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칙한 QT
매우 크게 오래 기뻐함[마2:1-12] 본문
왠지 기쁘다
왜인지 밝다
매우 크게 기쁘다
인생은 아직도
질기고 끈적거리게도
나의 발목을 잡아서지만
주의 빛을 보게되니
어느새 달라보인다
살 만하고
볼 만하다
이처럼 오랫동안
주님의 살아계심을
기뻐할 수있음이
진정한 복임을
깨닫게 하시니
나 정말 기쁘다
기쁘고 기쁘다
매우 크게 기뻐할 일이다
2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하니
3 헤롯 왕과 온 예루살렘이 듣고 소동한지라
5 이르되 유대 베들레헴이오니 이는 선지자로 이렇게 기록된 바
'메시야'로 기록된 그 이가 세상에 오신
증거가 바야흐로 나타나
갑자기 예루살렘 성내를 흥분의 상태로 뒤흔든다.
이것은 뜬금없는 '업자'들의 홍보성 이벤트에 의한 것도 아니요 ^^;;
세상을 흉흉하게 하는 이단 괴수들의 가짜 작업 멘트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분명히 오신
아기 예수의 흔적을 따라 온
동방의 선지자들의 입에서 나온 소리에 의함이다.
그러기에 세상의 흥분은 '당연한 일'이다.
비록 헤롯들은 흥분이 '위기의식에 대한 흥분'이고
민중의 대부분은 그 어려운 시대를 숙명이려니 살아가지만
그 숙명을 견디게 하는 이유가 '메시야'에 대한 기대였을 것이다.
그러다가 드디어는...
그러니 얼마나 흥분들 했을 것인가?
문제는 이것이 단지 거짓이나 풍문에 지나지 않는 흥분이 아니고
'사실'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결국'은 또 잠잠하게 되었을 것이다.
'대중'의 입장에서 말이다.
그들은 '진리'를 거의 대부분 맞닦드리지 못했기에 말이다.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인가?
'진리'를 기뻐함.
누구나 기뻐하거나 아니면 두려워 한다.
그러나 그 진리에 의한 기쁨도 시간이 지나가면
그 진리의 진실 여부와 상관없이 흐려진다.
예수님께서 하신 '가시 밭에 던져진 씨' 비유처럼 말이다.
10 그들이 별을 보고 매우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더라
그러나, 그게 아니지 않는가?
그 분을 본 동방의 선지자들처럼
기뻐하고 기뻐해야 됨이 마땅하지 않던가?
그것도 '크게' 기뻐하고 기뻐함...
아니 '매우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여야 할 것이다.
오십배 백배 .. 이땅의 천국을 기뻐해야 하지 않던가?
난.. 어떤가?
난 지금까지 기뻐함이 사실이다.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 절절한 첫사랑에 빠진 후
그 기쁨이 흐려질 즈음
말씀을 사모하기 시작하게 되고 (된 것이다. 내가 한 것이 아니고.. )
한참의 시간 후 '큐티'라는 말씀을 묵상하고
진리이신 하나님이 살아계심의 사실을 매일 경험하며
지금까지도 내 하나님에 대한 한마디의 느낌은
'기쁨'이다.
살아계신 그 분을 기뻐함..
그것은 내가 나를 보아도 '특심特心' 이다.
참 신기하다.
매사에 싫증을 잘 느끼던 내가
십수년을 놓치지 않는 변함없는 '기쁨'의 유지..
그것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증거가 아니던가?
문제는 그 기쁨이 매일 매시 매초 끊임없이 유지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
나도 사람.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
본성을 지니고 있고
오래된 아픔을 잊기 위한 습관으로 ,누구보다 '망각의 메카니즘'이 발달하여 있는 자.
그러기에 기쁨은 자주 잊혀지려 하고 있고
그럴 때마다 '멍~'하고 내 살아온 게 .. 하는 의혹이 오려 할 때도 많다.
하지만, 하나님은 말씀을 접할 수 밖에 없는 상황으로 날 인도하시고
그때마다 '통쾌한 ' 기쁨,
보좌로 부터 오는 통쾌한 (사도행전 표현 그대로 !!) 기쁨, 전율로서 나를 붙드셔서
여기까지 기어오고 무릎으로 오고 겨우 겨우 끌려오는
부끄러움이지만
그래도 '기쁨'이신 하나님을 잊지 않고 오고 있음이다.
그게 참 신기하다.
내 본성이라 생각했던,
그래서 매사에 이것 저것 왔다갔다. ..
직장도.. 인간관계도 오래버티지 못하던 내가
이리오래 꾸준히 한자리에 한모습으로 있게 되니
그것이야 말로 하나님이 하신
나만이 알 수 있는 '증거' 아니시겠는가?
연말 연초
계속 도전은 나를 밀고 들어온다.
그래도 잘 버티고 있지만
버티기에는 '버티지 못할 만큼' 어려운 시간들이 공격을 해온다는 의미를 포함하고있다 .
당연히..
그 버티지 못할 어려움들은
현실적인 문제도 있고
인류 보편적이고 생물학적인 이유도 있다.
그러면서 교묘한 '사단의 심리적' 공격도 있다.
신명기 8장의 표현처럼
인생은 참으로 '불뱀과 전갈'이 쏘고 무는
강렬한 아픔과 쓰라림의 연속이다.
그러나, 그러함에도 하나님의 반석에서 물내신 기억들은 너무나도 뚜렷하고
목이마른 광야의 갈증처럼 '심적 갈증이나 갈등'도 산재해있지만
그 물과 만나의 도움으로 힘내어 가게 되어 있다.
문제는 그러한 연단의 도구들의 당연함과 그로 인한
겸손과 마침내주실 복의 연계성을 너무나 잘아고 있음에도
자꾸 '무기력'해지려 함이다.
이제 오십몇년을 살다보니
어려움 자체보다는 어려움에도 이제 더 이상 싸워 이겨내
연단을 불처럼 이겨내야 하는 '의욕'이 감소되어
그냥.. ..그렇게 되겠지 하며
아픔 조차 덜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기쁨이 줄어든다는 표현이 맞다.
더 강렬한 기쁨.
그냥 그냥 살다가 가버리면 될 것 같은..
오늘 묵상의 '대중'같은 강력한 기쁨 후의 잊혀져 가는
진리에 대한 살아있는 역동적 기쁨 같이 말이다.
오래 지속되면 안된다.
주일.
예배를 마치고 서울에 다녀왔다.
인터넷 서핑 중 발견한 특별한 설명회에 대한 것이다.
말씀 가까이 살면서도
길어지는 인생의 스트레스에 따른 '무기력' 을 회피코 해보자하는 심정도 있고
현실적인 목적도 있었고
내게 '자극제'가 되는 목표 설정을 위해서도 이다.
하지만, 역시.. 다.
그리 녹녹치 않다.
단 가능성은 봤다.
돌아와 쉬려는데 '무기력'이 날 자극하려한다.
TV에 머리를 뭍고 정신을 몰두 했다.
잘 녘이 다와서 기도를 했다.
기도만 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심을 느낀다.
기도하기까지 막아서는 무거움이 늘 문제지만...
아침에 묵상한 요셉의 '착함'이 기억나고
더 크게 그의 끊는 게 '단지 착함'을 벗어나지 못하는 '죄'일 수 있음을 기억나게 하시고
인간의 거역할 수 없는 '원죄'적 현상을 넘기 위해서는
반드시 성령의 강력한 '현몽'으로 만 가능함을 깨닫게 하신다.
내 속의 '죄'들.
이제 바닥까지 다가왔음을 난 안다.
계속 '이긴 싸움'에 묵상의 포인트를 집중하게 하시면서
근본의 핵심 신념들.. 가나안 다섯왕...을 깨닫게 하시는 하나님께서
그 왕들을 마주하게 하시는 것이시다.
갑자기 깨달음이 날 깊이 기쁨으로 치달리게 하신다.
어제를 15분 정도 남긴 시간에 '컴 '앞에 앉았다.
기쁨으로 가슴이 요동친다.
묵상을 마무리하게 하신다.
쉬지 않고 폭풍처럼 내손을 이끄신다.
마음이 날아갈 듯 기쁘다.
그렇다.
오늘 묵상의 포인트처럼
'하나님을 오래 기뻐함'이 가능함은
선택된 '소수'의 특권이다.
그 소수에 속하여 감을 기뻐하여야 한다.
더 기뻐하고 감사할 이유를
오늘 묵상을 통하여 주님은 보여 주신다.
이 어렵고 힘들고 지친 삶에서
주님은 날 또 한발 걸어나갈 힘을 주시고 계신다.
내 사랑하는 주님께서
진정 기뻐할 실체를 보여 주시고 계신다.
남들은 다 공중의 연기처럼 흩어져서
분명히 보았지만 그랬던가 하는 .. 그러면서 다시 거짓의 허상의 세상에서
허덕거리는 것을 숙명처럼 살아가지만
난 허덕 거리고 지쳐하지만
진정한 기쁨의 실체를 보고 나가게 하신다.
좁은 길이지만 난 그래서 기쁘다.
주님이시여
오늘은 진정한 기쁨을 오래 크게 기뻐할 자,
그 자가 바로 주님이 진정 기뻐하시는 소수이고
소수는 선택받은 자들이며
난.. 어쩌면 지금까지는 잘 나가고 있음을
주님이 이처럼 정확히도 만져주십니다.
주여.
감사합니다 .
날 생각하고 어루만지심을 기뻐합니다 .
그래서
일상의 내 잘못된 생각들이
그 기쁨 하나 만 가지고 다시정리되어
힘내어 승리할 수 있길 원하나이다.
주여.
어제 주신 말씀대로
내 위치에서 내 할바를 주님이 말씀하신대로
그들의 , 상황의 변함과 상관없이
붙들어 지킬 힘을 주소서.
저에게 깨닫게 하신 '소수의 기쁨 특권자'로 더 힘내게 하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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