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칙한 QT
다시의 죄, 여러번의 긍휼[느9:23-38] 본문
(2009년 , 근무하던 S병원......)
주여
죽어가는 이 영혼들
응급히 살리소서
주의 놀라운
인내와 사랑으로
그리하소서
28.그들이 평강을 얻은 후에 다시 주 앞에서 악을 행하므로 주께서 그들을 원수들의 손에 버려 두사
원수들에게 지배를 당하게 하시다가 그들이 돌이켜 주께 부르짖으매 주께서 하늘에서 들으시고
여러 번 주의 긍휼로 건져내시고
29.다시 주의 율법을 복종하게 하시려고 그들에게 경계하셨으나 그들이 교만하여 사람이 준행하면
그 가운데에서 삶을 얻는 주의 계명을 듣지 아니하며 주의 규례를 범하여 고집하는 어깨를 내밀며
목을 굳게 하여 듣지 아니하였나이다
'다시'.. '다시' 다.
다시는 '악'을 행하는 우리, 나의 어이없는 되풀이 되는 죄를 말하는 듯하시고
'여러 번'은
그러한 어이없는 죄에 대하여
되풀이 되풀이 인내하시는
하나님의 긍휼 (주의 긍휼 )'을 의미하신다.
아..
가슴이 짜르르 하다 .
아침에 눈을 뜨니
(아니다.. .자다가도 깨면서 그랬다. .. ) 허리가 많이 아프다.
아....나도 모르게 속상하다고 울부짖었다. ㅠ.ㅠ;
그리고는 얼른 입을 닫았지만...
아내가 그랬다 .
'당신은 늘 조마조마해요.. 언제 또.. '
그렇다.
난.. 별거 아닌 것 처럼 잊어먹고 살았지만
갈비뼈 두번 부러졌고(자전거.ㅠ.ㅠ;)
다리 좌측 인대가 끊어졌었고
자전거타면서 찢어진데 부지기수..
교통사고로 어깨 인대 끊어지고
거기에 아주 오래된 허리 디스크.......
그러고 보니 참.......주신 육신을 험히도 다루었다.
허리.
오래된 거라.. 가끔 뜨끔하면 전신으로 퍼져나가며
근육이 뭉치니
절룩거리고 다니다가 얼마 지나면 또 잊어버리고 반듯이 ... 세워져
굳이 병가를 내지 않아도 (교통사고 때가 처음이다. ㅎ)
수술도 많이 하면서 열심히.. 잘.. 살아왔다 .
그거..
하나님께서 (진짜다.. 수사(레토릭)가 아니다.. ) 인도하셔서
이것저것.. 이 게으른 자에게 운동을 하게 하시고 하시며
나름 근육을 만드셔서 유지해가며 살아왔었다 .
그런데..
요번에는 괜히 더 아픈 것도 아닌데 (생각해보니 그렇다. . .다른 때도 많이 아팠었다. ㅠ.ㅠ;;)
나이 들어가며 겁이 나는 지
나도 모르게 좌절되려 해서 그랬던 것 같다 .
말씀 묵상을 들여다 보았다 .
은혜로운 구절들이 넘치지만
다 아는 것 같은... 그러한 내용이다. ㅜ.ㅜ;
아마도 내 자아가 득실대서 그러리라......
그럼에도 눈에 뜨이는 구절이
'다시' '다시' 와 '여러번'이다.
마치 내 허리 통증처럼
다시 다시 죄를 짓지만
또다시 회복시키어 오히려 더 젊은 몸을 가지게 하시는 (최소한 내 나이 또래보다는..ㅎ )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심으로
여러번 '회복'을 경험하며 살아왔다 .
솔직히 .. 그 허리로 서서 걷고 다니고 별문제 없이 일상을 산다는 것이
기적 같은 일이기도 하다.
남들 같으면 수도 없이 많은 가산 탕진해가면서
절절 맬것을 말이다.
그렇다면
내 '다시' 다시의 관점은
오늘 허리통증에 머무는가?
아니다
주님은 그를 통하여 다시금 내 되풀이 되는 죄에 대하여
돌아보기를 바라심이실 것이다 .
아..
안다.
'ㅇㄹ' ' 긍휼없음'..' 입으로 짓는 죄'................
이 고범죄들.
되풀이 되는 죄들.
그러나.. 그럼에 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내게 긍휼히 여기실 거.
그러함으로 죄책감이나 무거운 멍에를 질 필요는 없이
여러번 여러번 나를 다시 긍휼히 여기실
하나님의 그러하심,
또 허리를 펴주시고 아무 문제 없이 살게 하실
그 하나님의 긍휼하심에
감사하고 사는 삶을 바라심이시다.
그 감사함으로
이제는 다시다시의 죄를 짓지 않도록
최소한 그 다시와 다시 사이의 간극이 넓어지기를 바래야 한다.
감사하다.
주님.
주의 끊임없으신 긍휼하게 여기심으로 인하여
이 다시다시 되풀이 짓는 죄를 가진
저 주하인이
그래도 고개들고 살수 있음입니다.
주여.
전.. 그러하신 주의 긍휼하심이 없으셨더라면
지금까지 살 수 있었을 지도 의문입니다.
주여.
아픈 허리.. 아픈 다리.......육신의 그러함으로도 그랬을것이며
내 안의 깊은 죄책감, 두려움으로
우울함의 부정감으로 그랬을 것입니다.
주여.
그러나
여러번 여러번 긍휼히 여기신 주님의 그 끝없으신 사랑으로 인하여
제가 이제 점점 더 허리펴고 서게 되었사오니
제 그러하신 은혜로 인하여
더욱 성화되는 자 되게 하소서.
다시 짓는 죄, 그만 멈추게 하소서.
제 홀로 힘으로는 되지 않음을 고백합니다.
내안에 계신 하나님.
나를 감찰하시고
내 모든 것을 아시는 내 하나님..
내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그 러하심을 통하여
제가 감동으로
제 다시의 끈을 끊게 하소서.
주여.
오늘 그러게 하소서.
내 주 예수 그리스도 , 거룩하신 이름 받들어 기도하였습니다.
아멘
------------------------(2009.12.12 성령지표 (Spirit Index)
29. 다시 주의 율법을 복종하게 하시려고 경계하셨으나 저희가 교만히 행하여 사람이 준행하면 그
가운데서 삶을 얻는 주의 계명을 듣지 아니하며 주의 규례를 범하여 고집하는 어깨를 내어밀며 목을
굳게 하여 듣지 아니하였나이다
30. 그러나 주께서 여러 해 동안 용서하시고 또 선지자로 말미암아 주의 신으로 저희를 경계하시되 저희가
듣지 아니하므로 열방 사람의 손에 붙이시고도
고난 - 부르짖음 - 주의 들으심 - 축복 - 교만 - 죄-
다시 고난 - 다시 부르짖음 -........
또 고난 - 또 부르짖음 - ............
고난이 있어야 부르짖는다.
부르짖고야 주님의 들으심을 얻는다.
주님이 계셔야 평강의 축복을 누린다.
되풀이
또 되풀이
되풀이의 이유는 '교만함'이다.
주의 말씀을 듣지 않음이다.
주의 말씀은 '생명'을 얻는 것이다.
'삶을 얻는 주의 계명'이라 나온다.
고난은 말씀을 듣지 않음이다.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음이다.
그 듣지 않음은 교만이다.
교만은 '주의 신' 즉, '성령'의 임재하심을 막는다.
되풀이 되는 이 어리석은 죄.
성령의 임재까지,
그 놀라운 하나님의 축복이신
성령 하나님의 평강을 잊을 정도로
되풀이 되는 교만의 죄.
그렇다면,
이 교만은 선천적 결함 탓으로 인가?
영혼 씨스템의 오류로 인하여
도저히 어찌 거부할 수 없는 죄를 되풀이 되풀이 짓게 된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그것은 불쌍히 여길일이지
단죄를 하고 벌을 받을 일은 아니다.
그렇다면 '죄'는 무엇이 원인인가?
죄를 안짓도록 하시는 것도
'주의 신'이시다.
주의 영, 즉 성령이시다.
영적인 존재이신 그분 성령 하나님을
내 영혼이 기뻐하고
그 체험을 내 영혼에서 놓치지 않으려 노력하는 과정이
죄를 짓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 노력이 지날 수록 우리 영혼의 원죄적 결손은
하나 둘씩 엿가락 녹듯이 녹아져
순수하고 깨끗한 영혼,
즉 연단 받아 성화된 성인의 영,
주님 예수님 처럼 죄로 부터 자유로운 존재가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죄로 부터 자유로움은
'외부'로 부터 오시는 존재를
우리 영혼에 의지적으로 받아들이려는 '선택'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죄도 마찬가지다.
교만 자체는 우리의 고칠 수 없는 내재적 결함이 아니란 이야기다.
우리 영혼 속의 '원죄적 결점'은
그 죄의 영이 건드리고 지나갈 때 반응하는
깨진 부분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회개를 가져오시는 분도 '외부'의 '성령'님이시라면
죄의 영도 '외부'의 사단의 영이 자극을 하는 것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인가?
교만은 다 내 탓이 아니니 신경쓰지 말라는 것인가?
아니다.
모든 죄가 죄가 되는 것은
'선택'의 죄다.
주님은 생명으로 다가오셔서
주님의 영으로 늘 간절히 우리에게 속삭이시는 데
우리는 '악의 영'의 속삭임을 선택하는 죄를 짓는 것.
그것이 '벌'받을 죄다.
사도 바울께서도 분명히 말씀하시지 않는 가?
'하나님의 법을 원하는 나에게 다른 법이 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다.'
또 말했다.
'율법을 알기 전에는 죄가 우리에게 들어오지 않았다.'라고..
그렇다.
모르고 하는 죄는 벌이 약하다는 뜻이다.
알고 짓는 죄가 문제다.
그것은 '선택'이라는 명제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율법을 몰라야 되는가..라고 사도 바울께서 말씀하셨다.
돼지나 개는 죄를 지어도 큰 죄가 아니다.
그렇다면 사람이 벌 안받기 위해 개나 돼지가 되어야 한다는 말인가?
모든게 주님의 뜻이다.
주님은 우리를 만드시고 '선택'의 기회를 주셨다.
그리고 선과 악의 선택 안에서
선의 선택을 통해서 정화되어 연단받아 정결케 되는 것을
기쁨으로 보실 목적으로 만드신 것이다.
교만.
그것은 너무 달콤하다.
사람들의 칭찬은 너무 힘이 되는 것 같다.
꿀 발라지는 것 같이 달다.
하지만 비만과 충치의 위험이 따른다.
한번 맛본 교만의 재미는 벗어나기는 얼마나 힘든가?
사람들의 갈채를 늘 받던 자들은
갈채가 갑자기 사라지면 '우울'해지고 자살을 선택하기도 하는
작금의 세태다.
세상.
주님을 모르는 세상은 더더욱 그래서 악으로 달린다.
파리가 꿀에 모이듯
갈채를 받고 칭찬을 받기위해서는
갖은 수단 방법을 아끼지 않는다.
그것을 '성공'이라는 이름으로
사단은 부추기고 미화시킨다.
사람들은 파리처럼
꿀에 빠져 죽기 전까지 죽도록 달려든다.
교만은 그 꿀이다.
그 사실은 비단 '기독교'인이라고 다를까?
주님의 참 기쁨이
꿀보다 훨씬 달고
장미보다 훨씬 아름답고
꿀에 모이는 나비의 가벼움 보다
훨씬 더 달고 아름답고 가볍고 행복하다는 것을 알기까지는
많은 고난과 연단이 있어야 한다.
그 고난과 연단..
잘 이겨내고 정금같이 나올 자 몇이나 될까?
주님나라 가기 전까지
온전히 성화되기 전까지는
이 달콤한 악의 유혹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죄.
선택을 잘못한 죄.
그 죄는 적극적으로 회개해야 한다.
회개는 '성령'으로 이루어진다.
회개하고 난후 그 통렬한 시원함을
난 요즈음 제대로 맛보고 있다.
성장했다고 잘난체 하는 것이 아니다.
여러번 썼지만 예배하고 난후 놀랍도록 마음이 시원하고 기쁠 때가 많아진다.
어깨에 놓인 짐이 떨어져 나간 것 같고
가슴이 따뜻하고
아랫배는 든든해지고
눈이 나도 모르게 글썽 거려지는 증상이 오래간다.
이 것.
이 느낌.
이것은 '성령님'이 주신 감동임을 어렵지 않게 증명할 수 있다.
누가 체험을 증명할 수 잇는가?
그것이 주관적인 것이기에 감정의 착각 아니던가.. 할 수 있다.
하지만
나..
의사.
의학 문을 하는 자.
나름대로 생각을 해 보았다.
'통증 지수(scale)'이란 것이 있다 .
통증은 주관적이지만 '숫자'로 표시해 객관적 지표로 만든게 있다.
그것처럼 '성령 scale' 즉, 성령 임재지수을 만들고 싶다.
이것이다.
1. 얼마나 기쁨이 지속되는 가?
1) 없다 0점 2) 있지만 수분 내로 짧다 5점 3) 한시간 이상 : 10 점
2. 상황과 상관없는 눈물이 동반되는가?
1) 없다 0점 2) 있는데 잠시 찔금거리고 만다. 5점 3) 통곡의 눈물이 오래다. 10점
3. 예배나 기도후 후련하고 통쾌한 느낌 (사도행전에 나온다 )이 드는가?
1) 없다 0점 2) 잠시 5점 3) 오랫동안 통렬히 10점
4. 상황이 달라지지 않았어도 행복한가?
........................
솔직히 객관적 지표를 만들고
여기에 동감하는 분들 많이 모아
데이터를 모아 놓은 후
이렇게 된 분들이 얼마나 그 후 그런 체험이 지속되었고
그 후 얼마 시간 후에 생활이 얼마나 바뀌었는지
인격의 변화 (이런 것도 얼마든지 고민하면 변화지수 내지 척도를 만들 수 있다) 있던지
점수 별로 환산하여
그 정도 점수에 인격이 변화가 오고 삶이 행복했다면
그것은 '성령'께서 임하셨던 것이다...라는 점수를 만들 수도 있을 것 같지만
주님은 그것을 불손하게 생각하실 것 같고
솔직히 힘이 들어서 싫고
그렇게 아니해도 난 내나름대로 확신이 든다.
이것은 '성령'께서 나에게 임하시는 것이다...라는.
그렇다면 그 분의 임하심은 나의 삶의 목표가 다시한번
주님을 위해서 살다가 주님 곁에 성화된 자로 가는 것임이 확실히 되는 것을 알때
내 삶은
이 엉터리 같은 세상의 조건과는 아무 상관없이
행복해질 당연한 이유가 있게 됨을 알 수있지 않는가?
그리고 '교만'
남들의 칭찬을 좋아하여왔고
지금도 달콤해 하는 이 어리석음은
자꾸만 회개와 기도로 주님 앞에 내려 놓아야 하지 않는가?
오늘.
묵상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교만함.
그리고 그로 인한 세번 이상 되풀이 되는
고난과 하나님의 한숨과 기다리심과
그 끝없는 사랑의 결과가
쳇바퀴 도는 것을 보며
그 교만의 달콤함이 얼마나 강력하기에
저리도 미련한 것을 되풀이 하는 것인가.. 생각이 들며
어찌 보면
나의 이 어리석음도 얼마나 당연한 것이고
주님께서 날 얼마나 안타까이 보실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런 의미로
그동안 자책하고 괴로워하던 나의 어리석음에 대하여도
한결 부드러운 눈길이 펴짐을 느낀다.
나.
어리석은 자.
그러나 이해하고 받아 들이고 껴 안을 자.
주님이 사랑하시는 자.
교만하지만
이제는 주님의 성령을 더욱 사모하여
교만을 버릴 자.
죄의 영이여.
물러가라.
나는 주님을 사랑한다.
주님의 성령을 선택한다.
적용
1. 올바른 선택을 하자.
모든 악한 생각은 주님의 뜻이 아니다
성령의 열매로 모든 것을 선택한다.
'화'는 죄의 영의 장난이다.
화나려 할 때 주님의 영을 선택한다.
2. 모든 자에게 겸손한다.
환우 분들에게 특히 그러하자.
그들의 어리석음을 비웃기 보다는 불쌍한 눈으로 보자.
주님의 영이 그리 하실 것이다.
3. 회개하자.
교만하여 짓게 된 죄.
순간에 사단의 속삭임을 들은 죄를 회개하자.
나는 용서하자.
4. 성경 일곱장 읽겠다.
5. 장래에 대하여 준비하자.
기도
주님.
주님의 안타까움을 보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보고 있습니다.
그 교만 속에 갇혀 자신이 가장 똑똑하다고 생각할
그 어이없는 어리석음을 보고 있습니다.
주님의 도우심에 의해
주님의 사랑으로 살아났으면서도
되풀이 되는 죄를 보고 있습니다.
그들의 어리석음으로 인한 고난을 보고 있습니다.
주여.
성령으로 도우시고 붙드소서.
저.
주님의 성령의 임재하시는 기쁨을 아는 자.
주님의 원하심을 깨닫는 자로서
다시 한번
선택의 결심을 바로 하나이다.
난.
교만하지 않겠습니다.
난
사단의 유혹은 과감히 버릴 선택을 합니다.
난
주님의 뜻대로 선택할 결심을 합니다.
도우소서.
주님의 기뻐하심을 제 영혼이 채울 수 있기를 원합니다.
내일
주님.
둘째의 면회날입니다.
참으로 고생한 그 아이.
그 아이의 미래를 보길 원합니다.
부족함 보다는 장래를 보길 원합니다.
주님이 하시면 모든게 선일... 그 선한 것을 믿는 선택을 합니다.
성령이여 도우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감사하며 기도합니다.
아멘
----------
10여년 전 제가 이랬네요.
울 아들이 그랬고요.
변화를 읽습니다.
그때의 그 요동치던 내면이
많이 잠잠해져 있고
그 상황이 죄송하고 아프고 불쌍하던 것이
이제는 '긍휼'한 눈으로 바뀌어가고 있음을 느낍니다.
그래서........
과거의 묵상을 들여다 보게 하시나 봅니다.
자그마치... 10년전 일인데도
그대로 느껴집니다.
그때의 그 감정이...
그 인도하신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한 내 감동이요.........할렐루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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