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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연하라 주하인아(그들에게 무얼 기대하랴)[마20:17-34]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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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연하라 주하인아(그들에게 무얼 기대하랴)[마20:17-34]

주하인 2023. 3. 13. 06:37

(펌)

어떤 상황

어떤 위치에서도

 

오직 하나님

오직 예수님

오직 성령님의 은혜로

 

담대하고 

지치지 않고

오직 차분히

나의 하루를 행할 수 있는 것

 

그게 초연함이 아닐까

주님이 내게 보이시며

그토록 바라시는 

승리의 기록들...의 궁극 

 

샬롬

샬롬

샬롬

 

17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 하실 때에 열두 제자를 따로 데리시고 길에서 이르시되

 예수께서 

특별히 사랑하시는 자들을 

따로 (따로라는 표현에 '나'.. 좁은 길을 가는 우리가 포함된 것은 아닌가?  자랑스럽고 힘이 난다..)

데리시고(특별한 선택에 대한 감사함이 느껴진다.. 가슴이 뜨거워진다)

길에서(아.. 얼마나 급하고 힘드셨으면... 조용한 장소도 아니고.. 길에서..ㅜ.ㅜ)

이르셨다 하신다. 

 

 오늘은 예수님의 인간적 모습을 발견하게 하신다. 

 

18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19 이방인들에게 넘겨 주어 그를 조롱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 박게 할 것이나 제삼일에 살아나리라

 그 분이 '인자'라 스스로 지칭하고 계시지 않는가?

완전한 인성을 가지신 '인간' 예수님의 초조함 말이다.

마음의 갈등

괴로움.

 

 신성을 가지신 예수께서 

반드시 거쳐나가야할 '십자가 사역' 의 고통과 

하나님으로서 받아야할 조롱과 비아냥을 

미리 아시고 계시었으나 

인간 예수로서 모든 '고난과 고통'을 이겨내기에는

너무 힘드시기에

'보라'.. 라 시는 말씀으로 

그 '길'에서 

제자들

아무 도움이 안될 줄 아시면서도 

그 아픔과 힘듦을 '말씀'하시고 계심이시다. 

 

 그 마음의 힘듦과 

심적인 부담이  

새삼 가슴에 깊이 다가온다. 

 

주여.. 

죄송합니다. 

주여.. 

감사합니다

 

20 그 때에 세베대의 아들의 어머니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니

그런데 

바로 그런 '그 때에'

여지없이 우리네 미련한 '인생'들은

'이기적 구함'을 행한다. 

 

21 예수께서 이르시되 무엇을 원하느냐 이르되 나의 이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아...

그 마음이 마음이랴... 

 예수께서는 한톨의 위안을 받지 못하셨고

 

뒤통수를 맞은 듯

그들의 이기적이고 미련한 요구를 들어주신다. 

마치.. 아무 일 없으셨듯

저런 '길 위'에서 돌연 '제자'들을 모아 놓고 자신의 괴로움을 

조금이라도 들어주셔서 위로 받길 원하셨지만 (맞지 않으실까? .. 인자 예수님이신데... 그 모진 십자가의 고난을 앞두시고 두려워 하는게 당연하지 않으실까?.. 우리네 인생들의 버거운 고통을 일일히 다 체휼하시는 주님이시지 않을까?  그게 우리에게 힘이 되고 오히려 위안이 되지 않으신가? 그분이 약하신거.. 나 주하인의 특기인 이 약한 자기 연민..........ㅠ.ㅠ.. 말이다)

단 한마디도 그들, 인생들에게는 받아 들여지고 

그들의 가슴을 잠시나마 숙연하게 하지도 못했다. 

 

 그들은 

이 인간들은 철저히 .. 정말 철저히 자신들의 욕심으로 

자신들의 문제에만 관심이 있었을 뿐이다.

 너무도 당연하게도 그들은 '예수'께서 원하시는 방향과는 전혀 다른 이기심으로 

그 분을 좆았고 마지막까지 자신들의 원함만 내세웠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초연히도 일말의 배반감이나 속상함 혹은

기대가 무너진 실망에 대하여 표현하지 않으시고

무엇을 원하는 가 물어보시고 

 

26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지도 하신다.

 

31 무리가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더욱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지라
32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그들을 불러 이르시되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34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그들의 눈을 만지시니 곧 보게 되어 그들이 예수를 따르니라
그리고 '무리'들의 원함.. 

공생애 사역의 중요한 일부인 '치유' 사역을 행하시었다. 

다시.......예수님께는 잠시라도 가져야할 

오직 스스로를 위한 시간은 허락되지 않으시고 

무리에게 둘러쌓여 마치 워크홀릭들의 그러함처럼 일에 빠져 들어가시게 된 것이다. 

 

아..

오늘내게 보이심은 무엇이신가?

 

 인간 예수님의 '인성'을 보이심으로 

그 분은 결코 '하나님'으로서 모든 인간을 초월하여 

다 아시고 아무렇지 않게 하나님이 일만 하시다 가신게 아니시라는 

당연한 관점이다.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인간의 마음을 다 체휼하시고 가신 것이시다. 

그 모든 아픔과 고통을 

누구보다 더 크게

인생 모두의 어려움을 다 하나하나 체험.......

체험하고 긍휼히 여기실 준비인 '체휼'하고 가신 것이시다. 

 그러기에 그 분은 

오늘 ,

나 주하인 의 특기인 ^^;; '자기 연민'에 들어갈 만한 

저 절해고도의 외로움의 상황에 대하여

저리도 절절히 상황을 마주해 보이심이시다. 

 

 그리고 그 '외로움'과 '배반감'.......

예기 불안,

알지만 하나님의 명령이시고 지상과제이시니 피할 수 없는 

절해고도의 외로운 두려움.. 

그 아픔이 칼로 쑤시는 듯한 '가슴 앓이'로 표현될 절절함... 

무엇보다 같이 있지만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오직 홀로 감당해야할 괴로움과 더불어

'사역'의 현장으로 나가지 않으면 안될 과정 중에 있어

또다시 아무렇지 않은 듯 

정말 아주 잠시 드러낸 저 절박한 괴로움을 갈무리하고

아무렇지 않은 듯 또다시 

타인의 '아픔'을 어루만지시고 

치료 사역을 행하시었으며

예수님의 그 고난을 이해하여줄 능력조차없는 

철저한 '타인'의 무리들.... 을 데리고

줄레 줄레 따라오는 그들 '온통 이기주의 무리들'.. 속

군중 속의 외로움으로 

예수님은 '인간이 겪을 수 있는 모든 심리적 고통'을 

그것도 '십자가 고난'을 앞두고 

감당하고 보여주시는 것이시다. 

 

 그런데 그 예수님의 그 상황 그 모습을 

한마디로 정의해보라면 

'초연함'이시다. 

 

 모든 '사단의 감성(^^;;; , 사단이 준게 감성이라면 말이다... 미움 , 분노, 외로움, 괴로움, 실망함, 처절, 배반감 ..........이게 감성이라 할수 있을까? .. 왜곡된 생각들의 꼬임이지... 하지만 감정과 퓨전된 꼬임을 일단 감성이라 표현보자면 그렇다는 이야기다... ㅠ.ㅠ;;;)을 가슴에 갈무리하시고 

주님은 

이 땅에 보내신 자신의 사명,

자신이 어떠한 분이신지 '정체성'을 잃지 않으시고 

모든 '상황'을 다 받아 내시는 것이시다. 

 

그것이 '초연함'이시다. 

내가 누구인지 알아, (아.. 정확히는 잊지 않으면... )

해야할 일을 다시 힘을 내서 할 수 있는 상황........

그것을 '초연함'이라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문제는 

그 마음의 흔들림을 과연 '의지'로 

혹은 잘 연습된 인격의 힘으로만 가능하던가?
 '영적전쟁'에서 

정말 '홀로' 이겨내시길 주님이 바라셨을까?
예수님은 '성령'과 하나되신 분..

비록 그 어려움.. 인간의 본성은

'성령께서 얼굴을 가리셨을 때' .. 이시겠지만

다시 성령의 도우심으로 

철저히 이겨내심이 아니실까?
  아니시면 당연히도 '승리의 기억', 

삼위일체 하나님으로서 겪으시는 '간증의 기억'들.........로 

자연스레이 이겨내시게 됨이시다. 

 

 어제 그랬다. 

수영하다 .. 거의 십년 가까이를 하던 '레인'에서 

조금 느리게 간다고 (아.. 늙어서 인지.. 장거리 수영하면서 천천히 하던 버릇이 남아서.. ) 

옆레인으로 옮기라는 

아르바이트로 보이는 처음보는 수영 강사의 이야기를 듣고 

잠시 혼란이 있었지만

말씀을 근거로 '나를 부인'하기로 마음먹고 

예상되어지는 여러 어려움 (그 중에서도 물 속에서 지쳐 숨이 차면 , 옛날 물에 빠져서 죽을 뻔하던 기억이 올라올까봐 무서워지며 몸에 힘이 들어가고 , 쫓겨내려가는 손가락질도 두려웠다.^^;) 을 극복하고

나름 여러 방법을 대안으로 세우고 기도하며 들어간 이유로

아주 잘 적응하고 

오히려 많은 운동을 하고 나오게 된 일이 있다.

그러함..

내 이전의 습관으로는 '흥분'하고 수영장을 옮겨버리거나 했을 

그러함을 이기는데는

나를 부인하고 

정말 아무렇지 않게 변화시켜 이겨낸 

하나님 안에서의 승리의 기억들이 

전혀 해보지 않던 그런 습관의 변화를 아무렇지 않게 한

승리의 기록으로 남게 하셨다. 

할렐루야.. 

 

 각설하고 

주님 예수께서 

내게 그러시는 것 같았다. 

 

"주하인아... 

아.. 주하인 같은 좁은 길 가는 자들아...

주하인들아.... ^^*" 하시며

"그들에게 

무엇을 바라랴..."하시는 듯하게 들린다. 

 

그리고 

"나처럼 초연해보거라

그리고 네 할일.. 또 해보거라.

네 어려움이 누구에게 읽혀지고 위안을 받을 가능성이 없느냐?

그게 좁은 길 가는 자의 결국이리라 .

결국 그렇게 외롭게 가는게 십자가의 길이다. 

인생이 그렇다. 

그러나.. 그렇다고 

가능치 않을 주변을 향하여 

그 공감 부족하고 오직 자기만을 바라는 본성의 인생들에게

무엇을 바라랴.. 

오직 네 가슴 앓이만 심해질 것을 .. 

내가 도우리라. 

내가 도왔지 않았던가?
성령으로 

은혜로

감사로

행복으로 

자신감으로.........

위안으로.............

그렇다..

나만 바라라.

하나님 만 바라라.

그얼굴의 도우심으로 오히려 네가... " 하시는 것처럼...

할렐루야 .. 맞다. 

 

  그렇다. 

난.. 

내가 누구인지 안다. 

그렇기에 나도 모르게 또 세상을 향하려는 

위안을 받고자 하는 마음을 내려 놓고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 가운데 

내 할일을 묵묵히 또 하여 나가리라. 

과정에서 해결할 수 없는 것은 

반드시 지어야할 십자가로 받아 갈무리 하리라.

 

어제.. 수영장의 스스로의 받아들임... 

이전... 하나님의 말씀이 있으셔서

내 수술 기법을 바꾸면서 까지 내려 앉은 후

놀라운 변화가 내 현실에 나타난 

그 승리의 기억으로 

또다시 오늘 하루 내 삶의 현장에 다가올지 모를

그 모든 버거움.. 외로움... 괴로움.. 배반감을 

주님 앞에만 내려 놓으리라.

그리고 또 내게 남은 길을 한걸음 더 나아가리라. 

할렐루야.

 

 

 

 

주님.

감사합니다. 

그 외로움과 괴로움

인생 내내 가슴앓이로 다가온 '배반감'... 모두를 

주님 앞에 내려 놓습니다. 

 

제게 허락되어진 길.. 

제가 누구인지 다시한번 주님 안에서 확실히 인식하고

주님 허락하신 내 길을 또 한걸음 천천히 떼오 보겠나이다 

전... 

너무도 부족하니 

주여.. 조금은 더 가볍게 하시어 주시고 

주님 더 큰 은혜로 붙드소서.

 

아.. 주님. .

제 손녀 김 ㅇ ㅂ .. 아시지요?

강하게 붙드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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