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칙한 QT
주님 안에서만 가능한 온전한 평안[왕하4:18-37] 본문
부제) 이땅, 잠시의 축복과 흐트심 모두 주님의 뜻이시다
영원의 평안을 위하여
그러함에도 평안이 필요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있을때
그 어떤 일이라도
이해가 가고
그 어떤 상황에서도
평안이 있을 수 있으며
평안의 본질을 알아챌 수 있다
항상
언제나
무슨 일이 있더라도
주님 앞으로만 나가야 한다
늘 주님 앞에 있어야만 한다 .
평안
이땅을 살아가며
유일하게 존재할 수 있는 증거
하나님으로 인한
평안
유라굴라 풍랑
밤바다 풍랑의 뱃속이라도
주님 예수께서 같이 있으심을 알면
유지될 수 밖에 없는
그 평안의 진리.
20 곧 어머니에게로 데려갔더니 낮까지 어머니의 무릎에 앉아 있다가 죽은지라
21 그의 어머니가 올라가서 아들을 하나님의 사람의 침상 위에 두고 문을 닫고 나와
23 그 남편이 이르되 초하루도 아니요 안식일도 아니거늘 그대가 오늘 어찌하여 그에게 나아가고자 하느냐 하는지라 여인이 이르되 평안을 비나이다 하니라
주님의 기가막힌 '은총'으로 인하여 얻은 아이.
그 아이를 통한 '일상'의 기쁨이
마음 조리는 -머리 아파도 해줄 수 있는 것이 무릎에 앉히어 달래주며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는 현실.. 실존이고 실제이지 않은가? 하나님의 축복이 항상 좋은 끝까지로만 연결되던가? 하나님안에서 사는 것이 동화이던가? ^^; , 그래서 더 성경이 살아 움직이는 실제임을 느끼게 한다.. 아주 잠시지만.. 내 삶과 그리 다르지 않고 그러기에 더욱 더 주님의 뜻 안에서 사는 지금을 느낄 수 밖에 없다. - '낮'까지의 시간 후
마침내 아이가 죽고 말았다.
그런데 아이 어머니,
수넴 여인의 반응이 예사롭지 않다 .
몸부림치거나 안절 부절 못하는 대신
조용히 '하나님의 사람 침상'..엘리사를 위하여 마련한 방의 침대에
죽은 아들을 내려 놓고는
남편에게서 '사환과 말'을 구하고 나서
궁금증을 물어보는 일체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평안을 비나이다' 하는 말 만을 남겨 놓고는
갈멜까지 30키로미터에 달하는 길을
24 이에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자기 사환에게 이르되 몰고 가라 내가 말하지 아니하거든 나를 위하여 달려가기를 멈추지 말라 하고
'멈추지 말'라 당부하여
25 드디어 갈멜 산으로 가서 하나님의 사람에게로 나아가니라
하나님의 사람이 멀리서 그를 보고 자기 사환 게하시에게 이르되 저기 수넴 여인이 있도다
'드디어'는 갈멜산에 도달하였다.
무엇인가?
왜 이리 조금은 평범하지 않은 '반응'을 보여주는가?
보통은 아이가 아플때 몸부림치고 안절부절하다가
죽고말면 대성통곡하고
사람들을 불러모아 대책을 마련하느라 분주하고
개중 일부의 입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사람'에 매달리라는 소리가 나온 후
그제야 '번득' 깨닫는 장면이 나온후
온통 사람들을 대동하여 '남자'들, 발걸음 빠른 종을 통하여
엘리사에게 가야 마땅 하거늘...
울지도 않고 -너무 아프면 울음도 안나올 수 있다.... 아니면 너무 하나님을 깊이 믿는 가운데 유일한 길인 하나님을 일초라도 빨리 가고자 하는 절박함이 가장 크기에 울 시간도 없어서 일 수도 있다 - 단 한마디의 말만을 남겨 놓고는
묘한 반응들이 '여인'에게서 나온다.
그리고 그 안에서
그녀가 택하는 그 반응에
어쩌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깨달음이 숨어 있을 것을
당연히도 느끼게 하신다.
우선 여인의 고아함이다.
' 하나님의 축복으로
자연스레이
물흐르듯이 얻어진 아들'이다.
누가 보아도 하나님으로 인해 허락받은 축복이기에
반드시 하나님의 뜻이 있으셔서 허락되어진
또다른 고난임을
여인은 직감했을 거다.
고난은 필연이라는 이야기.
어쩌면 하나님을 믿어가며
자꾸만 일상에서 매몰되어서이지
그 어떤 일도 '반드시'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이루어지지 않을 것임이 믿어진다면
당연히도 '가슴은 아프고 미어지지만'
몸부림치고 안절부절 하지는 않을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그녀.
수넴 여인은
그러함을 깨달은 여인이다.
일상에서 벌어지는 '아들의 고통'을
가슴으로 떠 안으면서 하루 종일 '낮'까지
무릎에 앉고 쓰다듬으면서 기도 하고 있었을 게다
어찌 민간요법이나 당시의 수준의 약을 쓰지 않았을까?
그러면서 무릎에 앉혀 놓으면서 기도하고
노래 불러주고 쓰다듬어 주는 일을 하였을 것이
어느 부모나 다 당연하지 않았을가?
하지만... 막상 '가장 처참한 일'이 벌어지자
이 축복의 아이를 통하여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 무엇인가?( 주님의 뜻이라면 데려가소서..라고는 하지 않았다. 분명.. 하나님의 뜻으로 주신 아이니 아이를 세상에서 살게 하심이 주님의 뜻이심을 확신하고 그게 하나님의 뜻이심을 알았기에 그다음의 결단을 하였다. )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
화살기도 하며
시간이 늦기 전에 얼른 서둘러 -시간이 지날수록 사랑하는 자의 육신이 부패된다는 것을 상기하는 것이 얼마나 끔찍 했을까? 그러하기에 그녀는 무슨 수를 쓰더라도 가장 빠른 길을 생각해냈을 것이고 사환을 독촉하여 30키로를 지체하지 않고 나아갔을것이다. 또 일체의 설명하는 시간 조차도 아끼려 '평안'을 이야기 하며 남편을 떠났을 것이고.. 평안은 하나님 안에서 해결 후에만 있을 것임을 강조하는 것이기도.. 엘리사에게
아니 '하나님 앞'으로 달려가길 선택한 거다.
그녀의 행동.
일상을 사는 우리의 감정에 휘둘리는
이땅의 '영적 오류'에 아직 매달리는 사람들의 풍습과 당연함으로는
이해하기는 힘들지만
저니의 행동에는
오직 하나님 만을 바라보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아는 자로서
가장 빠른 선택에 대하여 결단하고 내리는
고아하고 귀한 결심이 표현되어진
한 방향에 대하여 보이고 있다.
26 너는 달려가서 그를 맞아 이르기를 너는 평안하냐 네 남편이 평안하냐 아이가 평안하냐 하라 하였더니 여인이 대답하되 평안하다 하고
그리고 그런 그니의 '절박함'은
필요없는 시간 소모,
인사치레
아들을 살리기 위한 유일한 키이신 '하나님'..
그 하나님을 대리하시는 '엘리사' 선지자 이외는
그 어디에도 굳이 말을 섞을 필요가 없음으로
'평안'으로 대치한다.
여기서 깨달을 바가 있다.
'평안'..
샬롬.. 이 정말 중요하다.
어찌.. 여인의 저 상황이 '평안'할 수 있을까?
하지만 '평안' .. 평안.. 평안을 계속외침은
'하나님 안에서 반드시 이루어질 평안'
'하나님 안에서 진정 옳은 영적 심적 상태가 평안'...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는 진정한 평안'에 대한
스스로의 상황에 대하여 계속 질문하고
'평안'하게 해주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며
계속 흔들리려는
그래서 대성통곡이라도 하고 그 자리에서 주저 앉고 싶은 자신을
'평안'이라는 말로 '독려'하고 있음이 아닐까?
하나님 나라는 '동화'가 아니다.
실제다.
'축복'이 영원히 이어지는 곳은,
절대로 이 땅이 아니다.
이땅에서의 '하나님의 역사'는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잠시 허락되어진 '평안'의 그림자 일 뿐이다.
그 나라를 위하여 허락되어지는 '은혜'의 징검다리이다.
그 뿐이다.
그를 놓치지 않기 위하여
최선을 다해 하나님을 붙들게 하시는
가장 귀한 도구일 뿐이라는 거다.
그리고 그것을 우리에게, 그니에게 보이시기 위하여
하나님은 '잠시의 시험'을 허락하셨을 뿐이다.
우리네 인생,
내 인생에도 마찬가지다.
더 이상 '현상'을 붙들려고 애쓰지 말라.
하나님의 실제,
하나님의 원하시는 '평안'을 잃지 않기 위하여
이땅을 최선을 다해 살다가
마침내 허락되어진 '연단'을 마치고
영적 성화를 이루어
영원의 나라, 저 천국에서
영생을 '평안',.. 평강 가운데 살아가는것..
그것이 유일한 우리네 인생의 목적이라는 것을
여인의 '평안'.. 평안.. 평안...을 소리쳐 외침에 의하여
다시한번 깨닫게 하신다.
27 산에 이르러 하나님의 사람에게 나아가서 그 발을 안은지라 게하시가 가까이 와서 그를 물리치고자 하매 하나님의 사람이 이르되 가만 두라 그의 영혼이 괴로워하지마는 여호와께서 내게 숨기시고 이르지 아니하셨도다 하니라
28 여인이 이르되 내가 내 주께 아들을 구하더이까 나를 속이지 말라고 내가 말하지 아니하더이까 하니
그리고 그니의 입은
바야흐로 '엘리사님'을 만나고서는 통렬히 나타난다.
그 냄새나는 발,
고대 중동의 그 시절의 그 발을
'여인'은 한치의 망설임 없이 달려들어 끌어안고 외친다.
몸부림치고 앙탈 ^^;; 한다.
게하시가 떼어놓으려 할정도로...
그러면서 "내가 언제 아들을....*&^ㅕㅛㅆㄲㄸ098&^%$... "하면서 통곡을 한다.
30 아이의 어머니가 이르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과 당신의 영혼이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하리이다 엘리사가 이에 일어나 여인을 따라가니라
31 게하시가 그들보다 앞서 가서 지팡이를 그 아이의 얼굴에 놓았으나 소리도 없고 듣지도 아니하는지라 돌아와서 엘리사를 맞아 그에게 말하여 아이가 깨지 아니하였나이다 하니라
37 여인이 들어가서 엘리사의 발 앞에서 땅에 엎드려 절하고 아들을 안고 나가니라
그리고는
게하시에게 지팡이를 주며 말씀하시는 '엘리사'를 보며
그정도로는 안된다고
다시 또 더 매달린다 .
" 여호와께서 살아계심과 .... 당신을 떠나지 아니하리이다" 하고 매달리니
할수 없이 -할수 없이다... 정말... 이렇게 매달려야 한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우리의 당신에 대한 절절함의 표현 강도 ^^* - '이에 일어나
따라 가실 수 밖에 없을 정도로 절절히 매달린다.
그렇다.
매달리고 외치고
온통의 감정을 드러내어 몸부림치는 것은
오직 '하나님 앞'에서만 이다.
영혼의 평안함을 위하여
하나님 앞에서만
절절히 외치고
마침내 일어서 따라오시는 주님의 응답을 기대하길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바라신다.
나에게 바라신다.
대충대충 살면서
적당히 신앙생활하기보다
고난을 통하여서라도
더욱 더 깊은 믿음을 원하신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우선이다.
하나님의 허락으로 받은 '아들' 같은 누림을 통하여
하나님을 일상에서 자랑하고 감상하고 감탄하며
자아의 편함을 적당히 누리길 원하시지 않으신다.
절절한 하나님의 믿음과
하나님과의 교통을 통하여
'평안'을 잃지않는 매일을
내게 권고하심이시다.
그리고는 여인이
아무렇지 않게 '살아난'..
증거인 아들을 들고 나가는
저 '츤데레 믿음'^^; 을 원하신다.
감사하다.
깨닫게 해주심이..
주님.
주님의 축복이라고
자랑스럽게 붙들고 살아가는 나날이
가끔은 또다른 내 자아의 훈장 같이 변해가고 있음을
오늘 말씀에서 느낍니다.
주님 앞에서
주님 손 붙잡고 살아가는
매일의 일상은
가만히 정체되어 살다가는
어느새 '고난'이고 '저주'처럼 느껴질 날이 있을 수 있음을
여인을 통해 깨닫습니다.
저 올바른 여인,
저 믿음의 상징인 여인이
'평안'을 잃지 않기 위하여
오직 주님 앞에서만
처절히 몸부림치고
마침내 다시 살아난 아들을 통하여
아들의 살아난 기쁨을 넘어
'평안'이 증거인 살아난 아들을 통해
죽을 때까지 하나님의 평안을 희구하고 간구하며 살아가다가
마침내 성화되어가는 모본을 보게 하십니다
주여.
흔들리지 않게 하소서.
흔들릴 때 주님 앞에 더 나가
없어지려하는 '평안'을 희구하게 하소서.
주님..
주님 말씀대로 살아가기원합니다.
고난 오기전
더욱 더 하나님의 평안을 묵상하고 간구하게 하소서.
거룩하고 귀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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