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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가 좋다 (마12:1-12)

주하인 2010. 1. 29. 11:29

제 12 장 ( Chapter 12, Matthew )

 

 

금요성령 집회 하기오스 찬양팀 준비 중.

교회 전광판에 비쳐진

이~쁜 내 모습 ^^*

 

아.

저 자리에서

찬양을 올리게 되기까지

오십년을 흘려보냈다.

자리에서

주님 만을 보면서

영광을 올릴 수 있기까지

십여년을 보낸 후

자유로와 졌다.

사람으로 부터 자유.

과거로 부터 자유.

 

그 자유로운 주님을

매사에 찬양할 것을

굳게 맘먹는다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주님

 

 


1.  그 때에 예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가실새 제자들이 시장하여 이삭을 잘라 먹으니
  안식일.

자유로움


 

2.  바리새인들이 보고 예수께 고하되 보시오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다
 안식일

규격

제한

  
7.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면 무죄한 자를 죄로 정치

     아니하였으리라
 제사의 규격보다는

자비가 우선이다

 주님의 뜻은 '자비'에 있다.


8.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니라
 규격에 갇힘은 '노예'적 믿음이다.

예수님은 규격을 넘어서시는 주인이시다.

우리는 주인의 형제다.

우리는 자유다.

   

12.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 하시고 
 이제 더 이상

쓸데 없는 이유에 갇혀 허송세월 하기 보다는

진실을 보기를 원한다.

진리 안에서 자유롭길 원한다.

 

 오늘 묵상은

안식일에 대하여 반응하는 두 부류에 대한 것이다.

하나는 바리새파로 대비되는 '원리' 주의

다른 하나는 예수님을 필두로 한 '자유' 주의.

 

 무슨 일이든 안 그럴까?

원리와 원칙을 어기는 자들에 의하여 세상은 어지러워 지고

너무 고집을 앞세우는 자들로 인하여 삶이 버거워지기도 한다.

더구나 그 고집을 앞세우는 분이

아주 가까운 분이라면

그로 인하여 받는 상처는 말도 못할 것이다.

 너무 자신의 자유를 앞세우는 사람들은

세상을 아주 혼탁하게 한다.

그들 옆에 있으면 사단이

끈적끈적하게 들러 붙을 것만 같다.

 

 이 구분.

이 구분이 쉽지 않다.

이 가운데의 중용이 참으로 중요하다.

 예수님의 오늘 행동은

일반인들이 하기에는 너무 위험 부담이 많다.

만일 다른 자들이 저랬다면

저거야 말로 질타의 대상이 아니던가?

마치 그시대 바리새인들의 눈으로 보면

지금의 막장 드라마 주인공과 하등 다름없을 것이고

늙어가는 할아버지들이 보았다면

땅을 치고 세태를 분노할 일이 틀림이 없다.

그러나, 무엇이 진리던가?

당연히도 예수님이시다.

이처럼 선과 악의 구분은 범인의 눈으로는 쉽지 않다.

진리를 구분하기 너무어렵다는 이야기다.

아니다.

신앙을 지키면서 살아가기가 힘들다는 이야기다.

그것은 마치 곡예사가 줄타기 하는 것 만큼 어렵다.

그처럼 오래된 '천주교'가 다원주의로 가는 것도

일견 보면 이해가 어렵지 않다.

무엇이 옳던가?

무엇이 틀리던가?

그들도 하나님을 믿고

그들도 예수님을 믿기는 하지 않던가?

무엇이 다르던가?

 

 매사에 모든 일에 '기준'이 있어야 한다.

 

그 하나는 '하나님을 위함'이다.

둘째는 '남을 위함'이다.

셋째는 '나를 위함'이다.

 그 셋의 기준에 그리 틀리지 않는다면

그것은 틀림이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안식일에 밀을 먹는 것,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것.

하나님의 원리에 어긋나지 않는다.

원리는 자비고 사랑이시다.

 남을 위함.

어긋나지 않는다.

오히려 더 맞다.

 나를 위함.

역시...

 

그러나, 하나님을 위함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자아를 위함은 아닌지

남을 위함에 어긋남이 희생되면 그것이야 말로 문제다.

 

 선교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일이고

자아의 성취를 위한 의미에서

나를 위하는 길이긴 하지만

어쩌면 그로 인하여 지나친 고통을 감수할

힘없는 가족들이 있다면 그것은 아닐 수가 있다.

하나님 이름을 들먹이지만

그 보다 내가 앞선다면 역시 아닐 수도 있다.

 

역시 모두 세 조건을 만족 못시킬 수도 있다.

그럴 때는 우선 하나님이 먼저다.

그러한 구분을 하기 위해서는

깨어 있어야 한다.

말씀으로 깨어 있어야 한다.

기도로 그리해야 한다.

그래서 영혼이 자유로와야 한다. 

 

영혼이 자유라는 개념.

방탕하고는 너무 다른 개념.

 

 1절 '밀밭사이로'라는 구절로

2년전 정말 자유로운 묵상을 허락하셔서

블로그에 올린 일이 있다.

 주님은 자유다.

주님은 평화고 흐름이다.

주님은 기쁨이고 한적함이다.

아..

한적함이라기 보다 고요한 기쁨이시다.

열정이시다.

그런 주님의 감동을 알아야

삶이 자유로와 진다.

이렇게 움직여도

저리 움직여도

거침이 없어진다.

그게 '진정한 자유'다.

진정한 자유는

말씀을 바탕으로 한

영적 풍성함이 기본이다.

 

주님은 누구나 그러하길 기다리신다.

 

감사하신 하나님.

오늘은 오전 근무하고 시골에 급히 다녀와야 합니다.

형수님 부친께서 얼마전부터 안좋으시더만

별세를 하셨다 합니다.

부디 그 분이 마지막 임종에라도

예수님 영접하셨기를 바랍니다.

이제 다녀오는 길 잡아주시고

가능하시면

그 과정에서

이 자유로운 주님을 전도할 대상이 있었으면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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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년도 묵상 글.. )

 

 

제 6 장 ( Chapter 6, Luke )

 

 

 작년

강변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밀밭 사진이 없고

올린 사진이 용량이 축소되어서

안 이뻐요.

 그러나,

오늘 내용과는 상관없는

아베마리아지만

조수미님의 감미로운 목소리와

아름다운 음율이

밀밭 사이로 지나시는

예수님 일행의

그 허허로운 여유를 느끼기에는

그리 부족함이 없게 만드네요.

 아니시라고요?

상상력 부족 탓입니다.

아니 감성 부족요.ㅎㅎ

 

 주님과 같이 한번 걸어가 보시지요!

아,

저들의 배고픔도 한번 느껴 보시고요

그들의 자유로운 영혼의 허허로움도

같이 한번 느껴보세요.

 

 


1.  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새 제자들이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비어 먹으니 
 

 왜 요 장면에 오면

사뭇

머리 속에 그림이 그려질까요?

 

 마침

조수미님의 아베마리아가

제 블로그 '음악' 카테고리에 있네요.

그래서

오늘 묵상이랑

잘 맞는 듯 싶어서 집어 왔어요.

 

 안식일에 거기를 걸어서

어디로 가실까요?

 

 아..

밀밭 사이로

새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중동의 날씨가

그 당시에는 좀 선선하지 않았을까요?

그리 그려집니다.

제 피부에 부닥쳐 오는

바람의 느낌이

조금은 선선합니다.

 

 사람들의 눈을 봅니다.

눈이 조금은 내리 뜨여져 있습니다.

그 눈에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차분함이 서려 있네요.

 

 주님은 앞서 가십니다.

무언가 형용할 수 없는

예기가 느껴집니다.

그냥 저 분을 따라가면

될 듯도 싶습니다.

 

 사람들은 자유롭습니다.

 

어떤 이는 뒤를 쳐다보고 가만히 있네요.

무엇을 보고 있을까요?

밀밭 사이에서 날아오르는

새 날갯 짓에

퍼득 놀라

하늘을 날아오르는

그 새의 형적을 따라 쳐다 보는 군요.

 어떤 이는

잠시 쭈구려 앉아 있군요.

풀 숲 안으로 들어가서..

무얼 하나요?

혹시...끙~~~!!  ㅎㅎ

 설마 그럴리가요..ㅎㅎ

아마도

숨어 있는 이쁜 꽃을 감상했겠지요.ㅎㅎ

 

 어떤 이는

밀대를 꺽어

입에 물고 있군요.

 누구는 팔짱끼고 걷네요.

콧노래 하는 이도

휘파람 부는 이도 있군요. 

 아..

어떤 이가

이삭을 잘라 양손에 대고 부비는 군요.

어릴 적 생각이 납니다.

노란 벌판에

밀이 고개를 잘 숙이고 있을 때

그 밀을 잘라

불에 그슬려

양 손바닥에 대고

문지르면

고소한 밀이 먹기 좋게 되었던 기억요.

 많이 먹을 게 없던 시절에

더 없는 간식이기도 했지요.

하지만

이들의 이 행동은

조금은 낭만과는 다른 듯한 면이 없지 않습니다.

 

 '안식일'

 어.

안식일인데 이러다니요.

그 엄한 시대에

엄격히 자란 이들이 이럽니다.

 한편으로 

얼마나 배고팠을지

상상이 갑니다.

참 불쌍해요.

그 시대의 어려운 삶이 그렇고

그 어려운 예수님 제자로서의 삶도 그렇고요.

 그 배고픔은

경험자로서,

특히

오늘 아침

빈속으로 나오다가 들여다 본

버스 속의 묵상에서

절실히 - ㅎㅎ - 공감이 갑니다.

 아마

배고픔을 못 참고

배고프면 영혼까지 시린 듯한

증상을 가진

저와 비슷한 사도신 듯해서

그 배고픔이

참 가련히도 느껴집니다.  ㅎㅎ 

 그러나,

이스라엘의

그 엄한 분위기에

그 안식일에

그런 율법을 어기는 일을

사사로이 하다니

그것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예수님의

조금은 반사회적 허탈 분위기 -  세상의 눈으로 볼 때 말입니다. ^^;;;-를

동일 시해서 닮았다 감안해도

그것은 조금 지나치긴 하네요.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요?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이 사제 지간에

이 방탕스러워 보이는

타락(?) 이 말입니다.

 

 난

밀밭사이로

걸어가는  이들의 분위기를 상상할 때마다

이  

아베마리아 곡의 분위기가 떠오릅니다.

아.

아베마리아를 가져다가 들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우연히

너무도 맞아서 일 뿐이지요.

 이 글 쓰기 전에

아침 묵상 전에

이 행렬의 분위기가

'허허로움'이란 네 단어로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그리 글을 쓸까 했었지만

밀밭 사이로가

더욱 서정적일 듯 싶어

그냥 붙혔을 뿐입니다.

 

 제가 그 행렬에 있다고 가정해도

앞서 나가시는

예수님의 등을 보고

그 분의

그 휘적 휘적 걸으시며

무엇인가 생각하시는 듯한

분위기를 보면서는 요.

저도 모르게

밀을 한웅큼 들어서

생각없이

손에 올려놓고

두 손바닥으로 비빈 다음요...

아마

훅~~하고 불어서

알갱이를 남긴다음

입에 넣어

우적우적 씹었을 거예요.

펄쩍 뛰면서

한 발로

길 가의 풀 포기 하나를

발끝으로 축구하듯이 차기도 했을 것 같구요.

왜 냐구요?

날아갈 것 같아서요.

그냥 그래도 될 듯하여서 말입니다.

아마도

내 뱃속의 우릉우릉 소리가

내 육신의 기아상태를 방지하기 위한

방제장치의 가동 탓 ^^;; 도 있겠지만요...

실은

그 분이 주시는

그 자유로움 탓이

자유롭게 해서일 겁니다.

날 묶고 있던

온갖 규제와 내적 억압이

나도 모르게 잊혀 진 상태요.

 그것은

아마도

그 사도도

마찬가지였을 거예요.

 

 주님은

자유지요.

 

 어제 그제 수요일...

오랫만에 일찍 퇴근해서

마음 먹고 기도원에 올라갔습니다.

그냥 그러고 싶어서요.

날은 정말 추웠습니다.

마스크를 쓰고

점퍼를 입고

목도리를 둘러썼음에도

찬 바람이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그럼에도

날은 청명했습니다.

걸어서

안양역 앞에 와서

2번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하늘을 쳐다보았습니다.

어찌나 맑고 이쁜지요.

노래가 나올 듯했습니다.

실은 월요일 글에도 고백을 했지만

약간은 멍한 상태였거든요.

 올라가니 세시 예배가 있네요.

예배를 들어가서 앉는 다는 생각만으로도

허리가 아파오는 듯하고

졸릴 것 같은 생각이

나에게 의지를 강요하는 듯합니다.

항상 그래요.

 예배가 진행되면서

난 감동하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

목사님의 설교는 너무나 훌륭했습니다.

하지만

그 감동은 인간이 줄 수있는

감동 스토리와는 좀 질이 다릅니다.

인간은

격정적이고

좀 일회적이고

코 풀고 나면 잊어버리는 감동이지만

주님이 주시는 감동은 좀 유다릅니다.

전 익히 잘 알고 있습니다.

이제 수년의 경험을 통해

이게 은혜인 줄 압니다.

 우선

가슴 한 구석이 따뜻해집니다.

콧 잔등 어디에선가

촉촉한 습기가 맣겨 (smelled) 집니다.

눈 뒷쪽

안구 뒤쪽이

촉촉해집니다.

웬지 모르게

마음이 넓어집니다.

이걸 ' 마음의 지평이 넓어진다' 고

표현하고 싶어집니다.

괜히 옆의 사람이 사랑스러워집니다.

아니,

그것은 사랑스러워 '죽겠다'는 그런 감각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람의 관계에 의한 감동에 의할 때는 그렇지요.

그냥

넉넉히 사랑스럽고

모든 걸 포용할 듯 싶고

그들이 안스럽고 불쌍해집니다.

그런 사랑입니다.

미운 사람이 없어집니다.

걱정요 ?

온갖 세상의 걱정을 다 들고 가도

이상하게도

아주 작아져 보입니다.

마음이 아주 허허로와 집니다.

그래요.

오늘 묵상하며

허허롭다는 느낌이 '확~'하고 온 것은

바로 수요일인 어제 그제의

영적인 쉬임을 허락 받고 왔기에

표현이 가능한 단어들일 것입니다.

 

 예배는 감동입니다.

특별한 감동이지요.

요새는 자주 그걸 느끼네요.

밀밭 사이로 걸어가는

제자들도 그럴 걸요?

 

이들

제자들의 자유로움은

영적인 허허로움의 표현인 것 만 같습니다.

그 자유는

현실을 넘어서는 안전감에서 발로된 것입니다.

방임과는

너무나도 다르지요.

같은 현상으로

건방지고 세상을 멋대로 사는 자들에게도

안식일 밀밭의 범죄를 벌일 수는 있겠지요.

하지만

그들은 그것으로 끝입니다.

 

믿음이 시간이 지나면서

어릴 때와

성장이 충분하게 일어나서

연단된 믿음을 가지게 될 때가

거의 비슷한 경우로 나타남을 보게 됩니다.

어릴 때는 너무 어려서

성장한 믿음은 규격이 필요가 없어서

자유가 주어지는 게 말입니다.

주님 곁에 바짝 서면

그 자유를 느끼게 됩니다.

영혼이 말이지요.

 그래요. 

그들 영혼은 그리 자유롭습니다.

주님 뒤를 따르는

밀밭 사이로 갈 때요.

 

 

 

적용

 

1. 주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오늘 하루 산다.

 

2. 주님의 그 허허로움과 여유로움을 묵상한다.

 

3. 한명 이상 이 기쁨을 전파한다.

 주님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려 오셨다 선언했다.

 

4. 성경 여섯 장 읽겠다.

 

5. 밀밭 사이로 걸어 어디로 갔을까?

 안식일을 지키려 성소로 갔을까?

 어디로 갈까?

 난?
 늘 같이 걸으시는 주님을 묵상한다.

 

기도

 

주님

감사합니다.

우리 주님께 모든 영광올립니다.

우리 주님의 그 자유로움

우리 그 주님의 안전을 감사드립니다.

주님

그 평강의 샬롬을 감사드립니다.

주님

어디에 있어도

주님이 계시면

나 날아가는 종달새의 지저귐과

흐르는 바람의 볼스침을 느낄 수 있어 감사합니다.

어디에 있어도

주님을 만나면

세상은 멀리 물러나고

진실이신 주님을 알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밀밭 사이의 여유를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주님을 알게되어

너무 너무 감사합니다.

제 영혼은 자유롭습니다.

날아갈 듯 싶습니다.

밀대 하나 꺾어들고

휘파람 불다가

입에 넣어 질겅거리는

그 자유를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예수님

주님의 이 평강을 전하고 싶습니다.

환경

결단

흐르는 인생의 시간을

주여 인도하소서.

자격되지 않는 자의 강박과

지나친 태만을 허락지 마소서.

주여

당신이 원하시면

인도하소서.

 듣겠나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조수미 - 아베마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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