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갇힌 자 갇힐 자 ( 몬1:1-16 )

주하인 2009. 10. 28. 10:38

제 1 장 ( Chapter 1, Philemon )

 

 

 

등불이

어둡던지

초췌하던지

분위기 있던지

포근 하던지

 

강아지 풀의 흐름이

하찮던지

귀찮던지

살랑거리든지

아름답던지

 

 모두

보는 에  달렸다 

 


1.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바울과 및 형제 디모데는 우리의 사랑을 받는 자요 동역자인

    빌레몬과    
4.  내가 항상 내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할 때에 너를 말함은  
5.  주 예수와 및 모든 성도에 대한 네 사랑과 믿음이 있음을 들음이니  
6.  이로써 네 믿음의 교제가 우리 가운데 있는 선을 알게 하고 그리스도께 미치도록 역사하느니라  
7.  형제여 성도들의 마음이 너로 말미암아 평안함을 얻었으니 내가 너의 사랑으로 많은 기쁨과 위로를

     얻었노라  
8.  이러므로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많은 담력을 가지고 네게 마땅한 일로 명할 수 있으나  
9.  사랑을 인하여 도리어 간구하노니 나이 많은 나 바울은 지금 또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갇힌 자 되어 
10.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 오네시모를 위하여 네게 간구하노라 
14.  다만 네 승낙이 없이는 내가 아무 것도 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너의 선한 일이 억지 같이 되지

       아니하고 자의로 되게 하려 함이로라  
16.  이 후로는 종과 같이 아니하고 종에서 뛰어나 곧 사랑 받는 형제로 둘 자라 내게 특별히 그러하거든

      하물며 육신과 주 안에서 상관된 네게랴
 
  
  오늘은 세 사람의 훌륭한 믿음의 용사를 본다.

사도 바울님.

오네시모

빌레몬.

 

 그 중 사도 바울 님에게서와 빌레몬에게서

신실한 기독교인으로 배워야 할 점이 잘 드러나 보인다.  

사도 바울 님은 지금 감옥에 갇힌 자다.

그 분은 자신을 잘 안다.

' 갇힌 자'

하지만 그 분은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거나 원망하며 좌절하기보다는

오네시모를 영적 아들로 삼아 차세대의 대단한 지도자로 만들고

빌레몬이라는 훌륭한 신앙인에게

밝고 명료한 지도를 행하는 영적 지도자로서의 직분을 잘 감당하고 있다.

 그 분의 훌륭한 점이 오늘 몇 곳에서 보인다.

그 중의 우선은 자신이 누구인지 확실히 알고 있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성경에서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께 직접 사도직을 받았음을

확실히 선언하기도 하지만

오늘도 그 분은 자신이 감옥에 갇힌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함'인 것을

확실히 두번이나 천명하고 있다.

그것이 훌륭하다.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 지 확실히 아는 자다.

그러기에 그에게는 '감옥'이란 현실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고

자신이 '죄인'의 딱지를 쓰고 감옥에 들어 앉을 수 밖에 없는 것이

두려움이나 좌절이 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도하는 (4절) 이유가 되고 있는 것이다.

그분에게는 현실의 어떠한 조건도 문제가 되고 있지않다.

오히려 그 분에게는 모든 것이 기회가 되고 있다.

오네시모를 전도한 곳이 감옥이다.

그 분은 아시아의 큰 리더가 되는 분이다.

비록 종의 출신이지만 ......

 또한 사도 바울님의 배울 점이 눈에 띠게 드러나는 구절이 있다.

8, 9절 및 14절을 통하여 말하는 바

' 명할 수 있으나....사랑을 인하여 도리어 간구한다'고 했다.

그것은 ' 주인이던 빌레몬의 승낙이라는 과정이 있어야 선한 일이 자의로 되게 함으로'

모든 일에 '배려'를 하였다는 것이다.

그것은 빌레몬으로 하여금 위신을 세우는 것이고

오네시모라는 종으로 하여금 

자유의 신분을 공포하게 하는 일이 되는 것이다.

 참으로 지혜롭다는 생각이 든다.

이러한 지혜는 사도 바울의 두뇌자체가 명석함에도 있지만

'남녀를 불문하고 기독교인을 잔멸하던..' 사도행전의 흔적으로 보아

그의 심성은 잔인하기 이를 데 없는 자로서

예수님을 다메섹 도상에서 만나고

3년의 광야 단련을 통하여 연단 받지 않고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인격의 향기이다.

'배려'나 '인간 미' 등은 인간으로 바꿀 수 있는 덕목은 아니다.

인격.

사람으로 하여금 꾸준히 나타나 보이는 성품적 특성.

가끔 변덕으로는 가능하지만 인격의 변화는

의사인 나로서는 가능치 않음을 잘 알고 있다.

 단, 하나의 경우로서는 가능함을 보아 왔다.

 '중생'

 하나님을 ,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변하는 것.

주하인이 증거다.

 

 또 배워야 할 사람으로 '빌레몬'님이 있다.

그 분은 1절에서 사도 바울님께서 '동역자'로 표현할 정도의 인격자다.

하인을 두고 많은 사람들에게 선을 베풀 재력가이기도 하다.

그 분의 인격이 얼마나 놀라웠던지

사도 바울님께서 기도할 때마다 중보하던 대상이었고

감사하며 주님께 기도할 조건 중의 한사람이었던 것이다.

아마 사도 바울님은 이리 기도했을 지도 모른다.

'주님 , 너무도 감사합니다................

 그 중하나는 제가 이 감옥에 갇힌 이유 중하나가

 이 빌레몬같은 훌륭한 분을.................'

 그 분은 성도들에게 잘하는 자이고 그들 모두가 칭찬할 정도의 믿음과 사랑이 넘치는 자였다.

그 분은 '교제'에 뛰어난 사람이다.

사람끼리의 친분이 아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믿음의 교제다.

 그것은 하나님이름으로 모이고 세속적 대화와 친분을 쌓는 모임이 아니다.

전적으로 예수님이 주제가 된 교제다.

그것이 '믿음의 교제'이다.

빌레몬 님은 그런 사람이다.

 그런 사람에게 사도 바울님은 '명령'할 수 있지만 '권유'를 한다.  

종인 오네시모를 '형제'로 삼으라고.........

 참 놀랍고 파격적이다.

이 시대가 르네상스 시대도 아니고

링컨에 의해 노예해방 전쟁이 일어난 후도 아니다.

인권이라고는 전혀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시절이다.

노예는 사람이기보다 '재산'의 하나로 인식되는 시절이고

거기에 그 오네시모라는 자는 '탈주'를 하다가 잡혀서

사도 바울님과 함께 감옥에 들어 앉게 된 자이다.

그런 그를 사형에 처하기 보다는 오히려 '형제'로 삼으라니....

아무리 존경하는 사도지만 그 권고 만큼은 귀를 씻고 싶었을 것이다.

평범한 촌부도 아니다.

가까운 친척을 그리하라는 것도 아니다.

얼마전 까지 종으로 있던 자다.

그를 다짜고짜 '형제'로 삼으란다.

속이 뒤집히려 한다.

내가 잠시 '빌레몬'의 입장에 서보니 말이다. ^^;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라면 가능했을까?

가능치 못한 이유는 무엇인가?

'속상함'이다.

나를 배반하고 튀쳐 도망간 자.

나에게 재산적 손해를 미친 자.

거기에 하인이 아니던가?

그 하인을 나와 같은 반열로 올려 '형제'로 삼으라니 ..

나를 도대체 어떻게 보고 저러는 것일까?

쪽팔린다.

화가 나려 할 것이다.

 

 하지만, 빌레몬은 해 냈다.

그것은 기독교 역사가 증명했다.

오네시모는 기독교의 대 지도자가 된 사람이다.

참 놀랍지 않은가?

하나님의 역사가 말이다.

 오네시모를 노예로 잡혀오게 하시어서

빌레몬님의 집에 살게 하시고

묘한 시간에 똑똑한 오네시모가 자신의 영리함을 못이겨 도망치게 하고

그러다 잡히게 하여 옥에 갇히게 하고

그 즈음에 사도 바울이 '갇힌 자'되고.........

 그 타이밍이 절묘하다.

거기에 빌레몬 님이 '결단'을 하도록 빌레몬님에게 선택의 조건을 남겨놓으시고

결국은 빌레몬의 그 선한 심성을 들어

그를 형제로 받아들이는 '패'가 맞아 떨어지게 하시어서

그를 대 지도자가 되게 하시고

지금까지 기독교의 역사가 면면히 이어나오며

주하인과 우리 후대까지 예수님을 구주로 삼을 기회를 주시니.....................

그것을 생각하면

소름이끼치도록 하나님의 손길이 놀라움을 금할 길이 없다.

 사도 바울님은

그 사실을 너무도 잘 아시고 계셨다.

우리는 수천년 쌓인 역사의 데이터를 통해 쉽게

주님의 엄청나고 놀라우시며 세세한 스케쥴을 깨닫지만

그 분은 하나님이 손길이 절절히 끓는

그 역사의 현장에서 이렇게 고백을 하고 있다.

' 나는 !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갇힌 자 되었다 ! '

그 분은 갇힌 자이지만 풀려난 자이다.

육신은 비록 감옥에 갇혀 있지만

그 분은 사단의 감옥, 영혼의 감옥에서는 풀려 나온 자이다.

 그 분은 자유로운 자이다.

 그것은 예수그리스도 때문이다.

 

 빌레몬.

그 분은 역사를 돌아보아 갇힐 뻔한 자지만 풀려난 자였다.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풀려난 자'인 것이 증명이 되었다.

무슨 이야기인가?

 나의 예를 든 적이 있다.

그것이 거의 대부분의 평범한, 특별히 그 시대의 사람이라면

벗어날 수 없는 , 거부할 수 없는 심정이었음이 분명하다.

그것은 '속상함'으로 표현되었지만

'미움'일 것이다.

분노일 것이다.

그것은 '용서 할 수 없음'이다.

용서할 수 없음은 '자신이 무시당함', '자신이 손해를 당하게 됨'에 대한

거부 반응이고 그것을 용서할 수 없는 마음일 것이다.

용서할 수 없음.

그것은 감옥에 스스로를 가두는 고통이다.

손가락질 할 때

손가락하나는 그를 향하지만

하나는 하늘을 향해

나머지 세개는 자신을 향해 돌아가는 고통이라 하지 않는가?

 빌레몬님은 사도 바울 님을 통해 '시험'을 허락 받고 있다.

용서와 용서하지 못함에 대한 선택의 순간에 와 있다는 말이다.

이것은 스스로를 가두는 것이고

이전에 그가 보이던 그 놀라운 '교제'의 실적 ^^; 들이

자신의 사람 좋아하는 감정적 장난인가

아니면 정말 주님이 인도하시던 선한 감정의 발로였던가 확인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그것은 사단의 감옥에 갇히는 결과이다.

그는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 '갇힌 자'인 사도 바울의 대열에 참여할 것인가

아니면 '사단의 감옥에 갇힐 자'인가  스스로 선택해야할 기로에 서 있는 것이다.

 

이.. 선택의 문제.

그것은 쉽지가 않다.

늘 그렇듯, 사단의 선택은 쉽다.

즉각적이고 개운하다.

우리의 죄된 속성이 택하기에 너무도 자연스럽다.

반면에 성령의 그것, 온유 절제 겸손 화평 오래참음 ,충성, 양선.......등 듣기에도 힘든 속성을 시행하기에는

상당한 결단의 의지가 필요하다.

그 만큼 사단이 잡아당긴다는 이야기다.

 

 신종플루 환자가 넘침으로 소아과는 폭팔 지경이다.

우리 산부인과 대기실은 소아과와 공유되어 있기에

대기실에 칸막이를 하고

우리 산부인과 환우들은 신경 센터 쪽으로 돌아 들어와 앉도록 배치가 되었다.

그러나 간호사들 책상 쪽으로 터 있기에 그 쪽은 소아과와 연결되어 있다.

그러다 보니 밀려 넘치는 소아과 환우들과 보호자들이 산부인과 간호사 책상까지 밀고 들어와 서 있다.

우리 산부인과 환우분들의 격리를 위해 설치한 칸막이는 소용이 없어진 것은 물론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가진 균이 남에게 넘어올 것은 전혀 염두에 두지 않는 듯하다.

그래.

거기까지는 인간의 '인식체계의 한계'라는 면으로 이해할 수 있다.

자신의 문제가 있으면 남을 배려하도록 작동하지 못하도록

컴퓨터 바이러스 감염되어 있는 인간이란 컴퓨터의 프로그램은..^^;

하지만 어떤 분은 앉아 있는 책상에 놓여 있는 챠트를 순서를 얼른 바꾸기도 하고

고함을 지르고...............

간호사의 표현이다.

'좀비 들 같은 느낌이 들어요.'

좀 과장된 느낌의 표현인 줄 알고 웃지만 서로 씁슬하다.

기존의 독감에 비해서도 치사율이 낮은 '신종플루'의 대 유행에도

이 정도 혼란을 보인다.

온통 자신의 '감옥'에 갇혀 남은 배려할 마음이 없는 사람들 투성이다.

이들도 한가할 때는 순서를 지키고 소리를 낮출 교육을 받은 분들이다.

그러나, 세상은 틀림없이 갈수록 새로운 병이 생길 수 밖에 없다.

몇년 사이에 '조류 독감','AIDS', '신종플루' 등 변종 바이러스들이 창궐하지 않는가?

그것은 인간이 초래한 것 맞다.

유전자 조작을 통해 눈앞의 이익을 보는 순간

유전자 조작된 생물에 감염된 바이러스는 순간적으로 '돌연변이 '된다.

아주 당연한 일이다.

세상은 어쩌면 '종말'의 시간에 너무도 가까이 있을 지 모른다.

그러면 이 작은 소란이

이 작은 배려 못하는 선택이

정말 지옥도처럼 너 나 없이 번지지 말라는 생각은 하지말라는 보장이 어디 있던가?

지옥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다.

배려 못하고 자신을 택하는 자 만이 살아 있는 곳이 '지옥'이다.

 

 다시 빌레몬님으로 돌아간다

그 분은 '감정의 지옥'에 갇히질 않았다.

그 분은 '용서'와 '화해'와 '이해'를 선택하였다.

그럼으로 그 분은 기독교의 현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고

그 분은 빌레몬서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이름을 성경에 한 부분에 당당히 올리게 되었다.

그 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갇힌 자'를 각오하고

'갇힐 자'에서 벗어나 '자유하게 된 자'로 이루어 졌다.

그 바탕에는 '용서'와 이해의 선택이 있다.

 

 주하인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세상의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로 이해하면 이해가 된다.

아니다.

그를 넘어서서 ' 내 삶의 하나하나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사는 것'이라는 것이다.

갇힌 자.

갇힌 것 같이 답답한 상황 조차도 주님을 위하여 살 기회가 되는 것이다.

의미없는 삶이 하나도 없어지는 것이다.

주님을 위하여 살기를 선언하는 즉시

내 삶은 힘이 있어진다.

난 '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사는 자'라는 의식을 확실히 지니기 원한다.

그리고

빌레몬님처럼 '온유하고 믿음 좋고 사랑이 넘치는 자' 되길 기도하여야 겠다.

또한 '용서'할 자는 반드시 '주님을 위하여 ' 용서하여야 한다.

미운 자 있어도 용서한다.

스스로도 용서한다.

나와 사이 좋게 지낸다.

나와 남과 주님을 위하여 오늘 하루 눈을 넓힐 것이다.

 

 

 

기도

 

  주님.

사도바울께서 갇혔음에도

분위기는 힘이 있고 밝습니다.

선한 방향으로 사람들을 지도해나가고 있는 모습을 봅니다.

그 분의 그러하심은

그 주위에 있던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자로 성장할 수 있도록 계기를 만들어 줍니다.

참으로 그 시대에 그러한 생각을 할 수 있는 것이 기적으로 밖에 볼 수 없는 일이

주님 예수님 때문에 일어남으로 그분과 빌레몬님은

시대를 앞서가는 인권을 존중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모두 주님이 살아계셔서 인도하심이 아니라고는 생각할 수 조차 없음을 보고 있습니다.

주여.

세상이 어떻든

모든게 예수 그리스도 때문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 자리에 있게 됨을

강력하게 인식하게 하소서.

그래서 현실의 어려움 때문에 좌절하기 보다는

주님의 뜻 안에서 최선을 다해 살 수 있도록 도우소서.

그런 마음을 주시고

늘 남을 위하여 배려하는 자가 될 마음을 주소서.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그리하도록 하소서.

도저히 되지 않습니다.

아무리 하여도 작은 자극에도 쉽게 좌절하고

조그만 스침이 있어도 급한 성격이 나옵니다.

주여.

이 부족한 자를 열어서

주님 은혜 안에서 거하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감사하며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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