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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결한 기도자[욥16:1-17]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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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결한 기도자[욥16:1-17]

주하인 2014. 7. 28. 09:12

 


2 이런 말은 내가 많이 들었나니 너희는 다 재난을 주는 위로자들이로구나
3 헛된 말이 어찌 끝이 있으랴 네가 무엇에 자극을 받아 이같이 대답하는가
  이런 말.

많이 듣던 말.

재난을 주는 말

 

 헛된 말

끝없는 헛된 말.

 

6 내가 말하여도 내 근심이 풀리지 아니하고 잠잠하여도 내 아픔이 줄어들지 않으리라
 말해도 대꾸해도

가만히 있어도 풀리지 않는 근심.

오히려 아픔만 주는 자들

그런 상대자들.

재난을 주는 위로 자들.

 

 

16 내 얼굴은 울음으로 붉었고 내 눈꺼풀에는 죽음의 그늘이 있구나
 아..

그의 탄식성 고백 중에

내 얼굴은 울음으로 붉었다 .

내 눈꺼풀에 죽음의 그늘이 있다.. .는 구절을 보니

가슴이 묘하게 흔들린다.

말의 힘이 얼마나 중요한지.. .

 

그의 고백은 수천년의 세월, 중동과 한국의 공간적 떨어짐을 격하고서

오늘 이 자리의 내게

가슴을 울린다.

 

재난을 주는 위로자들.

거짓 위로자들은

아무리 옆에서 말하고 듣고 떠들어도

그들은 내 가슴을 한톨 움직이지 못할 것을

이 분의 이 말은

나를 위로하지 않음에도 가슴을 움직이게 한다.

 

무엇인가?

무엇이 다르게 하는가?

무엇이 위로자 인양 하는 그들의 말이 위로는 커녕

그의 고통을 그리도 가중시키지만

나와 상관없는 듯한

욥의 자신의 한탄을 고백하는 소리가

왜 나의 가슴을 울리는가?

 

무엇이 같은 말이라도 다른 움직임을 가져오던가?

 

생명의 말과

죽음의 말의 차이가 아닐런가?

 

 

17 그러나 내 손에는 포학이 없고 나의 기도는 정결하니라

 무엇이 그리 만들지는

이 말 한마디에 농축되어 있다 .

'나의 기도는 정결하니라'

 

그렇다.

기도가 정결한 것은 당연하고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는 어떤 말이든 '정결'하게 되고

그 사실 , 그 마음 만 가지고도 그리됨이 당연하지만

그의 '나의 기도는 정결'하다고 새삼 고백함은

그의 평시의 하나님 앞에서의 정결하려 노력함,

그래서 얻어지는 '의로움'에 대한 확신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지난 주말 당직을 섰다.

적당한 정도의 바쁨이 있었고 금요일 피곤이 남아 일찍 잠을 청한 탓인가

10시경 눈이 떠져서 그때부터 미루어 놓았던 논문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세번째라서인지 큰 무리없이 마구 마구 글이 진행이 되어

새벽 3시 넘어서까지 그대로 쓰니 끝이 보인다.

 마침 전화가 왔다.

분만실이다.

초저녁에 입원한 산모가 영 진행이 안된다한다.

아무래도 제왕절개해야 할 것 같아서 쓰던   

침대에 올려 놓고 앉아 쓰던 탁자와 컴퓨터와 널려 있던 자료들을

대충 한구석에 치워놓고 내려 갔다 .

내려가면서 수술을 유도할 근거를 생각하며 도착하여

간호사에게 수술 승락서달라고 하는 순간..

가족분만실에 있던 산모보호자들의 괴성이 있어서 들어가보니

갑자기 경련을 하며 얼굴이 파래지기 시작하는게 아닌가?

전혀 history가 없었고 문제가 없었던 산모로

진행이 안되어 수술하던 찰라에 그런다.

 급히 인공호흡을 하며 주사를 주고 응급처치를 하였다.

눈앞에서 파래지는 것을 보는 것은

예상하지 않던, 아니 되지도 않던 모두에겐 청천벽력 같은 일이 맞았다.

이리 저리 노력한 끝에 안정을 되찾았고

그 사이에 응급실 전문의 샘에게 강제로

여성병원에 와달라고 부탁을 하고

마취과 선생에게 급히 나올 것을 알리고서는

응급실 전문의가 나오기전 '신경과 '선생에게 연락 도 하라는 조언을 받고

정신없이 전화번호를 알아내고 (한참 걸렸다~ㅠ,ㅠ;;)

전화를 하니 '너무나 평온한 목소리'로 받는다.

'아티반 하나 만 주세요.. ' 하고는 더 이상 이야기가 없다.

나는 불타는 불안의 마음으로 자제하고 있는데

그래서 이 후의 처치에 대하여 얘기하려니 이친구.. 자꾸만 자기 책임이 아님 만을 강조하며

있는 논리를 대기 바쁘다.

새벽 네시 가까이 되어 자신의 영역이 아닐 환자 (신경외과 문제일 수도 있기에...)를 이야기하며

심지어는 '산부인과 누구냐?'고 까지 한다.

화가 치밀어 오르려 한다.

나이도 어린...

거기에 자기 과적으로는 큰 문제가 아닐 수 있어도

벼락 맞은 듯 갑작스레이 당하는 타인 (나 포함, 보호자들... )에게는

너무나 격한 임계상황이라면

'이리 이리 해주시고 이리 이리 연락해보시고도 안되면

제가... .' 라든가 아무래도 그 쪽에 가까운 의사의 조언을 구하려 했건만.. .

결국 환우가 수술방에 들어가고

마취과장님과 응급실 과장이 동시에 들어와서

나중에.. .라 하면서 끊었지만

수술이 끝나고도 '화'가 가라 앉지 않으려 한다.

 

그래도 다행이 별문제가 없어

주말 당직 마치는 순간까지 큰 이상 없이 건강한 모습을

예배드리고 확인 했지만.. .

그 순간 만큼은 그 분들과 지옥 앞까지 갔다온 듯한 기분이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차분해지면서

내가 왜 화가 나는지 생각을 해 보았다.

 나이 어린 친구가 이름이 누구냐고 물어보는 버릇없는..

남의 불행에 너무나 떨어져 있는 차가운 태도도..

...........  여러가지 걸리는 생각들이 있었다 .

그러면서 그런 생각의 오류는 없는 지

묵상가운데 다시한번 십자가 앞에 그 생각을 가져가 보았다 .

깨달아 지는 부분이 있었다 .

현실적으로 너무 피곤한 시각, 여성병원 당직을 서니

본원의 신경과 의사가 여성병원의사를 알리가 없을 수 있고

내가 여성병원 의사인줄 알았을 개연성.. ..

화는 덜난다.

그러나. .. 객관의 유지를 하려 해도

타인의 불행에 대하여

전혀 상관없는 '사무적 '태도는 간과하기 힘들었다.

기도로 마음을 달랬다 .

난.. 이게 좋다.

말씀과 기도로 내 중심을 빨리 잡을 수 있다 .

이전에는 너무 급해서 생각보다 말과 행동이 빨랐었지만..ㅎ

 

월요일

출근하는 데 마음이 조금 무겁다.

어찌되었든 그 젊은 신경과 의사에게 내 감정적 이야기는 해야할 것만 같았다 .

계속 그 친구를 삐닥한 눈으로 보며

부정의 감정에 섞이긴 싫으니.. .

 

잠시 기도하며 말씀을 보니

정결한 기도.. 라는 단어가 눈에 온다.

그러면서 욥의 '의로움'이 마치 내 생각이 옳음을 말씀하시는 듯하다.

최소한 난.. 이전처럼.. 내 마음이 내키는 대로 행동하지는 않는다.

가능하면 .. 그것이 정말 하나님 앞의 응답인지 자신은 없지만

그래도 말씀대로 기도하고 행동하려는 태도를 가지고 있고

하나님을 의식하는 한,

나는 옳다 .

솔직히 절대적으로 옳은 게 어디 있는가?

하나님 이외..

살다가 부딪치는 수많은 일들에는 다양한 옳고 그름이 있을 수 있다.

나..

머리가 커서 어려서 부터 맞는 모자가 별로 없었다.

그래서 나에게 머리 크다하면 무조건 주먹 부터 나갔다. ㅜ.ㅜ;;

어떤이는 TV에 자신의 머리큼을 자학하는 개그로 유명해지는 사람들도 있다.

생각이 사람마다 그리 다르다 .

그 반응을 일률적으로 옳고 그르다고 어찌 이야기 하는가?

가능하면 스케일이 크면 좋겠지만

모두 똑같으면 재미도 없지 않는가?

마찬가지다.

그래서 난 이야기를 안하고 참는 점잖은 모습의 (겉으로만 ) 속끓는 이중적인 인간보다

다치지 않는 정도의 이야기로 내 감정을 솔직히 이야기 해줌이

그와 앞으로 같은 직장에서 일해가는 데 편할 것만 같았다.

솔직히 , 어제그제 새벽은

내 얼굴이 '붉었고'

그는 '재난의 위로자' 와 같았던 생각 밖에 없었다.

.. ^^;;

 

이제 나 '정결한 기도'를 조금 더 드리고

마음을 정리하고

I message로 할 이야기를 다듬고

샌드위치 기법의 대화 틀을 만들어

잠시 바쁜 시간이 지난 오전에

신경과장인 그의 방에 들어갔다.

 

움찔.. 한다.

'아.. 지난 새벽 못주무셨지요.. '

'피곤케 하여드려서 미안합니다. '

점잖게 이야기 하니 몸을 조아린다.

 

' 저는 .. 이리 이리 .. 해서 조금 마음이 .. ' 했다.

변명을 하려한다.

'그래도.. 난.. 샘보다 나이가.. 이름이 누구세요.. 는 소리 들으니

 마음이 좀.. '  하니 자기는 여성병원에 내가 근무할 줄 꿈에도 몰랐단다.

그래.. 확인하니 속상함이 덜하다.

' 그래요.

 그러실 줄..

 그리고 님은 늘 보시는 일이라....

 우리는 바로 그 자리에서 처음 겪는 일이라.. 조언.. 샘의 너무 사무적.. ' 하니

미안하단다.

 

그렇다.

마음이 가볍다.

세상은 아무리 옳은 생각으로 말을 해도

결국 '자신'이 중심이고

그 위로는 '위안'보다는 ' 곤고'만 더할 뿐이고

'위로자'는 재난의 위로자가 될 뿐이다.

세상이 마구 돌아간다 .

서로서로 위안하고 서로 SNS로 자신을 드러내며

강제적 위로를 구한다.

그게 그들로 위안을 받고 마음이 밝아지기 보다는

점점 더 세상이 악하게 돌아감은 어찌된일인가?

 

하나님이 아니신 위로는

'재난의 위로'일 뿐이다.

오직 위로자는 하나님이실 뿐이시다.

우리가 해야할 일은 '기도' 뿐이다.

그게 정결한 자 될 기도다.

그러나, 그러함을 기대하고 감사하며 기대하는 기도는

더욱 정결히 될 '정결한 기도'다 .

그는 자신이 하나님으로 의롭게 될 것을 짐작하고 기대하기에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는 매일의 정결한 기도가 되기에 그렇다 .

 

 

감사합니다.

주여.

지금도 눈이 감기려 하고

피곤하여 아무것도 하기 싫지만

수술을 하나 마치고 내려 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마져 주님이 더욱 강하게 인도하셔서 할 때는 힘든지 몰랐지만

지금은 눈이 감기려 함을 느낍니다 .

주여.

하나님이 아니시었다면

제 지금의 삶의 시간이 어땟을 까 소름이 끼치려 합니다.

머리가 아프고 가슴이 폭팔할 것 같이 당기고

눈이 빠질 것 같이 불안함이 절 사로잡았으리라 압니다.

이럴 때나를 위로할 자들을 찾으려 가는 유일한 방법이

세상에서는 '술'을 먹거나 동류들을 찾아 패거리로 뭉쳐다니거나

가족 안으로 들어가 그들에게 전가하려다가

점차로 무거워지는 영혼을 경험할 수 밖에 없겠다는 생각이듭니다.

감사하게도

전 정결한 기도의 기도자가 어떤 상황인지 아는 자입니다 .

주여.

그래서 기쁩니다.

주님.

오늘도 기쁨 가운데 마무리 하게 하심을 기뻐하나이다.

주님은 소망이 맞습니다.

내주 예수 그리스도

그 귀한 이름들어 감사하며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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