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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로움으로 자유하다[욥12:1-25]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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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로움으로 자유하다[욥12:1-25]

주하인 2014. 7. 23. 08:56

 
   

3 나도 너희 같이 생각이 있어 너희만 못하지 아니하고 그같은 일을 누가 알지 못하겠느냐
 그들의 이야기는 너무 당연한 이야기다.

누구도 다 아는..

그러나 그들은 왜 그럴까?

'고통은 죄에서 비롯되고

 그는 죄지은 죄인이니

 고통받지 않는 죄인이 아닐 듯한 자신들은 옳기에

 그를 가르쳐야 한다'가 그들의 기본 개념 아니던가?

 

그게 맞는가?

그래서 욥은

6 강도의 장막은 형통하고 하나님을 진노하게 하는 자는 평안하니 하나님이 그의 손에 후히 주심이니라 
이리 이야기 한다.

강도의 장막과 하나님을 진노하게 하시는 자들은 평안한데

그들이 '의로운가?'

 

너무도 당연하지만

어찌 많은 사람들,

특별히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이 자책하는 과정에서

저런 흑백논리에 빠지는가?

 

물론 죄가 있어 혼나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요

죄가 없어도 고통 중에 있을 수 있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데

우리는 과연 고통 중에 있을 때

'자책'하지 않을 자신이 있던가?

자책하지 않고 당당함이 '죄에 무디어진 ' 양심없는 것이 아닌가 고민하지 않을 수 잇는가?

 

그 혼란을 어찌 당해 낼 수 있는가?

그것..

믿는 자들에게는

특별히 '하나님 앞에서 혼란스러움으로 인한 죄스러움'의 무게가

믿지 않는 불신자들에 비하여 더 큰 무게로 짓누르게 된다 .

 

아주 아주 힘들때

그런 괴로움이 가중되며 숨도 쉬지 못할 만큼 힘들어질 때마다

'주여.......어찌..

 난.. 왜 예수님을 믿어서..........' 하고 몸부림 치던 것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ㅠ.ㅠ;;

 

그거 ..

잘못이긴 하지만 잘못이지만은 않다.

미련함은 배우지 못함일 수도 있고

아직은 영적으로 어려서 일 수도 있다 .

그러함은 하나님 앞에 '불쌍한 자녀'이지 '나쁜 '.. 이 아니다.

아버지로서의 나는 부족한 아들이 몸부림 칠 때 눈물이 나려하지

그의 실수인하여 그 아들을 혼내지는 못하겠더라..

하지만 그런 그 아들을 정죄하고 차갑게 매드는 친구나 주위가 있으면

분노가 일어날 것만 같다.

그들의 그 '무책임'함과 '인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함'과 '그들의 긍휼없음'이

속상하고 화가 날 것만 같을 것 이다.

 

 

4 하나님께 불러 아뢰어 들으심을 입은 내가 이웃에게 웃음거리가 되었으니 의롭고 온전한 자가

  조롱거리가 되었구나 
 그렇다면

난.. 언제부터 자유로와 졌던가?

 

첫사랑의 강력한 영접후 오랜 '혼란'의 시간을 보냈다 .

수없이 많은 실족의 위험성을 거쳤다 .

하나님 믿어야 함의 너무 당연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 가는것이 얼마나 무겁고 어려운 듯한지...

위의 생각들과 주위의 비아냥이 머리를 혼란스럽게 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엔가 난 자유롭기 시작했다.

말씀이 나에게 살아서 다가오며

생각들을 바꾸기 시작했고

어느 순간엔가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그분의 어루만지심으로

난..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었고

예수님의 보혈을 받을 자격이 있음을

성령의 은혜로 내 영혼이 각인되기 시작함 탓이었다.

 

그것..

오늘 욥이 이리 표현하고 있다 .

'하나님께 불러 아뢰어'

하나님이 부르실 때 불려 들어갔고

그 하나님 앞에서 신음소리처럼 만 나던 내 인생의 고뇌들을

어느 순간엔가 터져나오는 말로써 몸부림치듯 아뢰기 시작했고

' 들으심을 입은 '

그 분이 들으심을 알면서 마음 깊이 깨닫지 못하던 시간을

몸부림치며 보내고 보낸 후

나는 드디어 그 분이 내 말씀을 듣고 계심을 알게 된,

그것도 그런 사실을 알게 됨을 전적인 은혜로 알게된...

'들으심을 입은' 시간이 지나

드디어 내가 ' 들으심을 입은 나'임을 인정하게 되면서

즉, 내가 그냥 남들과 다름없이 세상의 인과의 법,

인과응보의 원칙에

흑백논리에

율법의 깡통로봇 같은

피노키오 같이 인생의 줄에 얽매여 사단의 조정대로 사는 자가 아닌

그를 넘어서는 '하나님의 의'로 의로와진

'하나님의 들으심을 얻은 의로운 나'로서 인정되게 되면서

자유는 내게 차오르게 되기시작했다 .

 

그것은 고난이 유익이고

약함이 기뻐하는 이유가 될 수 있으며

궁핍함과 곤란이나 핍박이 좌절의 근거가 되지 못하는

실제적 근거가 되기 시작하였으며

드디어는 그것이 내 의로움과 관계가 없고

내 강함의 도구가 될 뿐임을 인정하게 되었다 .

 

그 의로움은

말씀을 통한 성령의 흐름이란 과정을 통하여

매일 내 삶의 방향을 결정하게 되었고

어느 순간 돌아보니

내 주위의 변화도 따라옴을 느끼게 되었다.

 

얼마전, 새로운 수술 방법을 개발하게 되고

그 것을 남들과 나누고 싶은 의욕이

기도 중 인사이트로 다가오며

(난.. 이러면 하나님의 뜻인 줄 알고 시행하며 그것이 내 이룸의 근거가 되었다 ^^*)

논문을 쓰게 되었다.

자유로움은 다 방면에서 생각이 번뜩이게 하고

과정에서 나 .. 새로운 사실을 깨달았다.

내 시술과정에서 약간의 문제점들로 가슴앓이 하던 부분.. .

그래서 더 노력해서 극복해오던 과정들을 다시 수치로 돌아보게 되며

그 실적이 'S'대나 ' H' 대 , ' D' 대의 실적과 비교하여 전혀 치우치지 않고

오히려 월등한 안전성으로

그것도 뛰어난 기법으로 시행하게 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

세상도 이렇듯 강하게 하신다 .

난 . .그동안 약하고 부족한 줄 알았다.

의로움의 원리,

내 현실, 내 행동, 내 오판.. 에 상관없이 하나님이 주시는

'의로움'을 입었음을 인정하게 되면서 따라

내 삶의 반경도 달라지기 시작함을

쓰기 시작한 새로운 기법의 논문을 통하여

의과학을 하는 내게

데이터로 '직면'까지 시키시는 분이시다.

 

그렇다.

난.. 이제 내가 '하나님 앞에 불러 아뢰기만 하는 자'를 넘어

'들으심'을 '입은'..

정말 '그 한없는 은혜를 입은...' 자가 맞다.

그러기에 난.. 내 잘 잘못을 떠나

난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입은' 자다.

 

온유와 겸손과 긍휼과 자비와... 로 옷입고 사는 자다.

그런 나에게 주님은 '의로움을 옷입히셨으니'

그리 살라신다.

세상의 흔듦에 흔들리지 말 것을 권유하신다.

언제라도 '의'롭고

언제라도 '선'하고

언제라도 '승리 '할 것을 말씀하신다.

 

난..

그리 살 수밖에 없는 운명임을

이 비 많이 오는 아침에 감지하고

다시한번 내 의로움 안에서 '자유한다'

 

 

주여...

비가 많이 옵니다.

가뭄이 해갈됨이 다행이긴 하지만

이 비로 또 고통 받는 자들이 없었으면 합니다.

그 고통 받는 자의 고통이

하나님의 들으심을 들으면서도

들으심을 입어 의롭다 함을 깨닫지 못한 자들에게

더 고통이 되지 않게 하소서.

그들이 주여.. 주여.. 외칠 때 더 깊이 다가가셔서

그들의 영혼이 하나님 앞에 아뢴 것이 들으심을 입은 것으로 느끼게 하사

세상에 하나님의 의로운 자들이 점차로 넘치게 하시어

의로운 자의 의로운 품성과

그들의 예수님 닮은 향기로 세상을 맑게 하시고

오직 옳게 믿는 자들의

예수님으로 인한 세상의 기적들도

믿지 않고 마음대로 사는 고민 덩어리의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이렇게 살아계심을

널리 알려지게 하소서.

내주여.

의로움의 감정.. .

그것이 감정의 차원에서 머물지 않게 하시고

'심비'에 각인되듯 영혼 깊숙이 확신하게 하소서.

주여.

특별히 제게 그리하소서.

이 모진 세상.. 여기까지 살아오게 하시고

이렇게 의로움으로 느끼게 하시는

하나님의 그 은혜에 감사드리나이다.

이제는 살아 온 것을 넘어서는

살아갈 의미로

제 삶은 매사매사 소망으로 차고 오르고 있으나

다가올 환란 가운데서도 유지할 수 잇을지

솔직히 주여.. 자신이 없사오니

주님의 의로움으로 옷입은 사실이 잊혀지지 않게 하시고

들으심을 입은 자로서

더 단단한 영혼이 되게하소서.

주셔도 주시지 않아도 변치 않는 감사함과

소망을 잃지 않게 하시고

제게 '영생의 삶'에 대한 소망을

더 확실케 가지고 살게 도우소서.

내 주여.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도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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