답습해가는 자다. 

내가 한번도 꾸어보지 못하며 그냥 '세상의 틀'..

'세리들의 부스' 에 

어쩌면 지금도 앉아서 '흔들리고 있을 수 있다' 

 

 주께서 그러신다. 

다시

'나를 따르라' 

 

예.. 

주님.

흔들릴 일이 당연히 이제는 없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래된 삶의 습관은 

또 여지없이 저를 붙들려 하는지

일어나자 마자 머리가 뒤엉키려 하고 

설명하기 힘든 오래된 서늘함들이 저를 혼란케 하려 합니다. 

 

자유치 못함.

예수께서 원치 않으시는 상황 아니겠습니까?

 또 '바리새인'들의 공격 같은 ........

그러함 아니겠습니까?

 

 주께서 '레위'였던 '마태'님의 

세관, 

세리들의 부스에 앉아 넋을 놓고 있던 그를 묵상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주님예수'님의 그때 그시간 그 앞에 지나시며

보시고 

부르시는 그 장면을 묵상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 내면의 갈등의 터져나감.. 

진리를 마주함.. 

진실.........을 다시한번 묵상하게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자유였습니다. 

주님 진리 안의 자유.. 

그 자유를 알아채림.. 

그 진정한 자유 안에서 

세상의 그어떤 제약이나 혼돈으로 부터의 벗어난

진정한 개운함.. 

진정한 안식이 

이제 곧.........

아니 바로 곁에 항상............

'천국'의 그날로 제게 예비되어 있음을 깨닫게 하십니다 

그리고 매일 손내미시는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을 순종하여

벌떡 일어나기만 하면 

이땅을 살되 

더 이상 묶이지 않은 '심령천국'의 삶이 

바로 곁에 있는 

그 온전한 예수님의 도를 깨닫게 하십니다. 

감사합니다 

 

어느새 마음이 고요해졌습니다. 

 

이제 출근 준비 해야겠습니다. 

지난... 연휴 4일을 잘쉬댜 또 나가서 부딪쳐야 하는

이땅의 '세리의 일'들이 또 버겁기는 하지만

다 털어버리고 나가지 못하는 '생활인 주하인'의 모습이라

또 마음만 다잡고 갑니다 

주님.. 

절 붙들어 주소서.

제 삶 내내 주님 만 붙들고 살려 하오니

제게 '자유'를 허락하소서.

언제까지일지 모르지만

주님 이땅에 재림하시고 '휴거'하여 주실 때까지.. 

아니시면 감하신 그날을 허락하셔서 지나가

주님 얼굴 뵈올 그날까지

저를 붙들어 주소서

 

거룩하고 귀하신 우리 주님 예수,

자유의 본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레위였던 '마태' 사도

알패오의 아들 레위에 대한 설명

알패오의 아들 레위는 신약성경에 등장하는 인물로, 예수 그리스도의 열두 제자 중 한 명입니다. 그는 또한 "마태"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레위에 대한 정보:

  • 직업: 세리 (세금 징수원)
  • 아버지: 알패오
  • 형제: 야고보 (알패오의 아들)
  • 별칭: 마태
  •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장소: 세관
  • 제자로 부름을 받은 후: 세리의 삶을 버리고 예수를 따랐음
  • 신약성경에서 등장하는 장소: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사도행

레위에 대한 흥미로운 사실:

  • 그는 세리였기 때문에 당시 유대인들에게 멸시받는 존재였습니다.
  •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 자신의 삶을 완전히 바꾸고 제자가 되었습니다.
  • 마태복음을 기록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 그의 삶은 회개와 용서의 상징으로 여겨집니다.

레위에 대한 추가 정보:

  • 레위가 세리였던 것은 그가 로마 제국에 협력하는 자로 여겨져 유대인들에게 멸시받는 이유였습니다.
  • 예수 그리스도는 레위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 레위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복음을 전파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레위의 삶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 하나님은 누구나 회개하고 용서받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 죄가 많았던 사람도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삶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기보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대해야 합니다.

레위에 대한 더 자세한 정보를 얻으려면 다음과 같은 방법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 성경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사도행)
  • 성경 해설서
  • 인터넷 검색

알파벳 순으로 정리:

  • 아버지: 알패오
  • 별칭: 마태
  • 사명: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 마태복음 저자
  • 성격: 회개하고 용서받은 사람,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열정
  • 영향: 복음 전파, 다른 사람들에게 용서와 사랑을 보여주는 모범

결론:

알패오의 아들 레위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용서를 경험한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그의 삶은 우리에게 회개와 변화의 가능성을 보여주며,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의 의미를 일깨워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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