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칙한 QT
내 영혼의 끈의 끝의 이름은 여호와시다( 출 5:22-6:13 ) 본문
떠도는 구름 한 점에도
난
감사하다.
주님의 사랑이
내
온 영혼을
기쁘게 하신다.
제 5 장 ( Chapter 5, Exodus )
22. 모세가 여호와께 돌아와서 고하되 주여 어찌하여 이 백성으로 학대를 당케 하셨나이까 어찌하여
나를 보내셨나이까
모든 일에
주님께 돌아와 고하는
그 모세의 신앙을 닮아야 한다.
그동안의 나는
고난이 있거나 고민이 있으면
혼자 침잠해서 가만히 묵힌 후
가라앉으면
주님께 왔었다.
여러 이유가 있다.
그렇지만
그건 올바른 믿음이 아니었음을 안다.
모든 걸
어느때든
다 주님께 가지고 가야 한다.
그게 해결의 시작이다.
믿지 못함이 그러지 못하게 한다.
23. 내가 바로에게 와서 주의 이름으로 말함으로부터 그가 이 백성을 더 학대하며 주께서도 주의
백성을 구원치 아니하시나이다
원망이어도 괜찮다.
사이 좋은 아버지와 아들은
모든 이야기를 다 나누어도 괜찮은
안전한 관계이다.
言路가 막히지 않으면
그 가정은 건강한 가정이다.
주님은 더욱 더 그러길 바라신다.
집안에서 좋은 이야기만 한다는 강박관념은
역기능 가정의 잘못된 신념의 산물일 뿐이다.
제 6 장 ( Chapter 6, Exodus )
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제 내가 바로에게 하는 일을 네가 보리라 강한 손을 더하므로
바로가 그들을 보내리라 강한 손을 더하므로 바로가 그들을 그 땅에서 쫓아내리라
2.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나는 여호와로라
해결을 말씀하시다 갑자기
' 나는 여호와라' 하신다.
3.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전능의 하나님으로 나타났으나 나의 이름을 여호와로는
그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였고
전능자 하나님은 '엘 샤다이'다.
그들에게는 왜 아니고
모세에게만 왜 '여호와'라 하셨는가?
여호와란 무엇인가?
스스로 있는자이다.
왜 뜬금없이 스스로 있다는 말씀을 하실까?
왜 아브라함..등과는 다른 하나님의 존재를 말씀하시는가?
4. 가나안 땅 곧 그들의 우거하는 땅을 주기로 그들과 언약하였더니
5. 이제 애굽 사람이 종을 삼은 이스라엘 자손의 신음을 듣고 나의 언약을 기억하노라
6.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기를 나는 여호와라 내가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어 내며 그 고역에서 너희를 건지며 편 팔과 큰 재앙으로 너희를 구속하여
' 나는 여호와라'라는 말씀이 또 나온다.
이스라엘 백성의 신음을 듣고
기억하시고 구원하러 오시는 그 하나님.
스스로 계시는 하나님.
7. 너희로 내 백성을 삼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니 나는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어낸 너희 하나님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지라
또
여호와 하나님을 말씀하신다.
8.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기로 맹세한 땅으로 너희를 인도하고 그 땅을 너희에게 주어
기업을 삼게 하리라 나는 여호와로라 하셨다 하라
다섯 번 째.
'스스로 계신 하나님'
12. 모세가 여호와 앞에 고하여 가로되 이스라엘 자손도 나를 듣지 아니하였거든 바로가 어찌 들으리
이까 나는 입이 둔한 자니이다
말씀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하나 듣지 않자
모세가 하나님 앞에 말씀드리자
바로에게 또 한번 고하라 하신다.
그러자,
나는 입이 둔한 자라고
또 한번 순종하지 않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
13.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사 그들로 이스라엘 자손과 애굽 왕 바로에게 명을 전하고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시니라
주님은
금세 '아론'에게도 말씀하신다.
모세의 불순종인 듯한 모습에...
아침에 묵상을 펼쳐 들며
또 한번의
상황에 맞지 않는 듯한 내용을 접하게 되었다.
우선,
이스라엘 백성들의 저항에 직면한
모세의 항변에 뜬금없이
'나는 여호와니라'
엘샤다이 하나님도 아니고
아브라함 등에게 대하던
그 하나님과는 조금 다른 유형의 하나님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듯한 뉘앙스를 풍기며
여호와,
즉 스스로 계신 하나님에 대하여
말씀하신다.
그게 무슨 이유일까?
한번도 아니고 5번씩이나...
거기에
불순종을 극도로 싫어하시는 주님께서
모세에게 만은
그냥 뜻을 돌리시어 '아론'을 데리고 와야
말씀하신다.
이 이상한...
성경을 통하여 도도히 흐르는 ,
주님의 변치 않으시는
우리에 대한 요구인 '순종'을
모세에게 만은 왜 내려 놓으실까?
엘샤다이로 만도 충분하신데
여호와, 다른 이름이 있어야 하는
그 어떤 이유라도 계신 것일까?
여호와라는 이름을 통하여
무엇을 말씀하시려는 것일까?
혹시 그게 오늘 나에게 주셔서
하루를 짊어지고 살아갈 레마가 숨겨 있는 것은 아닌가?
묵상해 본다.
사람들은 육체라는 틀에 갇혀 사는
영적인 존재이다.
그 영혼은 천국의 하나님 보좌,
성전의 또다른 모형이다.
우리 영혼의 지성소에 주님의 보좌가 있으셔
성령으로 늘 앉게 되셔야
주님이 바라시는
인간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 들이 가져야할 온전한 모습이 되는 것이다.
그리되시면
성령께서 단 일분 일초도 놓치심이 없이
큰 안타까움과 사랑으로
우리의 알지 못하는 비밀을
주님 하나님께 직고하게 되는 것이다.
(롬 8: 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
이것은
우리의 실제 존재는
육체 자체가 아니라
육체라는 장막( 텐트 ) 혹은 깡통 안에 담겨 있는
영혼이 실제의 '나'이고
( 갈 2:20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
- 보라.. 육체 속에 사는 것이 나라고 나오지 않는가?
우리가 온전한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절대자이신 '하나님'께 '성령'의 끈으로
매달려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성령의 끈을 달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어디 우리 인간이 그리 녹녹한 존재인가?
이 끈은 아담과 이브의 잘못으로 생긴
'원죄'에 의하여
우리 영혼에 defect(손상)을 가져오고
그 손상은 끈을 끊어지도록 만들 운명이지만
주님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로
구약 시대에는 제사로
신약시대에는 '예수님 보혈'로 인하여
다시 연결되지 않았던가?
그러나, 그 놀라운 사랑에도
오늘 보이는 이스라엘 백성의 그것처럼
그 끈을 달기를 귀찮아 하고
거부하는 자들이 있다.
하지만 인간의 영혼의 지성소는 반드시 무엇의 끈으로 채워야 한다.
그 곳이 비면 빈깡통이 되기에
사람은 허겁허겁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 곳을 무엇인가로 채우려 한다.
그 대상이
주님이 아니시면
그들은
'돈'으로
'명예'로
'자식'으로
'쾌락'으로 채우려 한다.
인간 실존의 공허는 그리 생긴다.
그리하다가 그 공허감을 이기지 못하고
어느 사람은 우울로
어느 사람은 자살로
어느 사람들은 '패륜과 반 인륜'인 각종 엽기의 소행으로 빠져들어간다.
근친상간,
동성애
토막살인
총기난사
자동차 질주
영유아 추행
남대문 방화.....................
시간이 지날수록 예전에 볼수 없던 일들이
너무나도 눈에 많이 들어온다.
그것은
매스미디어의 발달로
이전에 숨겨지던 것이
캐취되는 것도 없지 않지만
실은 절대 다수의 악이 늘어난다.
진료실에서 찾아오는
'性'과 관련된 질병의 수가 늘어나고
그 질병의 악한 정도가 이전 몇년 전 보다 몇배는 더 심하며
환우들의 나이가 10대 중반으로 까지 내려갔다.
세상은 올바른 정신을 가지고 살기에 어려울 정도로
벌써 많은 부분 앞서 나간다.
이러한 근본 원인은
영혼의 끈이 주님이 아닌 다른 가치로 붙들려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누구나 끈을 붙들고 살 수 밖에 없다.
그게 비록 주님이 아니어도
인간은
끈에 붙들린 피노키오 같은 존재다.
주님이 붙들지 않으신 끈은
전부 사단이 붙들고 있는 끈이다.
비록 그들이
자신의 능동적 선택이라 착각한다해도
주님을 온전히 붙들지 않은 사람들의
끈의 끝은 언제나 사단이다.
수개월 전
양자 역학을 통한 양자의학에 대하여
불신자이신 모 의대 산부인과 교수님의
설명이 본원에서 있었다.
놀라웠다.
과학이
너무도 놀랍게
성경의 비밀을 설명하고 있었다.
그분은 비록 성경을 몰랐지만...
그 분의 말씀이 '빛' 조차 입자와 파동이고
모든 물질은 두개가 동시에 있다는 것이고
우리 눈으로 본 것은 물질이지만
그 뒤의 파동은 온 우주가 연결 되었다는 것이다 .
또, 물질이냐 파동이냐 결정되는 것은 '의지'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궁극의 끝에는
우리로 하여금 물질과 영혼으로 나뉘게 하고
모든 은사 마져
그 분의 의지대로 보게 만드시는
궁극의 존재가 있다는 걸 추리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런데
그 분 조차 우리처럼 끈으로 연결되어
더 높은 누가 있다고 가정한다면
그 것은 절대자가 아니다.
천사나 다른 존재이지...
오늘 하나님께서
유난히도
여호와..
혼자 존재하시고
홀로 존재하시는 분의 특성을 강조하신다.
그것은
이러한 논리로 쉽게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아브라함이나 야곱이나 요셉의 일생은
엘 샤다이
모든 것을 다 하실 수 있는 그 분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여 따르면
다 이루어지는
개인적이고 협소한 차원의 능력만 필요로 하신다.
그들에게는 '순종'만이 가장 필요한 영적 우선 순위가 될 수 있다.
이제
애굽을 탈출하는
출애굽의 대 장정
Exodus of Egypt !
현세의 불신자의 삶에서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는 삶,
예수님을 믿지만 세상과 양립하다가
오직 주님 만으로 선택하고 결단하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이는...
그러면서
영혼의 끈을
오직 질기고 온전한 '성령'의 끈으로 택하겠다는
결단을 모형으로 보여주는 그 사건의 과정 속에서
주님은
당신을
그 온전한 끈의 끝인
'여호와'로서 표명하고 계신 것이다.
그 분
그 분 하나님이 홀로 계시지 않다면
우리에게 어떤 가능성이 있는가?
아니다.
그 분
그 하나님은 홀로 있고 온전하신 존재이기에
우리의 끈을
우리 생명의 끈
육신을 통해
이 세상의 삶을 살아가지만
이 세상의 끝에
반드시 올라가야할 그 천국의 가파른 계단을 올라가기에
필요 불가결한
영혼의 지성소의 끈을
잘 잡아야 한다.
그 분 하나님은
이 귀한 원리
세상을 흐르고
온 우주를 흐르는
이 거대한 원리를
모세에게 맡기기에
그의 조금은 불완전한 듯하지만
순종의 능력은 넘치는 자를 선택하여
그에게 자유롭고 기본 원리를 넘나드는
특별한 선택의 기회를 주시고 계신 것이다.
그게
모세에다가 아론을 하나 더 넣어 주시는
의견 개진에 긍정적으로 화답하시는
원리에 사로 잡혀 있지 않으시는
온전하고 혼자이신 하나님의 모습을 보이시는 것이다.
이 원리는
개인적인 믿음에 적용하기는 어렵다.
단지
주님의 그 온전하심과
세상을 위해서는
불완전하지만 기본이 주님에게 고정되어 있는 자들에게는
주님의 주권적 선택에 의해서
대화와 타협을 통한
'조정'이 가능함을 말씀하시고 자 하는 것이다.
난
자유롭다.
순종하는 게 기쁨을 알고
그 순종에 허덕이다가
쓰러지기 보다는
주님의 허락하에서 안겨질 자유를 알기에
난 자유롭다.
주님은 여호와시다.
난
그 주 여호와 하나님이 기쁘다.
놀랍도록 기쁘다.
그 분은 내 자유의 원천이시다.
내 자유는
세상과는 다르다.
훨씬 힘이 있고 기쁜 자유다.
난
주님의 끈으로 구속이 되어 있지만
구속보다 훨씬 더 자유롭다.
날아갈 듯한 아침이다.
적용
1. 여호와 하나님에 대하여 묵상한다.
2. 감사한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모든 자들을 대한다.
특별히 찾아오시는 환우 분들에게 감사한다.
3. 모든 일을 우선 주님께 기도로 알리는 하루가 되겠다.
4. 성경 여섯 장 읽겠다.
5. 주님에 갇혔지만 자유롭다.
말씀대로 살기 위해 노력한다.
6. 한명 전도하겠다.
내 기쁨을 전한다.
7. 수술에 최선을 다한다.
8. 동역자 , 위안자를 보내실 줄 기대합니다.
기도
난
육체 가운데 삽니다.
그것을 확실히 압니다.
육체가 성전의 틀이기에
귀중하게 유지해야 한다는 것도 압니다.
난
그 육신에 사는 존재입니다.
난
주님의 끈을 단단히 붙들고 있음을 느낍니다.
그러기에 든든합니다.
그러기에 감사합니다.
그러기에 늘 행복합니다.
지금까지요.
주님이 허락하신 또다른 연단이 있으시면
모세와 같이
아론이 없으면 안될
답답하고 두려운 지경에 빠질 지는 모르지만
그럼에도 또한
주님께서 부족한 제 모습을
그냥 밀지는 않으시고
동역자를
위안자를
멘토를 붙히실 줄 압니다.
그래서
두려움이 가라앉습니다.
감사합니다.
내 일생은
홀로 계신 온전하신 그 주님으로 인하여
행복할 것을 예감합니다.
이제
이전의 어려움과 찐득한 답답함과 부정의 감은
멀리 던지려 합니다.
주님 도우소서.
부활하신 주님 도우소서.
그러리라 믿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감사하며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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