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칙한 QT
떨어질 내 자식의 눈물 한방울을 위해(창49:29-50:14 ) 본문
제 49 장 ( Chapter 49, Genesis )
29. 내가 내 열조에게로 돌아가리니
( 본향 입구 잔디 정원에서 이리 기뻐 뛸 수 있을까? ㅎ)
죽음이
본향으로의 '귀향'임을
죽을 그때도 확실히 인식하고 있으면
그 과정은 고통이나 두려움이 아니요,
기쁨이나
설레임이 될 것이다.
남아 있는 자들과의 이별은
잠시 후에 다시 만날 약속이 있기에
그리 슬프지도 않을 것이며
본향에서는
이 땅의 소유나 명예가
아무런 소용이 없음을 알기에
아무런 미련이 남을 이유도 또한 없을 것이다.
단,
남아 있는 자식들이
자신과 같은
어리석은 실수를 거듭하지 않고
실족치 않고
주님과 동행하는 효율적인 삶을 살 확신 만 있어야
특별히
그러할 것이다.
야곱은
요셉이라는
걸출한 자식을 두고 가고
자식들이 모두
나름대로 신앙 안에서
12지파의 시조로 살아갈 것을
영적인 능력으로 알기에
더욱 그 가는 길이 기쁘다.
그는
본향에 대하여
아는 것을 넘어서
확신이 있다.
야곱은 확신이 있는 죽음을 맞이하고 있다.
편안하고 기쁜 죽음을 맞이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열조 my people'이라는 표현을 하고 있다.
그가 부럽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나도 본향에는 가고 싶다.
가능하면 빨리.
마치 사도 바울이 '예수님과 함께 '있는 것이 좋으나... 라는 표현 한 것처럼.
비록
그들과는 조금 다른 이유지만....
31. 아브라함과 그 아내 사라가 거기 장사되었고 이삭과 그 아내 리브가도 거기 장사되었으며 나도
레아를 그곳에 장사하였노라
아브라함도
열심히 살았다.
그리고는 죽었다.
그의 아내도
두려움과
기대와
갈등과
사랑과
주님의 동행하심과
자손에 대한 여러 스토리를 이어가며
열심히 살았다.
그러나
죽었다.
이삭은
큰 내적인 요동이 없이
착하게 살며
이웃에게
늘 물을 나누어주며 살았다.
그런 그도 죽었다.
리브가는
홀연히 나타난 자신의 낭군을 만나기 위해
꿈결 같은 보리밭을 지나
석양이 뉘엿한 곳 멀리서
이삭을 만나는
그림 같은 결혼을 한 후로
쌍둥이의 산고를 겪고
그들로 인하여
가정이 풍파를 수도 없이 몸으로 감당하다가
결국은 편애의 결과로
야곱과 에서를 분가시키는
주역을 감당하는 역정을 겪으며
수없는 많은 마음 고생을 하였다.
그러면서 살아갔다.
그리고는 죽었다.
레아는 어떤가?
동생과 ..
누구보다 많은 마음 고생을 하며
살던 여인 아닌가?
그러면서 12지파의 몇 원조를 생산하고는
회한 많은 삶을 마감했다.
야곱은..
풍운아.
이제
소설로 써도 흥미진진한
파란 만장한 삶을
영욕의 부침을 거치고
그것도 모잘라
자식을 사별하였다가
다시 만나고
그 자식으로 인하여
노후를 보장받은
알고는
아무리 성경속의 인물이라도
그 삶을 살기는 겁이나는
그런 삶을 마감하려 하는 자이다.
그도 곧 죽는다.
인생은 이렇다.
누구나
드라마와 같은 삶의 질곡과 희망
웃음과 울음
고통과 기쁨
.... 을 겪으며
끝이 나지 않을 것 만 같은
자신이 언제나 주인공과 같은
드라마를 연출하며 산다.
그러나
그도 곧 죽는다.
자신은 절대로 죽을 것 같지 않고
눈 앞에 펼쳐 져 있는 당면의 과제가 영원히 존재할 것 만 같고
그래서
슬픔의 과정은 끝없을 것 같은 우울에도 들어가고
행운이 끝없이 갈것 처럼
이 땅이 좋사오니 하고
절대로 기독교인으로 사는 것이 필요함의 당위성을 잊고 살기도 해도..
그도 또한
곧 끝난다.
죽음은 모든 것의 끝인 양 생각하는
무신론자 들이어도
아브라함이나
이삭이나
사라나
리브가나
레아나
야곱과
그 후의 수천년을
이 땅에 살면서 엮어낼 그 겪은 그 파란 만장한 삶과 그들의 울고 웃음과
사랑의 스토리 들이
그냥
마치
뀐 방귀가 대기 중에서 소멸되고
텔레비젼 공중 파처럼
한번 소임을 다하면
공중에 흩어지고 마는
그런 아무런 의미가 없는 스토리라 느껴질까?
사람이 그런 존재라면
정말
아브라함... 야곱.. 의 삶 뿐 아니라
우리의 삶 속에서 울고 웃는 것은
( 아~무~ 의미 없어~ ㅎㅎ 웃기지요? 의미없다니까?ㅎㅎ )
정말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지 않은가?
우울할 필요도
성질 낼 필요도
기뻐할 일도
돈 열심히 벌 일도
사랑할 일도...
그냥
기분 내키면
동물처럼 섹스하고
그러다가 임신하면 지우고
아....
남들 고통도 아무 생각없이 쳐다만 보고...
이
세상의 삶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한편의 만화랑
큰 차이가 없다.
그렇다면
과거와 삶과 웃음과 울음과 행복과 사랑과 ... 아무 것도 신경 쓸 일이 없다.
그냥
코미디 프로그램 보면서
개그 보면서
깔깔 대다가
끝나면 그 뿐인 것이다.
그러나
오늘 나열되는
치열하게 살고
현재적 삶을 살던
과거 수천 년 속의
인물들이 기억될 필요조차 없는 것이다.
이 세상이
수많은 사람들의
시간과 공간과 그들의 삶과 사랑과 미움으로 이어지는 얘기들로
잊혀지지 않고 기억되는 것은
이 땅의 삶을 통하여
무엇인가
보시고자 하는 절대자의 뜻이 있음이
어렴풋이 느껴지지 않는가?
오늘
야곱이
자신의 이 땅의 스토리를 마감하며
자식들에 대한 예언을 하고
그들의 선조가 그랬듯이
그들이 있는 곳으로 간다고 한다.
33. 야곱이 아들에게 명하기를 마치고 그 발을 침상에 거두고 기운이 진하여 그 열조에게로 돌아갔더라
오
재 작년
그 생명의 삶에서 우리를 재밌게 했던
그 발가락 꼼지락 거리는 장면.
왜
난
여기에만 오면
애들이
코 잡고
숨참는 연습하며
쪼그려 앉아서
얼굴이 시뻘개 지면서
발가락 꼼지락 거리는 장면이 생각이 나지?
ㅎㅎ
그러다가
야곱도
'후~~와~~' 하면서
침상에서 벌떡 일어나며
자식들 한테..
'니들 놀랐지..!! ' 할것만 같다.
ㅎㅎ
제 50 장 ( Chapter 50, Genesis )
1. 요셉이 아비 얼굴에 구푸려 울며 입맞추고
야곱은 부럽다.
훌륭한 자식이 이렇듯 아비를 안타까워 한다 .
그도 천국을 아는 자식이고
거기에 열조들이 기다리는 복된
새로운 삶의 변환 과정임을 앎에도
운다.
그것은 천국을 못믿는 어리석은 자의 울음이 아니고
얼마동안 있을 헤어짐에 대한 안타까움이다.
늘
하나님의 실제적 형상으로서의
아버지의 실체적 모습을
더 이상
현실에서 볼 수 없을 진실에 대한 허전함의 울음이다.
아비의 얼굴에 몸을 구부린다.
그리고
입맞춘다.
그리고는
눈물이 한방울
'뚝~' 하고
죽은 야곱의 얼굴 위로 떨어진다.
장면이 상상이 되며
가슴이 짜르르 하다.
한폭의 그림이다.
그 그림이
사랑으로 안타까워 함을 볼 수 있기에
더더구나 아름답다.
그 요셉의 움직임이 느리다.
진중하다.
그러면서
그의 깊은 사랑이 느껴진다.
죽을 때
자식을 잘 길러 남길 수 있는 자는
예수님으로 인하여
누구나 갈 자격이 생긴 천국 시민으로서
또 하나
다행스러운 자격이 생긴 것이니
얼마나 좋을까?
그게 비록
세상에서 성공한 자가 아니더라도
오늘
요셉이 보이는
아버지에 대한
진중한 사랑과 존경과
죽을
내 육신 위에
떨어 뜨려질 한방울 눈물이 더해진다면
그 얼마나 행복할까?
야곱은 정말 행복한 죽음을 맞이하고 있다.
이 행복은
야곱의 사랑에 있다.
그는
요셉의 국무총리가 됨에
아무런 아버지로서 교육열을 보인 적이 없다.
그러나
요셉은
하나님이 길러서 국무총리 시키셨다.
요셉은 야곱에 대하여
교육열에 감사하지 않았다.
그냥
사랑으로 믿어주고
사랑으로 눈물 흘려서 반겨준 걸 기억하는 것이다.
사랑이야 말로
자식을 살린다.
그 자식이
내 본향 갈 때 벗어놓고 갈
육신의 껍질 위에
눈물 한방울 흘려 줄 것이다.
나는
내 자식을 더 사랑해야 한다.
주하인 ~~!!!!!!!
2. 그 수종 의사에게 명하여 향 재료로 아비의 몸에 넣게 하매 의사가 이스라엘에게 그대로 하되
3. 사십일이 걸렸으니 향 재료를 넣는데는 이 날수가 걸림이며 애굽 사람들은 칠십일 동안 그를 위하여
곡하였더라
이것은 조금 당혹스럽기는 하다.
어찌 보면
요셉은
오랜 타국 생활에
이방 민족의 습성을 온전히 습득한 것 만 같아
조금 받아 들이기 버거운 면이 없지 않다.
미이라 작업
그러면서 지나칠 정도로 화려한 장사 의식.
물론, 직분에 합당한 것이기는 하지만
선민 중의 선민으로 주님을 가장 닮은 자가 이렇다는 것을 일견 이해하기 힘들 조건일 수는 있다.
그러나,
이러한 외적인 조건은
모두 믿음의 성장에 따라 다르다.
그는
대단한 영적 성장의 요셉이다.
주님께서는
그의 모든 걸 아신다.
그는
외부적 조건에서 자유로운 자이다.
12. 야곱의 아들들이 부명을 좇아 행하여
순종하는 아들들을 둬서 야곱은 좋겠다.
야곱을 많이 닮고 싶다.
적용
1. 자식을 사랑으로 대하겠다.
웃고 이해하고 공감하고 칭찬하고 기르겠다.
2. 난 천국 백성임을 잊지 않는다.
천국은 지상보다 훨씬 좋다.
3. 이 땅위의 삶은 잠깐 임을 명심한다.
기쁨도
슬픔도
고민도
놀람도
두려움도.....잠깐이다.
4. 내 삶은 주님을 위한 것임을 명심하고 주님 뜻 매일 생각한다.
요즈음 잘 안된다.
언제 부터인가 그토록 노력해오던 것들이 힘을 잃고 있다.
약해짐을 기뻐하지 못하고 있다.
약해짐이 강해지는 것이라고
그것을 주님이 기뻐하시는 것이라고
약해지고 곤란해지는 상황에 기뻐하자...하여도
주님 도우시라 .. 기도해도 잘 안된다.
속 상하다.
다시 한번 주님께 맡기는 작업을 해야 할 것만 같다.
야곱의 죽음을 생각하며.........
5. 나도 매일 죽자.
6. 성경 다섯장 읽겠다
잊지 않으면 항상 하겠다.
기도
주님
죽음과 삶
주님의 뜻
이 땅과
저 하늘 나라
야곱과
요셉
자식의 눈물과
사랑
오늘
생각할 바가 많습니다.
주여
그러나
주님을 늦게 알고서
늦게야 많은 걸 생각케 되니
가슴 만 미어질 뿐입니다.
내 자식의 눈물을
난
죽을 때 받아 볼 수 있을까 생각하며
가슴이 답답합니다.
그러지 못할 듯 자신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그것은 외로움을 암시하기도 하지만
나에게 마땅히 떨구어야 할 눈물을 가질 자식들의 가슴에
안타까움과 아쉬움 보다는
묘한 미련과
냉랭할 답답함을 주고 갈 것 같기에 그렇습니다.
주여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아직도 많이 남아 있을
이 땅위의 삶이
언제까지인지
정말 전 모르겠지만
그 나머지의 삶에
주님의 원리가
온통 절 지배되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우리 자식들이
요셉의 수십년 만의 사랑의 눈물이 채워진 것 같이
그러하게
주님안에서
사랑으로 회복되기를 소원합니다.
주여
인간의 눈으로 보면
도저히 이루어 질 것 같지 않은
생각이지만
주여
오늘 떨어뜨린 요셉의 눈물이 내 가슴을 자극한 것처럼
우리 아이들의 가슴에도
우리 주님
귀하신 사랑의 정화이신 당신의 임재하심으로 인하여
그들이 가슴 깊이
인격적으로 우리 주님을 영접하고
진실로 행복과 기쁨이 무엇인지
정말로
짧은 인생에서
집중해서 살아야 할 진리가 무엇인지
확실히 깨달아
오직 주님 당신 만을 놓치지 않는 그런 믿음을 허락하시길 소원합니다.
그리하여
그들의 가슴에
주님이 허락하신 사랑으로 자연스레이 채워져서
적은 일에도 감동하고
귀한 일에 소름끼쳐할 줄 알고
흘릴 눈물이 있을 곳에
당연하게 흘릴
중심잡힌 균형을 허락하소서.
한마디로
선한 천국의 심성을
이 땅에서 회복되어 살게 하소서.
그게
제 죽음을 준비하는 제 바램에 대한
우리 주님의 축복이고
선물이라 생각합니다.
어제 주께서 허락하신 묵상의 그것이 이루어지게 하소서.
주여 간절히 소원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창세기49:25
네 아비의 하나님께로 말미암나니 그가 너를 도우실 것이요 전능자로 말미암나니 그가 네게 복을 주실 것이라 위로 하늘의 복과 아래로 원천의 복과 젖먹이는 복과 태의 복이리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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