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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앞에서 울 때[욥8:1-22] 본문

구약 QT

하나님 앞에서 울 때[욥8:1-22]

주하인 2014. 7. 18. 09:15

그런대로 볼만한 것들이

그런대로 피어 있습니다

 

그런대로 보아줄 만 하지만

그래도 정돈되지 않음이

부담스럽습니다

 

그렇습니다

정말 아름다운 것은

바른 것들이 바르게 자리잡고

조화로운 유지가 되어야 할 듯 싶습니다

 

그랬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그래도 주님 앞에 나옴인 듯 합니다

 

모든 내 삶의 이유가

주님을 향함입니다

 내 피워올리는 삶의 끝이

하늘을 향함입니다

 

하나님 내 주 앞에서

모든 울음을 울어내길 원하오니

그러한 간절함으로

내 영혼을 살게 하고

생기로 넘치게 하사

 

마침내

내 서있는 곳이

천국으로 바뀌길

간절히도 기대합니다

 

 

3  하나님이 어찌 정의를 굽게 하시겠으며 전능하신 이가 어찌 공의를 굽게 하시겠는가
13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자의 길은 다 이와 같고 저속한 자의 희망은 무너지리니
 

 마음이 혼란 스러울 때

특히 죄책감으로 힘들 때

근거없는 자괴감으로 좌절 될 때

우울한 마음이 들때

실제로 현실의 벽이 너무 높아 온 몸과 정신이 힘 하나 없이 주저 앉을 때

자신의 한계로 인하여 더 이상 희망없어 질 때

.................

 

살다 보면 얼마나 많은 어려움들이

우리를 향해 다가오는가?

그게 현실이 어려움이든

장래의 문제이든

그를 어렵게 하는 것은 '마음'의 고통이다.

그 짐은 그를 더 힘들게 하여

극단의 선택을 하게 하는 경우도 많아지고 있다 .

점차로...

 

그럴 때

기독교를 믿는다는 자들에게

하나 더 짐이 되는 소리들이 있다 .

'믿는 자가.. '

' 회개해..

' 하나님 앞에서 뭐..

'..........................ㅁ!@@#$%ㅆ$ㅆㅃ%$^..

그런데 그런 소리들이

오늘 욥 앞의 빌닷 처럼 실체가 있는

주위 신앙인들의 소리 들일 수도 있고

그보다는 인식하든 하지 못하든

그의 속 깊은 곳에 있는 양심을 가장한 (양심으로 인하여 죄가 아닌 것이 죄가 되었다.. 고 로마서에...)

사단의 소리들이 될 수도 있겠지만

그의 영혼을 점차로 깍아 먹는다 .

 

그런데 문제는

빌닷의 소리

그 '긍휼없는 공의를 가장한 소리' ,

더 기도해야지,

더 바르게 살아야지

더 회개해야지.. 의 소리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

 

무시하면 죄의식 없는 싸이코 패스로 갈 듯하고

마치 조금만 더 기도하면 축복이 쌓일 것을 그러지 못하는 내 자신 탓인 듯하여

무게는 점점 더 가중이 되어가고

기도하려니 머리가 더 혼란스러워 집중은 안되고

기도하며 나오는 소리는 영혼없는 중얼거림 같고........

은혜는 멀리 사라지는 듯하고

점차로 무게에 견디지 못하여

깊은 우울에 빠지고..................

이거.. 어떤 분들은 '종교 망상'이란 심각한 병에 빠지기도하고

그것을 도피하다간 죄에 무뎌진

세상 불신의 세상 사람들 보다 더 비도덕적인 일을

마치 십자가에서 다 용서 받은 듯 마구 행하기도 하고.. .

참 어려운 문제이다 .

 

이 빌닷의 소리.

그 빌닷의 소리가 그렇듯 옳으면서

그렇듯 속상한 이유가 무엇인가?

그렇다면 그 옳고 그름을 어찌 판단하는가?

 

잠시 묵상을 하며 욥의 입장에 서 보았다 .

그는 '스스로 의로운 자' 였다.

스스로 의롭다는 이야기는 그가 홀로 착각하고 망상에 빠졌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는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평강'을 누리던 자다.

그가 자식의 생일날 마다 번제를 드릴 만큼 외적으로 경건한 행동을 했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의 모든 행위가 '하나님의 평강 안에서 흘러나온 감사'의 제사엿다는 것이다 .

 

그것.

성령의 충만함이라 표현 할 수 있고

은혜의 폭포수 안에 있는 자라 할 수도있고

심령 천국이 어떤 것인 것을 아는 자라는 표현으로 할 수도 있겠다 .

최소한 내가 아는

하나님의 기쁨,

하나님의 평강 의 체험으로는 그렇게 표현하고 싶다.  ^^*

 

그런 사람들..

그런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십자가의 보혈'로서 '의롭다'하심이

어떠한 상황인지 영혼이 아는 상태가 된다 .

다시 말하면 예수 믿고

점차로 기쁨이 잔잔히 흐르며

세상의 호불호에 그답 끌리지 않으며

하나님의 말씀이 그대로 믿겨지는 매일매일의 묵상 가운데 사는 자들에게는

그들 나름대로의

하나님께서 그들 영혼에 허락한 '義의 정도'가 있다는 이야기다 .

 

 만일 그런 그에게  하나님께서 아직 부족하다고 말씀하실 때는

빌닷의 말이 옳다 .

그는 그의 잘못된 객관적 부분을 '십자가'에 가져가면된다.

그런데 '욥'의 경우처럼

빌닷의 말을 넘어선 '의'로운 자들에게는 그러할 이유가 없다 .

 

즉, 모든 빌닷의 소리들이 모두에게 동일한 것은 아니고

그러함을 결정지음은

하나님과의 동행 여부에 따른

영적 성장에 따라 다르다는 이야기다.

 

그러함을 알기위해서는 매일 주님말씀에 동행해야 한다 .

말씀을 기준으로 성령이 충만해져야 한다 .

 

그리고도 생기는 세상의 환란이나

스스로의 심적 부족함,

태생적 문제들로 인한 불편함,

그러고도 다가오는 인생의 버거움들은

내가 해결하려 노력하지 말아야 한다 .

내가 '무조건 회개'하여 고침을 받겠다는 일률적 기대를 버려야 한다.

하나님 앞에 가져가야 한다 .

가져가야 한다함은 '죄 고백하고 용서 받고 축복받겠다'는 논리가 아닌

'그냥 하나님 앞에서 하소연 함' 이 중요하다 .

그게 회개이던 단순한 아룀이던 중보이던 축복의 갈구이던

하나님께서 입을 열게 하시어

기도마져 주장하실 것이다.

그때까지 필요한 것은

무조건 하나님 앞에

모든 문제를 다 가져간 다는 것이고

특별히 '욥'의 경우를 통해 보는 것처럼

'원망'이나 비난이나 저급한 자기한탄 보다는

아버지 앞에 사정을 그대로 아뢰는 아기같은 '하소연'의 몸부림이 되어야 한다 .

아..

실은 내용보다는 '하나님' 앞에 모든 거

있는 그대로 다 들고 간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

 

그때..

때가 되고 시간되면

하나님이 알아서 기도시키시고

알아서 회복시키시고

알아서 축복하실 것이고

아니시면 하나님 나라에 부르실 것 아니시던가? ^^;

 

오늘 아침.

주제는 '양심을 가장한 공격', 자괴감에 대한 대처다.

하나님 앞에서 있는 대로 '울음'을 우는 것이다.

그럼으로 받아지는 평강의 회복을 말씀하신다.

내가 그래야 한다 .

머리 복잡하게 살 필요 없다 .

모든 것 다 아시는 예수님 앞에

오늘 도 하소연하고

십자가 보혈로 씻김 받았음을 믿고

일상을 인도하시는 성령의 함께하심을 느끼는 일이다 .

 

 

귀하시고 감사하신 주님

당직을 마치고 눈을 뜨니

세찬 빗소리가 제 귀를 울렸습니다.

조금 일찍 떠진 눈이라서 타고갈 자전거가 걱정이 될 정도였지만

다시 피곤에 눈을 감으며

그래도 알아서 해주시겠지.. 하다가 잠들었습니다 .

시간이 되어서 눈을 뜨니

적당한 가는 비로 바뀌어 있었습니다.

자전거 뒷 가방에 늘 넣고 다니며

전세계 여행을 함께하던 '비옷'을 꺼내 입었습니다.

주님 . .

출근하다가 많은 직장동료들이 조회를 마치며 나오다가 마주쳤습니다.

비오는 데 비옷입고 자전거로 언덕을 내려오며 출근하는 제 모습에

그들은 놀람과 경이로운 부러움이 섞인 눈초리로

저를 쳐다보았습니다.

 

주여.

그랬습니다.

비옷을 트렌치 코트처럼 입고

진료실까지 자전거를 밀고 들어오는 나에게는

익숙한 기쁨이 넘치게 됨을 느낍니다 .

차도 없이 자전거만 타고

늦은 나이에 타이트한 옷을 입고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몰고 들어오는 자전거는

어찌 생각하며 '부담'이고 '창피;일 수도 있지만

그게 자연스런 자신감으로

내 안에서 바뀌며

알 수없는 평안의 기쁨이 저를 감쌈을 느낍니다 .

 

없음의 자유

그러함의 여유

그럴 때 더 느껴지는 하나님의 도우심..

평화.. 평강.. 의미.. 소망.. .

 

그렇습니다.

주여.

동일한 내용이지만

어떤때는 빌닷의 소리들이 저를 잡을 때

저는 위축되고 눈치를 살피고

마치 그것을 회피하기위하여

더 회개하고 몸부림쳐 탈피해야 할 찝찝함으로 느껴지는 때도 있었지만

동일한 때에 동일한 비와 시선의 끈적거림에도

시간되면 비는 줄겠고 출근은 여유로와 질것을

하나님께서 배려하시겠지라는

나름의 조금의 성숙되어가는 믿음 탓에

오히려 기쁨이 잔잔히 저를 덮어가는

그 원리를 알게 되었습니다.

 

주여.

빌닷의 소리들에도

제가 바꿀 것을 지적하는 선한 것이 잇을 수 있습니다 .

주여.

무조건 배척하지 않고

제게 허락하신 것이면 받아 들여

주님의 말씀 안에 녹여

제 영적 발전을 위해 도우시는 주님 앞으로 가는 계기가 됨도 깨닫습니다.

주여.

감사합니다.

모든게 자유입니다.

주가 주시는 그 평강 안에서 사는 것을 기뻐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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