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칙한 QT
거두절미 (마 26:1-15 ) 본문
제 26 장 ( Chapter 26, Jeremiah )
주님.....
제가....
무엇을 요.....??
예~?? ^^::
가르쳐 주실 거지요?
하나 도 빠지지 않고
잘 들을 께요 ^^*
2. 나 여호와가 이같이 이르노라 너는 여호와의 집 뜰에 서서 유다 모든 성읍에서 여호와의 집에 와서 경배하는
자에게 내가 네게 명하여 이르게 한 모든 말을 고하되 한 말도 감하지 말라
3. 그들이 듣고 혹시 각각 그 악한 길에서 떠나리라 그리하면 내가 그들의 악행으로 인하여 재앙을 그들에게
내리려 하던 뜻을 돌이키리라
9. 어찌하여 네가 여호와의 이름을 의탁하고 예언하여 이르기를 이 집이 실로 같이 되겠고 이 성이 황무하여
거민이 없으리라 하느뇨 하며 그 모든 백성이 여호와의 집에서 예레미야에게로 모여드니라
교회 혹은
주님을 모시는 '나'로 이해되는
' 여호와의 집' (개역 개정에서는 ' 여호와의 성전') 내지 ' 집' 등이 여덟번 반복된다.
예레미야 님이 성전에 서서 무서운 예언을 한다.
그는 늘 주님을 가까이 하는 '성전'의식을 가진 선지자다.
' 악한 길에서 떠나지 아니하면 재앙을 내리고
떠나면 용서할 것이다.'
하지만, 그 소리를 듣는 자들은
거두 절미하고 '예레미야가 재앙을 내린다는 무서운 소리 한다..고 하며
원망을 품고 역시 여호와의 성전으로 몰려든다.
같은 소리를 달리 듣고
같은 '여호와의 성전'에 모여도
다른 목적으로 모인다.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민족이라도
그들은 다른 결과를 맞이할 것이다.
예레미야님은 하나님 편에서
거부하는 자들은 지옥의 형벌을..
그들은 모두 '여호와의 성전'에 모이는 자들이다.
입장을 바꿔서
무섭게 마구 치는 설교를 하는 목회자를 바라보는 입장에 서 보았다.
반발이 들 것 같다.
특별히 난
누가 뭐라하는 것을 잘 받아 들이지 못하는 성품이다. ㅜ.ㅜ;
그러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오는 대드는 모습을 보면서
아찔'한 느낌이 없지 않아 있다.
'목회자에 대드는 모습'
그것 , 엄청난 죄악이라고
목회자님들의 치시는 설교를 들은 경우가 많았으면서도
가끔은 그분 들의 행실이 옳지 않거나
그 분들의 신앙 방향이 너무 오류가 많아 보임에도
어찌할까 갈등하던 경우가 없지 않아 있어 보였다.
만일 무조건 순종하면 절벽으로 떨어지는 양무리의 꼴이 될 것만 같고
대들기에는 오늘 보이는 잘못된 백성 같구...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면서
가슴앓이 하는 경우가 없지 않아 있어 보였다.
이러한 어려움으로 많은 분들이 시험에 들고
심지어 급기야 교인들의 절대수가 점점 줄어들기에
목회자님들은 목회자님 나름대로
그들을 달래기 위한 이유로
점차로 꿀같고, 가벼운 설교로 치우치는 모습도
없진 않아 있다 느껴지기도 한다.
오늘 보이는 저들 백성은 분명히 오류에 빠져 있다.
그것은 '거두절미'다.
주님이 예레미야님을 통하여 전하고자 하시는
원뜻의 말씀 중 앞뒤를 다 자르고
재앙을 내린다는 부분 만 들어서 반발하는 것이다.
' 저 사람은 악한 예언만 한다.' 라고..
반면에 목회자로서의 예레미야님은 옳다.
그 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분이시고
그 분은 '회개'하여 주님 뜻으로 돌이키기를 강변하기에
그분의 톤이 다소 듣기 힘들어도 그 분은 옳다.
예레미야님의 치는 설교는
굉장히 거북스러울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분의 기본은 옳다.
그러기에 들어야 한다.
작년에 10년 넘게 다니던 교단의 교회를 나왔다.
그 교단은 군소교단으로 '성화'위주의
'재림대망'교회다.
당연히 방향 설정은 옳다.
얼마나 맑고 깨끗한지
그 교회가 아니면
난 예수님의 구원을 받아 들을 수가 없을지도 몰랐다.
아니... 당연히도 주님은 다양한 루트를 통해서
날 구원할 능력이 있음을 인정하지만
그 것을 통해서 내 교만에 들어맞는 길을
열어 주셨다는 이야기다.
절제,
청빈,
인내....
'시한부 종말론자'들은 아니지만
나름 막연한 종말의 시기를 기대하며
수도적 열심으로 달려오던 분들이
재림예수님의 오실 시기를 막연히 기다리기에는
많은 인내가 필요했다.
그러다가 사람들은 자꾸만 자신을 단속하기 위해
점점 더 '수도'를 강하게 표방하고
그 성향은 평범한 우리 같은 '삶' 속의 신앙인들은
'세상'과 '성화를 위한 수도'가 이분적으로 느껴져
견디기 힘든 상황이 되어가고 있었다.
'삶속에 표리된 신앙'이라는 표현이
내 그 당시 그 교단에 대한 감정이었다.
그러면서도 날 구원해주신 주님의 사랑이 너무 기뻐서
그리고 나름대로 세상에서 경험하기 힘든
청빈함과 열심과 '성화'에 대한 기본이 좋아서
버티고는 있었으나
모두 점차 지쳐가고 있었던 모양이다.
교회는 처음부터 적은 인원이었으나
점차로 교인들이 줄어들고
급기야는 '목사'님께서는 '인내'의 수준을 넘어서는
설교로 매 주일마다 '치시는 '설교를 하시기 시작하셨다.
주님의 뜻 안에서 받아 들이려 노력하지만
되풀이되는 무서운 설교는
참으로 힘들어 져 갔다.
두 마음이 요동을 쳤다.
그 하나는 ' 예레미야 님 '같은 분에게 대드는
이스라엘 백성의 꼴이 되는 것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고
다른 하나는 '이런 두려움 속에서도 신앙생활 하다가는
주님이 그처럼 주시고자 하는 '평강'이 없으니
이것 잘못되어 가는 것 아니던가?' 하는 것이다.
수년을 버텼다.
신앙생활 하면서 마음이 늘 무거웠다.
실은 지금 세상의 기독교는 어느새
너무 가볍고 기복적인 성향으로 바뀌어 가는 경향이 없지 않다.
많은 분들을 교회로 인도하기 위한다는 이유로
교회에 '스포츠 센타'가 개설되고
교회에 세상 밴드들이 그냥 들어와 공연하고
심리학이 거침없이 내적치유라는 이름으로 접목되고
축복이 전부인양 설교하고
선교가 모든 것인 것으로 침소봉대 ( 선교.. 너무나도 중요하다.
하지만 주님이 원하시는 '성화'의 부분이 낮추어지는 선교는
왜곡일 뿐이다. ') ...............
그러나 그러기에 또 너무 ' 시한부 종말론적 ' 으로 빠지는
반대현상이 나오기도 한다.
그러기에 '중도'를 유지하는 신앙인이 되기는
너무도 어렵다.
신앙은 까마득한 절벽 사이에 놓인 외줄을 타고
'율법지옥'과 '방종의 지옥'을 넘어가는 줄타기라고
유명한 영성가가 지적한 바 있다.
정말 맞다.
아니라 하면서도
우리 교단은 너무 율법적 성향을 띄어 가고
세상의 교회들은 너무 방종적 성향으로 달려가고 있다.
물론, 일부 만 그렇다.
그 사이에서 균형 잡힌 모습을 잡으려 노력하시는
분들이 너무도 많다.
그것을 오랜 고민과 고뇌 끝에 옮긴 현 교회에서
기쁘게 체험하고 있음도 사실이다.
이 블로그에서 들어오시는
많은 깨인 분들의 눈물과 말씀으로
느끼고 있음도 사실이다.
이제 다시 오늘 묵상으로 돌아간다.
이제 이 만큼 진행해왔다.
여기까지 인도하셨다.
그런데
이제 내 앞에 다시
'예레미야'님 톤의 목회자 께서
나를 위시한 많은 분들에게 저런 강력한 설교를 하신다 할때
난 어찌 받을 것인가?
잠시 묵상을 해보았다.
내 속에서 어떤 '울컥'함이 느껴진다.
가만히 보니 그것은 '힘있는 자들에 대한 반사적 반발'이다.
내 상처의 다름이 아니다.
그러면서 어딘가 피해 버리고 싶은 마음이 슬슬 솟아 나려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편으로 기대하고 있었던 마음이 없지 않아 있다.
최소한 난,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하나님의 말씀' 앞에 함부로 행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만일 그 분이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로 전하고
그 분이 풍기시는 하나하나에서
하나님을 사모하는 분이심을 절절히 느낄 수만 있다면
최소한 난 잠시 겸허히 들어볼 의향은 있을 것만 같다.
다행이다.
오랫동안 큐티, 말씀 묵상으로
날 주님 앞에 단련시키는 훈련을 해온 탓이기에
내 본성을 거스릴 연습이 조금은 되어 있구나 .. 하는 마음이 든다는게
정말 다행이란 생각이 없지 않아 든다.
오늘 묵상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잘못은
'거두절미'다.
그 거두 절미는
하나님께서 '회개'하고 '행실을 바로잡으면'..이라는
정말
주님이 그들에게 주시고 싶어하시는 본질,
회복, 사랑, 회개.. 등의 말씀을 듣지 않고
그들은 그들에게 주어질 '재앙' , 손해, 준행하려면 따를 힘듦이나 귀찮음' 만 생각하고
분노를 발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도 똑같은 장소에서 똑같은 설교를 들어가며
완전히 다른 반응을 보이는 것이다.
나.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나에게 무엇을 보이고자 하시는가?
나의 어떤 점이 저들과 닮아 있어 '회개'할 거리던가?
분노.
경거망동.
상처로 인한 무조건적 반응.
혹시 있을 이런 어리석음을 경계하시는 것이시다.
또한 무조건적 두려움
주님의 온전한 뜻이신 '사랑'보다는
율법적해석을 통한 과도한 두려움은 경계하려 하시는 것이시다.
여호와의 성전은
나에게는 어떠한 의미이던가?
교회에서 철저히 봉사하라는 이야기인가?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한계가 있다.
내가 좋아하는 것,
내 달란트
내가 바라지만 현실적으로 할 수 없는 것들...
그런 것들을 잘 분리하여
주님이 원하시는 나에 대한 것들을 잘 맞추어야 한다.
나,
성전으로서의 나.
나에게 부족한 '회개'를 주님은 원하신다.
돌이킬 것은 돌이켜야 한다.
특별히 함부로 하는 '말'은 자제해야한다.
한동안 열심이던 '공감'과 들어주는 일에 대하여
더욱 열심을 보여야 한다.
선한 말투를 사용해야 한다.
그것이 주님의 영광을 위하는 길이라면
더욱 그래야 한다.
교만 .
회개해야 한다.
오늘 묵상은 무겁다.
그러나 무겁기에 더욱 깊이
주님의 사랑을 상고해야 한다.
묵상해야 한다.
적용
1. 목사님 앞에 겸손하고 더 겸허히 한다.
2. 그 분들의 영성과 지성을 위해 기도한다.
3. 순종하되 주님의 뜻 안에서
4. 그러기 위해 말씀을 여덟장 읽겠다.
5. 내 자식들에게도 순종하는 능력 주시길 기도한다.
6. 이 블로그의 모든 분들에게 중심잡힌 믿음 주시길 기도한다.
7. 회개한다.
회개 만이 영이 살 길이다.
말씀 안에서의 회개.
8. 순종.
온화한 하루.
9. 종말론 적 재림신앙을 잊지말자
10. 상처는 또 다른 죄를 가져올 수 있음을 잊지 말자
주님께 아뢰되
회개를 통하여 회복을 기도하자.
기도
주님.
두렵고 무서운 말씀이 또 시작됩니다.
늘 평화롭고 기쁘기만 한 신앙생활을 원하지만
주님은 공의시기도 함을 잊지 않게 하소서.
주님
한편으로 치우치지 않는 믿음을 주소서.
주여.
그리하여 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어리석은
거두절미, 하나님의 또다른 공의를 잘라버리는
그 어리석음을
오늘날 '말씀을 듣는 ' 저를 포함한
모든 사모하는 분들이 잊지 않게 도우소서.
그리하여 주님의 나라가 이 땅에서 빨리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게 하여 주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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