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칙한 QT
본래 나에게 ( 마19:1-12) 본문
제 19 장 ( Chapter 19, Matthew )
본래
난
그림자 인생일 뿐이다
주님
빛으로
비추이시기에
그냥
잠시 머물지만
또 다시
흘러가버릴
그게
내 운명이다
무엇이 문제이던가
무엇을 붙들고
또
무엇이 날
붙들 수 있을 것이던가
이제 그만
잡은 두손 펼쳐놓고
흘러가는
저 물처럼
그냥 흘려 버리고 말면
끝인것을.
내
흘러 다달을
그곳 만이
오직
내 삶
본래의
의미인 것을...
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8. 예수께서 가라사대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 아내 내어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
12. 어미의 태로부터 된 고자도 있고 사람이 만든 고자도 있고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된 고자도 있도다 이 말을
받을만한 자는 받을지어다
바리새인 들이 예수님께 집요하게 묻는다.
물론, 그들은 예수님을 믿을 의도는 아니었다.
함정성 물음이었을 것이다.
결혼과 이혼 문제다.
그들의 수천년의 전통대로
남자들 마음대로 이혼을 할 수 있는 상황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절대로 ' 특별한 죄를 지은 경우가 아니면
버리지 못하도록 하신데 대하여
비아냥 거리 듯이
'그럴 바엔 결혼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한다.
그러자 주님은 '고자'가 아니면 안된다고 하신다.
그 고자 마져도
선천성이거나
사람이 만든 고자
특별한 이유에 의하여 스스로된 고자의 경우로
그 폭을 넓혀서 대답을 해주신다.
무엇인가?
아침 부터 결혼 이혼 고자.......
그리 오늘 나의 하루에 합당치 않은 말씀으로 일관하시는 것 같다.
그러나, 대비되는 관점이 눈에 띤다.
바리새인들의 '모세 율법'
예수님의 '인권'적 , 현대적인 말씀.
이천년 전.
인권이라고는 단어조차 생소한 그때.
모세.
수천년 전 부터 그들 이스라엘 지방에서 거부할 수 없는
거대한 이름.
그 이름으로 내려오는 관습에 의해
남자들이 한없이 누릴 수 있는 거의 폭행에 가까운 처사들.
코에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 식의 남자들만의
세상에서 그것을 너무나도 당당하게 인식하고
여자 들을 함부로 이혼하고 버리던 그 관습에
정면으로 대응하는 논리로
그들을 저항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 분의 이름이 바로 '예수'시다.
예수님의 주장하시는 바는
너무도 당연하다.
일부일처 제의 현대 사회에서는 너무도 당연한 이야기가
그 당시에는 '쇽킹'한 이야기가 될 수 밖에 없다.
그러기에 이들 바리새인들이 이처럼 충격을 받을 수 밖에 없지 않던가?
그런데..
그 분이 예수님이시고
우리가 현재에 살기에 너무도 당연한 듯이 이야기 하지만
위에 열거한 바 사회적 상황에서
'예수님의 주장'은 과연 '혁신적'이고 너무도 돌발적이고
어찌보면 '천재적'이기도 하다.
지금 시대에도 돌발적인 천재들이 있다.
하지만 이들과 그 시대는 차이가 많다.
지금은 정보가 너무나도 많고 쉽게 접할 수있다.
그러기에 사고의 폭은 무한정 커질 수 있다.
웬만한 지식을 가진 자들은 한번씩 그럴 개연성은 있다 하더라도
그 시기
그 고대 중동의 촌구석의 목수 아들이
그러한 수천년을 넘어서는 원리를 갈파할 가능성이 있던 말인가?
그것은
주님이 살아계신 하나님이 아니시고는 가능치 않은 이야기라 생각이 든다.
그래..
어쩌면 논리적 비약이 큰지도 모른다.
예수란 천재한 사람의 이야기를 -믿지 않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ㅜ.ㅜ;;- 하나님까지 비약시키다니...
그런데 이 천재 예수님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과연 이것이 아이큐 뛰어난 자의 이야기로 만 치부할 수 없는
그 무엇이 바리새인들과 극명하게 대비된다.
바리새인들.
이성이 지극히 발달하고
거기에 전통을 고수하여 극한까지 갈고 닦는 자들.
그들은 그들의 논리에 빈틈이 없다.
하지만 그들이 놓치고 있는 것.
그것이 '본래'다.
본래, 하나님이 인간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시고
본래 부인을 버리게 허락된 것은 '그녀의 완악함' 때 뿐이었다.
이것은 무슨 이야기이던가?
하나님이 남자와 여자를 만드신 근본이유는
독처함이 안스러워서 이시다.
그것은 다른 여자로 대치해서 독처를 막으라는 뜻이 아니시다.
하나님이 짝지워 만들어서
아름다운 사랑의 보완존재로
죽을 때까지 아름답게 살아서
하나님께 아름다운 모습으로
즉, 삶의 '찬송'을 올리라는 뜻이시다.(사43:21)
그게 '근본'이고
그게 '본래' 주님의 뜻이시다.
또,
본래
즉, 하나님이 버리게 허락된 아주 극도의 경우는
즉, 극도로 부인이 완악한 경우라는 의미는
남편의 영혼이 피폐해질 만큼
죄가 있을 때만이란 전제다.
그것은 다시 말하면
거의 버리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시겠다는 뜻이시며
부부가 깨어질 이유는 극도로 적다는 뜻이시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편의 아픔을 헤아리는
하나님의 너그러우심을 의미한다는 것 뿐이다.
바리새인이 놓치고 있는 것.
그 사회에서 사는 인간들의 능력으로는
얻을 수 없는 것.
그것은 '관습'을 넘어 뛰는
우주적이고
절대적인 가치.
'하나님의 뜻'
사랑
생명
긍휼
책임.........을
온전히 고수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예수님을 믿으며
시간이 갈수록 점점 들어나야 할 것은..
제도권 안에서 적응도 중요하고
인간의 기준에서 탁월한 실적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앞서는 원리,
하나님의 뜻 안에서
그 분이 그토록 원하시는
사랑, 믿음, 배려, 성화..........등이
나도 모르게 내 영혼에서 피어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때로
세상의 이익을 놓치고
손해를 볼 위험이 있고
어쩌면 오랫동안 사람들의 관심 밖에 있을 위험성이 있어도
그게
주님이 기뻐하시는 뜻이시면
따라야 할 당위성에 대하여 다시 한번 명심한다.
그게
나에게
본래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이실 수 있다.
왜 이리 산다는게 힘이 드는 가?
아들 의경 보낸 것.
도우신 손길이 너무 많아 참 기뻤다.
한마디 이야기만 꺼내면
이곳 저곳에서 서로 도우신다 하시고
드디어는 예산의 형님도 서둘러서 도우신다 하시니
'야... 드디어 형제간의 우애까지도
주님이 간섭하시는 구나..' 하며 마음에서 감사의 눈물이 흐를 것 같이
감동하였었다.
아들이 '서울 경찰청'으로 잘 옮겨갔다.
목소리도 훨씬 맑아지고...
아이는 이 일을 통해 많은 것 배운 것 같다.
그런데 금식 후 약간 무기력한 나에게
오래된 역기능의 흔적이 물고 늘어지나보다.ㅎ
형님..
그 분.
늘 '탓' 잘하시고 '위세' 좋아하시는 분이고
입이 걸으신 분이시다.
감사의 문자를 보낸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셨던 가..
저녁 늦게 어머니 .. 또 예의 그 목소리로
'전화나 한번 형님께 드려라......'
신신당부에 당부.
이구.........
또 역기능의 흔적이 날 붙드는 것 만 같다.
'아니나 다를까.. 또.... 무언가 빌미를 잡으셨나 보다.
솔직히 그 분의 힘보다는 내 친구의 도움이 컸는데..
마치 아이처럼 유세하고
유세를 넘어 늘...공격처럼 뭐라 하셨나 보다.
그러니 어머니가 저리 또 안절부절 전화하셨지.. '
회의 중에 옛 습관을 기억나게 하는
전화를 받고 나니 감사하기 보다는 아픔이 먼저 올라온다.
머리가 헝클어진다.
낮에는 수술 두건있다가
잠시 마취과장 실에 들어가
책상에 다리 걸터 올려 놓고 잠깐 잠이 들어 있는데
연배가 어린 모과장이 들어오면서
' 다리 내려 놓으세요.'
면박으로 느껴진다.
화가 불뚝난다.
뭐라했다.
마음이 편치 못하니 그런가 싶다.
이래저래
은혜가 넘쳐야 할 금식 이후의 시간이
흔들리는 사건들 뿐이다.
아침에 일어나서 나오며 잡은 묵상은
'남자와 여자'
' 이혼'
'고자' 이야기다.
전혀 감이 안잡힌다.
내 신앙이 어찌 이것 뿐 안되던가 하는 기분이든다.
사단이 흔든다.
가만히 정신을 집중하여 묵상한다.
'본래'와 더불어
'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된 고자, 선천적 고자' 등이 눈에 들어온다.
그렇다.
어디 주님의 원리가 내 이치와 내 논리에 맞아 들어가던가?
내 생각에 맞지 않는다고 좌절할 이유가 어디 있던가?
고자.
남자로서는 생각키도 싫은 이 불행한 희대의 벌 조차도
선천적이기도 후천적이기도
스스로 되기도.............예상하지 못하는 일이지만
주님의 뜻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지 않던가?
바리새인 들처럼
' 모세의 율법'에 갇혀 세상을 바라보려 하고
그 틀로 내 현상을 판단하고 재려하니
또 내가 흔들리는 것이 아니던가..
생각이든다.
눈을 들어 차창 밖을 쳐다 보았다.
일순 흔들리던 버스 손잡이 링을 통하여 창문 밖이 보인다.
창문 밖의 풍경이 동그란 손잡이에 제한 되어 보인다 .
가만히 그 뒤를 바라보게 된다.
눈에 보이는 것은 '허상'인 것 같다.
내가 보려 하는 것이
세상을 세상으로 보려고만 하니
세상은 내 눈에 세상으로 밖에 안보이는 것 같다.
어찌 잠시 진리의 눈으로 보면
이 허상은 걷혀지고
천국이 그 뒤에 있지는 않을까.. 하는
어이 없는 생각이 순간 스치고 지난다.
예수님.
그 위대하고 거대하신 분은
당연히도 '모세의 율법'에 갇혀 있지 않으셨다.
하나님의 원리로 세상을 바라보셨다.
그러니 버려도 될 여자는
'하나님이 우리 인간이 독처하는게 안쓰러워 붙혀주시는 연약한 그릇'임을
너무도 당연하게 보시는 것이시고
그것은 예수님의 말씀하시던
그 당시에 이천여년을 지나서야
이 땅에 '女權'으로 자리잡게 되고
지금은 누구나 당연히도 인식하게 되는 원리가 되고 있지 않던가?
나의 분석력과 화돋우는 장치로 작용하던
어제의 일들.
더 사랑으로 대하기로 하였다.
속은 그렇지 않아도
하나님이 '화해'하고 제사를 지내라 하시는 말씀이 생각이 난다.
전화기를 들었다.
' W과장님.. 식사나.. '
기뻐하신다.
내가 잘못했다.
저리 순하신 분을 오해했구나.
고향의 내 역기능 식구들.
억울한 것.
주님께 맡기고
그냥 웃어버리고
잊어 버릴 것을................
그러지는 못했다. ^^;;;
전화기를 들어 평생하지못하던
내 이야기를 조금 했다.
자분자분.
I-message
' 어머니.........저는 이리 생각합니다.
벌써 .......
제 기분이 이랬습니다.
그래서 제 바램은 .........'
아직 마음이 흔들리기는 한다.
이 어리석은 자.
언제나 되어야
'본래' 주님이 늘 나에게 보이시고 싶어하시는
그 일상의 뜻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받아 들이고
준행할 수 있을 까?
언제나 되어야 채찍과 침을 맞고도
십자가에 못박히시면서도
저항하나 안하시던
그 예수님의 사랑과 인내를 닮을 수 있을까?
답답한 일이다.
적용
1. 본래.
주님의 뜻을 늘 생각하자.
손해를 기뻐하시는 주님을 생각하자.
2. 흔들림
주님 십자가 앞에 더 내려 놓자.
3. 성경 여덟장 읽겠다.
4. 회개하자.
더 인내 하지 못함을 회개한다.
기도
주님.
눈을 뜨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왜 이리 눈 만 뜨면
비판 만 보이고
비평만 눈에 뜨일까요?
주님
좋은 일만 서로 이야기 하면서
죽도록 살아가도 부족할 것을
어찌 이리 손가락질 하여야 만 할까요?
주님.
그러지 않아야 함을 앎에도 불구하고
어찌 그렇게 사는지 요?
주님
본래 주님이 원하시는
그 근본의 뜻대로 살지못하는 제가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주님.
모든 것이 주님이 뜻이고
주님의 뜻안에서 되지 않는 것이 하나도 없이
고자 마져도 주님의 허락하심안에서 이루어짐을 앎에도
어찌 나는
손가락을 들어 고자같은 그들을 향해
고자라고 흉보는 지요.
분노하는 지요.
이 어이없는 인식과 내 속의 흐름 사이의 간극을 메워주소서.
불쌍히 여기소서.
주님 닮길 원하나이다.
주님의 뜻대로 살길 원하나이다.
그렇지 못하고 무기력해 있는 절 불쌍히 여기소서.
절 불쌍히 여기시어 구원하셨으니
절 불쌍히 여기시어 성령 충만하게 하소서.
절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채워주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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