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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한다 떠나라 조용하라[살후3:6-18] 본문

신약 QT

명한다 떠나라 조용하라[살후3:6-18]

주하인 2019. 7. 11. 09:51

 

바람 불 듯하고

비 올 듯한가

그래서

당황되던가


피할 곳 찾고

먹을 것 걱정하며

유지해야할 하루에

마음이 흔들리던가


주님이 명하신다

걱정하지 말하라

떠나라

네 분주함으로 부터


그래도 허락되어지는

매일의 양식과

온전한 쉼을

조용한 가운데

누리고 체험하여 보라


오늘 또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찬양합니다



6.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명하노니 게으르게 행하고 우리에게서 받은

  전통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모든 형제에게서 떠나라
 '명한다' 신다.

'모든 ' 형제에게서 ^^;;

'떠나라 ! '하신다.


이거.

무슨 뜻이실까?

명함.

명하심.

나.

이제 명하셔도 될 정도로 단단해졌을 것을 알라시는 듯하다.

자의식 강하고 생각 많고  자유로운 것 좋아하는

한마디로 '독특한 ㅠ.ㅠ;' 자가 나다.

그래서 누구의 명령.. 아주 싫어한다. ^^;

그거 아시는 하나님.

내게는 그동안 참고 참고 참아 주신 것 ......안다.

권고하시고 은혜로 붙드시고

내 속의 영혼이 점차 건강해지고 더 맑아질 때까지

기다리고 기다리시다가

이제 때가 되신 듯 '명령'이란 부분에 눈이 가도록 하신다.


무엇 때문에

무엇을

명령하시는 것일까?
 내 나머지 부분, 이제는 더 신경쓰고 더 성장하기 위해

걸려져야할 세세한 부분..


'모든 형제'.. 라 하신다.

형제처럼 끈끈하고 불의마져 참아주고 싶은

그러면서 세상의 필요한 부분을 형제라 상징하신 듯하다 .

모든 형제...

마치 ' 소경의 지팡이' 처럼...

예수님의 고치심으로 눈을 떳지만 필요없는게 지팡이인데도

오랜 습관으로 버리기 무서워하는

그 모든 형제.. 들 말이다.

어쩌면 상처라는 이름으로 내 피하고 싶은 비겁함을 가리는 도구.. 말이다 .

그렇지만 위에 고백한 대로

나의 특성 상 뭐라 하면 튈까봐 ^^;;; 가만히 때가 되길 기다리셔서

이제는 그만 내려 놓아야 할 모든 그러함.


그것을 떠나라...고 하신다.


명령한다.

모든 형제를

떠나라 .




12.이런 자들에게 우리가 명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권하기를 조용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먹으라

   하노라 
 또

명하신다. .. 신다.

그러시면서

다시한번 한 톤을 낮추셔서

'권하기'도 하신다.


'조용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먹으라.. 고..

 

강하게 날 흔들던

수십년을 나에게서 떠나지 않던

오랜 상념들..

이제 그들로 인한 내 격한 흔들림들은

참.. 많이도 차분해졌다.

모두, 주님의 말씀을 통한 권면과 은혜의 결과다 .

감사하다.


하지만 아직도

태풍불 징조처럼 습한 바람이 미리 몰려오며 날이 흐린 것 처럼

한번씩 그러함을 느낄 때가 있다.

그러하면 난.. 움츠리려 한다 .

번쩍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하여 날 금방 추스리고

내 고요함, 잔잔한 기쁨을 회복하지만

그러함으로 인한 두려움이

아주 은근히 내 속에 찌릿 거리며 남아 있는 듯도 하다 .

괜히 나도 모르게 분주해질 듯,

안정감 없어질 듯.. 말이다.


하나님이 명하심,

하나님께서 떠나라 명하시며 권고하심은

'조용히 '.. 라는 부분에서

명확해지는 듯하다 .


 곧 있을

이곳에서 다 적나라히 표현하지 못할 일들.

그 속에서 내가 선택해야할 옳은 방향들.

그러고 싶지 않도록 마음이 분주해지는 것들..

알게 하심이시다.


명령하신다.

흔들리지 말고

잠잠히

특별히 '조용히' 일하고

그런 마음에서 떠나라.. 고.

그래야겠다.

하나님이 그리 말씀하시니 그래야 겟다.

감사하다.

진정.



주님.

은혜입니다

깨달아 알게 하시고

매사에 이렇게 하시고

그렇게 따르기만 하면

제대로 됨을 제가 수도 없이 체험하고 알게 하시고

이제 미래, 내일, 오늘의 바로 앞 조차

주님의 말씀대로 그리되게 하심을 알게 하시니

그게 감사하나이다.

명하시는 말씀대로

더 힘내 따르겠습니다.

분주한 생각들 접고

떠나

조용히 제 하루를살겠나이다.

나머지.. 모두 주님의 인도하심 따라 살겠나이다.

걱정, 근심.. 모두 주님이 가져가소서.

믿습니다.

그러며 감사드립니다.

니 주여.


강하고 귀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들어

감사하며 기도합니다.

아멘 
 




------------------ 과거묵상 1 ( 2007.03.20)


주하인아 내가 있다

 

나는 생각이 많은 편이다.

생각이 많다는 것은

좋게 보면 실수를 덜 하기도 하고

조금은 비상하다는 소리를 듣고 살 가능성이 높기는 했지만

그것은 스스로 되고 안되고 제한점이 많다는 얘기고  

쉽게 모든 일에 결정을 내리는데 쉽지 않았었다는 뜻이기도 하며

삶에 에너지가 많이 들어가서 쉬이 피곤해 질 여지가 많다는 것이기도 하고

삶을 보는 눈이 두려움과 부정적인 것이 많다는 의미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실제가 그랬다.  

삶에 별로 힘이 없었다.

 

 그러다가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그 분의 말씀이 내 속으로 하나하나 들어오기 시작하며

쓰잘 데 없는 나름대로의 규칙이 제거되고 삶이 단순해지기 시작해졌다.

필요없는 생각 들이 하나하나 가지쳐지며 조금 세상을 보는 눈이 맑아지기 시작하자

마음이 편안해지기 시작했다.

하지 않아도 될 걱정들은 하지 않기 시작했다.

특별한 이유 - 예전에는 의미가 없으면 의욕이 나지 않았었다.- 없이도 평안하고 기쁜 날이 많아졌다.

 

 그럼에도 아직도 걸리는 부분이 많은 것은

주님의 말씀을 더 깊이 내 속에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암시하기도 한다.

 

 

 

6. 규모 없이 행하고 우리에게 받은 유전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모든 형제에게서 떠나라
 사람의 눈치를 살피고

이것 저것 재며 결론을 내리고

그러다가 가끔은 놓치고..

어떨 때는 멋진 결론을 내리지만

반면 상처 받을 경우도 생길 수 있고...

 스스로도 피곤하다.

 

 성경은 말한다.

규모없고 주님의 뜻이 아닌 것을 행하는 것은 하지말라.

그게 비록 같은 기독교인의 이야기 일지라도 규모없는 것은 피하라.

 

 어찌 보면 규모없는 것의 정의 조차 또 헷갈리는 말일지 모르지만

오늘 또 한번 흩어진 물방울 들에 손가락으로 이어서 물길을 만들어주는 말씀을 들었다.

 

이것이 예전이면 '율법적'으로 인식되었을 것이

이제는 '~ 게 어떻겠는가?','~ 게 좋을 듯 싶다. '.. 로 느껴진다.

오늘의 말씀은 이렇듯 내 영혼에 각인될 듯 싶다.

 

" 그럴 듯하여도 위엣 것의 원리에 맞지 않고 땅엣 것이 중심이 되는 이유는 버려라. " 

 

물론 , 자칫하면 청교도 적이고 율법적인 것으로 변할 우려도 없지 않아 있다.

그러나 나는 느낀다.

날마다 주님은 큐티할 때마다 말씀으로 잡아 주신다.

딱딱함 보다는 부드러운 마음이 살아나오도록 하시어

오랜 가뭄으로 마른 땅에 젖어들어오는 가랑 비 같은 느낌을 들도록 하시는 것으로 보아

아직은 그런 위험은 없지 않을까 한다.

 

 참으로 묵상을 아침 마다 하면서 감사하온 것은

내 영혼의 깨질 수 없을 듯 강패한 - 표현이 맞나? ㅎㅎ - 철옹성의 필요없는 논리의 벽이 하나하나 깨져나가고 서서히 그 잔해가 갈아지면서 적어지는 느낌이 든다는 것이다.

 

 그 도구가 오늘 아침처럼 늘 주시는 말씀이다.

 

 

 

8. 누구에게서든지 양식을 값없이 먹지 않고 오직 수고하고 애써 주야로 일함은 너희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일련의 지표.

 열심히 일하라.

노력하라.

지치지 마라.

남에게 폐 끼치지 마라.

혹시 열심히 노력하다가 멈칫하게 만드는 송사가 있을 수 있다.

' 네 열심이 무슨 의미가 있어 ?

  누가 알아줘?

  그런다고 돼?

  네가 대단한 사람인줄 알아?..........'

 

9. 오직 스스로 너희에게 본을 주어 우리를 본받게 하려 함이니라 

 거기에도 주님은 대처 원리를 또하나 주신다.

 

' 본을 주어서 본 받게 하도록 하라.'

 

아니 주여,

어찌 저같은 부족한 자가..

 

' 지금까지 이끌어 오지 않았는가?

이끌어 와서 본이 되도록 하는 게 너의 몫이다.

본이 되어라.

넌 본이 되는 자다.

남을 위하여.. '

 

 

 

 

13. 형제들아 너희는 선을 행하다가 낙심치 말라


 

( 주님은  힘이 지칠 때는 야수와 같은 나일지라도 안식하게 해주셔왔다...)

 

 그러다가도 힘이 부쳐 지칠 수 있다.

오랫동안 난 리듬이 있었다.

세상에 살 때도 그러했다.

열심히 하다가도 지치면 얼마동안 TV나 만화, 아니면 당구나.... 탐닉하기도 했었다.

 

예수님 영접하고도

은혜 받을 때는 열심히 새벽교회도 나가고 성경도 읽고 사람들에게 열렬히 전도하다가도 어느 순간에 한참 동안 내가 왜 이리 열심이었지...하며 멍하니 생활하기도.

 

 그런 리듬은 시간이 가면서 굉장히 줄었지만 - 이것만 봐도 주님의 내 안에서의 살아계심을 알 수 있다.-아직도 그렇다.

 

 아버지학교, 전인치유, 아침큐티, 열심으로 하는 기도..

주님의 인도하심 따라 참여한다고 생각하며 나름대로는 열심을 부리는 일에 사람들의 반응이 시원치 않음을 보며 가끔은 혼자 보이는 열심이 창피한 느낌이 스치고 지나가기도, 식은 땀이 나기도 할 때가 있다.

그럴 때 낙심이 되는 경우가 없지 않아 있으며

한동안 바닥의 리듬에서 헤매는 경우가 있었다.

그러나,

나는 스스로 생각해도 주님이 좋아하실 만한 단 한가지의 장점은 있다. ㅎㅎ

그것은 오뚝이 처럼 다시 서는 것이다.

실은 그 분이 아니면 다시 쓰러져 그 험한 낙심의 골짜기에서 헤멜 것이 너무도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주님이 아니시면 난 죽을 목숨이었을 런지도 모른다.

실제로...

 

그럼에도 일어서는 그 과정까지는 난 처절한 나름대로의 싸움을 한다.

 

주님의 오늘 말씀은 그런 의미에서 굉장한 힘이 된다.

주님은 절대로 혼자 두시는 법이 없으시다.

명령하는 것 같지만 명령이 아니다.

그 증거로 정확히 정확한 시점에 말씀을 주시는 것이다.

위로다.

위안이다.

부족하고 버거운 에너지 탱크를 가진 자에게 떨어질 즈음 채워 주시는 에너지 보충이시다.

너희는 선을 행하다가 낙심치 말라 
 그냥 말라는 것이 아니시다.

그것은 낙심치 않아도 될 이유가 있으시기에 낙심치 말라는 것이다.

 

이런 것이다.

낙심치 말라는 말씀을 들고

십자가 앞에 내가 낙심할 일과 함께 가져가는 것이다.

장소 불문.

아무 때나...

그리고는 머리 놓고 가만히 생각하는 것이다.

해결하려고 몸부림 치는 것 자체가 굉장한 에너지의 소모이기 때문에 그냥 가만히 있는 것이다.

그러면

주님의 말씀이 살아서 움직이면서 낙심되었던 마음에 알지모를 기쁨이 솟아나는 것이다.

그것은 평화와 평강의 회복이다.

기쁠 수 없을 곳에 생기는 기쁨이다.

슬플 곳에 있을 기쁨이고

낙심 천만한 곳에 있는 희망이다.

이것은 머리에서 유희하는 말의 장란이 절대로 아니다.

수도 없는 많은 체험이 쌓이면서

그 체험이 세미한 음성으로 들리는 시간의 과정이 지나가다가

세미한 음성이 확신으로 변하고

한줄기 흐름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아,

 이것이 주님의 원리시구나.

 이래서 주님이 성경에 수천년간 동일한 경험을 가지신 분들의 입을 들어 쓰시게 하신 것이고

 이것이 살아 계신 하나님의 흔적이시구나.'라는 것을 알게 하는 것이다.

 

그러한 원리의 인식의 시작은 성질 급한 내가 억지로 억지로 참고 교회에 가기 싫은 것 물리치며 눈 감고 기도할 자격없음을 알면서 기대하지 않고 겨우 시작한 기도에서 예상치 못한 엄청난 기쁨과 소름치는 듯 , 작렬하는 번개에 맞은 듯 은혜를 퍼부을 때의 경험 부터 시작하여 하나하나 쌓여진 경험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최소한 나에게는.....

 

 오늘 말씀하신다.

너희는 선을 행하다가 낙심치 말라
"
선을 행하라.

 아.

 넌 선을 행했었다.

 조금이지만..

 지금하는 방향을 그대로 유지하라.

 이전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렇듯이 낙심케 하는 일은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낙심하지 말거라.

 알지 않느냐?

 내가 있다.

 알고있지?

 주하인~

 내가 있다.  "라고 하신다.

 

친구가 그래도 기쁠 것을..

난 하나님이 말씀하신다.

 

 

 

 

 

14. 누가 이 편지에 한 우리 말을 순종치 아니하거든 그 사람을 지목하여 사귀지 말고 저로 하여금

     부끄럽게 하라
15. 그러나 원수와 같이 생각지 말고 형제 같이 권하라

  위로가 되었다.

그러자 주님께서 다시한번 삶의 행동강령을 지도하신다.

참으로도 자상하시고 세심하신 분이시다.

가르치시고

위로하시고

기다려서 회복되자 또 가르치신다.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인간적으로 동정이 가고 불쌍해도 자르라.

깨우쳐라.

 

 우리 아내가 난 참으로 고맙다.

날 구원하기 위해 3년을 지혜로 참은 여인이다.

그리고는 끝까지 옳은 feedback을 통하여 여기까지 오도록 했다.

그럼에도 가끔은 지나친 면이 없지 않는가 하는 느낌이 드는 경우가 많다.

그 중에 일부가

교회나 가정에서도 주님 앞에 올바르지 않다고 생각하면 과감히 지적한다.

당찬 여인이다.

그 부작용이 만만치 않을 때가 없지 않아 있어보이고 너무 시끄러운 일이 생길 듯하여 속이 상하기도 할 때가 있다.

 오늘 말씀에서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자르라는 말씀에는 부합하기에 어쩔 수 없기도 하다.

그러나, 그 아래 구절에 나오는 형제같이 권하라는 말씀에 하나의 행동 양식 수정을 더 할 기회를 얻었다.

형제같이 권하라.

 

난 좋고 싫음이 너무도 분명하다.

지금껏 그게 자랑으로 생각하고 마음 속에 난 강직하다는 잘못된 개념으로 살았었다.

하지만 그것은 남에게 많은 상처를 입히기 쉽상이다.

주님의 원리는 어디까지나 화합이다.

우리 아내의 그 열정과 강직함에 사랑을 더함이 원리다.

 

앞으로 그리할 것이다.

노력하겠다.

주여 도우소서.

 

 

 

 

16. 평강의 주께서 친히 때마다 일마다 너희에게 평강을 주시기를 원하노라

 

 간구가 나오기가 무섭게 이리 또 말씀하시지 않는가?

묵상을 글로 쓰면서 난 그냥 손가락이 나가는 대로 마음이 시키는 대로 쓴다.

그것이 하나님의 인도로 이어지는 경우를 너무나도 많이 경험했기에...

 

지금이 그렇다. ㅎㅎ

주여 도우소서...하니 평강을 주라는 축복을 사도 바울 선생께서 직접 나에게 내리시지 않는가?

 

 

그 높은 산들도 주님의 손길 앞에서 어쩔 수 없이 갈아 닦여 나가게 된다.) 

 

 

주님.

오늘 하루 매사를, 일거수 일투족을 간섭하소서.

그리하여 말씀으로 주신 모든 것이 내 영혼에 각인되어 더  이상 빠져 나가지 못하게 하소서.

오랫동안 나처럼 내 삶을 좌지우지 했던 세상의 원리와 상처의 흔적과 그를 통한 사단의 역사의 원리가 갈아 없어지게 하소서.

부서지게 하소서.

부서진 것이 잘게 갈려

부는 성령의 바람에 날려가게 하소서.

흔적도 없게 하소서 .

그리하여 내 속에 남는 것은 오직 주님의 평강만이 되게 하소서.

그 평강이 희열일 줄 압니다.

그 끝없이 넘치는 희열로

이웃을 향하여 선한 영향을 미치게 하소서.

 

감사합니다.

오늘 하루 도우실 줄 믿습니다.

그 하루가 또 내 속에 쌓여 한걸음 주 앞으로 더 나가는 기회가 될 줄 믿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적용

 

1. 일상에서  위엣 것을 향한 것을 구분하여 본다..

 

2. 이익이 되어도 주님의 뜻이 아니면 자른다.

 

3. 내 일이라면 최선을 다하는 책임감을 가지겠다.

   화요 모임에 참여 하겠다.

 

4. 겸손하겠다.

   환자들에게 온유하게 대하겠다.

 

 


------------------ 과거묵상 2 ( 2011.06.18) 

 

 

형제여 힘내자

낙심할 일이 생겼는가

좌절할 때가 되었는가

어찌 너 그리

힘없이 앉아만 있는가

 

형제여

그래도 힘내자

나야

그래도 일어나자

 

내 손 붙들어 주시는

내 아버지

내 하나님

내 곁에 계시니

 

 좌절할 이유

어디에 있던가

낙심할 이유

그 무엇이던가

 

13.  형제들아 너희는 선을 행하다가 낙심치 말라

  낙심.

 잘나가다가 한순간 걸림돌 걸려서 넘어지면

마치 그동안 쌓았던 것들이 '모래성'인듯, 신기루인 듯

와르르 무너짐.

그리고는 그냥 하염없이 넋놓고 주저 앉아 있고 싶은 기분.

 

주님은 말씀에서 사도 바울님의 입을 통하여 그러신다.

'형제여... '

나 주하인을 형제라신다.

그러실까? 

정말...?

세상이 다 등돌릴 듯 해도 주님 만은 나보고 '형제여.. ' 하실까?

낙심된 이 마음에 '형제여' 하실까?

그러면서 그동안 해왔던 그 신기루 같던 것이 신기루가 아니고

'선을 행했음'임을 주님은 인정하시는 것일까?

 

 낙심되려는 마음에

주님이 '위로하신다'


 
14.  누가 이 편지에 한 우리 말을 순종치 아니하거든 그 사람을 지목하여 사귀지 말고 저로 하여금

      부끄럽게 하라
 그리곤 내 대신 이리 말씀하신다.

'그 사람을 부끄럽게 하라' 

그러고 싶지만 죄악인 듯 망설일 때

악동을 혼내고 싶은 어린 시절, 대신 위로하고 때려주겠다시는

그 고소함이 순간 .. 나에게 흐른다.

이토록 낙심될 때 '괜한 공감'이라도 위로가 되거늘

하나님은 사귀지 말고 부끄럽게 하라고 강하게 까지 말씀해주시니

위로가 많이 된다.


 
15.  그러나 원수와 같이 생각지 말고 형제 같이 권하라
  그러나 , 한마디 첨언하신다.

혼내지 말고 '권하라'.

맞다.


 
16.  평강의 주께서 친히 때마다 일마다 너희에게 평강을 주시기를 원하노라 주는 너희 모든 사람과

     함께 하실지어다 
   이 모든게 사람과 사람끼리의 끼리끼리 권커니 자커니가 아니고

하나님의 평강으로 그리됨을 다시 한번 느낀다.

그 분이 매일 매일 일마다 때마다

나를 위로 하고 평강을 쥔다.

그러기를 원한다고 바울 형제님이 나에게 그러신다.

나와 함께 하시는 성령님을 다시금 상기한다.

 

 

 주여

감사합니다.

친히 때마다 일마다 내 곁에 계신 주님을 믿습니다.

3분이라는 책의 콜튼이라는 아이가 다시한번

간단히 정의 했듯이

보좌 곁에 계시는 예수님과 달리 내 곁에 계시는 성령님을 느낍니다.

친히 때마다 일마다 나에게 형제임을 불러주시는

그 아버지 하나님의 성령을 기억합니다.

어제는 성령집회에 오신 순복음 'KYS' 목사님의 강력한 성령 체험에 대하여 말씀하신대로

그 가까이 계신 하나님을 기억합니다.

 그 주님이 오늘 아침 나에게

내 낙심을 아시고 공감해주심을 느꼈습니다.

그 하나님이 매사 매시간 매일 매일 매 순간마다 평강으로 날 잡으심을 알았습니다.

힘내서 다시 나가겠습니다.

이전에 힘썼던 것을 다시 힘쓰길 원합니다

좌절하지 않겠습니다.

넘어지지 않겠습니다.

제 모습 다시 찾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주여 도우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귀하신 이름 받들어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멘

 

 


 ------------------ 과거묵상 3 ( 2015.04.20) 

 

완전한 善의 조건 

 

 

13 형제들아 너희는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라  

'선善'

무엇이 선인가?

외부적 착한 일?

정말 매사에 진짜 '타인을 위한' 100%의 선한 일이 있는가?

 

그 안에 '내재된' 자아 실현 욕구는 없는가?

정말 온전한 '타인'을 위한 선은 이땅에서 가능한가?

예수 그리스도의 그것 처럼 온전 한 선 말이다.

 

'선'을 행하다 낙심하다.

그것은 어떤 이유던가? 그러면..

낙심하는 것은 '상대'의 반응에 따른 것이다.

어쩌면 '바램' 이 있을 수 있을 지 모르고 (칭찬.. 이차이득..^^;;)

허기진 마음을 채우기 위한 자신도 모르는 목적의 선을 행함.. 등이

오래 되풀이 되는 변화 없음에

좌절하거나 낙심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15 그러나 원수와 같이 생각하지 말고 형제 같이 권면하라 

 그런

타인의 반응, 눈에 보이는 조건에 대한 기대를 염두에 둔 '선'은

그와 반비례하는 실망이 생기기 마련이다.

 

그럴 때 생기는 실망은

때로는 '일상적'인 수준을 넘어서는 '실망'을 유발하여

그렇지 않을 상황에

원수와 같은 미움이 뻗칠 수도 있다.

실망이 커져 모든 사람을

일률적으로 오해할 이유가 생기기도 할 수 잇다는 말이다.

 

그러기에 성경에서는 그것을 알고

이렇게 단도 직입적으로

'원수와 같이 생각지 말고 형제 같이 권면하라' 라고 하고 있다 .

그 실망에 반하여도..

 

그렇다면

이제 '선'을 행함에 대한

올바른 생각으로 돌아가야 할 것 같다.

 

 마음에 다른 '이익'을 바라는 것은 없는지

혹여 무의식적으로 끌려 다니며 하는 '선'은 아닌지

너무 의식하다 진짜 '선'을 행하는 데 머뭇거리게 되는 것은 아닌지

온전하지 못한 '가식적 선'에 대한 거부감은 너무 심한 것은 아닌지

어디까지 온전하지 못한 가식에 대한 용인은 가능한지... ..

생각할 것이 많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들의 꼬임은

자칫 삶의 활력을 잃게 하고

자신 속에 파묻히는 오류를 범하여

말씀에서 지속적으로 '선'을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단지 '잔소리 ^^;;' 내지 부담스럽고 고리타분한 소리로 만 남아

믿음에 장애가 되는 경우가 없지 않을까 싶다.

 

그렇다면 '선'은 무엇인가?

고백했듯이

온전한 이타의 의도로 인한 착한 일이다.

그러나 불가함은 위에도 고백한 바 처럼,

인간 '원죄'적 특성 때문에 불가한 이야기다.

누구나 , 자신이 가장 먼저다 .

아무리 고상한 논리로 얘기해도

그 근본은 '맨슬로우'의 동기를 들먹이지 않아도

'자아 성취의 욕구' 가 그 바탕이 있음이고

그것은 결국 , 근원에 악함으로 갈 수 밖에 없다 .

 

 따라서 인간으로

'선'을 행할 수있는 자 어디에도 없다.

 

그러나, 그러함을 모르시지 않을

너무나 당연하신 '전지全知'의 하나님께서

'위의 말씀'을 하실까?

 

선을 행하려다 반드시 넘어질 우리,

그래서 원수같이 대하지 않으려 해도

속상함이 마구 요동칠 '선'의 끝에

어찌 그러지 말라고 하실까?

넘어지고 쓰러지게..

 

 

 

 

16 평강의 주께서 친히 때마다 일마다 너희에게 평강을 주시고 주께서 너희 모든 사람과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 
 주님께서는 하실 수 있다.

그 답이 '평강'이다.

 

주님이 주시는 '평강' , 샬롬은

모든 불가능한 인간의 흐름을 가능케 하신다.

원수를 사랑하게 하실 수 있고

자식을 죽인 자를 용서할 수 있는 주기철 목사님 같은 용서도 가능케 하신다 .

그 아픔... 그 어려움,...

오직 하나님.,, 오직 주의 평강으로만 가능한 용서다 .

 

주님이

'선을 행하다 낙심하지 말라.'

' 원수같이 대하지 말라' 시면서

그 대안으로 '평강'을 말씀하신다.

 

주여.

귀하신 내 하나님.

용서 못할 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선하지 못할 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이처럼 말씀으로

유효적절하게 지적하시고

깨닫게 하시고

평강으로 인도하시면 말입니다.

그 강력한 은혜에 거하면 말입니다.

 

주여.

부디 매일 같이

주님의 말씀

살아계신 하나님의 은총에서 멀어지지 않도록

제 의지를 붙드시고

제 믿음을 정리하시고

제 선한 의지를 도우시사

늘 평강에 거하게 하소서.

 

주위의 조건에 상관없는 평강,

하나님의 폭포수 같은 은혜의 평강 말입니다.

 

주여.

제게 샬롬으로 다가오셔서

제 무거운 십자가 가벼히 하시고

모든 짐을 내려 놓게 하시며

묶인 끈을 푸시는 하나님.

 

오늘도 주님의 말씀하신 선을 위하여

용서하고 풀 길 선택합니다.

도우소서.

그리하실 줄 믿고

그리 될 줄 믿으며

평강으로 오늘 하루 또 성장해나갈 저를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받들어

감사하며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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