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칙한 QT
더 이상 내 고난을 미련으로 담지 않겠습니다[딤후2:1-13] 본문
부제) 예수 고난,나의 고난 & 예수 부활,나의 부활
주님의 좋은 병사로 남겠습니다 절 인도하소서
고난을 통해 부활될 운명 ,그 기쁜 운명
일상은 전쟁터다
그 곳을 살아가는 우리는
병사다
영적전쟁터의 매일을 의무 받은
영적 병사
거기에 예수그리스도께서
좋은 병사이기를 원하신다
직접 모범을 보이시고
성령을 보내시어
매일을 이끌어 주신다
그러기에 이 전쟁터에서의 고난은
당연히도 필연이다
그러고 보니 고난을
없애달라 기도함은
우리의 당연한 본능이고
어쩔 수 없는
허락되어진 몸부림이지만
들어주시어 피하게 해주심도
안들어주시어 병사로서의 나를
인식하고 깨어있게 하심도
모두
주님의 뜻이시다
그러기에 '고난'을
고난으로 몸부림치고 피함은
좋은 병사의 옳은 태도는 아닌 듯하다
이제껏 허락하신
고난을 피하기 위한 기도
어쩌면 이제부터
그대로 더 유지하고 산다는 것은
미련한 미련임이 맞다
내게 원하시는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확연하신 뜻은
고난을 필연으로 받아
주님 원하시는 '부활'로 거듭남
그리하여 주님과 합력되어진
완전한 승리
그것 아니실까?
그러함을 포기하고
내 모든것 없애달라 몸부림침은
마땅히 옳은 병사가 아닌듯 싶다
그냥 '내 자격'을 인지하고 있는
단순한 믿음일 뿐...
깨닫는 바 많다
오늘
더 이상의 고난을
피할 것으로 여기지 말자
감사하고
내 마음에 우겨 넣고
주님 영광위해
마음 다지고 살아낼
영혼의 정결한 깨달음의 기회로 삼게 해달라
그리기도 하는 것,
그것이 진실한 방향이 맞는 듯 싶다
주님 기뻐하시는
좋은 병사 말이다
3 너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병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
'너'는..주하인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병사로' - 매일 매시 영적 전쟁에 참여하는 그리스도 예수 편의 병사, 당연하다. 하지만 그 당연한 원리 중에 좋은 병사라 신다. - 주님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신다.
어차피 이 인생이 '광야 인생'이고
그 인생광야를 걸어간다는 것은
'영생의 하나님 나라'에 살기 합당한 영혼으로
'정화' 되어 가는 과정으로서의 과정들이라면
고난은 당연한 필연이다.
그 고난을 주장하기 위하여
' 하나님께 허락받은 사단'에 대하여
우리는 '승리'하여야 하는
'필연의 원리이자 의무, 운명'을 지니고 있는 자들이다.
즉, 고난은
하나님 나라를 위한
영혼의 세정, 정화를 위한 연단의 도구란 말이다.
그러기에 '우리'... '나'는
영적 전쟁터의 '군사'.. '병사'가 우리의 정체이며
그 과정의 연약함을 가련히 여기신
하나님의 긍휼하심의 결정체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성령으로 보혜하신 게
'복음'의 정수가 아니던가?
이 인생과정,
병사로서의 또 하루가
고난을 필두로 시작이 되었음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자주도 쉼을 허락하시지만
부인할 수 없는 실재 - 고난은 필연이고 유익이며 오늘도 또 마주해야만 할 원리-라는 이야기다.
그러기에
주님은 이제 '나'에게 그리 말씀하신다.
"주하인아.
주하인 들아
좁은 길을 가는 자들아.
언제까지더냐?
고난은 필연이고 필수인데
눈감고 피하기만 할 거더냐?
다시 '영적 전쟁터'로 나아갈 또 하루다.
힘을 내고 정신을 차려서
네 존재에 대하여 확인하고 돌이켜 보거라.
너는 병사이며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병사'이길
나,
하나님은
주하인
너에게
바라신다" 라시는 말씀으로 들려온다.
7 내가 말하는 것을 생각해 보라 주께서 범사에 네게 총명을 주시리라
8 내가 전한 복음대로 다윗의 씨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
그러시면서
'생각해보라'
'기억하라' 신다.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기억하라심이시던가?
'병사'인 나.
그중에 함께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의 부활하셨음이시다.
그렇다 .
부활
함께 하신 그리스도 예수 의 부활에 방점이 찍힌 거다.
고난을 통해
부활될 운명
그 기쁜 운명에 대하여 - 고난은 피하거나 슬퍼하거나 의지만을 드려야할 쓴약 만은 아니다. 기도의 방향이 쓴 고난을 피하기 위함 만이 되어서는 안된다. 이제 이후로는 고난 자체를 감사로 받을 자, 부활의 영으로 그리되어야할 자를 말씀하심이 아니신가? 그렇다면 고난은 기뻐할 일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영,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증거가 있으니 말이다. - 잊지 말라신다.
'매일 말씀 묵상'을 통하여 허락하신
주님의 '로고스' ,
로고스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하고
'그리스도 예수'를 기억하라 심이시다.
아.. 그 분의 '부활'을 기억하라고
오늘의 말씀의 방점이 찍혀진다.
'부활'하신 예수까지.. 말이다.
고난을 말씀하시지만
부활하신 예수님까지 .. 말이다
당연하다.
그 당연함을 당연하게 기억하고 생각함이 마땅함에도
왜 주님께서는 또 이렇게
되풀이 되풀이 하시는가?
고난은 필연이지만
고난으로 끝이 아님,
예수 께서 부활하심으로 승리하셨듯
우리의 숙명은 '승리'이지
'고난'이 끝이 아니며
고난은 있으되
고난은 부활의 전제이고
고난은 완전한 승리, 온전한 성화의 기회일 뿐
그 고난과 싸움 자체, 병사로서의 인생이 다가 아니라는 말씀이다.
'승리와 완전함을 위한 필수요건으로서의 고난'
완전한 부활의 승리를 위한 장치로서의 고난'이
주께서 '고난'을 대하는
'병사로서의 나'에 대하여
오늘 하루
확실히 깨닫길 원하심이시다.
11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보라.
확실히 말씀하시지 않으시는가?
'주와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다"
죽기 위하여
고난이 필요하고
살기 위하여
좋은 병사로서 견뎌야 함이며
예수 그리스도, 그리스도 예수 - 디모데 후서에서는 계속 그리스도 예수'라 표현하신다.. 예수님의 신성에 대하여 더욱 강조하심의 의미는 아닐까? 결국 이땅에서의 끝나는 나.. 보다는 승리하여 주님의 나라의 나로서의 나를 돌이키라시는?...- 의 부활에 참여하여
영원을 살라신다.
그렇다면
오늘 하루
내게 원하심은 분명해진다.
사도바울의 말씀처럼 '육체의 가시'다.
3번 간구하였음에도
고난을 거두지 않고
육체의 고난 -아래에 스크랩했습니다 - 을 그냥 두시며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하신
그 부분이
이제는 '내 시간'...
여기 까지 인도하신 하나님의 뜻에 따른 주님의 시간에 맞추어
나는 더 이상 '고난'을 피하고
주님 뒤에 숨어 좋은 것만 달라고 응석부리는
그러함을 벗어나야 함을
또다시 말씀하심은 아닌가 싶다.
그렇다면
내게 허락하신 '고난'의 실체는 무엇인가?
참 많이도 변화를 허락하셨다.
아니라 아니다.. 내 속에서는 아직도 뿌걱대며 다가드는
많은 저항들, 사단의 적병들의 소리가 있지만
주님의 말씀,
성령이 허락하시는
내가 나를 돌아보아 객관적으로 판단할
조용하고 차분한 근거^^* 에 의하면
난... 성장했다.
많이..
하지만.. 아직도 번연히 남아 있는 '장애'가 있다.
장해..다.
장해가 장애로 느껴짐은
그 고난을 아직도 벗어야 할 '가시'로만 생각하고 있음이다.
그렇다.
누구에게나 마찬가지지만
그 '고난'이
기도의 동기가 되어
벗어버리게 해달라고 '간구'하게 하시며
내 인생을 여기까지 이어지게 하시는
하나님의 허락하신 '도구'이기도 하다.
사도 바울님은 안그런가?
그 분의 '중생'이후의 삶,
그 놀라운 전도여행의 과정 중에서도
'고난'을 피하여 편안케 해달라고
육신의 가시를 벗게 해달라고
세번이나 간구 -얼마나 깊이 기도했겠는가? .. 어찌 내 인생 중 기도와 간구의 정도와 비교할 바가 되겠는가?-ㅠ.ㅠ -하였던 그 기간,
그러함을 통하여
그 분이 '하나님의 네게..족하다'시는 응답을 통하여
깊은 깨달음을 얻고
고난을 '축복'으로 받아 들이기 전까지
그의 '인생 광야 여정'을
거기까지 이끌어가는 '매개체'가 되었음이다.
나..
나도 그래야 한다.
지금껏 열렬히는 아니지만
내 '고난' -더 깊이는 어찌 더 설명할 건가?.. ㅠ.ㅠ - 을
주께서 해결해주실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그래서 지금껏 나를 변화시키셨으니
온전히 벗어나게 하실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로
아직도 싸우고 있다면
그 싸움의 방향을 바꾸어야 한다는 거다.
고난은 필연이니
그 고난을 붙들고 가면서
내가 '병사'임을 인정하고
병사로서 받는 고난의 당연함,
그 영적 전쟁의 '피곤함과 고단함의 당연함'을
확실히 갈무리하고 인정하고
그냥 '고난을 감사함'으로 가져가라 심.. 처럼
그리 느껴진다.
그리 하지 않고
이전과 동일한 삶을 유지하는 것...
방향성을 그대로 가져가는 것..
정말 미련한 일이 아니던가?... 하심 같이 느껴진다.
주여.
늦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출근하여 말씀이어가겟습니다.
감사하오며 잊지 않고 좋은 병사로 살아갈 하루 붙들어 주소서.
거룩하고 귀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 사도 바울의 '육체의 가시'에 대한 설명
사도 바울의 "육체의 가시"에 대해 성경은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지만, 고린도후서 12장 7-10절에서 언급됩니다. 바울은 이 가시를 "사탄의 사자"라고 부르며, 그가 교만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라고 설명합니다¹².
학자들은 바울의 육체의 가시에 대해 여러 가지 추측을 하고 있습니다. 일부는 신체적인 질병이나 장애일 수 있다고 생각하며, 예를 들어 시력 문제, 만성적인 통증, 또는 말라리아 같은 질병일 수 있다고 봅니다². 다른 이들은 바울이 겪었던 지속적인 박해나 정신적인 고통일 수 있다고 추측합니다³.
바울은 이 가시를 세 번이나 제거해 달라고 기도했지만, 하나님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라고 응답하셨습니다. 바울은 이 응답을 받아들이며, 자신의 약함 속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드러난다고 고백합니다¹.
혹시 더 궁금한 점이 있으신가요?
원본: Copilot과의 대화, 2024. 11. 14.
(1) Paul’s Thorn in the Flesh - It is - It is - Bible Gateway. https://www.biblegateway.com/passage/?search=2%20Corinthians%2012&version=NET;NIV.
(2) What Was Paul's Thorn in the Flesh? (2 Corinthians 12). https://www.crossway.org/articles/what-was-pauls-thorn-in-the-flesh-2-corinthians-12/.
(3) 2 Corinthians 12:7 - Paul's Thorn and God's Grace. https://biblehub.com/2_corinthians/12-7.htm.
(4) undefined. https://www.biblegateway.com/passage/?search=2%20Corinthians%2012&versio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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