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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하나님을 감동함 ( 느 7:5-70 ) 본문

구약 QT

내 하나님을 감동함 ( 느 7:5-70 )

주하인 2009. 12. 8. 11:24

7 장 ( Chapter 7, Nehemiah )

 

 

 

아~

언제 부터인가

예배드리려 가는게 정~말 기쁘다.

내려쬐는 아침의 햇빛은 어찌그리 밝고

하늘은 어찌그리 청명하고

또  비둘기는 어찌 그리 귀여운가

볼을 에는 추위 조차도 사랑스럽다

주님이 허락하셔서

걷는 이 지구 위의 발 걸음과

아직은 차가움을 느낄 수 있는

신경의 정상작동함도 

참으로 기쁘다

 

예배는 기쁨이다

주님은 감동이다

감동으로 살 수 있는 가능성이

말씀으로

일상에서

예배드리러 가는 도중에

감동으로 느껴져

참으로 감사하다

 

 

 

 


5.  내 하나님이 내 마음을 감동하사 귀인들과 민장과 백성을 모아 그 보계대로 계수하게 하신 고로

    내가 처음으로 돌아온 자의 보계를 얻었는데 거기 기록한 것을 보면   
 내 하나님

 내 마음의 감동

 보계.     
 
 
63.  제사장 중에는 호바야 자손과 학고스 자손과 바르실래 자손이니 바르실래는 길르앗 사람 바르실래의

      딸 중에 하나로 아내를 삼고 바르실래의 이름으로 이름한 자라 
64.  이 사람들이 보계 중에서 자기 이름을 찾아도 얻지 못한 고로 저희를 부정하게 여겨 제사장의 직분을

      행치 못하게 하고  
65.  방백이 저희에게 명하여 우림과 둠밈을 가진 제사장이 일어나기 전에는 지성물을 먹지 말라 하였느니라  
  정확한 분류와

정확한 지시.  
 
 

73.  이와 같이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문지기들과 노래하는 자들과 백성 몇명과 느디님 사람들과 온

      이스라엘이 다 그 본성에 거하였느니라
 확실한 운용.

 

 

 하나님의 원리와 감동.

살아가며 그를 조화시키는 것이 얼마나 어려웁지만

얼마나 중요한가?

 

 믿음과 행동과 조화.

하나님을 철저히 믿되 내려놓음의 중요성.

내려 놓되 처지지 않는 기다림.

빠른 세상 가운데 '느린 여유'. 

 느린 것 같으되 

가장 빠르게 이루어지는 축복의 실제화.

 

그리고 '감사'

축복을 주심을 감사.

그 축복의 크기보다는 축복이 축복임을 인지할 수 있는 감수성에 대한 감사.

그 모든 것의 중심.

'감동'

하나님으로 감동함.

'내 하나님'이 주신 감사함을 '내 마음'이 감사함.

그 감사함을 느낄 수 있는 영적 감수성을 감사함.

모든 것을 주시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감사함.

전율함.

'내 하나님을 내 마음이 감동함.'

 

 

 가끔 눈물이 슬그머니 삐져나올 때가 자주 있다.

직장에서

대화 중에

교회에서

집에서

기도원에서.. 

누군가 그런다.

'과장님은 아무 때나 눈물 흘리실 수 있네요..'

비아냥 처럼 들리기도 하지만

그 마음에 부러움도 있음을 느끼기도 한다.

 

 아침 직원예배 중 연세 많이 드신 '리더'께서

깊이 눈을 감고 감동의 모습으로 계실 때

그 분의 이전의 강팍함과 불신의 마음을 알던 내 눈에

'하나님의 살아계신 증거다'라는 깨달음이 번뜩 들면서

괜한 눈물이 쏟아지기도 한다.

 샘병원은 의료원이다.

샘 여성 병원은 특히 신실한 과장님들이 많다.

조회 중 임상과장들의 '특송'중 믿음이 약한 남자 과장님의

팔을 들고 눈을 지그시 감고 부르는

그 모습에 눈물이 찔금하고 나온다.

같이 부르던 목청이 막혀 찬양을 한동안 못할 때도 있었다.

그 분의 그 하얀 머리, 걷어 올린 가운 팔을 통해 보여지는

비록 짧지만 굵은 그 손으로

투박하지만 감격하며 부르는 그 찬양의 모습이 '감동'으로 느껴진 것이다.

 수술실.

믿지 않는 assist 간호사 까지 이제 습관화 되다 시피

손을 잡고 환자를 위해서 기도하고 수술하려 할 때

갑자기 목이 막혀 오는 울컥이 당혹스러울 때도 있다.

  진료실.

신실하신 환우님들의 고백에

턱하니 말이 막히고 눈물 나오려 할 때도 그렇다.

 아버지 학교.

스텝 형제님의 열렬한 전도의 열정으로 말을 할 때

이유를 알수 없는 눈물이 날 피하게 만든 적도 있다.

 .........

 수년 전 큐티를 시작하고 나서 심해진 증상이다. ^^ ;;

이전에도 감동은 잘 하는 편이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내 하나님이 내 마음을 감동시키신 것이라 알고 있다.

그러기에 그 눈물을 부끄러워 하진 않는다.

내 눈물 통해 흘러나올 내 영혼 속의 죄의 찌기가 느껴지기에

오히려 감사하다.

난 그 눈물 한방울에 믿음 한방울 더 늘 것을 확신한다.

 

실크로드 발표하러 가기전

잠시

간호사에게 부탁하여

현상하여 걸어놓은

진료실 시화 액자들 앞에서

잘난체 했다.ㅎㅎ

 

 감동은 여러가지 현상으로 나온다.

써보지 않은 '시'가 써지기도

찍어보지 않던 '사진'이 찍히기도

배워보지 않던 '기타'가 제법 - 몇번의 지도가 더해지긴 했다. - 늘고

트럼펫이 익혀지고..............

그것들이 하나하나 모여

이제 시를 합성한  '사진 시화'를 방에 걸어 놓았다.

그것들 중 일부는

내 '복강경 수술' 및 ' 수술 후 한방협진 회복 크리닉 ' 동영상으로 만들어

대기실에 작동하게 해 놓았다.

 내 진료의 영역은

주님이 감동으로 확장시켜 주셨다.

'복강경' 시술을 재작년 이후 진료 패러다임으로 바꾸어 주신 하나님이

이제는 ' 단일 절개 - 상처 하나 - 복강경'까지 개발 시켜 주셨다.

모두 '감동'으로 된 일이다.

 맞다.

 위에 얘기했던 '예술' 쪽의 방면 뿐이 아니라

'진료' 의 '생활, 삶' 쪽의 방면 마져 '감동'으로 개발시키시고 계시다.

아직도 '~ 중'이다.

 예술 쪽이라 표현하고 있는 모든 것.

그냥 나 혼자만의 감성적 만족을 위해서 그리된 것은 아니다.

'불신자 '한 분은 걸려 있는 사진과 동영상을 보고

감동했다며 교회에 나가야 겠다고 고백했다.

 중국 선교사로 가셨다가 '子婦'의 임신으로 같이 오셨던 목사님은

내 詩畵 파일 들을 선교에 쓰시겠다고 가져 가셨다.

그것들은 내 진료실에 '환우'분들이 정보를 가지고 오시게 하는

현실적 도구도 되어간다.

 주님은 감동을 통하여

한번씩 기도 중 번쩍 튀는 지혜도 주신다.

 

 며칠 전 아내가 그런다.

'교회 건축 헌금에 얼마나 ...'

울 교회.

오래된 건물에서 폭팔적으로 늘어나는 교인들을 견디다 못해

개축 (중수) 하기로 결정하고 목사님 헌금 말씀을 아주 조심스럽게 하시었다.

헌금하는 데 몇가지 잘못된 예가 있다고 하시면서

그 하나는 '강요'에 의한 것

둘째는 '비교'에 의한 것

셋째는 '위신'에 의한 것이라시며

그런 것은 기뻐 받지 않으시니 '감동'으로 하시고

그 감동으로 한 것은 본인의 축복이심을

놀라운 영감의 말씀으로 설파하신다.

기쁘다.

이런 부담스러운 말씀을 이리 영적으로 균형잡히게 하시니..

한 달 전부터 나온 이야기다.

감동이 없었다.

새로 옮긴 교회.

평집사 (남들은 장로 나인데..ㅎㅎ  ^^;;)

...

여러 이유로 그냥 가만히 기다리기로 했다.

  '자아'가 앞서기 쉬운 성품.

그러다가 상처입고 제풀에 꺽여 버리고.

그리고는 남에게 손가락질.

나도 남도 힘듦...

이것은 나로 생각하게 하는 게 많았다.

'자아의 앞섬과 믿음의 부족' 사이의 관계를 조율하는 게 중요하다.

너무 앞서서 많은 돈 헌신 결심을 하면

보기에는 좋지만 그 안에 내 잘난 맛이 들어가기 쉬울 수도 있고

그러면서 한편으로 아까운 마음이 없지 않을 위험성이 있으며

반대로 가만히 있으면 어느 새 사단이 진짜로 아까운 마음을 불어 넣어

영적으로 태만하고 나태한 상태로 빠지게 할 수도 있다.

 그래도 난 이제 안다.

말씀을 묵상하고 절절히는 아니지만

'주님 앞에서 서 있는 자'로서의 나를 인식하고 있는 한

주님이 인도하실 것이라는 확신이 생긴다는 말이다.

 가만히 기도 하니 대충 '숫자'가 떠오른다.

감동은 없다.

아까운 면도 없지 않아 있다.

그래서 가끔가끔 생각하며 기도하여 왔다.

'내려놓음'이란 책 이후 이 내려놓음이란 것을 많이 생각했다.

내려놓고 가만히 있다가 게을러짐은 내려 놓음이 아니다.

내려놓음이란 욕심을 포기하고 시키시면 언제나 할 것이란 것을 전제로 한다.

그러기에 '감동'이 전제로 되지 않으면 안된다.

 

 아내의 그 이야기에 난 지나가는 투로 툭 .. 하고

미리 생각해왔고 그 정도면 . ..했던 액수를 이야기 하니

아내가 얼굴이 빨개지며 '감동'한다.

'아.. 나하고 똑같아..'

그 이야기에 나도 감동했다.ㅎㅎ

그래. 그렇다면 그렇게 하자.

그리 적지 않지만 그리 많지도 않은...

아깝기는 하지만 현재 내 수준에 부담스럽지는 않은...

 

오늘.

'내 하나님'이란 구절을 본다.

늘 그렇지만 하나님은 공상속이나 전설 속의

혹은 성경 활자 속에 갇혀 있는 주님은 아니시다.

그 분은 살아계셔서 '나의 하나님'으로 다가오신다.

정신차리지 않으면 알 수없는 ...

느헤미야님의 그 엄청난 , 힘이 있는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실 수도 있지만

좁디 좁은 테두리 속의 내 하나님도 '나의 하나님'이 맞으시다.

그 내 하나님이 '내 아내'와 '나'의 하나님으로서 확인되시는 순간이다.

그것을 예민한 내 감성은 '감동'으로 캐취한다.

이전에 100번에 1번도 캐취 못하던 것을

10번 정도 못될 것 같지만 ㅜ.ㅜ;;

그래도 '내 하나님'의 감동으로

내 마음은 인지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럴 때 난 힘이 생긴다.

참 기쁘다.

영혼이 기뻐서 . ....정말 춤을 추는 것 같은 느낌을 얻을 때가 있다.

살아계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

 

 이제 '보계'에 대하여 나온다.

감동으로 살면서 '정확한 인구조사'를 하는 '보계'

이것이 나에게 무엇을  원하시는 지 잘 몰랐다.

감성으로 살고 느낌으로만 살다가 보면

신비주의의 위험성이 다분하고

오류에 빠질 위험이 있다.

 정리가 되어 있어야 한다.

말씀으로 정리가 되어 있어야 하고

말씀에 따라 순종하고 따르는 행실의 정리가 있어야 한다.

오래된 고범죄가 있으면 변화시킬 절제와 인내가 있어야 한다.

 자꾸만 내려놓아야 한다.

손에 쥐고 있던 것 펼쳐야 한다. 

그 쥐고 있는 것이 '자존심'이면 자존심을 버려야 한다.

미움이면 미움을 버려야 한다.

용서하지 못함이면 용서해야 한다.

조급함이면 기다려야 한다.

물욕이면 물욕을 내려 놓아야 한다.

 그 모든 것.

주님의 감동이 기본 에너지가 되어야 한다.

주님의 감동으로 내 마음이 채워지지 못할 것이면

무엇이든 버려야 한다.

주님의 감동이 기다리면 커질 것이 예상이 되면

기다려야 한다.

 세상이 폭풍우처럼 돌아가도

성공이 인생의 전부인 것처럼 몰려다녀도

나이 들어 외톨이로 될 것 같은 초조함이 있어도

오늘 주님의 감동이 시키시면

내일 주님의 감동이 예상되지 않는다면

과감히 포기하고 내려놓을 결심이 있어야 한다.

그게 '보계'다.

 주님은 때가 되어서

주님의 감동을 마음으로 누릴 줄 알 때가 되어야

보계를 허락하신다.

그 보계가 허락되면 다시 한번 돌아보아야 하는 것이다.

 

 

 

적용

 

1. 주님은 감동이다.

 감사하는 하루가 될 것이다.

 

2. 보계.

 버릴 것은 무엇이고

 감싸 안을 것은 무엇인지 감동에 비추어 생각해 보자

 

3. 주님은 모두 '선'이시다.

 당연하지만 당연하지 않게 잊어버리는 것이

 삶 속의 나다.

 돌아보면 기뻐할 일을 걱정하고 살았던 일이 얼마나 많던가?

 

4. 성경 일곱 장 읽으리라.

 

5.  성장 반에서 입다물리라.

 . 부담이 된다.

   말 조심 하리라.

   날 사랑하겠다.

 

 

기도

 

주님.

내 하나님

우리의 하나님.

 

주님을 앎이

제겐 너무나 행운이었음을 압니다.

주님을 영접하지 못했더라면...

머리 흰 꼬부랑 할아버지의 모습이 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원망과 비교와 세상의 욕정을 향해

제 가진 에너지를 다 소모해 버리고 나서

빈육신의 껍질만 걸어다니는... .

주님 그게 노인을 폄하하고

그들을 경멸하는 말은 아닌 줄 잘 아시리라 압니다.

희망 없는 하루 하루 연명하는 삶을 이야기 합니다.

주여.

너무도 감사하게도

말씀을 통하여

늘 감동이시고 기쁨이신 하나님의 약속이

뚜렷이 느껴지기 시작하고

그 감동이 이 늙어가는 빈 육신 속의

영혼에 채워짐으로

제 속은 마치 봄의 생기와 같은 희망과 감동으로 채워져 가고 있습니다.

그것은 나를 움직이는 힘이 되고 있음을 절감합니다.

비록

세상을 향하여

그들이 바라는 그 놀라운 업적을 베푸는 삶을 살지 못하고

영웅적인 삶을 펼치지 못하고는 있지만

이제 압니다.

그게 그리 다르지 않다는 것을 요.

나이가 들어가면

영웅도 꼬부라지고

이빨 빠지고

머리 숱이 엷어지며

더 시간이 가면

한 줌 바람결에 흩날리고 말

양광 아래의 채소나 푸성귀 같다는 것을요.

 우리의 삶의 유일한 의미는

그 푸성귀가 '채소'라는 이름을 남기고 가는 것이 아니고

이름보다는 훨씬 진실한 진리를 깨닫고 가는 게 중요한 지 알게 되었습니다.

확신합니다.

주여.

난 주님을 '내 하나님'으로 부르는

'주님의 주하인'으로 이름 불려지고 의미 붙여지고

주하인으로서의 나로 살고 있게 되었습니다.

감동입니다.

이 감동

내 죽어 주님 곁에 가는 천국의 백성이 될 때

지금보다 수천 수만 배는 더 증폭되어

영생을 살 생각을 하면

정신 차린 아주 잠시의 순간 ^^;;; 이지만

주여 전 너무 행복합니다.

주여 감사합니다.

주님 알게되고

주님 사랑하게 된 것이

저에겐 얼마나 행운인지요.

얼마나 기쁨인지요.

얼마나 다행인지요.

저 불쌍한

주님 모르는 불신자들

안타까운

주님을 내 하나님으로 모시지 못하는

그들 백성이 참으로 불쌍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시여.

주님은 감동이시고

주님은 내 하나님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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