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칙한 QT
날 이끄소서(눅4:1-13) 본문
(눅4:1-13)
1. 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 강에서 돌아오사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시며
오늘은 '성령에게 이끌리어' 라는 구절이 눈에 들어온다.
'산다는 것'
나에게 그것은 녹록치 않은 과정이었다.
매사에 생각이 복잡하고 많아서
미리 예상되는 단점, 결점,..예상하고 확실히 보장되지 않는 것을 하는 것은
참으로 미련한 일이니..
세상에 어떤 일도 그대로 되어가는 일이 있는가?
마음에는 갈등이 많을 수 밖에..
젊음.. 그 중에서 육신의 에너지는
아버지 대로 부터 내려오는 강력한 ..그 무엇이 끓는데 ㅠ.ㅠ;;
마음은 그러니 그게 얼마나 '갈등'을 유발하던지..
그러다가 예수님 만나고
정말 좋은 것이 '쉼'이란 단어였다.
'수고하고 짐진 자들아 .. 내가 쉬게 하리라'
그렇다 .
예수님은 십자가 지고 따르라 하시지만
그것은 우선 '평화'와 '평안'과 '평강'의 쉼을 우선하시는 말씀이시다.
영적으로 평안해지고 평강해지면
자기도 모르는 에너지의 순화로 인해 올바른 흐름이 일어난다.
주님은 그 때쯤 '우리의 선택'을 권고하시는 것이다.
그 길만이 '천국'으로 가서 살아야 할 자로서
이땅에서 '원죄'를 가지고 생겨난 '자범죄'의 더러움이
자꾸 자꾸 씻기어 가기 때문이다.
10.기록되었으되 하나님이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너를 지키게 하시리라 하였고
13.마귀가 모든 시험을 다 한 후에 얼마 동안 떠나니라
그런데.. 그게 정말 쉬운가?
사단이 그만 둘까?
세상은 '과학'을 필두로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며
우리의 관심을 자꾸 이땅에 머물게 하여
천국을 가지 못하게 하는 술수를 부리지 않을까?
어차피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불신자의 경우에
그것은 그냥 어쩔 수없는 그들의 선택이니 차치하고라도
믿는 자로서
그러한 세상의 사단의 방해터,
즉 영적 전쟁터임을 무시함은
결국 '천국'을 부인하는 것이고
그렇다면' 하나님' 과 예수님의 구원 자체의 의미를 부인하게 되는
세상에서 기복적 신앙인들이 그토록 보여주는...
천국은 간다니까 좋고
세상에서는 그냥 '하나님을 축복' 받는 도구.. 이상도 이하도 아닌
절대 불신앙의 단계가 아닌가?
정말 미련한 일 아니던가?
그게 아니고 '영의 세계'를 인정하는 '신앙인'의 너무나 당연한 기본 자세와
스스로 믿는 자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기를 원한다면
너무도 당연히 '영적 전쟁의 적군'으로서의 사단을 인정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들, 사단은 너무도 교묘해서
그들의 존재를 들어나지 않도록 하고 '과학'과 '이성'과 '합리'라 치장할 뿐이지만
이토록 논리로서 간단히 증거된다.
오늘 묵상구절에서
'예수'님까지 속이려는 그들의 교묘한 술수가 보여서
참~ 재미가 있다.
'성경' 구절을 인용한다.
'번데기 앞에서 주름 잡는가?ㅎ'
그들이 '기록된 바'.. 한다.
40일의 금식 후 혼돈스러운 그 분 예수님께 저들은 저렇듯 혼란을 주려한다.
삼일 굶은 양반 없다.. 고 하는 것 처럼
인간은 당연히도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이고 이성을 들먹이는 유혹에
쉽게 넘어갈 수 밖에 없다.
그게.........정말 이 삶이 전쟁터인 이유다.
나.
참 머리가 복잡하게 태어났었고
삶의 과정이 그리도 복잡했었다.
그러나, 주님 예수님 구원 후
말씀 묵상으로 인도 받기 시작한 다음 부터
그냥 내려 놓기 시작했다.
'성령으로 이끌리는 ' 연습을 하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다.
그리고는 많은 변화의 역사가 내 주위에 발생했음은
수도 없이 많은 고백을 했다.
그러함에도 '사단'은 교묘하기가 말도 못한다.
내려 놓았고 이끌림 받는 다 생각하면
어느샌가 난 돌아보면 '제자리'에 있는 듯 싶어 힘들어 한 게 한 두번이 아니다.
그 중에서도 진정 힘든 것은
'말씀'으로 인도 받는 자가 어찌 이렇게 변화가 없는가.. 다.
특별히 최근에 내 안에 가까운 자의 오해와 경계선에 대하여
다시 한번 한계를 경험하면서
한참을 혼돈 속에서 흔들렸었다.
그때 내 영혼을 짓쳐 들어오는 소리는
' 믿는 자가......' 다.
'정말인가?
여기까지가 한계인가?
나를 지금껏 살려 놓으신 이유가 무엇이신가?
. ..... '
참 많은 생각이 날 흔들려 했었지만
나름 말씀과 함께 한 시간이 길긴 길었던 탓인가?
비교적 쉽게 자리를 잡기는 했지만
그래도 힘듦은 사실이긴 하다.
오늘 말씀 가운데 '사단'이 떠나는 승리의 모습을
주님은 보이신다.
옳은 말씀,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인하여
예수님은 당연히도 승리하심으로 나에게 모본을 보이신다.
그러시면서 '성령 충만'함이 이런 혼란을 이기는 기본임을 보이신다.
성령으로 이끌림 받는 것이야 말로
세상을 이기는 유일한 길임을 말씀하신다.
세상의 탈을 쓴 사단의 미혹을 이겨내는 길임을 말씀하신다.
다시한번 그 길은
혼자 지는 십자가의 힘듦이 아니고
철저히도 이끌어 주시는 '피동'의 삶이다.
그것은 '그날이 와도 감해주신다'는 예수님 약속의 삶이다.
승리도 주님이 이기게 해주시는 가벼운 승리이시라는 것이며
십자가 역시 주님 성령이 끌어주시는 십자가이시고
내 살아온, 그리고 살아야 할 삶이
'성령으로 들어주시는 십자가의 삶'이라는 것이다.
그렇다.
이끌리면 가볍다.
성령충만함이 되면 될수록
더 내 십자가는 가벼워 질것이다.
십자가를 짐이 성장하는 자의 필연적 사명이라면
성령 충만하면 된다.
어찌해야 하는가?
어떻게 해야 충만해지는 가?
당연하지 않던가?
주님 말씀 앞에 더 가야 한다.
기도의 분량을 더 늘여야 한다.
주님은 그것을 말씀하신다.
오늘 토요일.
또 일주일이 '퍽~' 갔다.
무엇을 해야할 것 같은 강박관념과
하지못하고 늙어만 가는 현실 사이의 괴리가
또 날 교묘히도 몰아가려 한다.
그냥 '성령'을 사모하며
오늘 무엇을 할 것인가 내려 놓아 보자 .
빈 시간은 허무한 시간이 아니다.
빈시간은 주님을 만날 시간이다.
더 기도해야 한다.
더 충만해야 한다.
주님.
내 사랑하는 주님
오늘은 주님의 고난 중 당당하신 담대함을 봅니다.
그 원인이 성령의 충만하심임을 봅니다.
주님.
날씨가 춥지만 맑습니다.
전.. 이런 날씨가 좋습니다.
여유롭습니다.
그럴 때 여유로움이 나른함과 게으름으로 바뀌지 않게 하시사
그 평안함이 성령의 충만한 평안함과 구분되게 하시사
더욱 주님을 사모하게 하소서.
그래서 오늘 이끌리는 제 모습을 관찰 하길 원합니다.
그리되길 원합니다.
주여.
제 사랑하시는 주여.
제 가족 지키소서.
화합하게 하시고
주님 안에서 성령으로 이끌림 받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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