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칙한 QT
유다복음과 짝퉁 유다 본문
(열왕기상12:12-12:20)
처음에 예수님을 믿기 어려웠던 것도
믿고 얼마동안 혼란 스러웠던 것도 "예정론적 발상"이다.
너무도 당연히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면
모든 걸 다 아실 것이고
그렇다면 인간의 노력은 아무 것도 의미없다.
우리는 장기판의 졸이고
그 분은 장기를 두시는 분이시면
졸이 아무리 움직이고 노력을 해도
무슨 의미가 있다는 말인가?
예수님 믿기 전에는 이런 논리적 허구가 믿지 못하게 하는 이유였고
예수님 믿고 나서 그 은혜에 너무도 감사함에도 불구하고
힘이 없던 이유 중의 하나이다.
그 중 '유다'가 인간적으로 참으로 불쌍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어찌 그 예정 속에 그 사람이 들어가서
그리 ....
그렇다면 나의 움직임은 어떤 의미가 있다는 말인가... !
최근에 '유다복음'이 발견되었다고 떠들석하다.
이런 예정론적 발상이 그를 영웅시 만드는데 일조한단다.
유다가 그 예정론에 빠졌다면 너희들이 어찌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받을 수가 있겠는가?
...그는 한몸 희생한, 아니 희생된 거룩한 자다... 뭐 이런..........
어찌 보면 논리적으로 처음에 믿지 못하던 나의 생각과 너무도 들어맞지 않는가?
오늘 성경 구절 몇몇 곳에 유사한 의문을 제공하는 곳이 보인다.
12절
삼 일 만에 여로보암과 모든 백성이 르호보암에게 나아왔으니
여로보암이 왕족도 아닌데 르호보암이 세겜에 온다는 소리를 듣고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으로 부터 불러들여 벌써 한 마음으로 뭉쳐 있다.
이건 어떤 신비적 힘이 작용하지 않고는 이루어 질 수 없는 현상이다.
즉, 하나님의 예정 아래 이루어 지고 있는 특별한 현상.
15절은 특별히 명시 해놓았다.
여호와께로 말미암아 난 것이라
아
힘이 빠지려 한다.
어떤 노력도 필요없는 상황.
현재의 내 주위에서 벌어지는 여러 일들이
주님의 계획하에서 한치도 빈틈없이
그 분의 뜻대로 이루어질 것을...
솔로몬의 패악 - 우상을 섬기고 음란한 개인적 문제를 넘어 백성들에게는 채찍질과 멍에까지 메웠던 악한 행동까지 했다. - 의 결과로 르호보암은 아무리 선한 행동을 했다 하더라도 주님의 예언이신 솔로몬 자손들의 고통은 벗어날 수 없는 예정이 아닌가?
만일 그렇다면 르호보암이 노인들의 얘기를 들어도 무슨 변화가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예정론의 답답한 점이다.
그런데..
항상 성경을 읽어가면서 느껴지는 것은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항상 Interactive(상호작용)하는 원리가 보인다는 것이다.
물론 대 전제는 거의 정해져 있지만
그 대전제 마져 가끔은 모세의 예처럼 기가막힌 기도와 순종으로 바뀔 수도 있다는 사실이며
또한 큰 결말은 정해져 있을 수도 있지만 그 결말에 사용되는 사람은 바뀔 수 도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다.
이런 것이다.
예수님 십자가 사건은 반드시 제자의 반역에 의해서 이루어 졌지만
그 역할은 반드시 유다 본인이 아니고 다른 배역의 '유다'에 의해서 이루어 질 수도 있다는 얘기다.
가룟 유다가 아니구 '기룟 유다'이던지 ' 가롯' , '갸롯' ,'가륫', ' 갈룟'유다 일런지 어떳게 아는가?
요새 말로 '짝퉁'으로 대치하지 못할 정도로 예수님이 능력이 적으신 분이신가?
오늘 본문에서 '르호보암'대신 다른 동생이 그 자리에 있을 수도 있지 않은가?
아니면 12지파에서 2지파만 받는 대신 11지파를 받을 수도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무엇이 이런 차이를 가져오는가?
무엇 때문에
주님은 이런 차이를 허락하셨을까?
원칙 부터 다시한번 점검해본다.
주님은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당신의 기쁨을 위해서 만드셨다.
이사야서 43:21에서도 아름다운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하셔서 지으셨다고 하셨다.
즉, 아기의 재롱을 보는 부모님의 기쁨을 맛보시려는 심정이시다.
그러시면서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신 건 너무나도 당연한 결론이다.
자유의지란 무엇인가?
'선택'할 힘이다.
주님은 우리의 일상에서 매사를 선택하시길 바라신다.
그런데
우리의 커다란 운명은 결정되어 있다.
롬 8:28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선'으로 ...
문제는 우리의 '선택'이다.
우리가 항상 주님 뜻대로 , 주님의 뜻안에서 살려고 몸부림을 치는 '선택'을 하면 우리는 르호보암이나 유다의 자리에 설 일은 전혀없다.
너무도 당연하지만...
이것은 거꾸로 생각하면
우리가 주님 안에서 가장 선한 방향으로 선택을 한다면
현재의 우리의 현상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우리의 미래는 주님이 예정하신
선
가운데 놓여지게 된다.
그게 성경에 예언 되어 있지 않은가?
물론 그 선의 질(質) 문제는 역시 우리의 선택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그렇다면
우리는 예정된 이러한 '선'한 결과를 믿는다면
우리는 아무런 당황도
놀람도
원망도
없어야 한다.
모든게 우리의 '선택'이다.
현재 받는 고통을 고통으로 만 인식하는 것도 내 선택이다.
그 고통을 잠시 받는 '경한 것'으로 인식하고 장래에 올 크고 놀라운 비밀의
바탕이 되는 거름이라 생각하고 기쁘게 받는 것도 내 선택이다.
모든게
우리의 선택과 마음에 따라 달렸다.
단,
주님은 그냥 우릴 의지로 이겨 나가게 방치하시지 않는다.
그분의 '예정'에서 확고부동한 몇가지 사건 중의 하나는
'십자가' 사건과 '성령강림'이다.
우리의 원죄를 해결하기 위한 이 땅위의 장치로서
'십자가 보혈'을 속죄제로 단번에 드리시고
'성령'님을 '번제'의 성결은총을 예표하시기 위해 보내시는 것이다.
이것은 만고 불변
이 세상이 존재하는 도중에는 절대로 변할 수 없는 사건이다.
그 성령께서
우리의 선택을 도우신다.
선택의 결정을 도우시고
선택에 힘을 불어 넣으시고
선택을 축복하시고
선택에 신비적인 능력을 불어넣어주신다.
이게 성령에 의한 번제의 축복이다.
주님이 완벽하시다는 찬사는
그냥 과장되고 헛된 미사여구가 절대로 아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이 땅을 살면서
정결하여지는 선택을 하시도록 원칙을 마련하셨다.
그리고 그 과정의 순종의 선택을 기뻐 보신다.
그리고는
도우신다.
가장 선한 목표를 예정으로 허락하시고 끝까지..
그런다음
정결화 되고
성화되는 결과물의 우리를 보시고
천국의 당신 보좌 근처
가까이 두시려는
예정이시다.
이 땅의 부수적인 축복은
보너스다.
그것도
선이다.
오늘은 설마
오늘은 괜찮겠지 하다가
어느 순간에 예상치 못하게 임하시는 우리 주님께서
16절의 말씀처럼
"네가 천국(
다윗
)과
무슨 관계가 있느뇨
"하시며
"
이제 너는 네 집(이 땅의 성취)이나 돌아보라
"하시며
차갑게 돌아서면
난 어쩌나.
적용
1. 감사한다.
2. 매사 일거수 일투족에 주님을 잊은 것은 없는 지 신경을 집중한다.
오늘 '전인치유 집회'에서 찬양 봉사한다.
찬양에 받는 은혜가 주님의 은혜임을 잊지 않도록 하고
찬양 하나하나 환자 분들의 영육의 쾌유를 기원하며 할 것이다.
자주 감각적 만족에 넘어진다. 혼자서..
3. 주님을 만날 수 있는 하루가 되길 기도한다.
여러 은사를 사모한다.
4.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가장 좋은 모습을 보여주길 '선택'한다.
5. 올바른 선택할 수 있도록 기도한다.
기도
주여
너무 감사합니다.
세상에 횡행하고 있는
여러 마귀의 혼란이 있습니다.
다빈치 코드
유다복음
참으로 유치하고
어리석은 논리로 주님의 광대하신 사랑의 원리를
흔들려고 하고 있고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혼란에 빠지고 있습니다.
너무도
어려운 이 시절에
주님
올바른 선택을 함으로써
주님이 주시는 그 평안과 평강의 세상을
말초적인 불쾌한 이 유혹과 맞바꿈으로
주님의 천국을 잊는
그 르호보암같은
결과를 빚지 않도록 도우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원합니다.
아멘
양떼를 이끌 때 지팡이와 막대기를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 케빈 리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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