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칙한 QT
예수님 자유 안에서 흐르기 [눅6:1-11] 본문
.
1 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새 제자들이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비어 먹으니
예수께서 과연
'저들의 배고픔'을 모르셨을까?
'일부러 안식일 금식' 시간 동안 '밀밭'으로 가셨을까?
'보는 바리새인들'이 갈등을 겪게 하시고 , 가르치실 목적으로 일부러 그러셨을까?
.....
제자들은
평생의 관습,
그들 세상에서 거부할 수 없는 안식일의 금식을
어찌 저리 쉬이 깨뜨릴 수 있었을까?
예수께서 하셨고 가르치셨으니 해도 된다고
특권의식을 가지고 그랬을까?
눈치를 보면서 서로서로 배고픔과 관습과 군중 사이에서 선택을 한 결과일까?
마치 태극기 집회 ㅜ.ㅜ;; 노인들이
'저항권'이라는 'ㅈ 목사 ㅠ.ㅠ.....'의 교묘한 선동에
폭죽 터지듯 무너지는
관습에의 도전, 국가 권위에 도전하는
그런 인류 보편의 파괴적 본능이
저들에게서도 나왔을까?
..........
당연히도 아니었을게다.
너무도 당연히도 아님을
체험이고 경험이고 말씀을 통해 꿰뚫어지는 하나님의 원리,
사랑과 긍휼과 자유
거기에 흐르는 자연스러움........에 의하여
누구라 할 것 없이
흐르듯 그렇게 되었을 것이다.
오랜 묵상의 글에서
'아베마리아'라는 조수미님의 노래가 떠오른다는 글을
아래에 긁어다 놓았듯
자연스러운 허허로움을 넘어
오늘은
그런 자연스러움은
하나님 안에서의 초연함과 이어짐을 느끼게 함으로 이어진다.
제자들의 그러함.
그러한 자연스러움
그러한 흐름
자유를 빙자한 방종과는 차원이 다름을 보고 있다.
할렐루야
2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느냐
자유와 대척되는
'질시와 감시와 사망'
예수님과 바리새인
생명과 사망.
같은 일을 보되
어두움을 본다
관습에 갇혀
진리를 배척한다
두려움에 갇혀
생명을 멸시한다
영원한 배고픔에
영생의 풍족함을 질투한다...ㅠ.ㅠ
8 예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손 마른 사람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한가운데 서라 하시니 그가 일어나 서거늘
10 무리를 둘러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그가 그리하매 그 손이 회복된지라
그리고 그러한 '자유' 안에서 흐르는
또다른 예를 본다.
안식일에 하지못할 일,
치료하시는 주님 예수님의 요청에
자연스레이 따르는
아니.. 절실히 따르는
손마른 사람.
그가.. 머뭇거림이나 망설임이 있었을
하나의 뉘앙스도 없다 .
그렇다.
그게 답이다 .
하나님 안에서
예수님 영접 이후
성령의 은혜 안에 거하는 체험이 커지고 깊어지며
자유를 느낀다.
너무도 자주.. .
상황과 환경을 넘어서
비교와 좌절을 넘어서
두려움과 갈망을 넘어서
할 것과 못할 것에 대한 갈등을 넘어서
자유..
자연스러운 흐름이 좋다.
그 좋음이 너무 좋아
다른 좋음, 세상의 강렬함, 내 흔들림을 채워줄 안타까움의 대치............는
더 이상 필요없고
오직 말씀,
오직 은혜
오직 하나님.. .
그러함 가운데 많은 부분 내려 놓아지고
비교가 필요없어져
가벼워 지는 노후가 점점 이루어 지고 있음이다.
그러해서
더욱 더 '말씀'보고
더 많은 시간 묵상하고
하루의 많은 부분을 더 레마를 적용하려 하는
이유와 기회가 되고 있다
그렇다 .
오늘은
동일한 구절을 가지고
시간에 따라 다르게 허락하시는
레마를 묵상하고 있다
이제..
자연스러움,
내려 놓음
부딪칠 일의 감소
감사
초연함에 대하여 묵상한다.
감사하다.
정말.. .
------------ 누가복음 6:1-11 과거 묵상 들
#1. 2021.01.15 내게는 주가 계시니[눅6:1-11]
2.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느냐
그냥..
아무 것도 하기 싫어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있다 . ^^;
그냥
목소리도 내기 싫어
가만히 있다.
그냥
알아내고
해결하고
응답받고
더 편해지려는 노력도 하지 않고 있다.
그냥
단지
가만히
있을 뿐이다.
그러는 내게
오래된
생각의 꼬임들이 몰려 오려 한다 .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 죄인지 모르는가?
어서 어서 돌려 놓고 더 나가야하지 않겠는가?
어찌 그리도 변함없는가?
왜 그런거냐. ...
...
오늘
묵상 구절 중
'어찌하여'라는 소릴 보며
순간
익숙한 내 안의 방어하려는 마음,
움찔하는 느낌이 들려한다.
그러면서 아주 아주 오랫동안 훈련해왔던
익숙한 '방어'의 논리들을 마구마구 내 머리속에서 검색하려는
습관이 올라오려 한다
그러면서
그게 '옳은 것인지 틀린 것인지'.........
이 나이에 그렇게 해도 맞는 것인지...........
그 사이를 뚫고
슬그머니 '예수님 믿는 자'로서..........라며 '송사'하는 소리가 나오려 한다.
그래도
오래 연습온 '작은 소리로 읊조리는' 기도,
사자의 그르렁 거리는 듯한 'roaring'의 기도 라도 해서
생각의 꼬리를 자르고
다시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모습으로
우뚝 서야 겠지만.. .ㅠ.ㅠ;
힘이 없다 .
연민임을 알면서도
힘이 솟지 않는다.
어찌 다 표현하겠는가만
그저.. .그렇다 .
그래서 '힘을 다 풀고'
'멀리서도 밝히 내 생각을 다 아시고 '
'내 앉음과 섬을 다 아시며'
'새벽날개를 펴고 바다 끝에 거할지라도
날도우시는 ' 내 하나님.
'속히 오셔서 날 구원하실 하나님'의 구절을 기억하며
그냥.............
그냥........
그 어찌하여에 대항하여
가만히 있을 뿐이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훈련되어진 습관 탓인지 (스스로 놀랍다. . .난 .. 규칙적이란게 없는 사람인데.. 원래.. ^^;)
그 시간에
겨우.....라도 일어나 앉아
가만히.......
주님을 의식하고
말씀을 기억해내려 애쓰고 만 있다.
아침에 출근해서
여지없이
똑같이 이곳에 '오늘 말씀 구절'을 긁어다 놓고
환우 몇분 보고는
하기 싫은 (솔직히 .. 매일 매일.. 글을 쓰려하는 것 자체가 도전이고 고역이다. 죄송하지만.. )
묵상의 글을 올리려 앉았다.
넘. 부담이 된다.
은혜가 되어
나도 모르게 '절절히'.. . 감성이 폭팔하며 쓰며
내 안의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글재들이 튀어나와
감당하기 어려워
심지어는 길 가다가도 '작은 수첩'을 꺼집어 내어
휘적휘적.. .정신없이 갈겨쓰게 하시던
십여년 전 , SaM AY 병원 시절의
그 때처럼
전혀 인도하지 않으심에
가끔은 답답하고 속상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어쩔 것인가?
늘 항상 똑같이 어린 아이의 상태나 젊음의 상태... 에 머물수 없지 않던가?
그러함에도
단 하나 변함없는 사실..
하나님은 말씀하시고
듣고 순종하길 원하심이시다.
그게 내
아무리 둘러봐도 의미없을
이 삶에
오직 유일한 의미이시고
하나님께서 '하나님 시간'에
또 하나님의 방법대로
내게
나에 맞는
이끄심으로 또 모습을 드러내 보여 오셨음시기에
또
말씀을 이렇게 이곳에 펼쳐 놓고
여전히
또
그냥
가만히
눈을 감고 집중했다.
갑자기
떠오르는 생각이 있다.
'아.. 우리에게는
내게는
그래도
하나님의 말씀이 있으시다" 다.
마음이 뜨거워지고
은혜 받을 때의 감사함으로 깊어진다.
얼른 눈을 뜨고
아침 일어나 별 감동이 없게 받아 들여졌었던 말씀 구절을 들여다 보았다.
'어찌하여'... 라며 신랄히, 나름 정확히 공격해 들어오는
그들의 소리가 눈에 들어온다 .
그러하면서
당연히도
주님이신 예수께서
믿는 자의 자유로움... .
'율법',
세상 사람들의 판단으로는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인생의 굴레
진리의 눈으로 보고
아니.. 솔직히 지금 현대인의 눈으로 보아도
도저히 믿기 어려울 '미련함' .. 어리석음의 굴레에 갇혀
그들은 그렇게 살아가며
또한 그것은 돌이켜 생각해보면
지금 우리, 나의 고민과 생각도
어쩌면 '진리'이신 하나님의 뜻과는
아무 상관없는 굴레일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날 힘없이 하고
묶어 가려는 이 다른 생각들...
하나님 안에서는
'자유'인 것을
어찌도 이렇게 묶이려 했던지.. ...
하지만..
다시 삶으로 돌아오면
또 여지없이 난.. 우리는 또 묶이려 할 것이고
그것을 내 육신은 알아차리고
그 변화를 내 마음은 인지하여
불안하려 하고 답답하려 한다 .
하나님은
이리 말씀하신다.
'어찌하여'..........가 아닌
어찌 묶이려 하는가.. 하신다.
자유다 .
주님 안에서
주님을 인식하고
주님 안에서 회개하고 돌이키는 자는
주님이 또 알아서 하실 것이시다 .
우리
믿는 자..
말씀을 묵상하고
매일 말씀 앞에 서려는 자들은
당연히도
너무도 행운이다.
주님.
그렇습니다.
주님 말씀이 답이고
주님 만이 길이시니
난.. 방향을 알고 길을 알고 있는 자였으며
당연하게도 그런 나이기에
가볍고 자유로와질 당위성을 가지고 있음을
다시한번 깨달았습니다.
주여.
알면서도
이 땅에 살면서
자꾸만 나도 모르게 휘감아 가려하는, 휘감아 오는
생각들의 , 사단들의
어찌하여.. .에 묶이고 눌려
답답하고 불안해 하려 했습니다 .
내 영혼에 네가 어찌하여 답답해 하고
어찌하여 불안해 하는 고.. 라시는
주님의 안타까우신 사랑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오늘 송사하는 '어찌하여'의 사단의 소리를
어찌 예수님 안에 있는 자들이.. 라 답하시는
예수 님의 소리를 들으며
마음이 넓어지고 가라앉고
행복해지려 합니다.
주여.
힘을 주소서.
인도하소서.
부끄럽지 않게 하시고
당당하게 하소서.
내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살게 하려 하는 삶,..
그런 당위성을 가지고 사는 자
잊지 않는 제가 되게 하소서.
내 주여.
거룩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들어 감사하며 기도합니다.
아멘
#1. 2016.01.18 해도 될 일들
1 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새 제자들이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비어 먹으니
'안식일'로 대표되는
규정이나 율법이나..이런 것들이 더이상
예수께 아무런 지장이 되지 않음은 이제.. 누구도 알지만
그래도 왜 하필이면 오늘 구절에 '밀밭사이로' ,
먹지 못해 피골이 상접해 있을 당신의 제자들을 이끌고 지나가서
그들이 ' 이삭'을 잘라 먹을 '憂'를 범할 기회를 주셨을까?
2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느냐
보라.
어떤 '바리새인' , 한번이라도 찌를 기회를 찾던 그들에게
그런 것이 빌미를 줄 것이란 생각을 과연 주께서 하지 못하셨을까?
' 어찌하여.....하지 못할 일' 이라는 지적,
저 차갑고 날카롭기가 뱀같은 자들,
이 세상의 이지메 하는 자들,
싸이코 패스들,
소위 상위 몇 프로에 드는 '많은 분'들의 아래를 내려다 보는 눈빛들.... 같은
그 눈길에서 나오는 저런 잔인한 말을
과연 하나님이신 예수께서 짐작을 못하시고
단지 '반발성' 해명 만 하셨을까?
아니면 옳은 듯... 새로운 궤변을 늘어 놓을 기회를 잡기 위한 포석이셨을까?
당연히 아니다.
왜인가?
하나님의 모든 일은 당연히도 무조건 '선'하시고
우리의 '무엇인가'를 자극하시어 가르치시기 위함이시다.
그게 무엇인가?
아래에 오래전에 쓴 묵상의 글...
난 이 글을 참 스스로 기뻐하는데 ,
그 가슴이 늘 무겁던 시절에 하나님은 내게 저러한 자유로움, 허허로움을 주셨다.
아.. 그래서 그 감동이 지금도 그대로 생생하다.
무슨 상황이기에 '감동인가?"
하나님이 내게 보이실 일의 근거가 저것이다.
제자들은 제자들이다.
그들은 갓 믿은 자들이 아니다.
모든 사람을 끌고 밀 밭에 들어오신 것도 아니시다.
그들을 훈련 시키고 이천 몇십년 후의 주하인에게 '레마'를 주실 이유다.
그것은 '율법을 넘어서는 자유다'
자유는 주하인이 일관되게 예수님의 믿은 이후에 느껴오는 기본 감정이고
스스로 천국의 느낌이라 생각하고 있다.
이제 '제자들'에게 배고픈 안식일에 밀밭에 데려옴은
그들이 가지고 있던 자라고 나서부터 몸에 익혀두었을 풍습과
심한 배고픔 사이에서 '갈등'보다는
자연스러운 흐름을 통해
허허로운 가운데 자연스럽게 '밀'을 따먹는 경험을 하게 하심이다.
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다윗이 자기와 및 함께 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예수께서는
율법을 넘어서는 사랑을 말씀하시는 것이고
그 확신의 사랑은 자연스러움이다.
흐름이다.
주께서는 아무나 다 데리고 밀밭으로 오시지 않으셧다.
제자들이다.
안식일이다.
나.
병원을 01.13까지 근무하고 연차 내고 마무리 한후
그 다음 날인 14일 갑자기 하루 빈 시간을 이용하여 '소백산 트랙킹'다녀왔따.
정말 눈덮히고 맑은 하늘의 소백산은 기가 막혔다.
그리고는 저녁 부터 잠시 쌀 줄 알았던 '이삿짐' 을 새벽까지 쉬지 않고 정리하고
금요일인 15일 평택 병원에 가서 신체검사와 이사장님 면담을 하고
근처에 집을 구하고
저녁에 올라와 '금요 찬양집회'에 하기오스 찬양대원으로 섰다.
바빳다.
그리고는 여러 잡일을 마치고
주일에 예배 드리고 오늘이다 .
이제 남은 시간 '잡일'을 한 결과로 ( 갑자기 일본 종단 기차여행'갈 마음이 동했다)
일본 여행을 갈 기회가 생겼다.
참 빡빡한 일주일 내지 8일 동안의 계획.
오늘 오후에 부산에 가서 카멜리아라는 밤 배를 타고
후쿠오카에 내일 아침 도착하자 마자 즉시 JR 패스를 ( 외국인을 위한 기차 패스로 아주 저렴하다)이용
도쿄로 넘어가 일박하고
홋가이도로 밤 기차 타고 가서 3일 머물다가 주일인 24일까지
다시 오사카로 내려와 예배를 드린 후
26일 귀국할 예정이다.
역시 배 타고.. (오사카에서 혹은 후쿠오카)에서...
배표와 JR 패스 .. 아무 것도 안끊었다 .
단지 부산까지 내려갈 'KTX'와 26일 올 KTX 표만 예약 했다.
26일 오기 싫으면 다시 변경하면 된다.
마음 같아선 후쿠오카 ( 북해도) 에서 며칠 더 있었으면 좋겠지만
거기에 24일인 주일에 예배드릴 마땅한 '한인 교회'가 검색이 안된다.
3군데 쯤 보이긴 하는 데 오래된 블로그나 일본 종교 색채가 버무려진 듯한 느낌의 교회만 있어서
도저히 안되어 밤기차 타고 (11시간 넘게 걸린다 ) 오사카로 내려오는 것이다.
이것이다.
난 이번 여행은 홀로 간다.
아내는 너무 약하고 약간 취향이 달라서 요번은 그렇다.
그리고 내 나이 되어서 '배낭 여행'같은 여행을 즐기는 자 많지 않다.
그래서 홀로다.
그래도 자유롭다.
두렵지 않고 흥분이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여행코스에 반드시 '주일 예배 성수'가 들어간다.
그게 잡히지 않으면 아무리 하고 싶어도 코스를 변경한다.
'북해도'
정말 가고 싶었던 곳이다.
알래스카처럼 눈도 많고 경치가 사뭇좋다.
이런 곳에서 구석구석 발로 누비며 사진도 찍고
코끝을 찌르는 시원한 공기를 마시며 홀로 깊은 묵상에 들어가
주님을 만나는 것도 아주 좋다.
그런데 진정 북해도 내에서 그러한 곳은 더 북부로 가야 하는데
시간이 11시간 걸리는 곳이다.
북해도 안에서...
그래서 시간을 내서 들르고 싶지만
주일 때문에 포기하고 내려 오는 것이다.
예수님 믿지 않던 시절은 어땟던가?
주일 걸리면 안간다.
아마 휴가 때 '금식'하러 기도원에 들어가고
.....했을 것이다.
아니다.
절대 그게 잘못이란 이야기는 아니다.
그러한 시간도 난 ... 엄청난 은혜가 있었기에 그랬다.
대신 그때는 그러하지 않았으면 '두려움'과 허전함과 외로움이 너무 컸기에 그랬다.
그런데 이제 난. .. 자유롭다.
'예수님'을 늘 인식하고 살기에 그렇다.
제자들도 그렇다.
그들은 수십년간 해오던 '풍습'과 교육을 깜박잊은게 아니다.
자연스럽게 그들의 배고픔 과정에서 '밀'을 까먹었다.
두려움은 안 느껴진다.
죄책감도 없다.
그들은 '예수님'을 따라가는 나름 성숙한 '제자'들이기 때문이었다.
율법은 몽학선생이다.
초등학교 대학교 까지는 선생이 필요하다.
그 규제 안에서 그렇다.
그후는 자율이다 .
그 자율 속에서 가장 자연스러운 흐름은
'예수님' 목전에서 행하는 누림이다.
그들은 그랬다.
나도 그렇다.
해도 되지 않을 일과 해도 될 일들을 이제는 잘 구분하는 능력이 생겼다.
나이가 나랑 동갑이자
대전에서 아주 잘나가는 여류화가인 조카가 '카톡'이 와서
내게 새해는 어떤 마음이냐고 했다.
나 .. '경쾌'와 '명쾌'라고 했다.
지체 않고..
그렇다.
나는 그렇다.
예수님을 인식하고 사는 삶이기에
잘 흐른다.
해도 될일은 한다.
구분이 가지 않을 때는 '가만히 예수님'을 집중한다.
반드시 해야할 기본은 한다.
'주일 예배 성수, 십일조'..등이다.
그를 통한 '사랑의 노력'이다.
그리하면 난.. 자연스러운 흐름을 흐를 것을 체험하고 알아서이다.
그래서 감사하다.
그래서 행복하다.
주님.
허락하셔서 여행을 떠나려 합니다.
장래도 잘 붙드셔서 감사합니다.
주님을 붙들고 모진 세월지내 오고
이제 허락하에 '밀밭을 지나면서' 깔깔하지만 누림을 누립니다.
더 부드러움이 되고 자연스러운 제가 되기 위하여
깊은 영적 노력은 더 필요하겠지만
주여.. 감사합니다.
주님의 뜻 가운데 다녀오는 과정...
밀밭의 여유로움과 자연스러운 허락을 보이시니
더욱 그렇습니다
두고가는 식구들 붙드시고 위로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감사하며 기도합니다.
아멘
------------------------------- 2008년 묵상 글 (누가복음 6장 밀밭사이로)
작년 강변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밀밭 사진이 없고올린 사진이 용량이 축소되어서 안 이뻐요. 그러나, 오늘 내용과는 상관없는아베마리아지만조수미님의 감미로운 목소리와아름다운 음율이밀밭 사이로 지나시는 예수님 일행의 그 허허로운 여유를 느끼기에는 그리 부족함이 없게 만드네요. 아니시라고요?상상력 부족 탓입니다.아니 감성 부족요.ㅎㅎ 주님과 같이 한번 걸어가 보시지요!아,저들의 배고픔도 한번 느껴 보시고요그들의 자유로운 영혼의 허허로움도 같이 한번 느껴보세요.
1.
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새 제자들이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비어 먹으니
왜 요 장면에 오면
사뭇
머리 속에 그림이 그려질까요?
마침
조수미님의 아베마리아가
제 블로그 '음악' 카테고리에 있네요.
그래서
오늘 묵상이랑
잘 맞는 듯 싶어서 집어 왔어요.
안식일에 거기를 걸어서
어디로 가실까요?
아..
밀밭 사이로
새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중동의 날씨가
그 당시에는 좀 선선하지 않았을까요?
그리 그려집니다.
제 피부에 부닥쳐 오는
바람의 느낌이
조금은 선선합니다.
사람들의 눈을 봅니다.
눈이 조금은 내리 뜨여져 있습니다.
그 눈에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차분함이 서려 있네요.
주님은 앞서 가십니다.
무언가 형용할 수 없는
예기가 느껴집니다.
그냥 저 분을 따라가면
될 듯도 싶습니다.
사람들은 자유롭습니다.
어떤 이는 뒤를 쳐다보고 가만히 있네요.
무엇을 보고 있을까요?
밀밭 사이에서 날아오르는
새 날갯 짓에
퍼득 놀라
하늘을 날아오르는
그 새의 형적을 따라 쳐다 보는 군요.
어떤 이는
잠시 쭈구려 앉아 있군요.
풀 숲 안으로 들어가서..
무얼 하나요?
혹시...끙~~~!! ㅎㅎ
설마 그럴리가요..ㅎㅎ아마도 숨어 있는 이쁜 꽃을 감상했겠지요.ㅎㅎ
어떤 이는
밀대를 꺽어
입에 물고 있군요.
누구는 팔짱끼고 걷네요.
콧노래 하는 이도
휘파람 부는 이도 있군요.
아..
어떤 이가
이삭을 잘라 양손에 대고 부비는 군요.
어릴 적 생각이 납니다.
노란 벌판에
밀이 고개를 잘 숙이고 있을 때
그 밀을 잘라
불에 그슬려
양 손바닥에 대고
문지르면
고소한 밀이 먹기 좋게 되었던 기억요.
많이 먹을 게 없던 시절에
더 없는 간식이기도 했지요.
하지만
이들의 이 행동은
조금은 낭만과는 다른 듯한 면이 없지 않습니다.
'안식일'
어.
안식일인데 이러다니요.
그 엄한 시대에
엄격히 자란 이들이 이럽니다.
한편으로
얼마나 배고팠을지
상상이 갑니다.
참 불쌍해요.
그 시대의 어려운 삶이 그렇고
그 어려운 예수님 제자로서의 삶도 그렇고요.
그 배고픔은
경험자로서,
특히
오늘 아침
빈속으로 나오다가 들여다 본
버스 속의 묵상에서
절실히 - ㅎㅎ - 공감이 갑니다.
아마
배고픔을 못 참고
배고프면 영혼까지 시린 듯한
증상을 가진
저와 비슷한 사도신 듯해서
그 배고픔이
참 가련히도 느껴집니다. ㅎㅎ
그러나,
이스라엘의
그 엄한 분위기에
그 안식일에
그런 율법을 어기는 일을
사사로이 하다니
그것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예수님의
조금은 반사회적 허탈 분위기 - 세상의 눈으로 볼 때 말입니다. ^^;;;-를
동일 시해서 닮았다 감안해도
그것은 조금 지나치긴 하네요.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요?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이 사제 지간에
이 방탕스러워 보이는
타락(?) 이 말입니다.
난
밀밭사이로
걸어가는 이들의 분위기를 상상할 때마다
이
아베마리아 곡의 분위기가 떠오릅니다.
아.
아베마리아를 가져다가 들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우연히
너무도 맞아서 일 뿐이지요.
이 글 쓰기 전에
아침 묵상 전에
이 행렬의 분위기가
'허허로움'이란 네 단어로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그리 글을 쓸까 했었지만
밀밭 사이로가
더욱 서정적일 듯 싶어
그냥 붙혔을 뿐입니다.
제가 그 행렬에 있다고 가정해도
앞서 나가시는
예수님의 등을 보고
그 분의
그 휘적 휘적 걸으시며
무엇인가 생각하시는 듯한
분위기를 보면서는 요.
저도 모르게
밀을 한웅큼 들어서
생각없이
손에 올려놓고
두 손바닥으로 비빈 다음요...
아마
훅~~하고 불어서
알갱이를 남긴다음
입에 넣어
우적우적 씹었을 거예요.
펄쩍 뛰면서
한 발로
길 가의 풀 포기 하나를
발끝으로 축구하듯이 차기도 했을 것 같구요.
왜 냐구요?
날아갈 것 같아서요.
그냥 그래도 될 듯하여서 말입니다.
아마도
내 뱃속의 우릉우릉 소리가
내 육신의 기아상태를 방지하기 위한
방제장치의 가동 탓 ^^;; 도 있겠지만요...
실은
그 분이 주시는
그 자유로움 탓이
날
자유롭게 해서일 겁니다.
날 묶고 있던
온갖 규제와 내적 억압이
나도 모르게 잊혀 진 상태요.
그것은
아마도
그 사도도
마찬가지였을 거예요.
주님은
자유지요.
어제 그제 수요일...
오랫만에 일찍 퇴근해서
마음 먹고 기도원에 올라갔습니다.
그냥 그러고 싶어서요.
날은 정말 추웠습니다.
마스크를 쓰고
점퍼를 입고
목도리를 둘러썼음에도
찬 바람이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그럼에도
날은 청명했습니다.
걸어서
안양역 앞에 와서
2번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하늘을 쳐다보았습니다.
어찌나 맑고 이쁜지요.
노래가 나올 듯했습니다.
실은 월요일 글에도 고백을 했지만
약간은 멍한 상태였거든요.
올라가니 세시 예배가 있네요.
예배를 들어가서 앉는 다는 생각만으로도
허리가 아파오는 듯하고
졸릴 것 같은 생각이
나에게 의지를 강요하는 듯합니다.
항상 그래요.
예배가 진행되면서
난 감동하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
목사님의 설교는 너무나 훌륭했습니다.
하지만
그 감동은 인간이 줄 수있는
감동 스토리와는 좀 질이 다릅니다.
인간은
격정적이고
좀 일회적이고
코 풀고 나면 잊어버리는 감동이지만
주님이 주시는 감동은 좀 유다릅니다.
전 익히 잘 알고 있습니다.
이제 수년의 경험을 통해
이게 은혜인 줄 압니다.
우선
가슴 한 구석이 따뜻해집니다.
콧 잔등 어디에선가
촉촉한 습기가 맣겨 (smelled) 집니다.
눈 뒷쪽
안구 뒤쪽이
촉촉해집니다.
웬지 모르게
마음이 넓어집니다.
이걸 ' 마음의 지평이 넓어진다' 고
꼭
표현하고 싶어집니다.
괜히 옆의 사람이 사랑스러워집니다.
아니,
그것은 사랑스러워 '죽겠다'는 그런 감각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람의 관계에 의한 감동에 의할 때는 그렇지요.
그냥
넉넉히 사랑스럽고
모든 걸 포용할 듯 싶고
그들이 안스럽고 불쌍해집니다.
그런 사랑입니다.
미운 사람이 없어집니다.
걱정요 ?
온갖 세상의 걱정을 다 들고 가도
이상하게도
아주 작아져 보입니다.
마음이 아주 허허로와 집니다.
그래요.
오늘 묵상하며
허허롭다는 느낌이 '확~'하고 온 것은
바로 수요일인 어제 그제의
영적인 쉬임을 허락 받고 왔기에
표현이 가능한 단어들일 것입니다.
예배는 감동입니다.
특별한 감동이지요.
요새는 자주 그걸 느끼네요.
밀밭 사이로 걸어가는
제자들도 그럴 걸요?
이들
제자들의 자유로움은
영적인 허허로움의 표현인 것 만 같습니다.
그 자유는
현실을 넘어서는 안전감에서 발로된 것입니다.
방임과는
너무나도 다르지요.
같은 현상으로
건방지고 세상을 멋대로 사는 자들에게도
안식일 밀밭의 범죄를 벌일 수는 있겠지요.
하지만
그들은 그것으로 끝입니다.
믿음이 시간이 지나면서
어릴 때와
성장이 충분하게 일어나서
연단된 믿음을 가지게 될 때가
거의 비슷한 경우로 나타남을 보게 됩니다.
어릴 때는 너무 어려서
성장한 믿음은 규격이 필요가 없어서
자유가 주어지는 게 말입니다.
주님 곁에 바짝 서면
그 자유를 느끼게 됩니다.
영혼이 말이지요.
그래요.
그들 영혼은 그리 자유롭습니다.
주님 뒤를 따르는
밀밭 사이로 갈 때요.
적용
1. 주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오늘 하루 산다.
2. 주님의 그 허허로움과 여유로움을 묵상한다.
3. 한명 이상 이 기쁨을 전파한다.
주님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려 오셨다 선언했다.
4. 성경 여섯 장 읽겠다.
5. 밀밭 사이로 걸어 어디로 갔을까?
안식일을 지키려 성소로 갔을까?
어디로 갈까?
난?
늘 같이 걸으시는 주님을 묵상한다.
기도
주님
감사합니다.
우리 주님께 모든 영광올립니다.
우리 주님의 그 자유로움
우리 그 주님의 안전을 감사드립니다.
주님
그 평강의 샬롬을 감사드립니다.
주님
어디에 있어도
주님이 계시면
나 날아가는 종달새의 지저귐과
흐르는 바람의 볼스침을 느낄 수 있어 감사합니다.
어디에 있어도
주님을 만나면
세상은 멀리 물러나고
진실이신 주님을 알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밀밭 사이의 여유를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전
주님을 알게되어
너무 너무 감사합니다.
제 영혼은 자유롭습니다.
날아갈 듯 싶습니다.
밀대 하나 꺾어들고
휘파람 불다가
입에 넣어 질겅거리는
그 자유를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예수님
주님의 이 평강을 전하고 싶습니다.
환경
결단
흐르는 인생의 시간을
주여 인도하소서.
자격되지 않는 자의 강박과
지나친 태만을 허락지 마소서.
주여
당신이 원하시면
인도하소서.
듣겠나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1. 2021.01.15 내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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