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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나 외롭지 않습니다(왕상 8:44-53)

주하인 2010. 9. 24. 12:08

제 8 장 ( Chapter 8, 1 Kings )

 

홀로 있을 때

심히 외로웠습니다

작은 바람에 조차

 많이도 흔들렸었습니다

 

 

그러나

언제 부터인가

그렇지 아니할 수도 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크고도 높은 하늘이

내 뒤에 있었음을

알아챈 후 부터였습니다

 

외롭지 않습니다

아니

 그렇게 될 것을

이제는 압니다

 

내 외로움을 가져가신

 주님께

감사드리고

감사드립니다

 

 

 
44.  주의 백성이 그 적국으로 더불어 싸우고자 하여 주의 보내신 길로 나갈 때에 저희가

     주의 빼신 성과 내가 주의 이름을 위하여 건축한 전 있는 편을 향하여 여호와께 기도하거든 
 내가, 주의 백성이

이제 새로운 마음으로 나아가고자 , 적국으로 더불어 싸우고자 하여

그래도 주님이 좋아하시는 뜻대로 , 주의 보내신 길로 나갈 때에

내 성품과 성질이 움직이는 대로 싸우지 아니하고 , 주의 이름을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거든..

 

주님이시여...

 
45.  주는 하늘에서 저희의 기도와 간구를 들으시고 그 일을 돌아보옵소서 
 제 기도와 간구를 들으시사

저의 ' 그 일 '

주님과 저 만이 아는 그 일을

주여 돌아 보아 주소서.

어디에나 계시고 내 안에도 , 내 주위에도 , 내 우편에도 계시지만

'하늘에 계신'

그 하나님 , 그 어마어마하시기가 도저히 감당키도 어려운

에너지 그 자체이신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제 기도를 들으시고

제 간구를 들으시고

내 그 '비밀한' , 그 일을 돌아 보아 주실 줄 믿습니다.

주여.

 

 그래,

가만히 들여다 보니

내 속을 움직이는 가장 기본은

'내 외로움'을 달래줄 누군가가

내 외로움을 달래주지 아니하고

그 사람도 그 외로움을 달래지 못해

지쳐 있던 상태에서

그나마 움직여 무엇을 해 볼까 하며 패착을 일으켰던 것을

내 외로움이 칼처럼 그것을 발견하고 찌르고 나왔던 것이다.

 

 산다는 것.

살아있다는 것.

사람 들 사이에서 사람으로 산다는 것.

그들을 움직이는 '모티브'는 '외로움'을 해결하기 위하여

그토록 처절히 몸부림 치는 것이다.

어떤 강력한 욕구가 그의 본성을 좌우해서

그를 그토록 맹렬히 자신의 성공욕구에 따라 방향을 달리해서 그를 몰아세우지만

결국 그가 움직이는 그 깊은 곳에는

태어나자 마자 본성적으로 느낄 수 밖에 없는

원죄에 의한 '갈급함'을 채우려는 것이다.

' 영혼'에 생긴 그 결점은 '죽음'에 의한 것이다.

태어나자 마자 죽어가는 사람들의 영혼은

그것을 의식하지 않던 의식하던

그 두려움, 그 갈증, 그 공허를 채우기 위하여

사람 들 사이에 파묻히기도 하고

성공을 해서 사람들이 모이게 하기도 하고

이성과의 복잡한 육체적 관계를 통해서도 그 허전함을 달래려 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게 쉽사리 채워지는 갈증이던가?

그 본능적 외로움.

그 채워지지 않는 갈증은  특별히 사람과의 관계에서 상처를 입어

사랑으로 채워지지 못하는 경우 ,

다른 이유로 해서라도 채우려 한다.

도박, 섹스, 술, 마약, .........

수준 높은 채움은 '봉사' '헌신'.........이기도 하다.

물론, 이러함은 종교에 매달리게 하는 다른 모티브가 되는

긍정적 요인이 되기도 하지만

그러나 원초적인 깊은 외로움은

비단, 교회를 다니고 다양한 종교적 행동을 해도

온전히 해소되지를 않는다.

 육신의 힘이 있을 때는 그나마 여러 방법으로 채우는 목표가 이루어지지만

나이가 들어가며 육신의 힘이 소실 되어 갈 때

그 공허감은 점차로 커진다.

커짐은 '상실감'을 초래한다.

사람이 '죄'에서 멀어지기 어려운 가장 기본 중의 하나다.

그게 '외로움'이다.

외로움이 채워지지 않으면,

자신도 모르는 분노와 두려움이 대상을 향해 터져 나오기도 한다.

 

그 외로움.

그 죽음에 이루는 병을 해결할 방법이 과연 없던가?

있다.

 주님의 사랑을 깊이 만남이다.

주님의 일방적 '선택'에 의하여 구원 받은 그 이상의

주님과의 개인적 만남이다.

그 경험이 깊이 쌓여

주님과 같이 있는 것 만으로도

더 이상의 갈급이나 갈증이 없는 상태.

그것이 '고독'이다.

어차피 인간은 홀로 있을 수 밖에 없는 상태이다.

외로움은 타인을 내 속으로 흡수하고 그들을 내가 원하는 대로

마음대로 움직이기 원하는

파괴적인 '죄악'이라면

'고독'은 홀로 있어도 외롭지 않고

타인이 다가와도 그들을 어쩌고 싶어하는 욕구가 사라진

아주 건강한 상태이다.

이러한 고독을 가질 줄 아는 자라야 만이

그제야 진정한 '환대' - 헨리 나우웬의 '발돋움'에서 - 가 가능한 것이다.

그제야 하나님이 보이고 싶어하시는

타인에 대한 온전한 선한 관계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솔로몬의 이전까지의 기도는

전부 '회개'에 대한 것이다.

오늘 기도는 '적국과 더불어 싸우고자 할 때'라 한다.

과거보다는 미래적 개념이다.

수동적 보다 '능동적 개념'이다.

 

 외로움보다는 '고독'을 선택하고 깨달았다.

하지만 내 속을 길이길이 잡아 들이는

이 깊은 공허감과 배반감,

날 그처럼  오랫동안 아프게 하고 괴롭히던 정체는

내 안의 회복되지 않은 ' 외로움'이 다시

요 며칠의 계기로 인하여 잠들어 있다가 튀쳐나와

온통 내 영혼을 헤집고 다녔다.

절묘하시게도 주님이 말씀으로 사로 잡으셨다.

그리고 깊은 사랑으로 날 감싸심을 느낀다.

그리고 다양한 책을 통하여 깨달음을 많게 하신다.

이제 '긍정적'인 선택을 해야할 때다.

그러나, 아직 슬그머니 '미움'이 일어난다.

현실적인 대안을 생각하면 벌써 치달리는 내 머리다.

영혼의 한구석에서는 '손해'보길 바라신다.

실제로 그게 '고독'한 마음이 맞다.

'주의 보내신 길로 간다' 한다.

주의 원하시는 길로 간다 .

그러나 , 그러기 위해서는 놓아야 할 것이 많다.

아직도 날 붙드는 내 영혼의 원죄의 아픔이 너무도 크다.

외롭다.

지독히 외롭다.

그래서 그 외로움을 그렇게 하면 해결할 길이 없다.

현실적으로 내가 몇가지 제재만 가하면

그들은 내 외로움을 채워줄 수 밖에 없다.

내 앞에 엎드려 나에게 구걸을 하고

나에게 용서를 해달라고 빌고

내 외로움을 채울 웃음을 줄 수 밖에 없다.

하지만, 그런다고 본질적인 내 깊은 외로움이 사라질까?

일순 그럴 수는 있겠지?

그렇지만 또 그들은 그렇게 그렇게 자신들읙 길을 가게 될 것이고

더 나이가 들어 더 힘이 빠지면

내 현실적 능력도 사라지고

그렇게 되면 온전히 난 .................

그렇기 때문이라도 '난 나를 놓는게 맞다'

내 갈증을 하나님께 돌리고

내 걸고 있던 '외로움'을 채워주지 않던 자들에 대한 '미움'과 '원망'과 '배신감'을 내려 놓아야 한다.

그러하심을 알고 계시기에

오늘 주님께서 '적국과 싸우러 나갈 때'라 쓰고

내 눈에 크게 들어오게 하셨다.

그래서 주의 보내신 길로 나가라... 하셨다.

기도와 간구로 그러라 하셨다.

들으신다 ..하신다.

 

 예수님.

그 분이 십자가를 지시고

십자가에 매달리시는 대 사건으로

내 안에 기회가 왔다.

온 우주의 에너지가 그 분을 영접함으로

내 영혼 안의 지성소로 쏟아져 들어올 기회가 생겼다.

그 분을 구주로 영접한 순간,

나는 내 영혼에 버튼을 지니게 되고

기도와 간구를 통해

그 버튼을 누르기만 하면

'하늘' , 그 보좌의 그 무궁무진한 에너지가

'성령'의 끈을 타고

내가 알지 못하는 사이

내 영혼에 마치 호스로 물을 부터 담듯

주님의 그 놀라운 '구원'의 에너지가 내 영혼을 채울 것이다.

그게 ,

'하늘'의 아버지를 말씀하시는

솔로몬의 되풀이 하는 기도의 이유다.

최소한 오늘 나에게는 그리 느껴진다.

 

 어쩔까?

현실은 어쩔까?

다 ...내려 놓자.

이전에 그렇듯, 다 내려놓자.

원망도 배신감도 미안함도

돈도, 그것을 통제하려 함도

모두 다 내려 놓자.

그리고 용서하자.

사과를 받으려 노력하지도 말자.

그냥 그것도 내려놓자.

그게 주님이 보내신 길로 나가는 길이다.

그러기 위해 주님을 내 곁에 가까이 모셔야 한다.

그것을 기도하고 그것을 간구해야 한다.

 

 

 

주여

도우소서.

저 적국과 싸우러 나가야 할 때인가 봅니다.

지난 수일간, 무진 죄를 많이 졌지만

그것은 본질이 내 속의 외로움을 자극하는

사단의 장난 이었습니다.

거기에 미련하게 되풀이 되풀이 흔들렸습니다.

이제 '고독'으로 바꾸길 원합니다.

주님이 계시면

홀로 있어도 외롭지 않습니다.

그것을 체험한 저 입니다.

주님 만 계시면...

그렇다고 주님 만 바라보고 세상을 돌아보지 않는

그런 어리석음을 시행하길 원치 않습니다.

마음 한구석에 '주님 만 바라보고 ' 단절하고 싶은 충동도 없지 않지만

주님이 원하심이 아니기에

또 다시 세상을 향해서 나가려 합니다.

주님.

주님이 절 도우소서.

주님 보내신 길로 나가게 하소서.

흔들리지 않게 하소서.

내 속을 들키지 않게 하시고

배려 하게 하소서.

주여

불쌍히 여기소서.

저 어찌 해야 할지 가르치소서.

마음의 혼란을 앉히시고

주님이 보내신 길로 가게 하소서.

주여.

포기 하길 원합니다.

내려 놓길 원합니다.

통제를 버리길 원합니다.

주여.

그게 '외로움'에 더이상 잡히지 않는 길 임을 깨닫습니다.

주여.

홀로 태어난 길,

이제 주님과 함께 가려합니다.

홀로 다시 되어도

이제는 홀로가 아님을

고독이라는 표현으로 말씀하신

헨리 나우웬님의 고백이 공감합니다.

주여.

사랑합니다.

귀한 글 깨달음 허락하신

주의 그 살아게심에 감사드립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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