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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정하구나 ( 레13:1-17 )

주하인 2010. 8. 24. 10:19

제 13 장 ( Chapter 13, Leviticus ) 

 

흐름을 보되

뒤도 볼 수 있길 원합니다

 

세상을 살되

천국의 삶도 잊지 않기를 원합니다

 

밖을 보되

내면에 충실한 자 되길 원합니다

 

아픔이

괴로움이

죄송함이

끊이지 않고

잊혀지려 하면 오고

잊혀지려 하면 또 옵니다

주님

 

이전에는

아프지 않기만을 원하며 갈구했습니다

그러나 이젠 아픔이

어쩌면

주님의 은총일지 모른다는 것도

깨달아 가고는 있습니다

 주님

 

언제나

온전해질 수 있을지요

언제나 주님의

네가 정하구나 하시는

그 말씀을 들을 수 있을지요 

주여

 

 

 

네가 정하구나 ( 레13:1-17 )
1.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일러 가라사대 
  오늘도, 저에게도요..

 

 

2.  사람의 피부에 무엇이 돋거나 딱지가 앉거나 색점이 생겨서 그 피부에 문둥병 같이 되거든 곧

     제사장 아론에게나 그 자손중 한 제사장에게로 데리고 갈 것이요 
 제사장은 '문둥병' 환자를 진찰하고 판정하는 의사 역할도 하게 하신다.

그것은 문둥병 병을 접촉할 찬스를 높이는 일이고

문둥병 환자들의 외모의 거북함을 인내할 것을 전제로 하는 일이다.

 제사장은 '감당해야 할 일정의 몫'이 있는 책임이 있는 자들이다.

그리고 주님은 그러한 그들을 보호하시고 더욱 책임지신다.

'제사장'인 우리 주님 말씀을 매일 사모하고 기도하는 자들은

주님이 허락하시는 고난과 일정부분의 책임이 있다는 사실이다.

 어제 퇴근하며 늦은 시간에 들은 '극동방송'의 설교에서

교인들은 끼리끼리 모여 은혜의 단물 만을 즐기는 자들이 아니고

세상에 대하여 일정부분 책임을 가지고 이끌어 갈 자들이라 설교하셨다.

그게 '새로 태어난 ' 자들의 마땅히 할 책임이라 하셨다.

 그렇다.

제사장인 우리는 책임져야 할 일정부분이 있고

감당해야할 일정의 몫이 있다.

그것을 마음 먹고 순종할 때에

주님은 놀라운 은혜와 사랑과 기적과 보호로

우리의 일생을 승리로 이끌어 가시고

높은 상급으로 천국 백성의 영원한 생명을 허락하신다.

 
 
17.  제사장은 그를 진찰하여서 그 환처가 희어졌으면 환자를 정하다 할지니 그는 정하니라
 제사장이 정하여야 그는 정함을 받는다.

기독교인이 세상을 평가한다.

나.

신실한 기독교인이길 원한다.

주님의 온전한 자녀가 되길 원하고 사는 게 내 삶이다.

그러기에 난 세상에 끌려다니기 보다는 세상을 이끌고 세상을 평할 자격이 있는 자다.

세상의 혼돈에 흔들리지 말고

세상의 현란함에 유혹 당할 아무 이유도 없다.

세상에 살다가 '문둥병'에 걸릴 수 있다.

 

 아내가 '나자로의 집'에 아르바이트 나가고 있다.

간호사 자격증을 가지고 대학병원에 근무하던 중

나를 만나 집에 들어 앉힌 것이 계기가 되어

오랫동안 전업 주부와 신학을 공부하던 아내는

다양한 학습욕구를 버리지 못하고

통신대학에 다시 다니다가 만난 학우의 적극 추천으로

빈자리에 잠깐 나가기로 하고 그리 하고 있다.

나병에 대하여서 배운적은 있지만

직접 본적이 없는 나는 아내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를 들으며

그들의 아픔과 

그들의 소외와

그들의 절망과

그러면서도 소박해지는 그들의 마음을 들어가며

가슴이 아플 때가 많이 있다.

그리고 지금도 아주 소수이지만 끊임없이 나병은 발병되는 모양이다.

 문둥병인 이 나병은 감각이 사라지는 것이다.

그러기에 각종 탈골, 상처 그리고 그위에 덧 입혀 생기는 굳은 살 들이

악화에 악화를 거듭시키는 게 무섭다.

아프지 않다는 것은 아프지 않아서 좋은 게 아니다.

세상의 자극에 대하여 반응을 할 수가 없어지는 것이다.

고립되는 것이다.

자신의 육체 속에 고립이 되어

외부의 자극으로 부터 단절이 되어 산다는 것이

팔다리 무너지고 잘라지고 코가 떨어져 나가는 것 보다

어쩌면 더욱 무서운 일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상태가 되기 전에는

감각 신경이 죽어가는 극도의 고통을 느낀 후에

아픔을 느끼지 못하게 되는 것이라 한다,

 

 오늘 묵상에서

제사장들에게 판정 받으려 온

이 나병으로 의심되는 환자들이 기다리는 일주일의 시간을

묵상해 본다.

나병으로 판명되면 끝이지만

나병이 아닌 환우의 경우도

일주일 동안은 극도의 긴장과 고통 속에서 기다리지 않겠는가?

그리고 판정은 '제사장'의 입에 의하여 정해진다.

 

 나.

내 속에 있는 주님의 성령의 열매랑은

전혀 거리가 먼 죄악들이 있다.

이전에는 그게 죄인지도 모르고 살다가

조금은 커서는 그게 죄인 줄 알면서도 나를 그렇게 만든 사람들에 대한

묘한 복수의 마음으로 쾌감을 동반하며 ,

수십년간을 묵히고 뜸들이고 삶으며

내 속에 아픈 죄책감을 동반하며

죄로 죄로 죄로 익어가며

내 영혼에 깊은 상흔을 남기어 가던 차

그러다가는 그게 내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받을

태초 부터의 예정이 있으셨던 바,

나는 주님의 성령의 부르심으로 인하여

주님의 전에서 '영적인 일주일'을 기다리며

난 많은 가슴앓이를 하며 기다려야 했다.

그 기다림 중 나는 '말씀'을 들었다.

큐티를 했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어찌 그리 꿀처럼 달은지...

이제 얼마 남아있을지 난 모른다.

하지만 주님이 내 속에 남아 있던 병이 '나병'이 아니었다고 - 아니 어쩌면 나병균이 침범했는데

주님이 주님의 뜻대로 치유시켜서 아니게 만드실지도 모른다. - 선포하시는 그날,

난 온전히 성화되어 갈 것이다.

 

 나.

살면서 많은 흔들림을 얻는다.

나... 뿐일까?

누군 안그럴까?

그런데 그런게 다 누구나 있을 수있다는 이야기도 된다.

사는 데 고난과 환란과 역경이 누군 없을까?

그안에서 길러지는 상처와 상처의 염증은 누구가 또 없을까?

 

어제 월요일 아침.

당직을 마치고 아침 일찍 일어나 묵상을 하려는 데

본원에서 전화가 왔다.

염증으로 잘 나아가던 환자가 뒹굴정도로 아파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일찌감치 본원으로 출근하여

진통제 주사 다시 놓고 진찰 다시한 바

'내과'적 문제가 맞는 것 같다.

그래서 밀릴 것을 생각하여

아침 일찍 예약을 한 CT가 나오기만을 기다려도

감감 무소식이다.

10시가 넘어도 입원병동에서 전화가 안온다.

연락을 해보니 보호자가 오질 않아서 찍기도 안찍기도 그렇단다.

참으로 답답하다.

이렇게 되면 진단의 시간이 오후 늦게로 넘어가 

오늘 중에 저렇게 심한 통증의 원인을 밝혀낼 수 없게 된다.

내 .. 힘듦의 기억,

필요할 때만 시도 때도 없이 전화하다가 지지부진 할 때는 그냥 두는 모 간호사에 대한 오해,

환우 분의 모호한 태도.....

짜증이 나려 한다.

전화에 목소리를 좀 높였다.

그러고 나니 일은 잘 진행이 되지만

하루 종일, 저녁 늦게에도 마음이 불안정하다.  

오늘 아침까지 괜히 울컥할 것 만 같은 묘한 불안정이 날 흔들려 한다.

나..

이게 영적 나병과 닮은 영적 피부병이 아닌가 싶다.

어제는 산모에 대하여 나오더니

오늘은 나병에 대하여 나온다.

무엇인가 깨닳기를 원하시지만 어려움이 없지 않다.

 아침에 30분 일찍 출근하게 되니 좋더니

오늘 아침은 집중하기가 어렵다.

진료실 책상에 앉아 찬양집을 들었다.

' 죄를 지은 까닭에 ....♬'

죄 만 눈에 들어온다.

열심히 찬양을 하고 시편 23편을 묵상하고 나니 마음이 가라앉는다.

그리고는 묵상을 시도했다.

집중하기는 어려웠지만

'영적 피부병'을 가지고 주님 앞에 나아와

영적 나병일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떠는 것은

고통일지 모르지만,

그고통 후 주님이 '정하다'고 선언하게 되실 것이다.

그 정하다는 소리를 들으면

난 정해지는 것이다.

언젠가일지 모르지만 주님 앞에서

주님의 성령 앞에서 내 스스로의 추악한 모습을 가지고 나아와

온전히 기다릴 때

주님이 날 정하다 하실 것임을

이제 기대하고 기다릴 것이다.

마음이 가볍다.

조금은 풀린다.

 

이전에는 마음이 흔들리고 나면 참 어려웠다.

그러나, 말씀 앞에서 자유로워 지는 시간이 짧아진다.

점점 더.............

 

영적 일주일이 나에게 얼마의 시간이 걸릴지는 나도 모른다.

그렇지만 내 의지와 상관없이 내 영적 피부에 돋아났던

그 상처가 영적 나병이 아닐 것으로

결국은 판명이 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난 성화된 자가 될 것이다.

기다림은 고통이지만

그후의 난, 정결해질 것이다.

세상의 불신자들은 도저히 가능성 없는 영적 나병의 아픔을 겪고

결국 '화인'을 맞아 아픔조차 못느끼는 나병이 들고야 말겠지만

난, 아니다.

아픔을 겪은 후 더욱 더 정결해질 것이다.

그게 우리 기독교인들,

특별히 말씀을 놓치지 않고

주님 십자가 앞에 성령의 도우심과 판단을 기다리는 자들이

잠잠히 유지해야 할 태도다.

 

 

적용

 

1. 아픔 후 마비 되는 것은 불신자들이지만

 아픔 후 회복되어 어느 정도의 아픔을 안고 살아가는 것이

 건강한 기독교인 들의 운명이다.

 고난과 고통은 필연이다.

 

2. 고난과 고통은 성령 안에서 영적 신경이 살아 있는  증거다.

 아픔을 주님 예수님의 이유로 기뻐하자.

 오늘 혹 그런 일이 있더라도 그렇게 하자.

 

3. 성경 세장 읽겠다.

 

4. 아픔, 상처... 주님 앞에 가지고 나와 잠잠히 있자.

 기다리자.

 주님이 알아서 판단해주실 때까지..

 영적 일주일이 혹 길어져도 말씀 앞에 잠잠하자.

 

기도

 주님

저..

아플 때가 많습니다.

어떨때는 뼈골까지 아프게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그 아픔이 아파서 아픈 것 보다

낙망으로

좌절로

외로움으로

.. 아플때가 더 많았습니다.

이전

주님을 모를 때,

주님의 뜻에 지금보다 더 둔감할 때는

그게 몸부림치고 힘을 써야 할 것으로 느낄 때가 많았습니다.

이제 ,

주님 앞에 그냥 맡기고 기다려야 할 때임을

정신차려 알 때가 자주자주 있게 되었습니다.

오늘 영적 피부병이 영적 나병인지 알 때까지

주님 앞에서 판단을 기다리는

일주일의 기간을 묵상하고 있습니다.

주님을 인식하는 순간 부터

그것은 이미 영적 나병이 될 수 없음을 또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초조나 안타까움이나 괜한 사단적 감각을 붙들이유가 없음도 깨달았습니다.

주님.

인도하소서.

그냥 기다리리다.

아픔과 고통이 오지만

그 마져 감각을 살려 놓으신 주님의 뜻에 감사하며

하루하루 기다릴 수 있길 원합니다.

세상을 좇지 않길 원합니다.

세상은 마비된 신경으로

더 센 자극을 필요로 마구마구 달려 갑니다.

그들의 그 추악한 파국을 두려워 합니다.

그들을 불쌍히 여깁니다.

그들을 위해 기도하니

주여 조금만 더 주님을 두려워 하는 자들이 생기도록

세상을 인도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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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묵상은 '나병 환우' 분들을 모독하고자 하는 의도는 아니다.

나병이라는 현상 만을

단지 ' 자신의 선택'으로 생긴

돌이키기 힘든 영적 죄'에 적용 시켜보고 묵상한 결과다.

그들의 안타까움, 그들을 향한 긍휼한 마음은

주님께서 위안하시고 도우시길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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