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칙한 QT

내가 그리 여기니 넌 옳다신다[롬9:1-18] 본문

신약 QT

내가 그리 여기니 넌 옳다신다[롬9:1-18]

주하인 2023. 6. 13. 07:06

(펌)

하는 짓 아직 그래도

주님은 날 귀히 보신다신다

 

주님은

주님의 뜻가운데

날 보시고

세상을 보시며

 

긍휼히 여길 자

긍휼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길 자

불쌍히 여기신다신다 .

 

괜한 판단

어이없는 고민

가슴을 지쳐오는

감당할 수 없는 스스로의 정의와

끝없이 되풀이하던

바로의 곁눈질...

 

이제 그만 내려 놓고

주 안에서 

안식을 누려도 될 듯하다 

또 다시 .

 


14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당연한 이야기지만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절대로 옳으시다. 

 

15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보라.

하나님께서 "내가" ...라 하셨다. 

확실하게 도장을 찍으시고 

거기에 이견을 달 것도 고민을 할 것도 없이 

그냥 믿으라시는 의미로 말씀하신다. 

 

 그리고 말씀이 이어진다. 

"내가 

긍휼이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길 것'이다. " 라고..

 

 갑자기 힘이 난다. 

나.

자꾸만 조금씩 조금씩 흔들리려 한다. 

그런데 난.. 그래도 주님 안에 있음을 확신하고 있다. 

내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주님이 날 사랑하심은 

이제는 전혀 흔들리지 않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그런 나를

주께서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기시니' 그것으로 족하다는 느낌.

 

당연하지만 

흔들리려 할 때 붙들어 주시는 ...

"주하인아.

난.. 너를 긍휼히 여긴다. 

주하인아. 

난 .. 너를 불쌍히 여긴다. 

그것으로 족하지 않은가?

내가 널 사랑하고 긍휼히 , 불쌍히 여긴다는 데

그 어떤 논리가 필요한가?"..다.

위안이고 위로다. 

그게 힘있게 다가온다. 

 

오늘 말씀으로 .. 

 

17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그리고 말씀이 이어지신다. 

 

 '바로' 

애굽의 왕

불신자 중 최 상급의 상징.

사단의 , 세상의 권세잡은 자 안에서 지금 물질계에서 잘나가고 있는 자의 상징.

 

 지금 눈뜨고 세상에 나가면 

또 마주할 수 있는 마냥 부러울 수 있을 자의 상징...이기도 한

바로 .

 

 그 바로를 

주께서 

'내가

이 일을 위하여

세웠다' 신다. 

 

 당연한 것 아니던가?

온 우주를 말씀으로 만드시는 '권세와능력' 을 가지신 분이

이곳 , 이 지구에 인류를 만드시고 세우신 이유.. 

그리고 자유의지를 허락하시며

사단을 '도구'와 매개로 

'아담의 선택'과 

그 후의 출애굽과 

지금 세상까지 이어올 동안 

'바로'로 표현되는 사단은 주님의 도구로 허락되어진 자일 뿐임은

욥기에 극명히 드러나 보이기도 하지 않은가?

문제는... 

이땅에 몸을 담고 살아가면서 

이 지루하고 버거운 육신 안의 삶을 살면서 

가장 직접적으로 눈에 보이는 '연단'의 매개체 중 힘있는 대상이 

바로 바로다.^^;

 

 그러기에 알면서도 매몰되는 

이 어이없는 미련한 주하인을 위하여

주님께서 다시한번 상기시키신다. 

 

바로마져

내가

이 일을 위하여 (이 일이 무얼까?... 내 인생에 펼쳐진 어떤 진정히 중요한 의미.. 하나님을 위하여 사는.. 내 인생 , 이 부족한 자의 테두리 안에서... ^^;.. 알지만 실제로 의미로 다가와 오늘 하루의 힘써 지켜나가야할 의미..는 아닐까? ) 허락하신 존재일 뿐이라신다. 

 

 그렇다면 내게 하시는 말씀은 무엇일까?

 

당연히 하나님을 집중하는 삶.

그 삶의 기조가 흔들리지만 않는다면

세상의 그 어떠함도 

질투도

좌절도 

흔들림도 

홀로 두려워하거나 외로워할 

하등의 일이 없다는 이야기 아니시던가?

 

 바로마져도 

나랑 하등 상관없이 질주하듯이 잘나가는 세상 마져도 

주님께서 허락하신 것이시고

오직 주님의 뜻, 주님의 시간 .... 주님이 의도하신 안에서 

그리 되어가는 것 처럼 보이는 것 뿐이시라는 이야기시다. 

당연히도.. 

 

18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
 보라. 

긍휼도 

심판도 

악도 선도 

정의도 불의도 

다 하나님의 영역이시다. 

 

내가 고민할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냥 

오늘 , 지금도 내가 

주님의 기쁨을 갈구하는가

주님의 뜻 안에서 머무는가.......가 중요할 뿐이다. 

 

 

정의란 무엇인가 (팀켈러)라는 책을 읽고 있다. 

팀켈러 목사님은 얼마전 소천하신 분이지만

그 영성이 참 마음에 든다.

 읽다가 공감하는 부분 몇구절을 아래에 옮겨 보았다. 


하나님의 은혜를 이해하고 체험하는 일과 공의를 추구하며 가난한 이들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은 떼려야 뗄 수 없을 만큼 단단히 연결되어 있었다 

하버드대학의 일레인 스캐리(Elaine Scarry) 교수는 「아름다움과 바름에 관하여」(On Beauty and Being Just)라는 멋진 책자를 펴냈다. 그의 주장을 한마디로 압축하면, 아름다움을 체험할수록 자기중심적인 가치에서 벗어날 수 있으며 더 열린 마음으로 정의를 좇게 된다는 것이다. 실제로, 지난 수십 년 동안 목회 현장에서 그런 장면을 수없이 목격했다.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의 아름다움을 체험한 이들은 누구보다 강인한 의지를 가지고 정의를 추구했다.


.공의’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미쉬파트’(mishpat)다.
.레위기 24장 22절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거류민에게든지 본토인에게든지 그 법을 동일하게(미쉬파트)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여 이르시기를 너희는 진실한 재판을 행하며 서로 인애와 긍휼을 베풀며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와 궁핍한 자를 압제하지 말며 서로 해하려고 마음에 도모하지 말라(슥 7:9-10).

어떤 식으로든 취약 계층에 속하는 이들을 외면하는 처사는 자비와 자선의 부족이라는 차원을 넘어 정의, 곧 미쉬파트를 짓밟는 행위로 규정해야 마땅하다. 하나님은 사회 경제적인 약자들을 사랑하고 돌보시는 분이며, 크리스천들 역시 그러해야 한다. 그게 바로 ‘공의를 행하는’ 일이다.

언뜻 보면 은혜와 공의만큼 서로 상반되는 개념은 없을 듯하다. 공의는 해야 할 일을 정확하게 행하는 이들을 택하는 반면, 은혜는 받을 만한 자격이 없는 이들에게 혜택을 준다. 크리스천은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 곧 값없이 베풀어 주시는 사랑을 받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혜와 맞닥뜨린 이들은 어김없이 공의로운 삶으로 이끌렸다.

  공의, 정의는 

우리 하나님을 믿는 자들에게는 필수 불가결하게 나올 수 밖에 없는 

'품성'이 되어진다.. 는 개념이시다. 

 

 그리고는 이어지시는 내용이 

'자기 홀로'에 머물지 않고 

반드시 '관계'속에서 세상을 통해 그 정의로움이 흘러 나올 수 밖에 없다는 게 요지고

그것을 '오늘날 세상'에 접목하는 방법론과 

그 반론에 대한 여러 사례를 예로 들며 

아주 공감되는 이야기를 써 내려 가고 있으신 '좋은 책'이다. 

 

 그런데 읽어가며

난.. 좀 다르다는 

그들, 보편적이고 열심이고 .......나와 다른 성품을 가진 (내가 독특하다는 이야기다. ^^;

주님 안에 올바로 성장하는 자들의 당연한 그러함에 

조금은 '흔들리려 했다 ' 

 

그러면서도 공감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정의'란 절대로 앞서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전제로 흘러나오는 '현상'의 성격이란 것이 함축적 핵심이다. 

 

당연하다. 

은혜 후 나오는 현상이 공의라 하지 않은가?

주님의 은혜에 겨워 안절 부절하지못하고 

당연히 그리될 수 밖에 없는 것............

 

 

그런데 

그리하기 위하여서는 

당연히  하나님 안에 있음이 우선이고 

하나님이 무조건 옳으심을 인정하여야 한다. 

오늘 말씀이 그렇다. 

 

때로는 살다보면 

이게 무슨 '정의야'......할 흔들림이 왜 없겠는가?
그런데 ......그러한 정의와 공의를 따르려 하다보면

그 안에 '왜 바로'의 비교가 없고

공의롭지 않아 보이는 '정의'.. 

하나님이 너무 심할 것 같은

어쩌면 시대에 맞지 않는 가치 같은 흔들림이 왜 없겠는가?

더더구나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님을 확실히 알아도

시대의 가치...

바로의 성공이 너무도 화려하여 

비교되어 주눅드는 일이 왜 없을 것인가?

 

 난...

위와 같은 생각이 너무 많아 

은혜의 너무도 아름다움..을 깊이 많이 체험했음에도 

함부로 '공의'로 뛰어들지 못하고 있는.. 

그 과정에 지치고 어느새 내 강력한 자아가 앞서

공의와 은혜와 fusion되고 

혼란될 것이 위험하여

그냥 이대로 있음이

지침을 유발하기도 한다. 

그래서 '갈등'이다.

 늘........

난...

 

 각설하고

그러기에 특별히 

세상과 조금 유다른 생각과 과정을 밟는 자.........들에게 

어찌 비교가 없을 수 있던가?

 

그러한 나를 보고

주님이 그러신다. 

강조.. 또 강조

 

'내가' 하는 것.. 

다 옳다(그냥 가만히 있는 것도.. 그러면서도 고민하고 갈등하는 것도... ). 

내가 긍휼이 여기니 

너 , 주하인은 옳다. 

네가 나를 떠나지 않고 있으니 옳다. 

 

그러함에도 허락되어지는 어려움은

'이 일을 위하여' 허락되어지는 고난이다. 

좀더 하나님의 긍휼 안에 들어오라.........심처럼 느껴져 온다. 

감사하다. 

 

출근시간입니다. 

주여.

늦었습니다. 

죄송합니다. 

밤새 허리가 안좋아서 인지 깊이 잠들지 못하고 해서 

늦잠을 자서 입니다. 

당연히도 그럴 때 버거운 묵상이 되어야 함에도 

주님의 살아계심은 또 이리 힘이 나게 하십니다. 

 

비교 하지 않겠습니다 

흔들리지 않겠습니다 

내 주여.

그리 도우소서.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