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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하지 못했던 죄에 대한 묵상[갈2:11-21]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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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하지 못했던 죄에 대한 묵상[갈2:11-21]

주하인 2017. 7. 4. 09:46

 


11.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 받을 일이 있기로 내가 그를 대면하여 책망하였노라

 가끔.. 예상치 못한 이익에 대하여

그게 죄가 아닐 듯하여

'혼란'을 겪을 때가 있다.

끊으면 분명히 '주께서 ' 기뻐하실 것을 아는 정도의 신앙의 경험을 해온자로서

끊지 않고 유용하게 될때 느끼는 잠시의 '자유로움'과 '풍성한 마음'에서

그 선을 뚜렷이 하지 못하는 것...

그리고 그러함이 자꾸만 되풀이 되는데

그 시간이 지나면서 어느새 그의 모습은 '죄인'으로 그가 멀리하던 자 들의 그것과

그리 달라보이지 않은 행동을 하는데도

그는 스스로 모르고 있을 때..

'죄'가 죄인지 잘 모르고 스며 들어오고 있을 때..

그때..

책망하는 자,

사도 바울.. 특별히 은혜 받고 두려운 것 하나 없이 서슬이 퍼런 책망자.. 가 나타나서

질타할 때..

입장을 '베드로' ,.. 여기서는 게바.. 의 시선으로 보앗을 때

과연.. 나는

그가 달가울까.. 달갑지 않을까?

 그래도 베드로.

하나님의 전적이 은혜 가운데

뜨겁게

천둥치듯 여기까지 온자다.




12.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그들이 오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 
그는 슬그머니 피했을 마음의 부담이 있었던 자고

그가 그러한 질타에 격렬히 저항햇다는 뉘앙스나 성경의 근거 어디에도 없는 것으로 보아

그는 그래도 다행인 자다.


그런 바탕으로 게바의 입장에서

그 상황을 당햇을 때 그의 심리 내지 영적 상황에서

'죄'에 대하여 대처하거나

그런 죄에 대한 부담을 가지고 있는 자신에 대한

스스로의 마음은 어떠햇을까.. 다시 돌아보게 된다.


 슬그머니 피했음은 '죄'라는 것을 인식하고는 있지만

그 상황에 어울렸음은 철저한 죄의식은 없었다는 것이다.

그것..

위의 그러한 질타에 대한 태도로 보아

어쩌면 '죄'된 행동에 대하여서는 '깨닫고 있었고'

그러함이 그의 영혼에는 큰 영향을 미칠 만큼 '죄'는 아닌 것을 알고 잇으되

그러함을 질타하고 자신도 모르게 끌려 들어가는 그 죄된 상황에

바울'이란 또다른 성품의 사도의 입을 통해

하나님이 역사하셔서 자신을 자제 시키시는 것을 깨닫고

그러한 행동에 제동을 거는 입장이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그것.

'죄'의 정의에 대하여 '순백과 순흑'으로 구분하여

세상을 철저히 살 수만 있다면

어쩌면 자기 자신은 행복할 수 있지만

자신도 모르게 ''흑'에 가까워져 갈 때

마음의 부담이 있고

그러할 때 누군가 , 어떤 상황인가, 어떤 때인가 ..

그에게 '죄'임을 선언할 때는

당연히 '절제'하고 일어날 '기준 선'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죄'..


당연히도 '하나님의 십계명'이나 '우주원리'에 어긋나는 것은 타협의 여지가 없지만

위의 게바나

내 감히 드러내놓고 표현하지 못하는 묘한 '죄'근처의 일들에 대하여

흑백으로 구분짓기 어려운 상황이 있을 때의 죄에 대하여 묵상하는 것이다.

그때..

'사도'바울처럼 '죄'임을 선언해줄 어떤 자가 있을 때

그를 고까워하지 말자는 것이

오늘 내게 느껴지는 아주 부족한 자를 달래시는 하나님의 터치 같으시다 .

거기에.. 그러함이 감사함으로 바뀌어야 한다.

죄를 지적해주는 자가 있을때..

아직 하나님이 사랑을 놓치 않으심이다.

관심의 사람이다.

이 죄가 만연한 불신과 악의 회오리 시대에

그래도 주님께서 덜 악하다고 보시며

'네가 제물을 드리지 않았더라도

너의 번제가 항상 내 앞에 드려졌기에 족하다' 시던 하나님의 위로가 느껴지기도 한다 .

 한편.. 이 정확한 포인트를 매사에 잡기 어려운 시대의 혼돈 속에서

바울의 야단 같은 '주님의 제재'도 필요하다.

 거기에 그 때 흔들리고 삐지지 않을 나름의 깨어 있음...게바의 여유로움도 필요하다.




20.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정말 어렵다.

죄와 '의'에 대하여 구분해나가면서

일상을 살아간 다는 것이 때로는 정말 구분하기 조차 힘들 때가 많고

'죄'인지 알아도 순간순간 그게 왜 죄일까.. 라는 혼돈이 .. 그렇다.

내 의지로는 이 영적 영역에 대하여 굳게 서는 것이불가능함을 자꾸만 더 고백하게 된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 께서

이 부족한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 사랑이 절절하게 더 커지고

그리함으로 인하여 내 하루 하루의 삶이 모두 그 분의 그 은혜와 사랑에 감복하기에

죄에 대하여 멀리하게 되고

그러한 감사와 은혜의 갈구가 모두 내가 주안에서 사는 것으로 인하여 가능하며

그러함의 에너지로인하여 자꾸만 죄에서 멀어져야 만 하게 된다.


이제 내가 사는 것이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서 예수그리스도 만 살아 계시는 것이다..라는 고백이

그래서 더욱 힘이 있고 진실로 느껴지게 만 된다.



주여.

부족한 자..

죄에 근거리를 두고 멀리하지 못하고 사는 자..

주님의 말씀을 붙들려 애쓰고 있습니다.

말그대로 탁 자르고 순수와 순백으로만 살면 좋겠지만

그래도 이 세상의 삶을 유지해나가야 하는 나머지의 수십년을 생각하면

얼마나, 언제까지나 열렬한 기쁨으로 그를 유지할 수 있을가 걱정이 되어

죄를 완전히 멀리하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그러기에 자주 '주님께 죄송하고' 미안한 마음이 듭니다.

주여.

그러함에도 주님 앞에 감사할 수 있음은

죄지만 죄를 통하여 주님을 더 붙들려는 마음의 자세를 귀히 보신 줄 압니다.

주여.

죄책감은 떨구고

부족한 죄된 행동은 자꾸만 덜하게 되어

어느 순간 주님이 '바울의 질책'같은 소리로 제게 강하게 말씀하시고

이제 '죄를 털게 되는 게바'의 순간이 제게 올시

완전 성화를 위하여 달려가게 될 줄 믿습니다.

 그때.. 저를 통하여 더많은 분들이 주님의 은혜 가운데 죄를 더 멀리하는 표본이 되리라 믿습니다.


주여.

오늘 하루도 주님의 말씀 가운데

은혜를 잊지 않아 죄가 더 흐려지게 하소서.

내 주 에수 그리스도의 이름 받들어 감사하며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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