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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기억하고 힘내자(겔20:10-26) 본문

구약 QT

다시 기억하고 힘내자(겔20:10-26)

주하인 2011. 12. 3. 10:10

(겔20:10-26)

어디에나

언제나

어떤 상황에서도

내가

굳게 서 있을 수 있음은

 

그곳이 바로

내 인생의 예정된 광야이고

그 이유가 바로

생명을 누리는

율례를 배움이다

 

이제 다시 기억해야 한다

이제 다시 기뻐해야 한다

기뻐할 일을 울 일이 아님이요

즐거울 일을 힘들어 일이 아님이다

 

자유롭다

참 자유롭다

하늘을 본다

깃드는 어둠보다는

가슴을 치는 아름다움이

더 크게 보임은

깨닫게 하시는

주님의 은혜 덕분이시다

 

 

10.그러므로 내가 그들을 애굽 땅에서 나와서 광야에 이르게 하고 
 
애굽땅에서 구원 받음은 확실한 축복이지만

그 다음에 기다리는 것이 '광야' 이다.

 인생.

그 불신의 지옥예정자로 살다가 예수님 십자가 통해 구원 받은 사실은

너무도 대단한 우주적 축복이 확실하지만

그걸 통해 세상의 복마져 끝까지 누릴 것을 기대한다면

그 막연한 환상은 진짜 환상일 뿐이라는 이야기다.

 

진정한 구원은 '광야'의 연단을 통해 이루어진다.

어린이들은 단것은 좋은 것

달지 않은 것은 나쁜 것이라 인식할 수 있다.

영적으로도 마찬가지다.

인생의 그 험난한 굴곡이 어린 영혼들에게는

반드시 피해야 하고 축복의 증상이 아닐 거라 피하고 싶어하지만

실은 '광야의 고난'은 필수라는 이야기다.

 

 

11.사람이 준행하면 그로 말미암아 삶을 얻을 내 율례를 주며 내 규례를 알게 하였고  

 율례.

기독교인이라서 지켜야할 '룰'.

최소한의 하나님 안에서의 규제.

어찌되었든 세상은 '막 나간다'

자신이 기쁜 것이 '선'이라는 다원주의 덕에 세상은 정말 규제없이 막 나간다.

그렇기에 '예수님'으로 인하여 우리에게 구약시대에 비하여

너무나 많은 자유가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을 신경써야 하는 ,

그래서 세상에 비하면 훨씬 자유롭지 못한 듯한 상태로 산다.

그것을 주님은 '율례'로 표현 해주신다 .

 

하지만 '생명'을 주는 , 삶을 얻을 율례다.

그냥 율례가 아니다.

자유롭지 못한 듯 하지만

하나님의 그 율례 안에 살면

은혜가 넘치고 그 은혜는 

이성적이라 표현하는 인간의 생각의 틀로서는 짐작하지 못할

놀라운 '평강', '샬롬'으로

주인없는 허무한 방탕과는 다른

놀라운 자유를 얻게 된다.

그게 '삶, '생명'의 자유다.

 

 

12.또 내가 그들을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 줄 알게 하려고 내 안식일을 주어 그들과 나 사이에

    표징을 삼았노라
 구원하여 주셨으면 '광야'의 고난을 주시지 말던가

정말 전적인 자유를 주어 편하게 해주시고

아예 죄가 근접도 못하게 했으면 얼마나 좋을까마는

우리는 주님의 그뜻을 알지 못하긴 하지만

지어진 모든 우리의 인생의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 돌림'이고

그것은 '하나님을 알게 됨'으로 가능한 일이며

원죄적 존재로서

하나님의 허락하신 '고난', 광야의 과정이 없으면

어찌 그게 가능할까?

 

 

이 너무도 단순하고 극명한 원리를

난 참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삶 속에서 각개 전투로 살다가 자꾸만 잊는다.

때로 하나님의 사랑안에서 쉼을 얻게 될 때,

그분이 나  뿐 아니라 타인을 위해서 쓰기 위해서 날 축복하신 경우라던가

영적인 평강의 은혜가 오래 지속될 시.......

난 또 잊어 버린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많이 '옛 자아'가 튀어나온다.

자꾸 편하고 싶어하다가  게을러 지고

하나님의 말씀이나 율례가 자꾸만 귀찮은 듯 느껴지고

내 인생에 지워진 목적은  

'사랑받는 자는 반드시 광야를 거쳐야 하고

 과정을 통해 하나님의 율례를 깊이 체득함은 생명을 얻는 것이며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을 알아가게 하시는 이유'라는 것을

기억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 주시고 싶은 말씀'이라면

내가 무엇을 하여야 하는 것인가?

 

고난을 기뻐하라.

광야는 필연이다.

하나님 안에서 힘듦은 당연함이다.

혹여 어려움이 오늘 나에게 닥친다면 '하나님의 뜻'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

 

율례는 생명이다.

하나님의 허락하신 어려움은 율례를 배우게 하심이다.

율례를 지킴은 생명을 유지함이다.

생명력 있는 삶은 얼마나 귀한 일인가?

목표가 있고 생기가 돌고 삶에 희망이 있고 소망이 있음.

타인에게 정한 영향을 줄 수 있는 삶.

그게 비록 눈에 띠는 세상의 얻음이 아니더라도

내 자아성취를 향한 적극적으로 몰아감이 아니더라도

생명이 내 인생에 늘 함께하심을 내가 인식한다면

오늘 내가 하나님의 생명안에 거하는 일이

그리 거창하고 대단한 일이 아니고

고난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인식하고

그 뜻을 지켜 내 영혼에 또다시

하나의 올바른 흐름으로 지어 넣는 게

생명의 지름길이라면

그 얼마나 보람 있는 일인가?

 

오늘 난 그럴 거다.

어제 저녁 아홉시.

일찍 퇴근하는 금요일,

수술 한분 있어 얼른 하고 퇴원하려는 데 응급실에서 전화 왔다.

다섯시.

응급수술이란다.

그래도 어쨋든 내 환자니 급히 서둘러 단일절개 복강경으로 참신하게 수술하고 퇴원했다.

늘 그렇듯 수술 끝나고

수술 방앞에서 보호자를 불렀으나 안게시다.

여덟시 .

서둘러 교회로 갔으나 찬양팀에 서기가 늦었다.

앉아서 예배를 드리는 데 아홉시에 전화 온 것이다.

병원에서 보호자라고 '화를 마구 내신다'한다.

설명도 안해준다고..

그리도 찾아도 없더니 ..

더구나 그 늦은 시간 ,

응급으로 수술을 하는 의사에 대한 배려도 ,

감사한 마음도 , 정중함도 없다.

걱정하시지 말라고 답은했지만 그들의 경우 없음에 짜증이 올라오려 한다.

 전화를 마치고

잠시 마음을 달래고 다시 참가한 '목사'님의 설교에

'성숙한 기독교인'이란 말씀이 귀에 들어온다.

"상황에 맞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 성숙함이다.

 1+1은 2라는 것은 아이가 주장하면 귀엽고 똑똑하다 한다.

 대학원생이 자랑스럽게 그러면 미쳤다고 한다..ㅎ.."

맞다.

성숙하지 못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런데.........내 한편에 '회개'의 마음이 든다.

그 성숙지 못한 세상의 다원주의적 태도에

아무때나 '욱욱'하는 것은 '성숙한 태도인가?

난 내가 옳고 옳은 생각을 많이 하지만

타인에 대한 상황에 맞는 배려는 하던가?

내 믿음이 옳다고 타인에 일방적으로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소리 크게 냄은 옳던가?

 

 여자를 다루는 과.

특이한 분들 많다. 

긴장을 해서인지 두번 세번 얘기해도 못알아 듣고 다른 소리하는 분들도 많다.

예민한 여성들이 많다.

나.

나이가 들어서인지

과거의 깨닫지 못하던 아픔을 건드려서인지

진료 과정에서 짜증이 올라오려하는 경우가 가끔 있다.

급한 성격.

말씀 가운데 정말 많이 다져졌지만

아직도 내 '속앓이 하는 경우'가 꽤있다.

 

그것.

오늘

이전처럼

또 한번 내 영혼의 주름을 피시는 과정으로

주님이 깨닫게 하신다.

 

'고난.

의사인 나에게 세상의 절박한 분들과 비교하여

조금은 다른 양상이긴 하지만

그 고난의 많은 부분들을 정리해보면

이전과는 달리

이제는 '하나님 말씀'에 대한 부담과

아직도 그렇게 행동하지 못하고

또 마음 속으로 나마

때로는 전혀 변화 없는 듯한 자신을 발견하는 그 당혹감 사이의 괴리가

날 깊이 힘들게 할 때도 있다.

요사이 거쳐나왔던 힘듦의 그 근원적 이유.

좌절로 오랫동안 '나 할 수 없어.. 이제는.. '이라는

나도 모르는 포기가 그 이유였던 것이고

그런의미에서 오늘 말씀하시는

이 말씀의 레마는

' 다시 돌아보는 원리' 내지 '다시 기억해 낼 중요한 원리'가 아닌가?

 

나.

인생을 허무하게 보고 염세적이고 부정적으로 보았던 사람.

하나님의 주관적 선택으로 인하여 여기까지는 왔지만

아직도 힘든 때가 덜 벗겨져 있는

하나님의 나라를 가는 과정 중의 있는 자.

다시 힘내야 한다.

그 간단한 원리를 기억해 내고 다시 반추하여

나의 세상에서 걸리는 부분을 들어내고

말씀 안에서 말려야 한다.

 

 아침에 환우 분들에게 다정스레이 다가가려............노력했다.

덜 '욱'~했다.

세번 네번 들어주려 노력했다.

주님이 그러시라는 거 같기에 그랬다.

반은 성공.

주님이 이럴 때 기뻐하셔서

나의 아무런 재미없는 일상을 아주 재미있고 보람있게 만드실 것이다.

난 , 그것이 은혜의 증상이라 느낀다.

은혜로 난.. 오늘도 간다.

(  타인이 보면  술도 안하고 재밌는 골프도 안하고 매일 열심히 돈이나 명예나 무엇 다른 것을 위하여

 추구하는 것이 거의 없는 한마디로 재미없는 사람...

 그런데 난 내 인생이 은혜 없었던 시절이나

 지금도 내 자아가 앞설 잠깐의 순간은 그렇지만

상당히 많은 시간은 나도 모르는 보람과 희망과 재미가 날 사로잡는다.

 그게 감사하다.

 그게 하나님의 살아계신 증거로 난 느낀다. 

 살아계신 내 아버지.. )

그래서 '은혜 ' 놓치는 죄악의 상황은 가급적 피한다.

오늘.

조금씩 버걱거리는 내 일생의 터부들을

말씀 앞에 조금씩 가져와

아주 조금 또 , 아주 아주 조금이지만

어제보다는 몇 발자국 광야를 헤쳐 나가게 될 것이다.

감사하다.

 

 

 

기도

내 주님.

날 사랑하시는 내 하나님.

그동안 자꾸 잊으려 했습니다.

광야는 필연이고

사랑받는 자에게 고난은 유익임을 피하려 했습니다.

고난에 집중하고

고난은 있으면 안될 저주 받은 자의 그것처럼 피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고난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자로서

하나님을 더 알게 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뜻이시며

그를 통하여 율례를

내 영혼에 체득시키는 것이야 말로

'생명'의 기운,

은혜의 누림,

성령의 임하심을 크게 하는 기회임을

다시금 상기하나이다.

감사합니다.

주님.

다시 한번 제 인생의 하루를 정리합니다.

말씀 가운데 그리하려 합니다.

주님.

내 자식들.. 내 아내 ,... 내 식구.. 내 친구.. 내 아는 모든 자들..

주님 안에서 올바른 말씀대로 살아나가길 기도합니다.

고난.

피하게 되면 더 좋겠지만

불가피하면

주님 생각으로 기뻐하고 받게 하시고

그로 인하여 율례를 배우게 하시고

그 때문에 더욱 기운찬 생명을 얻게 되어

삶이 매일 매일 힘이 있길 원합니다.

매일 주님을 알아가는 기회가 디길 원합니다.

주여.

특별히 저..   잘 넘어지던 부분.

깨닫게 되었으니 잊지 않게 하시고

주님의 뜻 가운데 더 잘 지내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감사하며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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