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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로운 영적 싸움( 약3:13-18 ) 본문

신약 QT

지혜로운 영적 싸움( 약3:13-18 )

주하인 2009. 11. 7. 10:45

제 3 장 ( Chapter 3, James )

 

 

아들 데려다 주고 올라오다가 들른

부여 박물관 앞에 서 있는

거북이 닮은 조각물의 발.

수백년 전 사람들이

저 발톱과 발등에 줄무늬 조각을 하면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술 생각?

이웃집 아녀자?...^^;;

 

 

박물관 내부에 들어서니 여러 다양한 것들도 많았다.

호자.

이름도 특이하다.

남자들의 변기(요강)이다.

자다가 말고 눈꼽떼지 못하고

손에 집어 들고

히히... ^^;;

수많은 남자들이

저걸 들고 ㅎㅎ

많은 다양한 포즈와 잠꼬대와 생각들을

많이 하고 있었겠지?ㅎㅎ

 

 

 


13.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뇨 그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일지니라 
  지혜와 총명.

온유함과 행동.


 
14.  그러나 너희 마음 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스려 거짓하지 말라
  진리를 거스리지 않을 자들에 대한 당부.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 대한 당부.

 

 기독교인 들 마음 속.

그 안에도 독한 시기와 다툼은 있을 수 있다.

헛된 자랑이 있다.

진리를 거스린 자랑이 있을 수 있다.

온전한 성화 전까지는 있을 수 있는 '영적 전쟁'이 아니던가?


 
15.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세상적이요 정욕적이요 마귀적이니 
 지혜에는 위로부터의 지혜가 있을  수 있고

세상적이고 정욕적이며 마귀적인 지혜가 있을 수 있다.

그것은 위 구절에서 언급한 바

'거짓 지혜'다.

'진리를 거스리는 지혜'다.

'독한 시기와 다툼'을 동반한 것은 마귀적 지혜다.


 
16.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요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니라
 보라.

다시 한번 말씀하시지 않는가?

 '시기와 다툼' 은 요란과 악한 일을 초래한다.

그것은 무슨 논리든

어떤 지혜로운 소리 같든

주님의 뜻이 아니다.

 우리의 속을 늘 들여다 보아야 한다.


 
17.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

      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나니  
18.  화평케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보라.

위로 부터의 지혜는 성결하고 , 화평하고 , 관용하고 , 양순하고 ,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다.

화평이 증상으로 나오는 것이야 말로

'위'의 지혜가 맞다.

 위의 지혜라는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허락하신 지혜다.

말씀이다.

성경 구절을 글자 그대로 보면 희한한 이야기 책에

겁주는 도덕율법서와 다름없다.

하지만,

말씀을 묵상하다 보면 그 글은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란 것을

늘 체험한다.

그것은 비단 내 이야기 만은 아니다.

수천년의 변함없는 기독교의 역사와 유대인의 역사가 증명한다.

 

 

 

 아들 데려다 주고 부여를 거쳐 올라왔다.

부여 박물관.

백제의 유적들이 숨쉬는 듯 잘 정리가 되어 있다.

박물관 입구에 여러 조각들이 있다.

그 것이 진품이든 복제품이든

그 외형은 똑같을 것이라 생각되어 가만이 들여다 보았다.

돌을 깍아 형체를 만들고

선으로 마치 거북이 껍질처럼, 발등 피부처럼 만들어 내었다.

가만히 그 발등의 선을 따라 눈을 옮기니

불현듯 그 시대 사람들이 그 현장에서

마지막 마무리라 생각하며 발톱을 표현하고

그 껍질의 골을 하나하나 정으로 새겨가며 마무리 하고 있을 장면이 떠오른다.

그 작업장에 앉아서 나름으로는 사실감을 주기 위하여

무늬를 새기며 자랑스러워 하고 있었을까?

곧 있으면 돌아가서 조우할 '아내'와 '자식' 생각하고 있었을까?

뉘역뉘역 지는 저녁 노을 아래 작업하며 한잔 걸칠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마작이나 도리지고 땡, 민화투 .. 한판 땡길 생각했을까?

가슴아파할 어떤 일에 대하여 분노를 느끼거나 회개하거나

새로운 마음 정리는 혹 했을까?

...........

 

 박물관 안으로 들어서니 도자기 같은 것들

멋진 왕관 , 이름과 역사를 알 수 없는 것들이 많다.

눈에 띄는 것.

위에 걸어 놓았지만 '호자'라는 남자 변기 , 즉 요강이다.

그래서 얼른 사진 찍었다.

위의 상상을 확대시키니 더 재미있다.

자다가 말고 한겨울 차가운 문풍지를 뚫고 들어온 냉기의 윗풍에

눈을 제대로 뜨지 못하고 급히 아랫바지 끈을 풀고

쉬~~ ㅎ

수많은 남자들이 저 입구에 ^^;;;;

눈도 뜨지 못하는 그 비몽사몽의 순간에

이 땅을 살아온 수 없이 많은 남자들의 꿈과 그들의 무의식 속에

무슨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을까?

그리고는 그들은 다시 꿈 속으로 들어갔을 것이다.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있다.

사람이 눈을 뜨고 살아갈 때 누구나 생각을 한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그 생각의 대상이 '두 가지'다.

 우선 하나는 '현실'이라 표현되는 '육적인 삶'에 대한 것이 그 하나이고

또 하나는 '내적인 생각'들이다.

 육적인 것은 이런 것들이다.

'자식'을 어떻게 길러야지?

돈을 어떻게 하면 더 많이 벌까?

어떻게 해야 성공하지?

............

'내면적 생각'이라는 것은 이런 것이다.

'난 왜 이렇게 분노해야 할까?

 내 인생이 갈곳은 어디인가?

 왜 난 이리 아파해야 하는가?

 천국은 어떤 곳일까?'

 

 그런데 이런 두가지 생각이 모두 눈에 띄게 드러나고

누구나 쉽게

아무때나 버젓이 인식이 되는 생각인가?

 아니다.

위의 박물관 예를 들며

700년전 백제 시대 사람들의 생각을 연상해보았지만

그들이 멍하니 그 작업에 집중하며 생각되었을

당연한 생각들은 '내적인 생각'들도 많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진리'이신 '예수님'을 전파 받았을 때가 아니다.

하나님이 그 시대 이 동방 삼국을 어찌 관리하셨을 줄

거기까지는 알 수도 알 방법도 없지만

어쨋든 그들의 영혼 속에는 정죄되지 않은 생각이 많이 떠돌았을 것 만 같다.

불쌍한...

 

 어제 저녁.

금요 예배를 마치고 집에 들어서니 어수선 하다.

큰 아들이 돌아오고 컴퓨터 하나를 새로 들여와

자기 방에서 LAN으로 연결하여 동생 방에 이전부터 쓰던 컴퓨터를 연결해 놓았다.

두 아들 방은 문 들어서자 마자 양 옆에 있어

그 사이에 '지렁지렁' 늘어져 있는 랜 線이 다리에 걸릴 듯 위태 위태하고

보기도 그리 좋지 못하다.

그래서 오래 전 부터 정리 하고 싶었지만

차일피일 미루던 것이 둘째 아들 논산 훈련소 보내고 빈방을 보니

그 선이 더욱 보기 싫게 느껴진다.

그래서 '큰아들'을 불러 '얘..내일은 .. 철물점... 해라' 했다.

아이의 대답이 들린다.

 얼마 전에도 부탁한 적이 있는데... 아직도..

아무 생각없이 그렇게 해 놓고서는

세수하고 자려 하다가 성경 읽지 않은 것이 기억나

자는 아내를 두고 거실로 나와 성경을 읽는데 갑자기 속이 턱~ 막힌다.

'아니... 저거 하지 않으면 또 화날 것 같다'는 게 이유다.

'어'... 왜 이러지?

가만히 집중을 해 보니

내 성품의 이유다.

무엇을 시켜놓고 안하면 불같이 화를 냈던 게 내 과거의 습관이었다.

큰 아들은 실수가 없이 정확한 반면 고집이 세었다.

실수로 몇번 잊은 것을 가지고 혼나니 

사춘기 이후로는 아마도 반발성이 없지 않았겠지만

의도적으로 내 말을 지키지 않아  분란이 일어난 경우가 많았었었다.

난 아버지로서 권위를 찾고 ....

그러다 보니 아이를 혼내는 경우가 많았었다.

둘째는 일반적으로 막내가 그렇듯 조금은 더 순종적이니 덜 혼나고.....

예수님 영접하고 점차로 줄고 말씀 앞에서서 이제는 예전의 몇분의 일도 안된다고

스스로는 생각은 하나 아직도 남아 있는 내 급한 성격이 느껴지는 것이었다.

그래서 깜짝 놀랬다.

스스로....

그렇다고 말을 뱉어 놓은 것 되돌리고

장정인 아들이 펑펑 놀게 놔두고

소소한 집안 일까지 아빠인 내가 하자니 자존심이 상하는 듯하다.

그렇게 생각하니 괜히 긴장이 되어가는 내 마음이 느껴진다.

한번 '화'의 끈이 잡히면 마구 올라가는 게

이 부족한 나의 습성.

잠시 정신을 말씀에 고정시켰다.

마음이 가라앉는다.

잤다.

아침에 느즈막히 일어나 급히 나가려는데

아직도 어제의 마음이 정리가 안된듯 슬슬 건드림을 느낀다.

'아버지로서의 자존심'과 '화평'함과의 싸움.

'자존심'과 '평화'와의 싸움.

두 판단 사이에 난 말씀을 선택하기로 결심했다.

나름대로 혼란이 있을 때 말씀을 먼저 생각하는 노력이 조금은 훈련이 되었다.

'화평'이 주님이 원하시는 것이다.

늦었지만 'MP3'에 말씀을 녹음하려하니

'시기와 쟁투'

'화평'에 대하여 이야기가 나온다.

'세상과 육신과 마귀적'인 것과

'위'로 부터의 생각에 대하여 이야기가 나온다.

그래.

맞다.

어떤 논리적인 이유를 떠나 '화평'을 깨뜨리는 것은 '죄'다.

말씀이 그러니 어쩌랴.

마음을 정했다.

 그리고는 매일마다 그렇듯, 자는 아이의 방에 들어갔다.

아이는 늦게까지 컴에 붙어 있어서 아침이 늦다.

그것도 인내하게 해주신 주님이 감사하다.

그냥 자는 아이 머리를 붙잡고 기도했다.

축복기도다.

그리고는 잠이 설깬 아이에게

'가능하면 오늘 시간내서 선을 정리하면 어떻겠니?

 너무 힘들면 아빠가 다녀와서 하마.. '

'예' 그런다.

그냥 나왔다.

설령 아이가 내 말 순종을 아니하고 - 순종하는 것 가르치는게 내 교육의 목표인데.. ^^;;;;- 그냥 두어도

나름대로 성질을 부리지 않을 단초를 마련해둔 셈이다.

그 아이와의 타협이기도 하지만

내 속과의 타협이다.

출근하면서 들어보니 말씀의 내용이 '화평'은 '위'의 생각이라신다.

'18.  화평케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
의의 열매를 맺는다 한다.

다행이다.

성질은 벌~~써 가라앉을 기미였다.

 

늦어서 차를 몰고 나오면서 불현듯 깨달은 게 있다.

그렇다.

생각의 관점을 '현실의 성공'에 두고 생각을 진행시킬 수도

지금처럼 '노'와 '화평'등 내적인 것에 집중시킬 수도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떠한가?

잘모르겠지만 '현실'에 관심이 더 있지 않을까?

'내적인 것'은 무엇인가?

실체를 깨닫지 못해서 그들은 필요없는 것으로 사료해서

가치를 그리 두지 않고 있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나도 마찬가지다.

내적인 것과 현실적인 것에서 얼마나 비중을 두고 생각을 하던가?

그러나 실체가 없다고 내적인 생각들이 과연 가치가 없는가?

분명히 오늘 묵상에서 말한다.

'세상적이고 정욕적이고 마귀적'인 현실 생각에만 치우치면

그것은 '시기'와 '다툼'...이 나온다 하지 않는가?

그 현실은 현실일 듯하지만

이 세상의 삶은 얼마나 더 유효이 나에게 남아 있을 것인가?

죽음이후는 '無'가 맞던가?

정말 그렇다면 이 짧은 삶은 무슨 열심히 몸부림 칠 이유가 있던가?

결국은 '내적인 생각', '위의 생각'에 관심을 더 기울일 일이 아니던가?

이런 진리의 생각에 관심이 없으므로

줄어 듦으로 현대인의 삶이 점차로 시기와 쟁투의 삶이 되고 각박해져 가는 것이고

목표를 잃는 것이 아니던가?
목표를 잃음은 그 삶이 '지옥'으로 변한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우울증' 투성이에 '자살' 전 세계 최고가

우리 한국인이다.

 주님의 말씀이 더욱 필요한 이유이고

이 아침이 나로 하여금 더욱 밝게 빛나 보이게 하는 이유다.

난 최소한

주님의 말씀을 묵상하려 노력하는 자이다.

 

 난 주하인이다.

행운아다.

 

 

적용

 

1. 말씀을 일곱장 읽겠다.

 

2.  아버지 학교 가겠다.

  3주 차다.

  너무 바빠 가지 못했다.

  남을 위한 가장 적은 내 헌신이다.

 

3. 아들에게 웃겠다.

  화평이 최우선이다.

  순종은 그 후다.

 

4. 감사하자.

  수백년 전 수만가지 생각들도 다 어둠에 묻히고 역사 속으로 스러져 갔다.

 그것은 '시기'와 '쟁투'의 생각들일 가능성이 많다.

 주님을 모르는 자들의 생각.

  어쨋든 그들도 그 당시에는 현실에서 살았고 결국은 사라졌다.

 나의 고민 나의 갈등, 나의 생각도 결국 시간 속에 흩어져 버리겠지만

 나는 영원히 남을 것이다.

 주님 예수님을 아는 자이기 때문이다.

 

5. 화평하자.

 '18절.  화평케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

 화평은 주님의 뜻이다.

 시기와 쟁투는 어떤 이유와 논리든 세상이고 사단이다.

 그 화평의 생각을 결심하게 해 주신 주님이 감사하다.

 난 주님 말씀 안에서 화평한다.

 화평을 노력한 도덕군자들도 있겠지만 그들 역시 역사 속으로 스러져 갔다.

 난 감사하다.

 주님 때문에 화평하게 되는 것이다.

 

 

6. 삶은 '세상'과 '천국'의 생각의 싸움 장소다.

  늘 모든 일에 '하나님'과 '사단'의 생각 사이에서

 내가 선택한 결과물로 이루어진다.

 난 늘 영적싸움에서 주님 편에 서야 한다.

 승리하자.

 

 

기도

 참 생각이 많이 돕니다.

비단 이게 저 뿐이 아니리라 압니다.

생각하고 싶지 않고 의식하지 않아도 우리 속엔

끊임없는 생각이 돕니다.

그게 점차로 의식이 되어 표면으로 나올 때

의도적으로 인식하고 준비하고 정제화되지 않는

현실만 바라보며

내적인 충실이나

내면이나 영혼에 대하여 고민하지도 않고

고민한다하더라도 '주님의 편'에 서지 않는 자들의 말로는

당연히도 역사 속에 무너져 가고 스러져 버려가는

백제 '석공'들의 현재와 무엇이 다를까 생각이 듭니다.

주여.

부디 제 영혼을 잡아 주소서.

늘 주님의 뜻대로 생각케 하소서.

아무리 옳은 논리인듯 보여도 그게 시기와 쟁투를 유발할 것이면

막아 주소서.

강력한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절 화평의 중심이 되게 하소서.

인내의 마음을 기쁨으로 들게 하시고

자꾸만 드는 합리의 세상적 논리를 막아주시고

지혜를 허락하소서.

올바른 지혜.

삶의 중심을 꿰뚫는 하나님의 지혜.

위로 부터 내려오는 주님의 지혜로 절 이끄소서.

주여.

부디 부족한 줄 알지만

절 그리하소서.

눈뜨고 눈감을 때까지

절 불같이 지키소서.

이 곳에 오시는 모든 분들과

저의 아는 모든 지인들과

저의 가족과 친우들....모두 지키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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