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칙한 QT
오직 기억될 유일한 순간들[마19:13-30] 본문
13.그 때에 사람들이 예수께서 안수하고 기도해 주심을 바라고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꾸짖거늘
제자들.
아이를 바라보는 시대의 분위기가 그러해서 였든
기득권의 자랑스러움으로 도를 넘치는 위세를 부리는 마음으로 그리했든...
수천년이 흘러 지나가 버렸다.
그때로 부터.. 벌써..
그들의 그 자랑스러워 함도........벌써 수천년 전이다. ㅜ.ㅜ;
15.그들에게 안수하시고 거기를 떠나시니라
그 시간의 흐름은
예수께서 그 곳을 떠나심으로
갑자기 정지되었던 시간으로 느껴진다.
주님께서 떠나시고 남은 빈자리.
그 허전함, 그 슬픔이 가슴에 오는 듯하다.
그 시간도 쏜살 같이 흘러가 지금
내..
묵상하는 시간, 바로 지금에 이른 듯하다.
아..
오직 의미는 '주님과 함께 있던 시간 뿐임'이
가슴에 쏘아들듯 느껴진다. ^^;
22.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부자 청년'
그가 진심으로 진리에 대한 갈구가 생겨서 이든
아니면 단순히 부유한 자의 고급스러운 호기심이든
그는
예수님, 하나님 나라가 본질이 되어 생긴 마음이 아닌 이유로
주님께 다가왔다가 실망하고 스스로에 대한 반신반의,근심하며 돌아갔다.
그리고는 그의 아쉬움, 그의 안타까움, 그의 고민, 갈등......을 뒤로한 채
그 시간도 벌써 수천년이 지나가 버렸다.
27.이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사온대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베드로.
그는 아직 깊은 성령체험을 못한 상태로
예수님의 공생애를 같이 하는
연단의 상태.
'주를 따랐지만'
아직 세상적 원리와 하나님의 원리가 내적으로 충돌이 일어나는 상태.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묻던 그 시간으로 부터
역시
수천년이 흘렀다.
30.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하나님 나라.
천국의 시간.
영생의 시간...
아니.. 영적인 것... 짐작하기 어려우니
우주로 생각을 제한해 생각해 본다.
지구 밖에만 나가도
크기, 시간은 상상을 불허하게 커진다.
광속, 빛의 속도... 짐작하기 어려운 속도로 달리는
광속으로 수억광년......수억의 100억 단위광년.....
상상을 하기 힘든 시간의 단위 속에서
이 땅의 '시간'.........
그 시간을 과연 우주의 시간에 어찌 비교나 할 수 있을까?
찰나.
눈 깜작할 시간.
거기에 영원, 영생으로 맞춘다면..
무한대의 수천년?
'0'이다.
말그대로 '1 (일)도 아니다.'..ㅎ
그렇다면 '먼저 된게 하나님 나라에서 나중 된 자랑 구분이 가능할 것인가?'
어불 성설 !
갑자기 제자들의 위세, 청년의 재물과 청빈에 대한 고민, 베드로의 혼돈의 욕심....이
아~무 것도 아님이 느껴진다.
'시간'
이 시간, 이 지구 땅덩어리에 발붙히고 사는 자들의 '시간'이
과연 하나님 나라에서 얼마나 의미가 있어보일까.. 다.
그리도 죽고 살지 못해 야단하던 연애감정도 3년이 한계다.
그 나머지의 지고지순한 사랑의 이야기는
나름의 논리적 회로를 돌린 후
스스로 가장하고 사는 것 뿐..
육신이 나이들어가며
육신의 세상에 사는 것은 어느 것이나
이 짧디 짧은 시간의 흐름 속에 사그라져 버린다.
그렇다면
내가
지금
지금까지
앞으로도
영원할 것 같던 그 어떤 것도
과연 그대로 유지 될 것인가?
이 '시간'의 흐름 앞에.. ?
무엇을 붙들고
무엇을 고민할 것인가?
왜 그래야 하는가?
그게 과연 어떤 가치가 있을까?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재채기를 심하게 한다.
콧물이 바가지로 떨어지기 시작한게 몇 달 되었다 .
알레르기 비염같다. ㅠ.ㅠ;
허리가 아프다.
20여년 잘 달래오며 사는 디스크, 압박골절, 퇴행성 관절로 인한 허리통증이
날이 갈수록 길게 ~ 아픔이 유지가 된다.
몇달전 끊어져 수술한 왼쪽어깨가 저녁만 되면 뭉친다.
눈은 노안이 와서 '다촛점렌즈'를 끼고 그냥 그냥 살던게
묵상 구절을 올리려 컴퓨터에 집중하다 보면 갑자기 온통 글이 깨어져 보인다. ㅠ.ㅠ;
잠은 아무리 오래 자려 해도 일찍 일어나 진다.
(아.. 내 아침 기도하게 해달라는 기도를 들으신 탓도 있다 .ㅎ)
전립선이 커졌단다 ㅠ.ㅠ;
아내의 얼굴이 갑자기 늙어져 보인다.
........................
그 어떤 것도 '시간' 앞에 장사 없다.
시간이 지날 수록 모든 게 약해지고 흐려지고 무뎌지고 변해간다.
그 안에서
내 것,
내 가지고 못가진 것
내 위신
내 권리
내 자리
내....... 해 보았자 그거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 하나도 있을련가?
결국 인간들이
그 안에서 대안으로 생각한 유일한 방법이
'후손'을 통한
자기 살아 있음을 확인하는게 유일한 방법이던가?
남자들은 다 가정으로 회귀하고
가진 것 어떻게든 물려 주려 하며
영화를 보든 무엇을 하든
'가족'의 가치가
유일한 주제다.
이제 시대가 '종말'을 향해 치달릴 수록
더 이상 그들을 묶어둘 아무런 가치가 세상에 존재하고 있지 않아 보인다.
결국.. 인간들끼리의 사랑, 그리고 가족이다.
그래.. 가족.. 중요하고 귀하다 .
그러나 자식이 자신의 영혼 마져 책임 질 수 있던가?
그도 돌아보면 자기 만족이고 자신이 살아 왔던 결과물을 눈으로 확인하고 싶은
얄팍한 대리 만족이지........
그 어떠한 것도 '시간'의 그러함에 저항하기 어렵다 .
하지만..
우리
예수님을 깊이 체험한 자들..
최소한 주님의 말씀이 '성령의 검'임을 영혼으로 아는 자들.
오직 예수님이
유일한 절대자 이시며 시간의 지배자이신
전능자 '하나님'께 닿는 유일한 길임을 안다.
주님 만이
무의미하게 수천년을 그냥 '찰나'로 흘려 보내지 않을
그러나 영멸하고 말 존재가 되지 않고
이 땅을 살되
천국을 향해 갈 유일한 길임을 알게 된다.
지금이라도 그래야 한다.
더욱 깊이 주님 께 매달려야 한다 .
주님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말씀대로
즉각적으로 반응해 살 수 있는 자 되도록
늘 인식하며 살아야 한다.
그것 만이
이 땅에서
시간이 우리에게 매사 의미가 되어지고
하루 하루가 복된 매일이 되는
진정한 삶이 되는
유일한 길이다.
주님.
정~ 말 감사드립니다.
이 무의미한 땅에서의 살아가는 것.
이 찰나보다 못한
거의 '0'의 순간을
헛된 몸부림으로 '방황'하다가 스러져 가지 않게 되게 하여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주여.
그러한 저.
의미있는 시간을 살아가게 해주신 저.....
또 이땅의 붙드는
그 어떤 필요없는 욕심과 잘못작동되어 온 내 삶의 버거움들도
의미가 아님을 잊지 않고 살게 하소서.
주님 만이 의미이시고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만 의미가 되게 하시어
하루,
천국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의미의 순간이 되게 하소서.
내 주여.
부족하여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지만
제게 허락하신 주님의 뜻을 붙들고
오늘 하루 살도록
주여 지키소서.
간절히 비옵기는
제 부족한 육신의 버거움들...
고치시거나
아니시면 그를 통하여
더욱 성장하는 자 되게
받아 들일 수 있도록 하소서.
주여.
힘주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시간의 지배자이신
전능하신 하나님의 이름 받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1. ( 2010.03.24 묵상 분 )
예수님 안수해주소서 (마19:13-22 )
주여
지금껏 인도하셨음을
참으로 감사드립니다
이제 후도
주님
당신 만이
내 삶의 지지대가 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천국의 영생을 위하여
당신의 뜻안에서
굳건한 믿음의 틀을
세울 수 있도록
주여
저를 안수하소서
14.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린 아이들을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천국이 이런 자의 것이니라
하시고
15. 저희 위에 안수하시고 거기서 떠나시니라
어린 아이 머리 위에 놓인 손.
주님 예수님의 손.
안수하시는 그 손.
그 손을 타고 내려오는
천국의 생명의 기운.
그 기운을 받아 들이는
아가의 천진한 영혼.
순수.
순수함에 스며드는
천국의 생명.
주님.
오늘 저의 머리에도 안수하소서.
주님의 생명이 내 살아가는 모든 힘의 원천 되길 원합니다.
계명을 지킬 에너지 되길 원합니다.
천국의 생명이
아무리 예수님께서 손으로 안수하고 싶으셔도
영혼이 깨끗지 못하면 어찌 받아들일 수 있던가?
예수께서 고향에서 머리 누일 곳이 없다면서
기적을 베풀지 아니하고 떠나시던 그 장면이 선하다.
내 영혼이 모든 것 다 아는 듯
혼탁한 고향의 영혼같지 않길 소원한다.
16.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가로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17.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
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18. 가로되 어느 계명이오니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말라,
거짓증거하지 말라,
19.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
20. 그 청년이 가로되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오니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21.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22.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영생.
영원한 생명.
지금 같은 삶이 죽지 못하고 영원히 지속되는 것은
'트와일라이트' 라는 영화의 죽지못하는 뱀파이어 생과 무엇이 다른가?
영생.
영생은 천국의 생명이다.
이 땅에서 은혜만 받아도 날아갈 것 같은데
영생은 그 은혜의 수백수천배의 강도로 영원까지 유지된다니
그 얼마나 환상적일까?
영생을 얻는 것.
'계명'에 대하여 말씀이 나온다.
그 계명은 우선 부자 청년의 입에서 나온 것이다.
'선한 일'을 무엇을 하면 천국갈 수 있는가..하고...
그의 관심은 '행위'에 있다.
그의 선한 일의 촛점은 '자신' 에 있다.
그는 그가 그런 일을 많이 행했기에 자신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께 그리 물어 보는 것이다.
주님은 말씀하신다.
그의 말과는 다른 대답을 하신다.
'선한 분은 하나님이시다.'
'천국에 들어가려면 계명을 지키라'
그러시면서 10계명 중 몇가지를 말씀하신다.
그러자 청년은 자신 있게 말한다.
'내가 다 지켰습니다. '
그러자 주님은 '소유를 팔으라' 하신다.
어찌보면 청년에게 '더 더 더' 하며 행위의 최고 최선을 요구하는 듯하지만
실은 예수님은 다른 관점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행위'는 당연히 선하게 나와야 한다.
하지만 그 행위는 '목적'이나 '실적' 이 아니고
'결과'이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신다.
청년,
아니 청년 뿐일까?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당연히도 자신이 중심이 되어
'행위'를 해내는 자로서 생각한다.
과정에서 그 속에 자기 만족이나 교만은 싹틀 여지없을까?
인간은 원죄적 동물이다.
당연히도 '절대 선'은 있을 수 없다.
그럼에도 '계명'을 말씀하신 것은
계명이라는 선한 틀을 만들어 놓아야
이들 우리 영혼 속의 야수가 맘대로 뛰지 못하는 틀일 뿐이기에 그러신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예수님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리 말씀하시는가?
아가의 안수.
영생.
천국의 생명의 흐름.
그것이 답이다.
예수님의 생명을 받아 들인후
의지적으로 '계명'을 지킬 결심을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면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의 영혼을 흘러 들어와
죄를 짓기 싫어지는 것이다.
죄로 얼룩지었던 우리의 영혼은
점차로 물을 부어 희석시키는 것 같이
점차로 맑아 지고 희어져
어느 순간 '아기'의 그 순수한 영혼을 닮아 있을 것이다.
그 맑은 영혼에서 나오는 행위는
자연히도 순전할 수 밖에 없다.
'음행'.. 생각지도 않게 될 것이다.
' 살인".. 형제를 미워하는 것도 살인이라 하셨다.
고범죄성 미움은 당연히도 없어질 것이다.
'이웃 사랑' .. 점차로 커지고 늘어난다.
긍휼한 마음이 커지게 될 것이다.
' 거짓 증거.' , '도적질' ... 당연히.........
' 부모님 공경' .........더더욱 당연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것이다.
' 아이와 같이 되려는 결심'이다.
'하나님으로 부터 흘러 나오시는 영생의 기쁨,
천국의 감정'을 늘 사모하고 받아 드리려는 결심 뿐이다.
그리고 주님이 말씀하신 계명을 지켜야지..라는 결단 뿐이다.
나머지는 주님이 알아서 하실 것이시다.
어제 .
나름으로는 최선을 다하여
어머니께 '전화'를 드렸지만
내 속에서 흘러나오는 억울함과 속상함 등,
역기능의 흔적은 없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하나님을 믿고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내 영혼의 순수를 들여다 보면
아직도 검은 빛을 띠는 물색깔은 아니지 싶다.
그래서 어머님께서 내 최선의 정중한 항의에도 불구하고
가슴아픔은 없지 않았을 듯 싶다.
하지만, 이정도의 절제된 선은 필요할 거라는 생각으로
나름위로는 삼지만
마음이 불편한 것은 사실이다.
이전 , 예수님을 영접하고
내 하나님 내 예수님으로 인격적 만남하기 전까지는
고향집은 늘 양가감정의 대상이었다
인정받고 싶은 대상이면서도
늘 받을 상처가 싫고 두려워 멀리하고 픈..
관계가 좋은 형제들은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가슴앓이를 많이하고 자란 어린시절을 가진 자들은
내 말에 공감이 갈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면서 어느새인가 주님의 사랑이 내 가슴을 채워가며
한발 멀리 했던 시간이 있어왔다.
그러다가 말씀은 늘 나로 하여 부담을 가져와
그 말씀 따라 나도 모르게 관계회복을 시작하고 있었다.
관계회복도 가끔은 그들의 내 옛 아픔을 자극하는 상황에 부닥치면
가슴이 얼얼해지며 나도 모르게 깊숙히 웅크리고
또 한번 선을 긋고 멀리하고 픈 충동이 든다.
억울한 마음이 날 '미움'으로 몰고 가려하고...
하지만, 그 마음을 아시는지
주님은 이러신다.
' 네 이웃을 사랑하라.'
이웃도 사랑하는 데 '형'... 그 어리석으신 행위마져 이해못할 것은 또 무엇이던가?
'네 부모를 공경하라.'
죄송하다.
남들의 입장에서 보면 아무것도 아닐 것을..
그냥 가만히 인내하면 더 좋았을 것을...
마음의 부담이 온다.
아침의 묵상.
묵상에서는 다른 것은 정말 잘 조절된다.
거짓.. 잘 안한다.
아주는 아니어도.ㅎㅎ
음행... 멀리한적 아주 오래된다.
마음 속으로도 점점 옅어진다.
나이 탓인가?ㅎㅎ
도둑질.. 더더구나.
살인.. 형제를 미워하는 것을 살인에 포함시키면 .... ㅜ.ㅜ;;
그래도 다행인 것은 주님의 그 평강을 위해서는
얼마든지 미움은 내려 놓을 수 있다는 것이 다행이다.
부모 공경.
이제 곧 더 잘 되리라.
이전에 행하지 않던 정중한.. ^^;; 태도의 이야기는
주님께서 더욱 다져주시리라.
이 모든 것.
돌아보면 알면서도 행하지 못하고
40몇 년을 되풀이 해왔다.
중독적 증상을 벗어버림도 오래걸렸고
위의 고백한 것들을 이루는데도
그후로 많은 시간이 걸렸다.
그게 돌아보아도 '절대 내 혼자서는 못하는 것'임을 안다.
마치 머리에 안수하듯
아이같은 내가 되기를 권면하고 기대하시는
주님의 끝없는 기다리심과
그 분의 놀라운 생명력이 없으셨다면
전혀 불가능한 이야기 일 줄 안다는 것이다.
부자 청년
그 사람의 말과 행동거지,
그리고 마지막에 머뭇거리면서 돌아가는
그 마음의 어진 면을 볼 때
그는 고생을 하지 않고 성장한
유복하고 다정한 가정의 소생인 듯 싶다.
그런 사람들.
이 현대의 삶 속에서도 많은 그런 사람들은
계명을
율법과 구분하지 못할 성향이 많다.
그들은 그들의 행위가 너무나 옳다는
기본 전제가 되어 있기에
즉, 자신이 틀릴 수있다는 것을 가슴 아파 고뇌해볼 기회가 없었기에
오히려 율법적 성향을 일단 배우게 되면
회개나 고민을 할 가능성이 적어진다.
아픔을 겪는다는 것.
그것은 아프고 힘이 들지만
주님의 내 영혼 속에 임재하시고
그 분의 생명이 영혼 속에 임하실
그 평안을 더욱 감사함으로 체험할 기회를 가질 수 있기에
오히려 행운일 수 있다.
그들에 비하여 오히려 더 나을 수있다는 것이다.
성경에서 '약할 때 강함'이라는 이 역설이
다시한번 되뇌어 지는 하루다.
적용
1. 아이와 같이 되길 원한다.
. 의심없고
단순하고
믿어버리고
걱정 없고..
그리되게 하소서.
2. 예수님의 안수하시는 손을 묵상한다.
예수님 저에게도 안수해주소서.
3. 성경 여덟장 읽겠다.
4. 부모님을 공경하자.
결심한다.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5. 형제를 미워하지 말자.
주님을 위해서.
6. 영생을 주시는 주님께 감사한다.
영생.
영원한 생명.
그 안에서의 자유.
그 영원한 기쁨
기도
늘 감사합니다.
주님이 안계시면
이 어두운 세상
어찌 살아갈 수 있었을 지
어찌 살아올 수 있었을지
정말 감사한 마음 금할 길이 없습니다.
주님 주신
그 놀라운 평안
그 격렬한 기쁨의 충만함
주님 주신 그 생명의
물흐르듯 흐름.
그것은 저로 하여금
지난 어두움을 헤칠수 있어왔던
원동력이 되었음을 고백합니다.
주님
사랑합니다.
남은 내 여생동안
남아 있는 내 자식들의 삶동안
주여
인도하소서.
그들의 머리에 안수하시사
제 머리위에 안수하시사
살아가는 동안
주님 주시는
생명으로 에너지 삼아 살아갈 수 있도록
도우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2. (2014.02.24 묵상 분)
본래적 배려 [마19:13-22]
사람이 사람을 진정 사랑하고
그들 사이에 가로막는 것이 없어져
하나님이 원하시는
향기나는 영혼이 되기 위하여서는
얼마나 많은 가야할 길과
가로 막는 장벽이 있는지요
오늘은
배려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그것도
온전한 배려
진정한 배려에 대하여 말입니다
하나님 말씀과
하나님의 은혜와
온전한 사랑 만이
세상에 펼쳐지는
하나님의 나라에
저희가 거할 수 있도록 할 것입니다
내 주여
진심으로 간구하오니
매사에 기도할 수 있게하시고
그 기도로 인하여
제가 더욱 성장할 수 있도록
주여
도우소서
13 그 때에 사람들이 예수께서 안수하고 기도해 주심을 바라고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꾸짖거늘
14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을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천국이 이런 사람의 것이
니라 하시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뭐라셨다.
그런데 제자들이 크게 잘못했는가?
예수께서 힘들 것을 생각하고 그런 것은 아닐까?
하루에도 수도 없이 밀리는 환자들을 보시고 하루 한끼도 식사 제대로 못하시는 상태에서
고대, 중세 시절... 인권이란 개념 조차 없었고
더구나 '아이'의 인권이란 아예 무시되던 시절에
제자들은 '스승'으로서 예수님의 어려움을 먼저 생각하여 하던
너무나 당연한 , 아니 나름의 생각 깊은 행위일 수 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모든 원죄적 인간의 영혼이
'아이들 같은 영혼의 회복'을 위하여
세상에 오신 바 그들을 금함은 하나님의 뜻과는 어울리지 않으셨다.
그것을 주님은 강하게 말씀하셨다.
그런데 제자들이 정말 잘못인가?
혼나는 거던가?
20 그 청년이 이르되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온대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21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청년.
부자이면서도
10계명을 모조리 지키었다는 것은
그냥 일반인들이 지킨 10계명과는 또 다른 의미를 가진다.
물질은 영적인 성결과 상극이다.
그러함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려 하였음은
그의 심성에 꼭 율법적... 으로만 정죄하기 어려운
다른 '선한 부분' 이 있다.
문제는
그러함에도 예수님께서는 '필부'들도 지키기 어려운
과도한 주문을 하신다.
'모든 재산을 팔아서... '
그것.
과연 가능한가?
나..
그리 많은 포기할 돈도 없지만
내것을 팔어 다 주라 하시면
난.. 스트레스가 심하게 올 것이다. .^^;;
아깝기도 형편없이 아깝지만
과연 주님 믿는 다는 것이 이처럼 모두 '거지'가 되어야 천국에 들어가는 가.. 하는
표현하고 싶지 않은 반감 같은게 들지 않을까 싶다.
그것은.. 진정한 하나님의 원하심이 아니시지 않는가?
예수님은 질타나 실족할 만한 시험을 주시는 분이 아니시다.
그분의 본질과는 너무 어긋난다.
그렇게 잘하는 자에게 다리 걸어 넘어 뜨리시는 현대의 '집단 정신병'도 아니시다. ^^;;
그렇다면 무엇인가?
위의 제자들에 대한 경우와 마찬가지로
'아직은 덜 성장한' 제자나 사랑스러운 젊은 부자에 대하여
깨달음을 주시려는 것이시다.
어느 복음서인지 모르시지만 젊은 청년부자를 이쁘게 보시는 뉘앙스가 나온다.
그렇다면 두 장면에서 무슨 공통적인 레마가 숨어 있던가?
그것을 나에게 알게 하시려 하심이다.
'제자' 나 '부자청년' 모두 잘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 했고 나름의 시대적 가치관에 따라 최선을 다해 예수 앞에 나왔다.
청년이 문제가 없음에도 그 가난한 무리 사이에서 예수를 쫓은 것을 보아도 알 수있지 않던가?
모두 예수님을 위하는 마음, 예수님 앞에 칭찬 받고 싶은 선한 마음이 있었다.
그러나, 두 군(群) 모두 그 기준이
'자기 자신들의 생각'이라는 데 문제가 있었다.
다시한번 생각해보아도 그들은 잘못이 아니다.
그러함에도 '질타'처럼 들릴 교훈을 얻었다.
예수님은 '예수님의 입장에서 배려'를 해주시길 가르치고싶으신 것이시다.
제자들에겐 '아이를 기뻐하시는 예수님'의 입장에서 생각하시기를 권고하신 것이고
부자 청년에게는 '자신의 기쁨을 위한 율법 준수' 도 중요하지만
거기에 '타인의 진정한 필요성을 생각'하는 배려의 마음을 원하시는 것이시다.
가난한 자에게 먹여주는 나눔의 마음..........
예수님은 '공생애 내내' 타인에게 주셨다.
그들은 성경에 기록될 입장이기에 더 세게 권고하셨을 뿐.
나를 돌아 보았다.
나에게 하시는 말씀이 그것이셨다.
'주하인아 .
이제는 배려를 하라.
네가 하는 행동이 그들에게 옳을 것이라는 생각보다
그들이 원하는 것을 그들에게 해주어라.
그것이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이다.'
당직 방, 새벽 .
환우분의 콜이 있어 깨어내려 갔다 걸터 앉은 침대 맡에서
잠시 묵상을 위한 기도를 하는 중 깨닫게 하시는 말씀이시다.
나.
환우 분들에게 최대한 설명을 쉽게.. 날렵하게 한다.
'이러 이러하니 저러저러 해서 조러조런 치료를 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요런 요런 경과가 예측이 되니
이렇게 이렇게 하시라'
어떤 분들은 아주 좋아하신다.
어떤 분들은, 아니.. 솔직히 더 많은 분들이 그래도 어려워 하신다.
나... 두번 ..세번 설명하면서 지친다.
그리고 차가워지는 듯하다.
그거... 최근에 내 모습인 줄 깨달았다.
어떤 분들이 그렇게 잘 해주는데 왜 짜증 내며 가는 지 조금씩 깨달았다는 이야기다. ㅜ.ㅜ;;;
오늘 말씀에서
'그들'의 입장에서 그들이 원하는 대로......라 시며
'배려' 라는 단어가 머리 속에 크게 들어오게 하셨다.
기도 중...
솔직히 자주 그러해야 함을 알긴 알고 몸부림도 쳐 봤지만
어느새 55년 살아온 내 입술이 나도 모르게
이전과 같이 줄달음질 치고
변함없는 얼굴은 또 딱딱하게 굳어지니...
이 .. 깨달음은 늘 내 행해짐의 뒷북을 치는 것을 되풀이 하면서
난 주님 앞에 결심했던 것들이 무너지고
자주자주 '주님'은 그래도 아시고 날 이해하실 것을 빌미로
변함없는 시간들을 저들처럼 '내 좋은 대로'
하나님의 뜻을 찾아가면서 살고 있더란 이야기다.
당연하게도 '예수님을 제대로 믿는 자'에게서 바라는 더 뛰어난 '행동',
정말 향기로운 행동이
예수님을 제대로 믿는 자라면 당연히 잇어야 하는 것이
내게는 제대로 나오지 않음에 난.. 자주 당혹해하고 잇던 차다.
알면서 바라면서도 너무 오래된 (50년 넘게 .. ) 되풀이된 습관의 탓에
난... 의지를 발휘할 틈도 얻지 못하고 좌절하고 있던 차란 이야기다.
그러다가 최근 말씀 가운데,
목사님의 설교 가운데
다시금 기본을 회복하게 하는 촌철 살인의 설교를 들었다.
' 결심하지 말고 기도하라'
어제도 그제도 이 말을 썼다.
너무 간결하면서도 내 현재의 수준에 맞는 ^^; 정확한 말씀이기에 그랬다.
결심하고 선택.. .왜 하지 말까?
당연히도 해야지..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선택'하고 '결심' 하면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성령으로 인도 받는 것을..
그러나, 영적인 문제가 늘 그리 간단하던가?
어느새 잘되는 것을 이유로 ' 내'가 앞에 나가고 '매너리즘'이 신앙인양 가리다 보면
전혀 영적이지 않은 신앙행동만 하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그거..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인간의 본성 중에 누구나 거쳐야 할 과정이다.
그렇게 믿는다.
이제 새로운 단계를 넘어가기 위해서는
결심하고 하나님 이름을 들먹이면서 내가 쉽게 나가는 행위가 자제되는 대신
매사에 '기도'가 이루어져야 한다.
그것이 정말 '기본'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다.
본래적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어제 말씀하시지 않으셨던가?
본래적.
마땅히 해야 할..
그래서 그러려 한다.
오늘 하나님이 나에게 말씀하신대로
'그들이 원하는 대로'
'하나님이 나에게 진정 바라시는 대로' 행하려 한다.
그러나, 고백한대로 난 너무 오랫동안 내 습관에 쩔어져 있다.
그래서 아무리 의도가 좋더라도
슬금슬금 내가 앞선다.
제자들처럼..
부자청년처럼..
내가 저들과 다른게 .. 하나도 없다.
난 정말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할 의도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며
타인의 그렇지 못함을 차갑게 정죄하고 있었으며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그들을 경시하고 있었음에도
그것을 깨닫게 해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고민은 하지만 내 의지로 고치지 못하여
좌절하며 가라앉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이제 다시 기도로 돌아가야 한다.
그래서 내 그런 부족함,
타인의 입장에서 더 들어주고 더 이해하고 더 기다려 주지 못함,
당연히 의사로서 환우들의 어려움과 힘들고 긴장하는 상황을 이해하여야 함에도 그러지 못함,
아버지로 남편으로 아직까지 권세 사는 가장으로 더 낮추어 그들의 소리대로 살아줘야 함에도
난 그러지 못했다.
자주...
이제 기도로서 아뢰고 다가가겠다.
요 며칠 그런 연습을 시키셔서 그리한다.
고민하지 않는다.
걱정하지 않는다.
괜히 좌절하거나 속상해 하지 않는다.
그러려하면 '주님 어찌합니까?' 하고 일분이라도 기도하고 나서 다시 행한다.
그러면 훨씬 힘이 들지 않고
기뻐하시는 주님을 느끼게 되곤 하였다.
아.. 기본의 회복.
아니.. 올바른 방향.
그 것은 고난과 연단의 과정 중에서 이루어져 가고 있음을 안다.
오늘 특별히 다시 하나님이
그 들, 그 분의 입장에서 배려하여야 함,
그러지 못하게 막는 '에너지'들의 반란에 대하여 기도로써 물리침.. 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감사하다.
주님.
오늘도 수술 무사히 마치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약간의 걱정되는 상황 (환우의 문제)이 있사오나 그것마져 기도합니다.
우리 주님이 편하신 대로 이끄실 줄 믿습니다.
주여.
그리고 환우 분들의 입장에서 들어주려
그제보다 어제보다 조금은 더 노력했습니다.
강한 조급한습관, 정죄의 문제들... 기도하고나니 조금은 가벼워 졌습니다.
주님의 뜻대로 생각하려 애쓰고 있고
본래적 배려를 방향 잡으려 하니
주님이 인도하시길 기도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하게 기도했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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