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칙한 QT
겸손할 자(습 1:14-2: 3) 본문
아버지 하나님이 노하시면
그 큰날이 도달하면
참 무서우리라.
그래도
주님의 선택받은 자,
겸손한 자들은
그날이 감해질 것이다.
주님 안에서
늘 겸손하고
주님의 공의를 닮으려
몸부림치자.
제 1 장 ( Chapter 1, Zephaniah )
14. 여호와의 큰 날이 가깝도다 가깝고도 심히 빠르도다 여호와의 날의 소리로다 용사가 거기서 심히
애곡하는도다
제 2 장 ( Chapter 2, Zephaniah )
3.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며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
너희가 혹시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숨김을 얻으리라
아침에 일찍 일어나
묵상을 하고 나왔다.
그래도 주님 앞에 서려는 몸부림을 귀히 여기셨나?
어려운 과정에서도 조금은 숨돌릴 여력이 있다.
환경은 안그래도 영혼이 버퍼가 생긴 듯 하다.
묵상 구절에 '겸손한 자들아' 하신다.
큰날 , 주님의 오실 마지막 날을 온전히 '겸손'한 자로 인정 받을 자들이
과연 얼마나 되겠는가?
오늘 묵상이 그런 온전한 겸손의 자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이면
묵상집을 들출 아무런 의미가 없지 않은가?
늘 그렇듯 부족하지만 주님은 나에게 일대일로 말씀하신다.
'나의 하나님'이 나에게 그러신다.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들아'"
그것은 이렇게 들린다.
'세상의 모든 겸손할 자 중에 속할 자야'
예전 같으면 무거운 마음으로 나는 아닐 것이라고 생각하고
스쳐 지나갔을 이러한 구절이 이렇듯 받아진다.
이것은 교만과는 또다른 차원의 그것이다.
주님과 말씀으로 동행하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내 객관적 입장 - 내가 생각하는 정황을 생각하여 나를 비추어 볼 때 - 과는 상관이 별로 없을 듯한
말씀 구절이 나에게 해당되는 듯한 것을 경험하고 있다.
그것은 주님이 나에게 '너는 이제 말씀으로 의인이되어가고 있는 중이다'라고 속삭이는 듯하신 느낌이다.
언젠가 욥기 묵상하면서 욥의 철저한 자기 인식에 대하여
이해가 되며 공감되던 바가 있다.
그 의의 개념은 도덕적 차원의 것과는 조금은 다른
주님의 임재로 인한 자기 인식에 의한 것이다.
그는 죄를 짓지 않아서 의인이라기 보다
주님의 임재로 인하여 점차로 죄에 대한 욕구에서 멀어지고
주님이 그 자신에 대한 인정과
장래 있을 온전한 의인으로서의 자기 확신에 의한 것임을
막연하게 느껴지게 하고 있으셨다.
난, 나도 그럴 것이라 생각이 되어 지고 있다.
아주 조금씩...
지금 죄가 많다.
갈등이 있다.
그럼에도 오늘 주님이 말씀하시는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들아 '에 그리 큰 부담이 들지 않고있다.
'그래. 어차피 난 겸손하게 될 자 맞아'
'그러니 주님 말씀 안에서 하루를 더 열심히 살면 되..'하는 게
묵상을 대하면서 살금살금 드는 생각이다.
지독한 자기 비하나 열등감, 나랑은 거리가 먼듯한 비교의식등은
많이 멀어져 갔다.
그런 마음으로 아침을 맞았다.
환우 한분이 들어오신다.
지난 번 '우울증' 이야기를 하시며 폐경기 약을 타가시던 분.
다행이도 예수님 믿으시는 분이라서
'영육혼'의 원리와 우울증에 대한 나의 견해를 이야기 해주니
눈이 커진다.
나가실 때는 '모 방사선과 원장'님이신 장로님의 모습이 나에게 비친다 한다.
그 분이 전도를 많이 하시는 분이시란다.
일단은 주님의 겸손 안에서 성공한 듯 보인다.
내 스스로.. .
다음에 몇달 전에 난소파열로 응급 수술했던 아이가 들어온다.
똑같은 현상.
모친의 수다.
그래도 겸손하려는 묵상의 구절이 남아 있던 지
부담이 오는 보호자 임에도 표정관리는 했다.
하지만 마음이 끓어오르려 한다.
웬지 그런 분을 뵐때 속이 걸리는 부분이 있다.
마음이 부담이 된다.
주님께 죄송하다.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들아 '에 ,
겸손과 공의를 구하라 하는 데 벌써 내 마음과 얼굴의 굳음이 실패는 아닌가?
실패와 걸림이 되풀이 된다.
짜증이 마음에 걸린다.
점심시간.
참으로 주님 앞에 나갈 길이 멀고도 험하다는 생각이 든다.
어찌 이 짧은 오전의 시간에도
주님 말씀을 묵상하고 그 말씀을 내 삶에 적용하여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오늘 하루 더 이루어 보고자 함에
이리도 힘이 드는가?
언제나 되어야 이 불같은 내 성품은 잠잠해질 것인가?
물론 외적으로는 너무 달라지셨다고
착한 외래 간호사가 칭찬은 하지만
내 속의 겸손치 못하고
환우들을 진심으로 위로하고 격려하는 공의의 긍휼함이 나오기는
이리도 거리가 멀단 말인가?
점심시간.
잠시 눈을 감고 묵상하려다가 잠들었다.
밥먹고 와서 다시 힘을 내서 가야지.
적용
1. 말씀 일곱장 읽겠다.
2. 겸손한다.
3. 말을 줄인다.
4. 공의롭겠다.
난 의사다 .
환우의 영적 심적 편안을 위해 공의로울 필요가 더 있다.
5. 주님 안에서의 내 인식이 서서히 좋아지고 있다.
조금 더 확장 되면 난 '겸손한 자'가 되어 있을 것이다.
6. . '세상의 겸손한 자들아' 백번 외우겠다.
기도
주님.
겸손한 자가 되길 원합니다.
그 겸손이 낮추려는 노력에서 벗어나
자연스레이 낮아짐을 기쁨으로 받아 들이는 자가 되어 있길 원하나이다.
주님.
그토록 오래 겸손하려 노력은 하였으나
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세상에 겸손한 자들아'라는 말씀에 거부반응이 들지 않음은
되지 않았으나 될 나의 모습에 대하여 알게 해주시는 듯합니다.
겸손은 주님의 능력으로
주님의 생명으로
십자가의 생명으로
성령의 능력으로 될 수 있고
난 말씀 안에서 그러한 바램을 끝까지 놓지 않고 있으면 말입니다.
주여.
난 겸손한 자가되길 원합니다.
주여.
삶에서 향기를 드러나게 하시고
내 스스로 그리 인정하게 하소서.
이제 그만 짙은 회색의 구름 같은 부정의 생각들은 벗어 버리고
주님의 햇빛 아래서 건강한 겸손의 나로 살아갈 수 있길 원합니다.
주님 오실 그날에...
세상의 겸손한 자를 부르실 때
제가 나갈 수 있는 그런 겸손한 자가 되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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