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칙한 QT
그러고 보니 흔들리는 것은 내 마음이었다[막9:2-13] 본문
부제) 풍랑이 문제가 아니다 내가 문제다
변화산에 계신게 아니다 내 안에 계시다
내 안에 예수 계시다
항상 내가 그리고 있는 그림
어쩌면 예수님 가장 아름다우심
어쩌면 일상에서 가장 holy한 경험
어쩌면 가장 귀한 체험을 하고 있음에도
내가 그려낼 수 있는
겨우의 모습이
저런 것이어서
지금 내가 이러고 있음은 아닐런가
주께서
변화산상에서
천국과 비슷하신 모습을
역동적으로 이끌어 보였음에도
두려움에 떨고
겨우 구름속 초막집이나 그리고 있음은
비단 베드로 뿐이었을까
지금 마주하고 있는 현재
내게 가깝게 허락되어진
모든 이땅의 현상과 관계들
그를 통하여
주께서
우리에게 바라시고 기대하시는
완전함은 어떠한 것일까?
그러고 보니
흔들리는 것은 내 마음이었다
예수님은
성령님께서는
늘 내 안에 계셔왔다
할렐루야
2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제자들 중 3명만 '따로' 데리고 가셨다.
더 '높은 산'으로..
그리고 그들 앞에서만 변형되셨다.
다른 차원의 '믿음'
더 성장한 제자.
천국의 상급에 따른 차원 다른 모습.
그런거 아닌가?
그리고 '일상'에서의 '변화'를 보이심은
당연하지만 '이 땅에서의 기적' .. 심령천국..모두 다 가능함.
성장에 따라
사람에 따라
하나님의 선택에 따라..
3 그 옷이 광채가 나며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매우 희어졌더라
4 이에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그들에게 나타나 예수와 더불어 말하거늘
그 변화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깨끗해지신 예수님'과 더불어
' 엘리야와 모세'가 그곳에 나타나심.
그리고 그 분들이 얘기하고 소개하고 하는 과정의 생략에도 불구하고
'세 제자 '모두 그 분들이 그 분들이심을 알아차리게 된 사실이다.
5 베드로가 예수께 고하되 랍비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니
6 이는 그들이 몹시 무서워하므로 그가 무슨 말을 할지 알지 못함이더라
그리고 이어지는 '초막' 사건.
비단, 베드로의 특성상 그의 입을 통해
주절주절 무슨 말인지 모른채 튀어나와 버리고는 말았지만
그 셋 모두 동일하게 '느꼈을 것'
그리고 그 느낌 중 공통중 하나인 두려움을 누르고
용기있는 '베드로'의 입을 통해 '초막' 이야기가
정말 뜬금없이 나와 버리고야 만 것이다
그렇다면 누구하나 의견을 나눈 적 없지만
왜 갑자기 '여기서 사는게 ' 좋을 듯한
정말 지금까지의 행로, 상황에 아무 상관없을
뜬금없는 '초막' 이야기가 나왔을까?
누구 하나 제자 중에 부인하거나 어이없어 쳐다봤다는 뉘앙스없는
공감된 '초막'은 어찌된 일인가?
왜 ..
맥락이 하나도 일치하지도 않는 이야기들이 나왔을까?
그것도 더더구나 가장 사랑받는
선택받은 자 중의 '소수'...에게 말이다.
이 뜬금없음..
이 .. 아무리 생각해도 '신비'와 그 안에 알게 하실 자만 알게하실
주님과 나 만의 깨달음 아니고는 알지 못할
그러한 내용들이 자주 있지 않던가?
그렇다면 무엇을 보이시려 하는 것인가?
7 마침 구름이 와서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10 그들이 이 말씀을 마음에 두며 서로 문의하되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이 무엇일까 하고
그리고 그 모든 신비한 일 뒤에
'구름' ...
신비와 천국과 포용과 안온함과 모호함, 양털, 따스함....등
그 모든 느낌을 가져오는 '구름'이 쌓인 후
그들은 하나님의 목소리를 듣는다.
그리고 이어지는 '십자가 부활'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
아직은 깨닫지 못하는 제자들.
왜 이셨을까?
이 일련의 몽환적이고 비유적이고 특별하고 선택받은 자에 대하신
특별하고 개인적이지만
결국 모든 자들이 가야할
반드시 깨달아야할 비밀을
오늘, 월요일 아침에
특별히 더 보이심은...?..
어제 잠깐 읽은 '팀켈러 목사님'의 '마가복음'에 대한 책
'왕의 십자가' 라는 제목의 책에서
'마가복음'은 주로 '예수님의 사역'을 중심으로 기록된 것이고
당연하지만 그 내용들이 사실일 수 밖에 없는 것을
증거하는 개연성 들에 대하여 설명하며
'불필요한 내용'들이 정리되지 않은 필력으로
이것 저것 마구 써져 있는 듯함이라 적으며
만일 이게 남들을 설득할 의도록 써진 것이라면
훨씬 더 정리되고 주제를 향하여
결론을 이어가려 매끄러워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었다 .
그러기에 그렇지 않은 이러한 군더더기 들이
그냥 마구 써 있음.. .
그 사실에 겨워 어찌할 수 없는 사실들을 ^^*
오늘 나는 또
수천년 뒤에
사실과 진실 앞에
이렇게 '선택받은 소수의 시선'을 유지하며
그들에게 동일하게 주어졌을 상황을 마주하고 있음이
이 아침 더 뚜렷이 느껴진다.
오늘 말씀을 읽으면서
위의 여러 의문들,
성경을 읽으면서 자주 드는 여러 구석구석의
'퍼즐' 맞추는 것 같이
보물 찾기 하는 것 같이
숨겨 놓은 레마 같은 그러한 부분들이
한꺼번에 마구 써 있는 거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그 안에
그 '예수님이 변화산에서 세 제자 만을 데리고 올라가'
동시에 느끼게 하시는
그 '영적'이고 '다른 차원'의 깨달음이 아니고는 불가능한
저 일들이 매끄럽게 펼쳐져
결국 '십자가 사역'과 '부활'로 이어지는
일련의 일들을 우리는 보고 있음이다.
그 사실,
그 때 그시간 그곳에서
그렇게 실제 벌어진 일들
그 , 정말 중요한 일들.. 중
오늘 날 내게
무엇의 의미를 지니고 다가와
마치 '데리고 가신 선택받은 중 선택받은 자'들에게
보이고자 하시던 그 이야기를 하고 싶으신 것일까....??....
참.. 쉽지 않다.
이 내용을 가지고
'구름 속의 편안함'.........이란 묵상도 수년전에 한 일이 있다.
하얀 구름 속,
펄펄 내리는 태백 산 싸리재 산중의
하얀 '르망' (옛날 대우 차.. ^^; )속에서
몸이 밀려나갈 정도의 칼바람 속을 뚫고
그 구름 , 한 밤 중 차 밖으로 나가
'체인'을 끼우면서 느끼던 '공포'와 한편의 따스함,
그리고 내 칼바람과는 달리
따스한 차 안에서 내다보는 아내의 편안하던 눈빛(어쩌면 바람에 밀려 몇 미터 아래에 있는 절벽으로...ㅠ.ㅠ...떨어질지도 모를 그 상황에서 ^^;;)을 묵상한 적이 있긴 하다.
오늘은 다르다.
무엇을 말씀하실 지
마치 '말씀하시지 않아도, 인사하지 않으셔도 '
그 분들이 모세와 엘리야임을 알았듯
알게 하시고자 하시는...
아니... 벌써 수차례나 십자가 돌아가심을 말씀하셨었는데도
깨닫지 못하고 가슴 안 깊숙이 갈무리 하지 못하던
진정한 믿음,
그리고 '부활의 실제의 의미'를
이 땅에서 알아 적용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한
'영적'이고 '판타스틱'하며
특별하고 개인적인 인도하심의 아침 같이 느껴진다.
이제곧 몇 십분 후면
또 새벽에 입원시킨 응급실 환우 아이 (12살 이란다 ^^;)를 마주하며
이전과 동일한 삶의 패턴을 또 시작해야 하는 시점이다.
이때.. 주께서 나에게
다양한
그러나 3제자 모두에게
'사실의 , 실제의... 모호한 ' 사실을 보여주신 것 처럼
또 제시하신다.
주하인아.
넌.. 깨달음을 원하고 있다.
좁은 길을 선택하고 있다.
'십자가'...
비록 네가 지어야 하지만 너의 유약함을 이유로 미루고 있지만
삶 속에서 마주할 수 밖에 없는
그 십자가의 삶을 알고는 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엘리야'님과 '모세'님의 모습만 보아도
그들임을 알 정도의 '영적 깨우침'을 가지고는 있다 .
하지만...
아직도 두려워함은 무슨 일인가?
아직도 여기가 좋사오니.. 하고 있음은
이제 그만해도 되지 않겠는가?
구름기둥 불기둥의 인도하심,
그 성령님의 강력한 인도하심을 벌써 잊고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또 잊어버리는 것은 아니던가?
그리고 무엇보다
일상에서 마주할 수 밖에 없는
이 종말론적 세상에서
십자가의 삶으로 '승화' 시켜 사는 삶의 길을 알면서도
부활의 소망을 또 잊는 것은 아닐까?
어제 평소 교분있던 '유목사님'의 고관절 수술 후의 간증을 들었다.
발가락 골절이 있는 아내의 고난을 같이 마주하고 있다. ㅠ.ㅠ
고난을 십자가로 마주하고
성령을 은혜로 '감해지는'
그 특별한 원리들을
우리 , 좁은 길 사모하는 자들은 다 안다 .
그러함에도 흔들림은
'부활'에 대한 더 강한 소망이 문제가 아니던가.... 하시는 듯 싶다.
주님.
다 압니다.
다 알지만 다 모릅니다.
십자가도 알고
그 원리도 압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몇번씩이나 듣고 들었지만
알것 같던 그 사실, 그 진리 조차도
일상에서 자꾸만 잊어버리고
심지어는 '영적 체험'들을 했음에도
그게 '엘리야' 모세이심을 당연히 앎에도 불구하고
왜 아는 지 어떻게 아는지도 구분할 수 없는
그 모호함..
구름 속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들었으면서도
또 두려움으로 자신을 에워싸는
이 모진 '물질계 인생'의 버거움을 깨닫습니다.
그러나,, 소망을 봅니다.
'초막집'이야기 하는 미성숙을 보유했지만
그래도 선택받은 소수로서
영적 체험들을 많이 하였으며
또 일상에서 '부활'..
내 결국의 부활을 확신합니다.
주여 감사합니다.
오늘 .. 일상에서 어떤 의미로 다가오고
어떠한 적용을 하게될지 기대합니다.
거룩하고 귀하신 우리 주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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