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칙한 QT
모두 믿음으로 바꾸소서(왕하 4:18-37 ) 본문
제 4 장 ( Chapter 4, 2 Kings )
20. 곧 어미에게로 데려갔더니 낮까지 어미의 무릎에 앉았다가 죽은지라
아프다던 아이를 죽을 때까지 무릎에 앉히고 바라보던
어미의 머리에는 어떤 생각이 있었을까?
마음이 아팠지만 어찌할수 없는 자신이 얼마나 안타까웠을까?
죽을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그니의 머리 속에
막상 아들이 죽자마자 얼마나 혼돈이 왔을까?
하기오스 찬양 팀의 한분이
유방암 2기 완치 판정 후 재발하여 항암제 맞으러 간다고 담담히 말씀하셨었다.
그런 그 분이 수개월 후 갑자기 본원에서 호스피스 병동에 입원하셨다는 전갈을 받았다.
놀라서 다음 날 올라가보니 '잘못 알았다.
항암제 맞고 난 다음 날이셨다.
그래서 힘들어 하지만 또렷이 말씀도 잘하셨었다 .
그러더니 그 이틀 후인 어제 '돌아가셨다'고 메시지가 날라왔다.
사람이 살고 죽는 것...
너무나 급격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 교류가 없던 분의 그러하심도 놀랍거늘
막상 가족들은 어떠했을 것인가?
더구나 그 분은 암이 말기까지 퍼지셨다니 마음의 준비는 되었겠지만
이 어미의 마음이 어떻겠는가?
그렇다면
이 극도의 '놀라움'을 어찌 감당할 것인가?
실신이라도 하고 정신이 나가야 옳지 않던가?
21. 그 어미가 올라가서 아들을 하나님의 사람의 침상 위에 두고 문을 닫고 나와서
그러나, 이 수넴여인은 그러지 않았다.
잠시 당혹이야 있었겠지만 성경에서 표현되지 않았음은
비교적 그의 행동을 빨리 정리하고 결정했음을 의미하는 것 아니겠는가?
' 하나님의 사람'
오늘 묵상에 다섯 번 이상이나 되풀이 나온다.
엘리사님을 말하지만
그 분을 특별히 '하나님의... ' 하나님의... 하나님의....하나님의 .. 하나님의.. 사람'이라 표현함은
그 절절한 마음을 표현해주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 하나님의 사람의 침상이란 표현이 나온다.
수넴 여인은 그 분이 안계셔도 하나님을 모시는 마음으로
그 하나님의 대표자를 대하는 태도를 보인다.
그를 위하여 늘 침상을 비워놓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차분한 행동이 놀랍다.
23. 그 남편이 가로되 초하루도 아니요 안식일도 아니어늘 그대가 오늘날 어찌하여 저에게 나아가고자
하느뇨 여인이 가로되 평안이니이다
남편은 '현실'을 이야기 한다.
그에게 엘리사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고 기적을 보이는 선지자일 뿐,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는 아들의 죽음을 그가 살릴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하고 있는 모양이다.
그러기에 안식일 ,초하루를 계산한다.
그러나 여인은 '평안이니이다. ... (괜찮다)'고 한다.
계산하고 생각함은 '믿음'이 아니다.
내 경험 속의 이치를 생각하고 주님을 바램은 꼭 올바른 믿음이 아닐 수도 있다.
나.. 주하인에게 하시는 말씀처럼 들린다.
나름 아는 것, 생각하는 것 늘어났다고 이것 저것 재고
영적 육적 ..성장을 생각하는 것..
어느 정도까지는 하나님의 바라심에 속할 수 있으며
균형잡힌 믿음을 위해서는 필요할 수 있지만
그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더 '강력한 믿음'이 필요하지않을까?
수넴여인의 믿음을 일반적인 눈으로 보면
이제 부터 시작되는 적나라한 행동이 어쩌면 세상의 기복적 믿음들,
세상의 복 만을 적나라히 구하는
많은 왜곡된 성장하지 못한 분들의 그것과 다른 것 같지는 않지만
그 비는 대상이 영적이고 아니고를 떠나
절절한 믿음이 있어야 진정한 믿음임을 암시해주는 것을 알 수있다.
첫사랑 후 믿음은 주님의 절대적 인도와 축복으로 인도되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하나님은 연단을 위하여 영육간의 구분을 훈련시키시다가
어느시기가 되어 장성한 믿음을 위하여는
그 한계를 구분하지 않는 진정한 믿음을 훈련시키시는 듯하다.
그 단계를 넘어선 자들의 강력한 믿음은
프랜시스 성인이나 수 많은 믿음의 성인 들이 보여지듯
기적이 일상처럼 일어나는 단계가 벌어지는 것은 아닌 가 한다.
이 여인.
나름대로 불신의 세상에서 깊은 믿음을 지닌 분이시다.
이 여인의 성장을 통하여
오늘 나에게 보여주시고자 하시는
그 믿음의 성숙도를 가르치시려 하시는 듯하다.
24. 이에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자기 사환에게 이르되 몰아 앞으로 나아가라 내가 말하지 아니하거든
나의 달려가기를 천천하게 하지 말라 하고
여인의 절박함.
행동은 조신하고 당혹스러울 정도로 냉철 하였으나
이 말 달리는 모습을 보라.
과속하지 않는가? ^^:
26. 너는 달려가서 저를 맞아 이르기를 너는 평안하냐 네 남편이 평안하냐 아이가 평안하냐 하라
하였더니 여인이 대답하되 평안하다 하고
잠깐, 헷갈리는 부분이다.
엘리사의 종, 게하시가 나와서 묻자 '아무일 없다' 한다.
그의 안스럽다는 얼굴 빛을 한번 보면 마음이 얼마나 포근해질까?
그러나 그녀는 그리 하지 않았다.
아마, 그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대표되는
'하나님'께만... 말씀 드리길 원하는 것으로 느껴진다.
또 , 긴 이야기를 설명할 마음의 여유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절박하다.
그만큼....
나.
진정으로 주님 만을 바라보던가?
이처럼..
사람을 향하여 ' 나 좀 알아달라'고 죽은 시늉하며 외치지 않던가?
혹여 '나 이처럼 신앙생활 잘하니 알아 봐 주세요'하는
게하시를 바라는 믿음은 아닌가?
27. 산에 이르러 하나님의 사람에게 나아가서 그 발을 안은지라 게하시가 가까이 와서 저를 물리치고자
하매 하나님의 사람이 가로되 가만 두라 그 중심에 괴로움이 있다마는 여호와께서 내게 숨기시고
이르지 아니하셨도다
그리고는 드디어 '산'에 이르러는 철퍽하고 하나님의 사람의 발을 안았다.
마치 방해를 하려는 제자들을 넘어서는 큰 소리로
예수님을 향해 외치는 '소경'의 그 절절함이 연상된다.
그러자, 하나님의 사람...
아.. 하나님의 사람..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그 중심에 괴로움이 있다. '
그렇다.
그 절절함,
주님 만을 간절히 바라고 하나님께서만 나를 도우실 수 있다는
그 강력한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
어찌 내가 다 아뢰지 못한다고 주님이 모르실꼬?
그 분은 그러신다.
' 네 중심에 괴로움이 있음'을 내가 안다."
그것을 믿을 수 있길 원한다.
내 믿음이 그렇게 되길 바란다.
나.
원하는 것 많다.
그러나, 생각도 많다.
물론 옳은 생각이다.
주님이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을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으로 바라고 싶지만
내 안에서는 세상의 부족한 것도 어찌할까.. 하고 온전히 구하지 못한다.
그래서 어제 묵상에서 처럼 진정으로 아뢰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그 마져도 중심을 아신다 하시니
결국 그 말씀을 듣고 주님이 응답하시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했던 모양이긴 하다.
이제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주님이 내가 입으로 발하지 않은 그 중심마져도 다 아신다는 '믿음'이다.
28. 여인이 가로되 내가 내 주께 아들을 구하더이까 나를 속이지 말라고 내가 말하지 아니하더이까
그리고는 여인은 이렇게 토한다.
' 자식을 주신다 하실 때 제가 속이지 말라 하시지 않았습니까?'
아마 이리 이어졌을 것이다.
그런데 '주시고는 죽게 하신 것은 또 웬일이십니까?'
이게 정답이 아닌가?
세상엔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부지기수다.
믿는 자들로서도 '축복'으로 , 응답으로 허락받았다 생각했던 것들이 사라져
실망하는 일이 없지 않아 있다.
이럴 때 그 받는 충격은 '믿음'이라고는 없던 불신자들이 받았던 것의
수배의 충격이 더 한다.
'이럴 거면 왜 ..
정말 주님이 주신 것은 맞던가?
....'
그러다 보면 '불신의 의혹'이 슬금슬금 일어나 싸우게 되지 않을 것인가?
그 마음에 부담이 두세배 가중이 되는 것이다.
주님께 죄송하니...
그러나, 여인은 그냥 멈추지 않았음이 중요하다.
그녀는 그래도 주님 앞에 나와서
주님 앞에 있는대로 토하는 기도를 하는 것이다.
'내가... !!! ...??? "
30. 아이의 어미가 가로되 여호와의 사심과 당신의 혼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하리이다 엘리사가 이에 일어나 여인을 좇아가니라
그리고는 절대로 엘리사가 가지 않으면 - 게하시 정도로는 안된다며 - 돌아가지 않겠다 한다.
얼마나 절절하고 당찬가?
정말 이 여인은 행동 거지가 명확하고 뚜렷한 여인이다.
'하나님의 사람' 이 하나님의 사람임을 확실히 알았고
그리하여 최선을 다한 섬김을 하였으며
자기가 원하고 원치 않음을 정확히 알았으면서
필요한 것을 위해서는 망설이지 않고 과감히 시도하며
절절하고 끝까지 밀고 나가는 믿음을 가졌다.
37. 여인이 들어가서 엘리사의 발 앞에서 땅에 엎드려 절하고 아들을 안고 나가니라
그래서 그녀는 결국
'살아난 아들을 안고 나가는' 놀라운 응답을 맛보았다.
귀하지 아니한가?
나에게 주시려는 오늘 묵상의 주제는 '믿음'이다.
믿음도 절절한 믿음이다.
그 믿음의 대상이 ' 세상적이든 영적이든' 그 구분이 중요치 않다.
얼마나 나에게 절절한가?
그것이 하나님의 원리에 어긋나지 않는가?
하나님 만을 바라보는 믿음이던가?
하나님이 가장 우선 순위던가?.. 다.
나.
정말 배울 바 많이 있지 않던가?
어찌 수넴여인을
여인이라고 무시할 수 있으며
어찌 불신자 들의 틈에 끼어 있는 자라고 무시할 수 있을 것인가?
사람의 가치는 외견에 있지 않음을
오늘 묵상을 보면서 다시한번 느껴진다.
그 여인이 '엘리사'를 바라보는 그 시선의 강렬함은
되풀이 되풀이 나오는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표현에서
강하게 느껴진다.
나.
하나님 만을 강하게 바라볼 수 있는
하나님 만으로 .. ..하나님 만.. ..하는 믿음이 과연 있던가?
그 절절함, 그 강력한 흐름
성령의 강한 임재를 느낄 수 있던가?
그러길 간절히 바라본다.
적용
1. 믿음에 대하여 돌아보자.
미지근한 내 믿음.
사람의 칭찬과 하나님의 칭찬 사이에 교묘한 줄다리기식 믿음.
조금의 흔듦에도 여지없이 흔들거리는 믿음은 아니던가?
아닐 수도 있다.
최소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확신,
예수님, 십자가에 대한 강력한 확신,
나를 사랑하시는 그 분, 그 사랑에 대한 확신.. 은 있다.
그럼에도 어딘지 부족한 내 믿음.
절절함의 부족.
강력한 원함의 부족 등은 묵상하고 기도해 볼 일이다.
2. 내 자식들의 장래.
허락된 것이면 언제까지... ..
가장 좋은 방향으로 인도하실 것임을 믿음
3. 오직 주님 만으로 만족할 수 있음에 대하여
세상의 가치에 비추어 부족함은 속상함으로 한구석에 자리 잡는다.
지금 주신 상황 만을 깊이 만족할 수 있는 것이 좋은가?
더 발전시킬 것을 믿는 것이 좋은가?
이것이 절절한가?
나에게 절절한 필요는 무엇이던가?
4. 주님이 고치실 것에 대한 기대와
그냥 허락하신 고난인지 여부에 대한 구분이 힘듦.
그러기에 절절함이 잘 생기지 않았다.
여쭈어 보고 주시는 답으로 기도하자.
주님이 허락하신 것이시면 그냥 받아 들일 수 있게 절절하게 해달라고
고치길 바라시면 고쳐주심을 믿음.
5. 성경 세장 읽겠다.
기도
주님.
믿음의 부분에 들어오면
생각이 많아집니다.
아마도 이게 '수넴여인의 남편' 같은 심성은 아닐런지요?
주님.
저에게 집중된 생각을 주시옵소서.
정말 기도해야 할 부분,
믿음이 필요한 부분에 대하여 깨달음을 주소서.
그래서 어리석게 이것저것 재지 않게 하소서.
절절함으로 깊이 깊이 주님을 받아 들이게 하소서.
어떤 환란이나 고난이 와도
모두 주님을 향한 믿음으로 바꾸게 하소서.
수넴 여인의 저 결단과 강력한 믿음을 닮게 하소서.
가슴을 찌르는 아들이 죽은 것에 대한 고통을 넘어서는
더 강력한 아들이 살 수 있다는 믿음의 기도를 닮게 하소서.
주여.
간절히 빕니다.
고난이 오면 그냥 주님 뒤에 숨는 것도
저에게는 발전이지만
그보다 더 발전되어 더 강력히 기도할 수 있게 하소서.
고통은 기도의 원천이 되게 하소서.
고통이 오면 손발 힘 풀고 누웠다가 가라앉으면 주님 앞에 나가는
이 어리석은 자의 어리석은 행태를 이제 말리소서.
더욱 강력히 주님께 매달리는 자 되게 하소서.
의혹,
아이가 죽을 지도 모른다,
그래서 가슴이 찢어진다는 우울의 고통보다는
하나님 만이 살릴 수 있다는
더 강력한 절절함이 절 사로잡게 하소서.
제 자식들.
이제 비오니 고치소서.
바꾸소서.
인도하소서.
주님 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저와 제 아내.
주님 만이 인도하실 수 있습니다.
올바른 목표.
강력한 믿음
흔들리지 않는 장래를 주소서.
주님 앞에 갈 때까지
세상의 나이들어가는 자들처럼
그냥 주저앉지 않게 하소서.
흔들리지 않게 하소서.
나이들어가는 나를 주님의 사람으로 바꾸어 생각하게 하소서.
그래서 부끄러워하지 않게 하소서.
주님.
세상에 도움이 되는 자 되길 원하나이다.
주여.
오직 주님 만이 나와 세상을 바꿀 수 있나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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