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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빈들(눅3:1-17) 본문

신약 QT

내 인생의 빈들(눅3:1-17)

주하인 2012. 1. 26. 12:42

(눅3:1-17) 

오늘도 또 하루 해가 지는 구나

또 그렇게 내 하루가 넘어가누나

 

이렇게 이렇게 넘어가는 날들이

얼마나 많은지 셀 수 조차 없구나

 

내 앞에 보이는 저 넓은 광야는

내 살아온 인생 길의 허무함처럼

 

그렇게 그렇게 끝없이 허전하구나

아 어이없는 이 영혼의 빈들이여

 

 그러나 나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

  내 영혼의 빈들을 채워줄 그분을

 

아 그 분이 말씀으로 임하시면

이제 이곳 은혜로 가득찰 것이다

 

저 빈들의 석양이  슬프지 않다

아 이제 보니  너무나 아름답구나

 

  
 
 

2. 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빈 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한지라
 빈 들.

광야

사막.

아무 것도 없는 사막.

 

 외로움.

배고픔.

두려움.

춥고 더움

 고난.

 

 아무 것도 없지만 광대한 사막.

아무 것도 없지만 무엇보다 강렬한 태양.

어디보다 강렬한 에너지

아무 것도 없지만 상상을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많은 모래.

아무것도 없지만 어디보다 많은 에너지.

 

거기에 들어간 '요한'

아무 것도 배울 가능성 없는 사람.

아무도 의지할 것 없는 곳.

 

 거기에서 만난 하나님.

말씀으로 임하신 하나님.

그로 인하여 들어온 '우주의 에너지'

 


7. 요한이 세례 받으러 나아오는 무리에게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일러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독사의 자식들아' 소리친다.

 

  그 빈들에서 임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하여

그는 두려움을 눌렀다.

두려움은 그에게 주어진 말씀의 에너지

성령의 권능으로 인하여 물러갔다.

 

 
12.세리들도 세례를 받고자 하여 와서 이르되 선생이여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그 빈들에서 그는 지혜를 얻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만 그랬다.

 

 

16.요한이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풀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그곳에서 그는 '겸손'을 얻었고

그곳에서 그는 '순종'을 얻었고

그곳에서 그는 ' 내려놓음'을 얻었다.

하나님의 뜻 이이에는 아무것도 의미없는 '無我之俓'을 이루었다.

' 그런 즉 이제는 내 안에는 내가 없고 오직 하나님만 내 안에 계신 .. '

 

빈들.

나에겐 어떤 의미인가?

내 인생에서

오늘 내 삶에서의 '빈들'은 무엇인가?

 

관계의 빈들.

나이의 빈들.

업적의 빈들.

 

 명절을 다녀오면 이 소리 저 소리 들린다.

누구네 누구는 어떻게 되었다.

둘째 조카가 연봉 4천, 보너스 4백 프로의 기업에  30대 일의 경쟁을 뚫고 입사 했단다.

동생네 조카는 서울에 제법 괜찮은 대학에 ...

잘 나간다.

그러면서 다 화기애애 한 것 같다.

 나........

그럭저럭.......이다.

아들들과의 관계?

그럭저럭이다. ㅜ.ㅜ;

대외적 ........ 그럭저럭.....이다.

 재력......? ........

위치......?

어쩌면...이토록 .......'아무 것도 없는 것 ' 같은가?..........................

 당직을 마치고 누워 있는 휴일의 내 머리는 약간.....복잡하다.

마치 '사막' 같다.

마음 한 구석이 답답하려 한다.

어제 묵상에 잠시 소개했다. ㅜ.ㅜ;;

 그래도 다행인 것은

난 내 그 광야를 '인식'하기 시작했다.

그게 '절망의 나락' , 아무 것도 없는  모래덩어리 , 뜨겁기만 한 고통의 장소 만은 아니게 느껴진다.

나...

나름.. 이 고난의 오랜 시간을 거치면서

이 광야의 삶에는

가만히 눈들어 살피면

너무도 아름다운 색깔로 입혀진 신비의 장소이기도 하고

너무도 광활한 '탁터진 공간' 이기도

헤아리기 어려운 '에너지'의 스물 거리는 장소임을 깨닫기 시작했다.

그랬다.

오직 위만 쳐다보고 비교하고 내 없는 것만 생각하면

'절망' 뿐이고 고난 뿐일 이 광야가

실은 ' 하나님의 말씀'을 만나고 나니

새삼 달리 보이는 것이다.

그것을 말씀 묵상을 통하여 '세상'에 살면서 접목을 해가니

진실이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래서............. 덜 흔들렸다.

 이제 필요한 것은 ' 온전한 만남'이다.

사도 요한님이 절대적으로 만난 그 하나님의 말씀.

그 말씀의 살아 움직이는 '운동력'과 '에네르기'를 만나야 하는 것이다.

 

나.

빈들에 있다.

정말 그런 줄은 알겠다.

 

나.

빈들의 또 다른 면을 안다.

이제는 정말 그렇다.

그 황량함이 외로움과 좌절만은 아니고

거대한 힘이 다가올 '큰 공간'임을 안다.

 

나.

그래서 조금 달라졌다.

좌절이나 고민보다

조금은 차분해졌다.

어려움과 힘듦에 주님 앞에 가져갈 줄 알게 되었다.

 

나.

그러나 아직도 몸부림 치려 한다.

아직........이 빈들에 내려 놓지 못한 어둠들이 있다.

내 속에 그렇다.

주님이 임하시기 까지

사도 요한님은 얼마나 많은 뙤약볕 밑의 시간과

또 얼마나 오랜 석청과 벌레 만의 식사로 주림을 견뎌야 했을까?

 

그렇다면 나..

어찌 해야 하는가?

무엇을 원하시는가?

주님은 무엇 때문에 '빈들' 을 묵상케 하셨을까?

내가 어찌 해야

저런 힘있는 삶,

내 의지와 자아의 만족과 성취에 대한 욕구로 발버둥치다가

결국 지쳐 스러져 가는 거의 모든 인간들의 군상,

그 중에서도 가장 심한 병태를 보이는 주하인의 과거의 모습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혹시,

사도 요한님의 그 청빈을 원하시던가?

추움과 더움, 배고픔과 외로움을 기쁨으로 감당하라시는

주님의 말씀이시던가?

그냥 주님이 임하실 것을 믿으며 그냥 그냥 뙤약볕기다리는

그 단순하고 우직한 주님 사랑, 주님을 믿음 만 닮으라시는 이야기신가?

 

인내.

나.

참 부족하다.

조금이라도 흔들리면 여지없이 무너진다.

 

 괜히 피곤하고 힘이 들려 한다.

오늘 '빈들을 묵상하며 기다리자.

오히려 이런 힘듦을 기뻐하자.

약함을 기뻐하고

곤란을 기뻐하자.

핍박을 기뻐하고

궁핍을 기뻐하자.

 주님은 빈들에서 임하신다.

그 빈 공간에 충만한 하나님이 임하신다.

주님은 역설적인 분이시다.

 

 

적용

 

1. 기뻐하자.

 약함을 기뻐하자.

 말씀이 임하실 때다.

 강하게 임하시는 하나님을 기억하자.

 

2. 빈들을 묵상하자.

 그 강렬한 에너지의 공간.

그 무한함을 느끼게 하는 빈터.

거기에 임하시는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사랑을 기대하자.

 

3.  주님이 임하시면 모든게 이루어진다.

 두려움 대신 당당함이

 무지대신 지혜가

 교만 대신 겸손이

 몸부림 대신 순종이

 갈등대신 평안이

 .........

 그곳이 '빈들'이다.

 

4. 사람을 통해서 무엇을 이루시기도 한다.

 그러나, 요한에게는

 오늘 묵상하는 나에게는

 성장을 위한 시간에는 '빈들'이 필요하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 만이 필요하다.

 주님을 더 깊이 만나는 장소가 '빈들'이다.

 

5.  사도 요한은 하나님 말씀이 그처럼 강력하게 임하기 까지

  많은 시간을 고통속에서 기다렸다.

  인내가 필요하다.

 외로움에 대한 인내.

  고통에 대한 인ㄴ............

 

6.성경 세 장 읽겠다.

 

 

기도

주님.

사도 요한의 빈들을 묵상합니다.

그 분의 그 오랜 기다림을 묵상했습니다.

그 기다림 중의 고통을 생각해 봅니다.

그 외로움을 기억합니다.

편안함과 동떨어진 그 갈등을 묵상합니다.

배고픔과 그 질박한 삶의 오램을 기억해 봅니다.

주님.

그 넓은 광야에서

오직 주님 만을 사모하며 간절히 기다린 그가

드디어 하나님을 만났을 때

그 안에 그득한 에너지의 폭팔을 체험하게 됨을 느낍니다.

 

주님.

저에게도 힘을 주소서.. 

이제 인생의 빈들을 소롯이 인정합니다.

주님.

관계의 빈들에 서 있습니다.

아무도 없습니다.

주님.

소유의 빈들이 되어감도 인정합니다.

그토록 갈급했지만 제 수중에는 그럭저럭입니다.

주여.. 주신 것 많지만

제 욕심해 비해 '빈들' 이었습니다.

희망의 빈들이 되어갑니다.

주님.

자식들을 돌아보아도

주위를 보아도

나이를 들어 생각해보아도

아무 것도 '희망'이 될 만한 건덕지가 없어 보입니다.

빈들입니다.

난 빈들입니다.

그러나, 다행인 것은

그 빈들이 그리 힘들지 않습니다.

아니.. .주님의 은혜가 임하니 그렇습니다.

며칠전 연휴 마지막 날까지 계속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그러나, 기도후 임한 하나님의 평강으로

지금 다시 제 마음의 빈들은 채워집니다.

 

그랬습니다.

사도 요한님이 바라보는 빈들의 그 광폭은

외로움이 아니었습니다.

그에게는 주님이 임하실 '좁은 '공간 중 그나마 여유로운 부족한 공간이엇습니다.

거기에는 아무도 없지만

그는 꽉채워진 '우주의 에너지'를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가 바라보는 세상의 무리들은

그의 호통에 꼼짝 못할 수 밖에 없는 '가르쳐야'할 대상일 뿐이었고

갈바 몰라 방황하는 '배만 부른' 세상 불쌍한 양들을

주님 앞으로 인도해야할 안타까운 목자의 그것이었습니다.

그는 '배운 바 없는 지혜'로 충만해졌고

가르침을 받은 바 없는 겸손과 순종의 기쁨으로

그 영혼이 '숙화' 되어 갔습니다.

 

 주님.

저도 그리하게하소서.

이제 이 인생의 빈들의 순간, 시간에

곧 임하실 하나님의 말씀을 더 강하게 기대하며

제 인생의 빈들에 흐르는

이 보이지 않는 예정된 에너지를

강하게 느끼는 계기가 되게 하소서.

오늘이 그런날 되게 하시고

제 마음이 오직 주님 만을 기뻐하는 마음으로 채우시고

제 머리가 주님의 지혜로 채워지게 하소서.

제 안의 아직도 내리지 못한 더러운 때를 내려놓게 하소서.

지혜를 주시사 흔들리지 않게 잘 적응하게 하소서.

주여.

나 자신을 주님의 청지기로

주님의 하인으로 깊이 인식하는

빈들의 시간이 되게 하소서.

예수님.

제 자식들 기억하시고

제 아내를 기억하시고

제 부모님도 기억하시고

제 직장의 터전을 기억하시사

언제나 주님의 뜻 가운데 흔들리지 않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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