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칙한 QT
사자로서(겔19:1-14) 본문
(겔19:1-14)
늙은 사자.
이제는 더욱 생각 깊게 하시사
사자로서의 나
아버지로서의 나
무엇보다
하나님 앞에서의 나로서
굳게 서게 하소서
그리하여
그러한 내가
세상의 모범이 되고
하나님의 뜻을 세상에 제대로 보이는
그런 힘있는 사자로서
드러나게 하소서
3. 그 새끼 하나를 키우매 젊은 사자가 되어 먹이 물어뜯기를 배워 사람을 삼키매
5. 암사자가 기다리다가 소망이 끊어진 줄을 알고 그 새끼 하나를 또 골라 젊은 사자로 키웠더니
6. 젊은 사자가 되매 여러 사자 가운데에 왕래하며 먹이 물어뜯기를 배워 사람을 삼키며
어제도 날짜를 잘못 보아서 오늘의 묵상을 읽었다.
까짓거..
인간이 나눈 날짜,
하나님이 내 실수를 통해서 무엇인가 보여주실 게 있겠지 .. 하며 그냥 했다.
어제는 '암사자',
사자의 부모인 사자로서 겪을 수 밖에 없는 절망과
자식인 사자를 바라보는 그의 사자이자 부모로서의 자신감과 절망감
그리고 주님 안에서의 소망.. 을 읽게 하셨다.
비록 어제 너무 바빠서 마무리할 틈은 없었지만
그 절망을 소망으로 바꾸는 데는 '하나님' 밖에 없음을 다시 한번 절감하며
난 일상에서 주님을 앞세우는
새로운 '리모델링',
아니 전적으로 이전의 올바른 깨달음을 다시 한번 되돌리는 노력을 했다.
말은 거창하지만
틈만 나면 '전도'하려 했고 그게 내 의사로서 늙어가는 나이지만
여기에 힘있게 세우신 이유임을 명심하고 전도했다.
세 분에게 그랬다.
나.. 사자로서 .. 그랬다.
수요예배 회복하려 했다.
기도원예배.
집에 들어가서는
내 혹시 왜곡된 세상의 지표로서 아들 사자를 바라보는 지 모르지만
아들 사자를 바라보는 암사자의 절망 가운데 '소망' 어린 기대와 그의 아픔으로
자식들을 생각하려 애썼다.
마음이 은혜롭다.
피곤하지가 않다.
그랬다.
깨닫지 못하고 수개월 수년을 조금씩 나태해져갈 때
하나님은 외적 장애로 통하여 내 어려움을 드러내셨다.
말씀 그대로 였다.
세상의 독수리를 하나님으로 착각하고 그래왔다.
그랬더니, 난 암사자의 절망을 느꼈다.
그게 어제 까지의 묵상의 깨달음이다.
더 있지만..
오늘.
동일한 묵상을 가지고 또 진행함은
객관적으로 생각이 고정되어 묶여 버려 새로운 은혜를 받기 어려울 가능성이 많다.
그래도, 난 그냥 했다.
내 기준은 이렇다.
'하나님은 말씀이시고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다.
당연히도 하나님은 내 생각에 묶이지 않는다.
조건에도 묶이시는 분이 아니다.
그러기에 동일한 묵상에도 또 오늘 주실 말씀으로 다가오실 것이다.'
맞다.
오늘은 '사자'의 위치.
특별히 젊은 사자의 위치에서 묵상을 하게 하시는 듯하다.
'먹이 물어 뜯기를 배운다.'
당연히 혐오스러운 행동이다.
양이 보면 무서운 행동이고
들개가 보면 자기 먹을 것을 빼앗을 거북스러운 행동이고
소가 보면 이해못할 행동이다.
그러나, 사자가 보면 그것은 ' 생존을 위한 당연한 행동'이다.
하나님이 만드신 사자는 그것을 죄라 여기지 않는다.
물어뜯기는 '포악'함이다.
포악함?
어쩌면 하나님의 기준에서 보면 강한 '힘'일 수도 있다.
그것을 내재하고 있는 '나'와 '내 자식', '내 식구'는 어쩌면
하나님의 만드신 기품있는 '사자'로서 허락받은 품성일 수 있다.
그것은 다시 말하면
세상은 포악이라 질타해
그것을 어쩌면 '부끄러움'으로 잘못이해하고
오랫동안 왜곡된 사자상을 가지고 있었을 지 모르지만
그 삶을 위해 허락된 기준을 벗어나지 않으면
하나님을 위한 영광의 도구가 된다는 이야기다.
다시 말하면 ,
나의 약함을 인정하고 받아 들이고
하나님 안에서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받아 들여
매일 말씀 가운데 내려놓고 다지면서
자신의 성품을 순화시키고 연단 받아 가면
그것은 다른 어떤 자들 보다 뛰어난
기품있는 사자로서 설 수 있다는 사실이다.
문제는 ' 사람을 삼키지 않아야 함'이다.
사자는 힘이 있고 쉽게 배가 고파
자칫 손쉬운 상대로 보이는 '사람'을 해칠 수 있다.
그것..
달란트를 허락 받은 자는
그 달란트에 의하여 스스로 데일 위험에 있음을 의미한다.
사자.
젊은 사자는 더우기 그렇다.
그 가진 달란트가 '부끄러움'의 기회가 될 위험도 있지만
너무 '교만하여' 자제 못할 큰 불의 불씨가 딜 위험도 있다는 이야기다.
오늘의 묵상의 레마이신 듯 하다.
나.
아버지 사자다.
사자다.
아들 사자 둘을 거느린 아버지 사자다.
내 하나님 앞에서의 사자로서 올바른 정체감을 다시한번 회복하고
내 달란트 안에서 행동할 방향과 경계를 다시한번 설정해야 한다.
사자가 양을 닮을 수도 없다.
사자가 자신을 미워하여 개처럼 행동할 수도 없다.
자신의 특성을 미워할 이유도 없고 교만할 이유도 없다.
또한 내 자식들을 인정하고 받아 들여야 한다.
그들의 그러함을 어찌할 수 없는 하나님의 허락된 과정으로
무조건 받아 들여야 한다.
암사자의 그 기다리고 기다리면서 소망을 가지고 다시 절망의 단계를 거쳐가는
그 어이없는 인생의 허무함을 인정해야 한다.
자식들에 대한 과도한 기대도 내려놓되
그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 들여야 한다.
그리고 '고난'의 기다림이 있을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또한, 기다리면서 겪을 어려움은 (지금도 많이 그렇지만..^^;)
기도로서 내려 놓아야 한다.
주님 앞에 올바로 섬을 회복해야 한다.
그리고 '선'을 기대해야 한다.
주님은 무조건 선이시다.
기도하고 기다리면
아들들은 '젊은 성숙한 사자로서 우뚝 설 것이다'
그날을 기대하면 웃자.
기도
내 사랑하시는 아버지
날 사랑하시는 내 아버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사자'로서 세워졌음을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제 인생을 돌아보면
그 깊은 하나님의 세워주신 뜻을 잘못 이해하고
물어 뜯기를 스스로 창피해 했고
남들과 다름을 고민도 했었습니다.
주님.
제 자식들의 물어 뜯기 마져 그랬었습니다.
그러나, 말씀 따라 생각해보니
그 물어뜯기는 '사자의 생존' 을 위한 기본 행위였으며
그것은 소나 양, 개나 늑대와는 다른 차원의 축복이었음을 깨닫습니다.
주님.
제 일생, 제 일상에서 어떤 것이 물어 뜯기 였던지
다시한번 점검해보고 깨닫는 지혜가 필요하겠습니다.
도우소서.
그리고 기뻐하게 하시사
두려워하거나 부끄러워 하기보다는
주님 안에서 잠잠한 감사로 바꾸게 하소서.
제 약함, 제 고난을 기뻐하게 하소서.
주님 탓에 그리하게 하소서.
그리고 간절히 소원할 것은
그런 달란트로 타인을 공격하거나
자신의 영혼을 불사르는
규격없는 무절제를 일으키지 않게 도우소서.
이제는 조금씩 깨달아가는 '암사자'와 같은 성숙의 저로서는
제 자식들을 위해서 더 기도하며 기다리게 하소서.
초조해 하지 않게 하시고
그들에게 사람을 삼키는 한계를 뛰어넘는
육신의 힘에 눌리지 않기를 기도하게하소서.
그 기도가 모든 것을 가능케 하심을 다시한번 믿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시여.
도우소서.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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