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칙한 QT
주님과 연합한 감동으로 또하루 살아내기[렘50:1-10] 본문
부제 ) 불현듯 찾아 오고야 말 감동의 그날 그때
지금도 우리를 언약 가운데 지켜보신다
지금 내가 해야할 일, 주님과의 연합
내게 필요한 것.
주님과 연합하기
주님 안에 거하고
내 안에 주님 거하게 하시기
내가 기대해도 될 것.
내 거하는 곳 어디든지
감동으로 터질듯한 이벤트가
언제든 가능하다는 것
그리고 그 기대는
현재의 상황과 아무 상관없어도
무방하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사는것
내 오늘 사는 삶의 태도는
더 기도하고
더 기대하고
더 기다려도 될
고요하고 잔잔한 초연함 유지
그 모든 것
내가 말씀 앞에 서 있고
그 말씀을 통해 주님이 임재하시고
그 주님의 임재 가운데 살아갈 수 있음이
진정한 원리이고 사실임을
인식함으로 시작된다는 것을
오늘도 깊이 인식하고 살아가기
1 여호와께서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바벨론과 갈대아 사람의 땅(NIV; Babylon and the land of the Babylonians)에 대하여 하신 말씀이라
바벨론.
갈대아(아래에 #1.로 정리해 놓았다. 갈대아와 바벨론은 거의 같은 의미로 씌이기도 하고, 갈대아는 남 바벨론으로 바벨론을 통일한 '신 바벨로니안 왕국'이기도 하다. 그래서 NIV에서 Babylonians라고 갈대아인을 표현했다. 현대의 이라크. )땅..에 대한 예언.
애굽을 무릎 꿇리고
이스라엘을 멸망 직전까지 이끌어가며
유다백성의 상당수를 포로로 끌고 갔던
그 시대 고대 근동의 절대 강국.
2 너희는 나라들 가운데에 전파하라 공포하라 깃발을 세우라 숨김이 없이 공포하여 이르라 바벨론이 함락되고 벨이 수치를 당하며 므로닥이 부스러지며 그 신상들은 수치를 당하며 우상들은 부스러진다 하라
그 나라가 또 다른 예상치 못했던 신생강국,
메대, 페르시아(역시 아래에 #2.에 정리 해 놓았음..현대의 이란) 에 의하여
'무혈입성' 형식으로 파멸 당했다고 나온다.
그리고는
4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 날 그 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돌아오며 유다 자손도 함께 돌아오되 그들이 울면서 그 길을 가며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구할 것이며
5 그들이 그 얼굴을 시온으로 향하여 그 길을 물으며 말하기를 너희는 오라 잊을 수 없는 영원한 언약으로 여호와와 연합하라 하리라
'그 날 그때에'
포로로 잡혀갔던 유다 자손,이스라엘 자손들이
'울면서 그 길'..
고향으로 돌아오는 그길을
감동의 눈물로 돌아오며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구할 것'을 말한다 .
무엇인가?
무엇을 보이시는가?
절대 강자들.
절대 강자의 국력,
그 세상의 기준으로 보아 도저히 불가능할 것이라 (그 안에 포로로서 갇혀서 판단하면 어찌 안그렇겠는가? 지금이야 온통 발전한 정보 기술 때문에 '지정학적'으로 웬만하면 쉬이 누구나 짐작할 수 있는 지구촌 시대이지만... )
단 한톨도 생각조차 할 수 없던
그 상황에서
갑작스레이 이루어진 '귀향길'이라니...
얼떨떨 하던 상황에서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오는 것은 '눈물'과 '울음'과 '감사' 뿐이지 않겠는가?
이 표현이 가슴을 친다.
'잊을 수 없는 영원한 언약'으로 란다 .
그렇다 .
하나님의 언약.
하나님이 우리에게 일방적으로 하신
''사랑의 약속'
그 언약은 영원하시다.
그것을 우리는
나는
너무 일상에서 쉬이 잊고 살아가고 있음이 문제다.
하나님이 '언약'으로
우리를 구원하신것..
예수께서 이땅에 육신을 입고 십자가에 달리신
그 놀라운 구원의 언약이 아니었더라면
과연 내가
지금의 내가 있을 수나 있겠는가?
굳이 '영원 영생의 구원'을 염두에 두지 않더라도 말이다.
그 감동을
우리는 너무나 쉽게 잊고 산다.
그것은 '잊을 수 없는 영원한 언약'이시다.
그러함에도 '포로'생활 하게 되는 것..
그것은 철저히 우리의 '죄' 탓이다.
회개하지 못하는 죄.
무엇보다 '감사하지 못하는 죄'..
이 포로 생활같은 현실의 각박함 마져
하나님의 허락하심으로 살아 있음이다.
감사보다 좌절,
좌절이 깊어 무기력하고 소망하나 없이
그대로 현실에 묻혀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우리'를
그냥두지 않으셨던 것이다.
그분은 '잊을 수 없는 영원한 언약' 가운데
지금도 우리를 지켜보고 계심이시다.
그렇다면 지금의 나.. 는 어떠한가?
이들처럼 '감동의 상태'.. '포로로 풀려난 상태'인가?
당연하다 .
난.. '주님 예수그리스도의 철저하신 십자가 은혜'로 말미암아
포로에서 풀려난 상태다 .
그런데.. 왜 저러한 눈물의 감동,
갑자기 풀어지는 '회복'의 징조들이 없는가?
또다시 밀려오는 영적 전쟁 가운데 있기에 그렇다 .
광야 연단에 있어서 그렇다 .
그렇다면
오늘 말씀대로
'잊지 못할 영원하신 언약의 감동' 은 어찌 받아 들여야 하는가?
내 부족함을 회개하고 더 돌이키고 더 힘써
내 자신이
절대 강자이고 철벽일 듯한
현실의 벽에서
완전한 하나님의 손길, 기적으로
다시금 '감동'으로
그 감동의 마음의 상태로 변하길 기대하고
전신 투구해야 하는가?
그런 감정 회복시켜 달라고...?
그것도 맞다 .
하지만... .
풍랑 밤바다의 조각배 속에서 마주한
그 절대절명의 풍랑 속 제자,
유라굴라 풍랑 바다 배 안의 '사도바울 일행'들의
외침과 기도의 간구의 방향과는 다르게
더 바라심이 있으심이다.
'감동'도 좋고
'회복'과
'풀려남의 나른한 안전감'도 좋다.
당연하다.
하지만.... 본질은
그 속에서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함께 하셨음을 인식' 하는
그래서 '풍랑'이나 '고난'.. '두려움'..........의 여부보다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음'..
'주님의 영이 내 인생의 배 안에 같이 계심으로 안심' 함이
더 확실한 목표가 아닐까?
오늘 말씀처럼
'여호와와 연합하라'심,
하나님 안에 내가 거하고
내 안에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언제나 깨닫고 인식하여
영혼 깊숙이 갈무리 되어
'풍랑'이 밀어치는 밤바다도..
'갑작스레이 밀려오는 대 격변의 충격 '속에서도
'감동'은 유지하되
극단의 눈물과 극단의 두려움과 혼란으로
롤러코스터 타는 감정의 회오리 안에 갇혀
이게 과연 신앙인지
내 심리의 왜곡인지 알수 없을 정도의
그러함은
주께서 굳이 기뻐하지 않으실 수 있음을 인식하는
그러한 성장된 '믿음'으로의 준비............
그것을 주께서 오늘
이 말씀을 투영시켜
내 안을 밝히 보여 주심이시다.
감사하다.
주님.
늘 그러시지만
주님 말씀을 들으면
마음이 훨씬 밝아짐을 느낍니다.
저 포로되었다 갑작스레이 '귀향'길에 오르는
'유다의 포로되었던 자들의 감동'을 봅니다 .
절대 '일상, 현실'에 갇혀 자포자기의 심정 비슷이 살다가
한번도 상상해보지 못했던 꿈같은 일을 마주하며
'극도의 감사'로
시가 입에 서 튀어나오고
찬송과 찬양의 노래가
영혼 깊숙이서 튀어나오며
그 신앙의 일시적일 것이나마 (아.. 우리는 압니다. . 주여.. 끝까지 돌이키고 유지하지 못함을요.. 죄송합니다. ) 회복과 돌이킴을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임재의 결과로 벌어지는
그 내면의 깊은 고백,
여호와와 연합하라는 선언들이 이루짐을 봅니다.
그렇습니다.
주여.
저 감동은 깊이 공감하고 마음에 갈무리 할 수 있길 원합니다.
그리고 그러나 선후가 바뀌지 않게 하소서.
주님과 연합되어 사는 영혼의 상태로
이 땅,
이 바벨론 포로, 출애굽 전의 포로 상태와 비슷한
이 일상에서 '광야의 연단'을
거쳐나가고 있는게
이제의 '저희'의 모습임을요..
감동과 전율의 기쁨으로
영혼 깊숙이 터져나오는 감사의 외침도 좋지만
그 우선에
'하나님의 함께 하심'..
내 영혼의 배 안에 함께 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
성령으로
하나되는 삶을 놓치지않고
세상을 살다가
마침내 주어지는
당연하신 '주님 언약, 영원히 잊혀지지 않는 언약'의 이루어짐을
목도하고
깊이 감사하며
그 당연한 감사에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같이 흘러가는
그런 자 되게 하소서.
더 시간이 필요하고
더 성장이 필요할 줄 믿습니다 .
앎에 대하여
더 깊은 깨달음을 허락하시고
그 말씀을 근거로 한 '감동의 에너지'가
오늘도 또 제 영혼의 한자락을 넓고 깊게 다지시어서
한걸음 더 성장하여 출근하고 퇴근하는 하루 되길 기대합니다.
거룩하고 귀하신 하나님
내 안에 연합하고 계실 내 구주 예수님
성령 하나님의
삼위일체 완전하신 연합을
진정 감사하고 찬양합니다.
거룩하고 귀하신 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바벨론과 갈대아, 그리고 메대 페르시아)
#1. 바벨론과 갈대아
: 긴밀한 관계 속에서 변화된 의미
바벨론과 갈대아는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역사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서로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었지만, 역사의 흐름 속에서 그 의미가 변화하고 결국에는 거의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갈대아의 기원과 의미 변화
- 원래 의미: 갈대아는 원래 메소포타미아 남부 지역, 특히 신바빌로니아 제국의 지배 세력이었던 반유목민 부족을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 의미 확장: 신바빌로니아 제국이 강성해지면서 갈대아인들이 바빌로니아 전역을 지배하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갈대아'라는 말이 바빌로니아 전체를 가리키는 말로 확장되었습니다.
- 학자 계층으로의 의미 변화: 갈대아인들은 천문학, 점성술 등 학문 분야에서 뛰어난 능력을 보였기 때문에, '갈대아 사람'이라는 말은 학자나 점성술사를 지칭하는 일반적인 표현으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바벨론과 갈대아의 관계 요약
- 초기: 갈대아는 바빌론의 일부를 차지하는 부족이었습니다.
- 신바빌로니아 제국: 갈대아인들이 바빌로니아를 통치하면서 갈대아와 바빌론은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 학문적 의미: 갈대아는 학자, 점성술사를 지칭하는 일반적인 표현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왜 중요한가요?
바벨론과 갈대아의 관계를 이해하는 것은 성경을 비롯한 당시 역사 기록들을 정확하게 해석하는 데 중요합니다. 특히 구약성경에서 '갈대아 사람'이라는 표현이 자주 등장하는데, 이는 단순히 한 민족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당시 시대의 문화적, 사회적 배경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합니다.
예시:
- 성경: 다니엘서에서 '갈대아 사람'은 바빌론의 학자이자 점성술사로 등장합니다.
- 역사: 바빌론의 함무라비 법전, 천문 관측 기록 등은 갈대아인들의 높은 학문 수준을 보여줍니다.
원본: Gemini , 2024. 8. 13.
#2. 바벨론의 멸망, 메대 페르시아
예레미야서 50장 3절에서 언급된 "한 나라"는 **메대와 페르시아**를 가리킵니다. 이들은 북쪽에서 내려와 바벨론을 공격하고 멸망시켰습니다¹.
역사적으로, 바벨론 왕국은 기원전 539년에 **페르시아 제국**의 **키루스 대왕**에 의해 정복되었습니다. 키루스는 바벨론을 거의 무혈입성으로 점령하였고, 이 사건은 바벨론의 멸망을 의미합니다⁷.
현재 바벨론은 **이라크**에 위치해 있습니다. 바벨론의 유적지는 이라크 바그다드 남쪽 약 80km 지점에 위치해 있습니다¹¹. 한편, 메대와 페르시아는 오늘날의 **이란**에 해당합니다¹³.
이 외에도 궁금한 점이 있으신가요? 다른 성경 구절이나 역사적 사건에 대해서도 질문해 주세요!
원본: Copilot과의 대화, 2024. 8.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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