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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은 같이 아프기도 한 것이다[단10:1-9]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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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은 같이 아프기도 한 것이다[단10:1-9]

주하인 2022. 11. 21. 07:05

(펌)

같이 웃을 수 있고

같이 화내주기만 하고

같이 울어주기만 하면

그게 다 일까?

 

공감에는

더 큰 '책임'의 문제가 따르지 않을까
그리고

그 어려움을 과연 내가 홀로 감당할 수있을까?

그렇다고 모든 것 차단하여

무감각 해지는 것은 더 죄가 아니고?

 

이 아침..

생각할 것이 많이 다가오지만

그래도 '소망이고 희망'인것이

 

내게는

주님이 함께 하시고

그 분의 뜻을 부여잡고 있으면

내게 맞추어

가장 정확하게 이해되는

깨달음,

인사이트

은혜가 있다는 것이다.

 

아..

오늘은 '공감'을 부여잡고

하루 살아보아야 겠다.

 

도우소서.

살아계신 내 주 하나님이시여.

 

7. 이 환상을 나 다니엘이 홀로 보았고 나와 함께 한 사람들은 이 환상은

    보지 못하였어도 그들이 크게 떨며 도망하여 숨었느니라

 다행이긴 합니다. 

주여.

 

 사도바울님의 다메섹도상의 

홀로 예수님의 소리를 들을 때

동행인들게는 우뢰소리로만 들리던 장면과 비슷이 느껴집니다. 

그리고 그것만으로도 얼마나 무섭고 힘들었는지

당연히도 하나님의 그 상상을 불허하시는 광대한 에너지 앞에 제대로 서 있을 수 없음은 

익히  표현해낼 수 없을 만큼 크심입니다.

'죽지 않고 살아서'

'크게 떨며 도망'하고 숨을 수 있는 것만도 

허락되어진 상황의 은혜임을 다시한번 압니다. 

 

 

8. 그러므로 나만 홀로 있어서 이 큰 환상을 볼 때에 내 몸에 힘이 빠졌고

    나의 아름다운 빛이 변하여 썩은 듯하였고 나의 힘이 다 없어졌으나
9. 내가 그의 음성을 들었는데 그의 음성을 들을 때에 내가 얼굴을 땅에 

    대고 깊이 잠들었느니라

그리고 이어지는

'나' 다니엘이라 표현하시는 바

하나님의 뜻을 어떠한 어려움이 닥쳐도 철저히 준행하겠다는

다니엘님의 선택에 의하여 부여된

'공감'과 그로 인하여 다가오는 책임의 무게를 보고 있습니다. 

 그 힘듦의 실제가

수천년의 시간을 격(隔)하고  

지금의 우리에게 그대로 전하여져 오는 듯

다니엘님의 주님 앞에 서는 자의 무게를 느낄 수 있게 됩니다.

 온몸에 힘이 빠져 썩어 무너지듯 쓰러져 잠이 들만큼

혼절하는 그 상황.............

 

그리고 그 내용은

모두 다 알다시피

이스라엘 백성의 징죄,

7년 대환란, 종말론 적, 계시록적 상황.....에 대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 '다니엘님'

인간 중 어쩌면 '예수님'을 제외한

가장 죄없는 순결한 자 중 하나일 것으로 생각되어지는

그 다니엘님이 동족 이스라엘의 죄를 인하여

대신 받는 저 기절하고 수 이레를 정신 못차릴 만큼

힘들어 했던 고통의 기본에는

바로

'공감' 때문이 있었기 때문이라 여겨집니다.

 어쩌면 홀로의 문제라면 저리 기절하지 않아도 될 것이지만

세상의 죄와 그로 파생되어지는 '주님 공의의 심판의 두려움'에 대한

그렇지 않아도 될 '죄' 때문에 생기는 안타까움이 

저 공감에 가중되어서 말입니다. ㅠ.ㅠ;;

 

 아... 그렇습니다.

그러고 보니 공감이라함은

같이 (共) 느낀다(感)는 의미였습니다.

 

같이 느끼기 위해서는

그들의 죄로 인하여 다가올 고난이 같이 무서웁기도 한 것이고

그들이 슬퍼하면 같이 슬프고

그들이 기뻐하면 같이 기쁘며

그들이 고통스러워하면 같이 아파하고

그들이....

그들이....*&^%... 하며

그들이 웃으면 같이 웃기도 하지만

그들의 죄에 대한 '심판적 징벌'로 같이 가슴아파 함과

그들이 그러지 않아도 될 텐데 하는 아쉬움과

그 어리석음에 대한 반감의 흔적 조차도 눌러야 하는 에너지의 차단도 포함이 되니........

공감은

저처럼

아니 어쩌면 대다수의 평범한 자들에겐

감당하기 힘든 감정이고

더구나, 상처입은 자들에게 있어서의 공감 문제는

'동병상련'의 감정은 어찌 어찌 있을 수 있겠으나

그들... 의 아픔으로 인해 가중되는 아픔이

상처에 소금 붓는 듯한 '훨씬 더한 아픔'으로 아릴 것이기에

어쩌면 그 아픔을

무의식 중에 스스로 차단시킬 수 밖에 없음도

있지 않을까...

그래서 '공감 능력 부재'.... 라는 

주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현상들이 

저희에게 ,

이 시대에 

제게 많이 퍼져 잇는 것이 아닌가

그리 깨달아 졌습니다.

주여.. .

 

 그러나 오늘

이제는 거의 다 나아가는 아픔을 지닌 자로서

불현듯 깨달았습니다 .

 

아... 그리고 더 있습니다.

혹여 그들이 즐거워할 때

이 부족한 자의 가슴 한구석의 못은

'나만... 왜.. '라는  '사단의 찌름'같은

공감하려 할 때마다 가로막는

아픔이 있어 

스스로의 틀에 갇혀지게 되면서 

더 공감 못하게 하는 것도 있구요...ㅜ.ㅜ;

 

어쩌면 '믿지 못하는 자'들의 경우는

마비도 있을 수 있겠지요.

하나.. 어차피 오늘 묵상은 '믿는 자의 대표격'인

다니엘님의 공감에 대하여 묵상케 하시니

올곳이 '제 공감에 대하여 '

왜 그 분처럼 하지 못하는 지

그렇다면 오늘 부터 공감을 어찌해야 하는 지...

묵상하게 하시는 것 같습니다.

 

주여.

 

그렇습니다.

공감하고 같이 하나님의 원하시는 방향으로 나아감...

중보함을 위하여 옳은 공감이 선결되어짐..

그러기 위하여 '내게 부족했던 공감'에 대하여 회복되기 위함....에 대하여

오늘 주님은 제게 말씀하십니다.

 

 

주여.

오늘 '월요일'.

한달전 수술 후 농양생겨서 재 입원하신

독거 노인  HKJ님.

가슴이 아픕니다.

그 분.. '집사님'이시랍니다.

가슴도 아프고 걱정도 되고

공감의 거리는 많지만 제 안에서 예상되어지는 허술한 의학적 예상으로

가능하면 생각지 않으려 마음 한켠으로 눌러 놓았습니다.

그분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가 제가 할 세상의 일을

제것인양 다 해결해주고 싶은 충동도 있고

그렇게 하는 게 제대로 하나님 기뻐하실 것 같은 착각으로

이것 저것 마음 분주하였었으나

기도하고 내려 놓길 바라시는 것 같아 그랬습니다.

 

제 안의 '공감' 하면 생길 여러 아픔과

현실적 대체 대안에 대한 버거움으로

'공감'에 함부로 나서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다니엘'님 만큼 같이 아프고

하나님 앞에 모든 내면의 어두움 들이 드러나는 것이 두려워 그랬습니다.

 

그러나, 오늘 묵상을 마주하면서

하나님 앞에서의 공감의 회복과

어디까지 제가 감당해야할것인지

어떤게 하나님이 기뻐하실 내 역할인지

조금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아... 주님..

솔직히 평생 살아오면서

제안의 '불안'으로 뭉뜽그려져

제 가슴을 짓누르며 다가오던 상념들의 무게로만도

견디기 힘들었던 바

가슴을 몰려오는 '긍휼'함과 불쌍지심을 억지로 누르는 훈련을

너무 오랫동안해와서

'공감'과 '그 이후의 문제'는 가능하면 생각지 않으려 해왔던 것도 사실입니다.

 

주님..

행동으로 까지 갈지

주님이 내게 원하는 것이 무엇이신지

내 안의 문제는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공감'과 '긍휼의 회복'과 주님 공의 앞에서의 '바로섬' 등

모든 것..

그냥 주님 앞에 맡깁니다.

 

오늘 '공감'을 묵상하게 하셨사오니

그냥 가만히 쳐다보고

제 안에 다가오는 여러 무게들을

주님 십자가 앞에 내려놓으려 합니다.

당연히도 '성령'의 지혜와

옳은 방향으로

제 게 가장 맞는 '주님의 향기'로서

절 인도하실 줄 믿습니다.

 

주여.

HKJ님 좋은 결과를 우선 허락하소서.

다행이도 '시청'에 의뢰하여 경제적 문제 해결하였사오니

그분의 고난을 통하여 그 분의 어려움도

어느 정도 어루만지시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공의와 은혜 사이에서 옳은 풀림 있게 하소서.

 

내주여.

 

거룩하시고 귀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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