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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l & cry ( 시 86:1-7 )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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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l & cry ( 시 86:1-7 )

주하인 2010. 2. 27. 11:37

제 86 장 ( Chapter 86, Psalm )

 

 

 

 

주님 부르시니

봄이

성큼

우리곁으로

다가온 듯합니다

 

주님 부르시니

새 생명

이리

봄을 반기는

축포의망울을

 터뜨립니다

 

주님

이제 제가 

종일토록 

주님이름 부르오리다

저를 

긍휼히 여기소서

 

주님

제가 

환난 날에 부르리이다

제게 

응답하소서

 

저로

당신의 이름 만을 

높이게 하시고

 

주님

당신의 하신일을

소리높여 

찬양케 하소서

 


  
3.  주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내가 종일 주께 부르짖나이다 (call)   

 

 주님의 긍휼히 여기심을 기대하며

종일

주께만

부르짖다.

 

부르짖다는 call이라 나온다.

답을 기다리는 부름.

 


6.  여호와여 나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고 나의 간구 (cry)하는 소리를 들으소서
 간구.

cry out.

외쳐 소리지르다.

 자신의 탄식을

자신의 어려움을 

꼭 응답 여부와는 관계없이

터져나오듯 부르는 외침.

그게 간구라고 번역이 되어 있다.

 목이 터져라 외쳐야 주님이 들으실 거 아니시던가?

꼭 소리쳐야 들으시는

귀어두우신 분이 아니고

그처럼 간절한 기도를 말하는 것 같다.

 

 지난 금식 기간 중.

아직도 절절히 기도하는 습관이 들지 않아서 였던가?

간절히 구하고 간구하는 기도의 습관이 필요하지만

그러지 못해왔다.

더욱 간구하는 기도의 습관을 들여야 겠다.

 

 
 
7.  나의 환난 날에 내가 주께 부르짖으리니(call) 주께서 내게 응답하시리이다
 환난 날에

부르짖다.

응답하실 것이다.

 

call은 응답을 전제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주님을 간절히 바라고 부르면

주님이 응답하신다는

응답의 기도를 시인은 묘사하고 있다.

 

환난 날

긍휼

열렬함

부르짖음

간절함

응답

희망

공감.

 

사는 게 늘 행복한 사람들이 있을까?

돈이 많으면 걱정이 없을까?

명예가 높으면 아무 근심이 없을까?

자식이 잘되면 그게 행복일까?

단단한 발밑의 얼음이 꼭 안전을 보장할까?

예술이나 창조의 행위가

인생을 잘 살았다고 확인도장 찍는 일이기는 할까?

이름 남기면 천국이 보장이 되는가?

설령 지금 행복해도

계속 유지가 될까?

폭죽처럼 세상적 축복을 받았다고 해도

그게 얼마나 계속 될 수 있을까?

 행복하다는 감정.

그 감정을 유발하는 물질이 '옥시토닌'이라 한다.

그 홀몬의 유효기간은 1년 반을 넘지 않는다 한다.

 

근자에

세계 최고의 국내 S기업 임원

세계적 학자.

유명병원 의사의 잇단 자살 소식이 신문 지상에 오르내린다.

 얼마 전에는

탤런트 들의 잇단........

그 전에는

대통령

기업인..........

 전방위적으로 남녀 노소 계층 불문하고

그런 일이 벌어진다.

그게 ,

세상에서도 보기 드물 만큼 '국운'이 융성해져가는

우리 나라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이것은 거꾸로 말하면

물질이 꼭 행복을 보장한다는 것이 아니고

위에 열거해 놓은

누구도 행복이 지속될 수 없는 상황임을

반증하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답은 명확하다.

  사단의 권세잡은 자들이 횡행하는

이 세상.

이 물질계는 진실한 안전과 행복이 없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저들.

저처럼 모든 것을 다 가진 자들이

생명을 미련없이 버리는 것을 보면

그 한계를 절감하게 되지 않는가?

 

 

 오늘.

시편 記者의 상황은

저들 목숨을 던져 버리는 자들의

그것과 비슷한 아픔 속에 있지는 않을까?

깜깜한..

어두운..

절망적인..

 그럼에도 이 시편 기자는 저들, 현대인의 자살자들이나

우울증...환우들..아니면 그 즈음에 있는

희망없는 자들과는 전혀 다르다.

 

그들은 죽음을 향해 달리지만

기독교인은 그 절망적 상황을 가지고

더 주님 앞으로 달려간다.

우리는 힘이 들때마다 더욱 외친다.

힘이 들때마다 기도한다.

곤란할 때마다 더욱 금식하고 간구한다.

더욱 부르짖는다.

 

그런 우리들에게 응답하시는 분이 계심을 알고

그 분의 위로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생각이 아니다.

체험이다.

부르짖으면 응답하신다.

간구하면 해결된다.

 어둠은 사라지고

막힘은 뚫어진다.

 

긍휼

가련하게 생겨서 해결해주려는 마음을 말한다고 하던가?

단지 슬프게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행동적인 의미가 섞여 있다.

하나님이여 긍휼이 여기소서.

제가 부르짖습니다... 한다.

 내가 환난 날에 부르짖습니다.

응답하여 주세요.. 한다.

그게 기독교인들의 힘이다.

약할 때 강함이고

곤란할 때 기뻐한다.

궁핍할 때 감사한다.

그럴 수 있다.

주님을 위함을 알고

주님이 그를 통하여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를 강하게 만드시는

연단의 도구임을 알기에 그렇다.

 

 

 오전 근무를 마치고

아들 면회를 다녀왔다.

아들이 서울 경찰청으로 발령이 났다고 면회오란다.

어찌.. 이리 자주..ㅎ

가보았다.

시간이 촉박하여 묵상의 글을 다 마치지 못하고 갔다 왔다.

아이는 생각보다 당당하다.

연단을 받는 동안 하나님을 철저히 붙들었다 한다.

기동단에 있는 동안 너무 피곤해도

수요 예배와 일요 예배는 빠짐 없었다 한다.

특송도 하고

성경도 하루도 빠지지 않고 읽었다 한다.

아이와 기쁜 마음으로 돌아와

늦은 시간 방에 들어가 기도를 했다.

오랫만에 내 방 테라스에

십자가 밑에 조그만 이불을 깔아놓고

깊이 말씀을 가지고 묵상했다.

마음 한구석에 눌려 있었던 생각.

답답한 마음

미움.

괜한 짜증... 내 어찌할 수 없었던 제목을 가지고

깊이 회개했다.

막혀 있는 부분을 가지고 십자가 앞에 내려 놓으려 했다.

잘 안된다.

말씀을 가지고 깊이 그 상황에 대입했다.

 

' 주여.

 절 긍휼히 여기소서.

제가 부르짖습니다.

주여.

주님의 뜻과 어긋나는 악감들..

환난이 아니고 무엇이겠나이까?

주님의 평강을 막아서는 이 오래된...

주님 부르짖으니 응답하소서.

 마음이 '뻥~하고 뚫어지는 듯하다.

그냥 말 장난이 아니다.

가끔 예배 때,

기도 후 이런 느낌을 얻을 때

통쾌한 느낌이 보좌로 부터 내려오는 듯할 때가 있다.

말씀 대로다.

' 부르짖으니 ' 응답하시는 것 같다.

 생각이 났다.

묵상 구절을 완성하지 못했구나.

이제 마무리 하고 자려 한다.

참 감사한 하루다.

 

 

기도

주님

귀하신 주님

살아계신 주님.

어쩌면 마음이 이리도 답답하였던지요.

주님앞에 앉아

말씀 대로 기도를 하고 묵상을 하니

이처럼 응답하시는 것을 느낍니다

참으로 마음이 통쾌합니다.

주님 보좌로 부터 통쾌한 그날이 임한다는

사도행전의 말씀 그대로 느껴집니다.

주님.

늘 부르짖도록 도우소서.

늘 주님 앞에 서도록 하소서.

주여.

응답하소서.

주님 답하소서.

늘 저를 붙들고 인도하소서.

예수 그리스도께 감사하며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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