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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QT

난 살아있는 자다(마22:23-33 )

주하인 2010. 3. 9. 15:11

 

죽음에서 구해내시어

새로운 생명을 주시고

말씀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허락하시는

살아계신 내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주님께 드리는

붉은 사랑을 받으소서

 

내 

주님께 올리는

터질 듯한 감격을 보소서 

 

주님께 펼쳐 드리는

생명의 향기를 받으소서

 

주님

사랑합니다

살아 있는

제 감동을 받으소서

 


    (마22:23-33)
28.  그런즉 저희가 다 그를 취하였으니 부활 때에 일곱 중에 뉘 아내가 되리이까 

29.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

32.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하시니 

 

 참으로 열심히도 올렸는데

무엇이 문제인지... 다 .. 날라가 버렸네요.

하나님이 원치 않으시는 글이신가 봐요.

어쩌면 너무 교만해서 인지도 모르고요.

바쁘다는 핑계로

주님과의 교류보다는

수년간 올렸던 습관대로

글 포인트를 잡고 마구 잽이로 썼던 탓일 수도 있겠지요...

그래도

다시하렵니다.

주님 인도하실 것 같으면 인도하실 것을 기대하고요.

 

오늘 묵상포인트는

'사두개인들의 그럴 듯한 논리'

'이전 같았으면

 아니, 과학적이라고 생각하는 내 논리의 근거대로라면

 지금도 그럴 듯한 논리'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전혀 모르는 자의 논리이고

'성경의 원리'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논리라는 것이다.

  두 논리는

정리하면

'죽어가는 자들의 논리'와 ' 살아 있는 자 논리'의 차이이다.

그 사이에

난 어찌 끼어 있는가다.

난, 이전 것도 옳았었으나

지금은 눈이 전혀 달라 졌다.

'살아있는 자의 논리' 가 내 논리가 되어 있는 것이고..

살아 있는 자는 '부활한 자'와 동의어기도 하다.

 그렇다.

난 죽어 있는 자의 생각들을 아침에도 경험했다.

 오랫만에 아내와 의견 충돌 후

눈치를 살피는 내 마음에

다양한 생각들이 꼬리를 물고 들어온다.

'이러 이러 이러 해서.. 이러하니.. '

짜증이 올라오고 억울하려 한다.

하지만, 말씀을 기억하려 노력하는 순간,

난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변해 버렸다.

짜증은 사라지고

평안과 고요 만 내 속에서 움직이는 것 같다.

사랑의 눈과 긍휼한 마음이 솟아 오른다.

아.

묵상의 글을 펴놓고

난 금방 깨달았다

어쩌면 이것이 '부활'일 지도 모르겠다.

부활한다는 것은

사두개인 같은

이 땅의 원리에 고착되어 살아가던 내 영혼이

말씀대로

말씀에 따라 생각하게 되고

자연스레이 내 속에 생명의 기운이 넘치게 되는 것.

 화요일 점심.

나이 든 의사들끼리

밥먹는 것이 목적인 점심식사를 한다.

거기에 선배 마취과 부장님을 초대했다.

그 분은 내 학교 선배시기도 하다.

여유롭고 좋으신 분.

말씀하시다가 나이든 자들이 도태될 수 밖에 없는 운명에 대하여

말씀하시면서 이유가 '체력'이라 하신다.

하시면서 '나의 체력'이 좋으심을 치켜 세우신다.

아니다.

이전에는 쉬이 피곤을 많이 느꼈었다.

하지만, 지금은 피곤을 모른다.

이유는

난 안다.

 주님 말씀이 원인이다.

이것은 어떤 논리가 아니다.

내 체력이 증거한다.

아니, 피곤을 매일 느끼던 자가

생명의 말씀을 체험하면서

일상에서도 생명의 기운이 넘침을 느끼는데야 어찌하겠는가?

나.

진짜로 피곤할 때는 무지하게 피곤하지만

생명의 기운이 넘치는 것처럼 기쁠때가 많다.

소록소록 새 기운이 솟는 것처럼 생각될 때

난, 이것이 하나님의 생명의 기운임을 느낀다.

 오늘... 부활.

이 단어를 보면서

부활하는 자들이

어찌 '하나님의 능력'이나 '성경'을 모르는 소리를 하는가 시는

예수님의 질타가

이전의 내가 부활이란 단어 앞에 까우둥 하던 것이 생각난다.

아침에 부활이란 이런 것이구나 하고 깨달아진다.

느껴지는게 주님의 '레마'가 아니던가?

느껴지는 데야 어찌하는가?

주님은 논리의 그물로 짜여진 '전설'이 아니다.

그 분은 늘 말씀대로 증거하신다.

살아서 움직이신다.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

개역 한글에는 '산자의 하나님'이라 나왔다.

 그보다는 개역개정의 이 표현이 더 살갑고

살아 있는 듯 느껴진다.

살아 있는 나.

살아 있는 생명의 기운.

말씀 앞에서 살아 있는 나.

그런 나를 기뻐하시고

나의 곁에 계시는

살아있는 자의 하나님이

날 기뻐하신다.

 

 나.

강력한 미움의 논리들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섰다.

그러기로 선택하고

말씀을 묵상했다.

마음이 '뻥~'하고 뚫린다.

부활이 내 일상에서 일어난다.

난, 매일 매일

옛사람에서 새사람이 되는 체험을 한다.

그럴 때

내 분위기는 '우울'에서 '행복'으로 급반전한다.

어쩌면 주님이 아직도 저런 체험을 하시게 하시는 게

성경의 말씀이 하나하나 이해되도록 하시기 위함이고

온전한 부활체의 운명으로 허락되어 있음을 보이시기 위함은 아니시던가 생각이 든다. ^^*

 

죽도록 말씀을 묵상함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변하지 않는 것 같아도

난 매일매일 부활한다.

그런 나는 살아 있는 나다.

나의 곁에 하나님이 기뻐 계신다.

 

 

적용

1. 부활에 대하여 묵상한다.

 부활은 '사두개인의 논리'에서

'생명의 논리'로 바라보게 되는 것을 말한다.

 죽음의 논리에서 살아있는 논리로의 전환을 이야기한다.

 난 , 매일매일 살아난다.

 난 자주 자주 이긴다.

 난 완전한 부활을 할 운명이다.

 

2. 살아 있는 자.

 생명이 넘치는 자.

 예수님의 사랑을 난 체험한다.

 난 살아 있는 자다.

 늘 살아 있기 위해 죽도록 묵상의 시간을 놓치지 않으리라.

 

3. 성경 여덟 장 읽겠다.

 

4. 사두개인의 논리를 버린다.

 끝까지 들러 붙는 세상의 원리

 상처의 원리, 다툼과 정욕의 원리를 버린다.

 

 

기도

 

주님.

감사합니다.

어찌 이리도 어둠의 논리, 사두개인의 논리들이

마치 너무도 그럼직하게 들러 붙는지요.

부활한 자가 바로 나임을 느끼지 못했다면

그래서 그러한 논리들이

정말 어리석었음일 깨닫지 못한다면

벗어나기 힘들정도로

강한 유혹으로 다가옵니다.

그러나 ,주님.

주님 말씀으로

생명의 언어로 절 잡으시면

전 곧 그리될 줄 압니다.

살아 있는 자로 서 있을 수 있음을 압니다.

그런 저를 기뻐 받아 주실 줄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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