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칙한 QT
아들에게 ( 눅 15:11-24 ) 본문
제 15 장 ( Chapter 15, Luke )
11. 또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나도
두 아들이 있습니다.
12. 그 둘째가 아비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비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둘째 아들하고
어제 저녁 늦게까지
이야기 하다가
늦게 일어났어요.
그래도
내 아들은
이 아들 보다는
훨씬 나은 심성을 가졌는데도요.
그런데도
이 아버지는
저와는 달리
걱정 한번 안하시고
어이없어 하시는 것 같지도 않게
그냥 아들의 말을 들어주시네요.
아마도
대화는 충분히 시도하셨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아들이 엉터리인걸 보아서
아버지를 거역했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래서 이 아버지는
저보다 훨씬 대단하신 분예요.
배울 것이 있을 듯 해요.
전,
아들이 원하는 것
그대로 해주지 못하거든요.
아뇨.
주로 맘에 안들면 혼내지요. ^^;;
13. 그 후 며칠이 못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허비하더니
전
이렇게
제 시간 할애해서
이런
전인치유 행사에도
봉사하는 데
왜
우리 아들은 이럴 까요...
속상해요.
주님...
( 잘못된 생각일까요? ^^;;;)
왜
내 눈에는
이리도 허랑방탕할 아들처럼
보이는 지 모르겠어요.
아니..
그대로 살면
얘는 틀림없이
이렇게 될 것 만 같아
얘를 볼 때마다
가슴이 덜컥거리고
한숨이 나와요.
참 좋은 아이인데요.
그래서,
아이가 원하는 대로
해주고
기다리지 못하겠어요.
14. 다 없이한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저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이 보세요.
틀림없이
이 아들도 고생하잖아요.
저도
이게 걱정이 되어서
아들을
그냥
내 뜻대로 움직이고 싶어요.
주님.
15.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하나에게 붙여 사니 그가 저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16. 저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17. 이에 스스로 돌이켜 가로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군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이거 보세요.
얼마나 가슴아파요...주님.
상상하기만 해도
가슴이 타요.
마치
아이가 원하는 대로
그냥 두면
그냥 나태한 상태로 방치하면요..
이대로 될 것 같은
어이없는 생각이 마구 들어요...
18.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그런데요.
이 묵상집을 들고
눈을 감고 있다가
다시 들여다 본 이 구절에서
'고통이 이 둘째 아들에 결코 헛된 것이 아님을'
그것이
세상적으로는 지독하게 나쁘지만
하나님 안에서는
은혜일 수 있다는 생각이
불현듯 드네요.
글 속의 형이상 학적인 생각의 유희가 아니고
아들에게 맞추니
조금은 현실화 되네요.
세상의 고통과
영적인 이득.
내 뜻대로 이끌어서
세상의 매끄러움과
영적인 기회의 차단...
어느 것이 이익일 줄은 생각해보지는 못했어요.
일단
세상의 모든 일이
주님의 뜻 안에
주님의 장중에 있고
고통이 이익일 수 있다면
한번 정도는
내 욕심과 통제의 갈증은
내려놓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요.
아프지만
조금은 가볍네요.
아마
집나간 아들을 둔
이 아버지의 근본 마음의 바탕은
아들을 위하고
그 아들을
하나님이 보호하셔
끝까지 책임지셔
가장 선한 방법으로 이끄실 것이라는
강력한 믿음이
바탕은 아니련지요.
19.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군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아들의 이 고백을 들으며
눈물이 나려합니다.
그 아들이
그처럼 고생했음이 가련하고
고생하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안타깝고
겸손할 수 있는 기회를 가슴으로 얻었음이 기쁘고
그 결심의 순간 동안 자기 부인의 그 아픔을 겪었을 것이 가슴이 아픕니다.
내 아들이라 생각하니
더 그렇습니다.
어제 아들과 밤 늦게까지
대화한 절묘한 시점에 묵상이 진행되어서
그런 것 같습니다.
그래서 눈물이 날 것 같은
찌르르 함이
묵상의 글을 진행하는 내 가슴을 휘어 도는 군요.
20.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너는 아느냐'
찬양이 모노톤의 부드럽고 섬세한 목소리로
나오니
마치 아버지가
기다리셨던 그 마음이
그대로 읽혀지는 듯
가슴이 뜨거워지고
눈물이 났습니다.
인천의 낙원교회 '파라다이스 여성 중창단'였습니다.
전인치유에서...
어제
전인치유에
여러 손님 들이 오셔서
다양한 프로 그램을 진행하는데
이 여성 합창단의
'너는 아느냐'라는
차분한 음성의 찬양이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그대로
전해 주는 듯
저로 감동을 금치 못하게 했습니다.
미리 한곡을 듣고
얼른 동영상 촬영을 시작하기 시작했습니다.
마침
달려 나와 부둥켜 안으시는
탕자 아버지의 그 마음이 너무나도 맞아서
얼른 업로드 했어요.
주님을 믿고
아들의 자유를 위해
그냥 내려 놓는
'사랑'의 대 사건을 결행하였지만
- 사랑은 아들이 원하는 것을 그대로 해주고 거기에 하나님의 뜻을 의지하는 것임을 확실히 느낍니다. - 그 마음이 얼마나 타는 지
위 찬양으로도,
멀리에 아들이 언제나 나타날까
보이지 않는 눈으로
두리두리 살피는 그 아버지의 모습과
달려가 부둥켜 안는
그 아버지의 모습으로도
절절히 느낄 수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은
포기를 뜻하는 것을 알았습니다.
사랑은
기다림을 전제로 하는 것을 알았습니다.
사랑은
하나님의 선하신 뜻아래
모든 것이 선하게 될 것임을
확실히 믿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사랑은
가슴 아프고
찢어지는 고통을 참아내고
인내하는 과정이
전제가 됨을 알았습니다.
21. 아들이 가로되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하나
그 사랑의 결과는
아들의 고백과 같이
세상의 결과도
선하게 돌아 갑니다.
결국
주님의 품으로 돌아올 것입니다.
22.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23.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24.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저희가 즐거워하더라
이제
이 방탕한 탕자의 아버지의
기쁨이 느껴집니다.
주님 안에서
온전한 사랑의 결과가
힘있게 다가옵니다.
그것은 '선'입니다.
그것은 '기쁨'입니다.
그것은 '희열'입니다.
아들에게
부디
난
네가
고생을 덜 할 수 있기를 바란다.
가능하면
주님이 원하시는
테두리 안에서
의무가 아니고
주님이 사랑이심을
깨닫고
살 수 있기를 원한다.
지금
그냥 바라기는
공부도 잘하고
좋은 가정도 꾸밀 수 있고
믿음이 더욱 신실하게 커갔으면 한다.
그러나
현실이 어떻든
그 주님이 좋아서
그 주님의 사랑이 감격에 겨워서
주님의 말씀을
절절히 준행할 수 있는 자가
되기를
실은 더 원한다.
이제
네가
삶의 소용돌이 속에서
인생의 모진 역정 속에서
잠시 흔들리는 줄 안다.
하지만
힘을 내거라.
주님은 선이시다.
주님은 희망이시다.
모든 걸 의지하고
최선을 다했으면 한다.
아프면 아픈대로
기쁘면 기쁜대로
주님을 의지하자.
주님께 고하라.
그것이
최선을 향한
시작점이 될 것이다.
주님
제가 그렇습니다.
아직도
사랑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주님을 믿고
자식을 믿고
기대하고
기다려 주고
인내하고
기도해주며
끝까지 희망을 가지고
긍휼한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것임을
이제야 배웠습니다.
주여.
자식들에게
기대를 놓치는 않겠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받아드리겠습니다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의 여유와 지혜를 허락하소서.
지나친 기대를 내려 놓게 하소서.
그들에게 주어진
인생의 흐름이
또
주님이 그들에게 허락하신
가장 적당한 인생의 여정임을
믿게 하소서.
혹여
그 들이 반발해도
그냥 받아 들이게 하소서.
그들을 위해
내 자아를 내려 놓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적용
1. 성경 여섯 장 읽겠다.
2.. 사랑은 믿음이다.
믿자.
3. 사랑은 기다림이다.
인내하자.
4. 사랑은 기도함이다.
5. 사랑은 상대방이 원하는 걸 따라 줌이다.
내 원하는 것에 맞추려 하는 시도를 멈춘다.
6. 아이들의 장래를 위해 깊게 기도하겠다
아이들이 주님 안에서 올바른 선택을 하길 기도한다.
----------------------- 문정희 시인 ( 아들에게 )---------------------
- 출처 - 겨울 사과님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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