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칙한 QT
난 부흥의 길에 서 있다 (출 35:30-36:7 ) 본문
제 35 장 ( Chapter 35, Exodus )
누가 보든 안보든
누구에게 보이든 안보이든
이들은 이렇게
아름답게 피워가고 있다.
나도 그러고 싶다.
주님의 그늘 아래서
주님의 주시는 생명으로
크든 작든
그냥 흐르듯
내 가진 모든 것을
주님을 위하여
세상을 위하여
그리 피워내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난 기다린다.
주님의 계절이 오고
주께서 적절한 성령의 비로써
나의 영혼을 채우셔서
날 빨갛게 익게 하시길...
주여.
그날까지
날 붙드소서.
30.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되 볼지어다 여호와께서 유다 지파 훌의 손자요 우리의 아들인 브살렐
을 지명하여 부르시고
하나님이 부르심이 먼저다.
31. 하나님의 신을 그에게 충만케 하여 지혜와 총명과 지식으로 여러가지 일을 하게 하시되
34. 또 그와 단 지파 아히사막의 아들 오홀리압을 감동시키사 가르치게 하시며
그가 시키심이 먼저다.
우리가 해야 할 것은 그 분의 성령으로 '충만케'됨이다.
그렇게 되면 그분의 시키심을 알아 듣는다.
사람끼리의 그것과는 너무도 달리
하나님의 시키심 알아 듣는다는 것은 '감동'이 넘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감동은 육신에 숨겨져 있던 어떤 능력들이 촉발된다.
마치 번개를 맞은 아주 소수의 사람들이 초능력을 발휘한다는
그 영화같은 설정이 주님의 뜻에 의하여 강도의 차이가 있지만
나오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혜'가 넘치게 된다.
' 지식'이 넘치게 된다.
'일'에 열정이 넘치게 된다.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된다.
.........
제 36 장 ( Chapter 36, Exodus )
3. 그들이 이스라엘 자손의 성소의 모든 것을 만들기 위하여 가져온 예물을 모세에게서 받으니라 그러나
백성이 아침마다 자원하는 예물을 연하여 가져 오는 고로
봉헌이 넘치게 한다.
5. 모세에게 고하여 가로되 백성이 너무 많이 가져 오므로 여호와의 명하신 일에 쓰기에 남음이 있나이다
이 모든 것이 '주님의 감동'이 얼마나 강한지 알게한다.
쓰고 넘치도록 헌금하고 헌물하게 한다.
6. 모세가 명을 내리매 그들이 진중에 공포하여 가로되 무론 남녀하고 성소에 드릴 예물을 다시 만들지
말라 하매 백성이 가져오기를 정지하니
7. 있는 재료가 모든 일을 하기에 넉넉하여 남음이 있었더라
주님이 하시는 것은 '주시는 것'이든 '받으시는 것'이든 넘치도록 하신다.
풍성하다.
오늘의 주제는 '모든 것을 하나님이 하신다.'와
'부흥하는 집안'의 모습이다.
이게 정답이다.
주님이 우선이 되셔야 하는 것이다.
주님이 우선이 되셔서 헌신과 봉사도 되는 것이고
주님의 감동으로 '지혜'와 '능력'이 넘쳐나고
주님의 감동으로 자꾸만 더 헌물하고 헌신하고 싶은 마음이 소록소록 생겨야 하고
주님의 감동으로 지혜가 개발이 되고
능력이 개발이 된다.
또 , 주님 앞에 깨어 있는 모세와 같은 리더가 있다.
한번 실수는 했지만 주님 앞에 고정하려는 시각을 가진 백성들이다.
이래서 부흥되는 것이다.
작금의 교회의 대형화.
그리고 점점 더 줄어들어가고 핍박 받는 현 기독교의 문제는
그들 대형화되어가고 늘어가는 성도의 수가
오늘 보이시는 '부흥'의 모습과는 상치되어 가고 있기에 문제가 생겨 가는 것이다.
아무리 명분이 주님이 되셔도 프로그램이 앞서가고
인본주의가 끼어 들기에 그런 것이다.
그런 방법은 자기 살을 깍아 먹는 결과를 가져온다.
일시적으로 쉽고 풍성한 듯하지만 결국은 부흥하고는 거리가 멀게 된다.
여기서 말하는 '부흥'이라는 것은
꼭 사람들의 수, 즉 교인 수 만을 의미하는 부흥이 아니다.
그 곳에 거하는 자들의 영혼에 '감동'이 있느냐를 의미하는 것이고
그들이 하나님의 영으로 전율하고
그들이 하나님을 믿게 된 것을 '점점 더' 기뻐하게 되느냐를 의미하는 것이며
그래서 그들이 자발적으로 헌신하고 구제하게 되고
그들이 원하지 않아도
'지혜'가 늘어나게 되고 '비전'이 생기게 됨을 말하는
자연스러운 것이며
흐르는 흐름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이 아닌 숫적인 부흥은 '잠시 반짝 곧 망함'일 수도 있다.
증거가 유럽의 대형화된 교회 건물 들 아닌가?
프로그램을 경시하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그 프로그램의 이룸이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로서 이루어진 것이고
참여하는 자들이 하나님의 미심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냐는
순서적인 문제에 달려 있다.
이것은 맞고 저것은 틀리다는 것은 '흑백 논리 '일 뿐이다.
주님은 자연스러움이다.
주님이 원하시는 부흥은 그런 것이다.
또한
이 부흥에 대한 말씀은 '개인적인 부흥'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헌신과 봉사가 의무가 되지 않고
기쁨이 되고
그 헌신에 참여하게 됨으로서 더욱 큰 축복을 얻게 되는 것.
그 축복은 영적인 안정감을 더불어
영혼의 성화가 이루어져 가고
세상적인 것도 반드시 절제하고 금욕하고 물질 달라 열심히 간구하지 않아도
주님이 알아서 부어주는 그런 놀라운 축복이시다.
이게 부흥이다.
한곳에 치우치지 않는 전방위적,
흐름에 막히지 않는 자연스러움
누구도 알수 있는 이해하기 어려운 꿈틀거리는 '역동성'
이게 부흥이다.
자연스럽지 않은 것은 '부흥'이 아니다.
프로그램일 뿐이고 강요일 뿐이다.
특별히 개인적 관점의 부흥에서
마지막에 넘치도록 헌금, 헌물하는 백성들의 입장을 곁에서 바라보았다.
만일 내가 부흥을 이해하지 못하는 '냉랭한 기독교인'이거나
불신자로서 그들의 행동을 볼 때
그것은 '미친 짓'이 맞을 것이다.
종교 망상.........으로 핍박했을 지도 모른다.
물론 개중에는 선후가 바뀐 그런 분들도 없지 않다.
그러나, 오늘 분명히 보이는 현상은
주님의 은혜로 인한 부흥의 증상일 뿐이다.
그렇다면 그들, 주님의 뜻에서 약간 멀리 있는 자들의 비판에서
어떻게 자연스럽게 자신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을까?
' 세상의 원리'와 '하나님의 원리' 다.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은 당연히 세상의 원리에 속할 수 밖에 없다.
그들은 그들의 눈으로 볼 수 밖에 없다.
교회는 나오지만 성령체험이 없는 분들은 그렇게 이해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하나님의 원리를 알고 그 분의 성령으로 충만한 경험을 한 분들은
이들의 이 행동이 너무나 옳음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어느 것이 옳은것인가?
과연 하나님의 원리가 옳은 것인가.. 라는 의문이 드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당연한 것이 아닌 가?
이 세상의 유한 한 것이 무엇을 얼마나 줄 수 있는것인가?
하나님은 수천년을 두고 당신의 살아계심을 증명해오셨고
수도 없이 많은 사람들이 그 성령의 체험을 증거해오고 있으며
주하인의 개인적인 삶에서도 그리 운용해 오시고 계시다.
나, 주하인.
주님을 전혀 모르던 상태에서
예수님을 영접하고 그 첫사랑의 놀라운 성령의 잡으심으로 말그대로 둥둥 떠다녔었다.
수개월 동안..
그러면서 두갑씩 피던 골초 애연가가 담배를 잊어버리게 되고
불면증은 예수님 믿자 마자 사라졌다.
오픈하고 있던 산부인과 의원을 아주 높은 가격으로 인도 하게 하신 후
낙태를 하지 않는 병원인 지금의 샘 안양병원으로 인도하시고
점차로 매일 매일 큐티를 통하여 말씀을 묵상하게 하시며
그 하루 하루를 감동으로 잡으시더니
마구잡이 박자도 맞지 않던 기타를 점점 운율있게 하시고
찬양을 인도하게 하시었다.
그 과정에서 생각지도 않던 블로그를 운용하게 하시고
트럼펫까지 배우게 하셨다.
이제는 소리가 제법 난다.
사진을 찍어본 적이 없는 자가
주님이 주시는 감동으로 사진을 그럴 사 하게 찍어
블로그를 통하여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하신다.
내 직업인 의사 라는 분야에서는
'복강경'을 자연스레이 습득하게 하시어
나도 모르는 사이에 폭팔적으로 환자를 늘어나게 하시고
이제는 그 복강경에서 'SPA'라는
절개를 한곳만 하고 시술하는 최첨단의 시술 법을 배우게 하셨다.
이 시술은 대학병원도 몇곳에서 시행하지 않는 기법이다.
이러한 일련의 것들이
내 나이 '50'세라는 적지 않은 나이에 - 솔직히 은퇴할 나이다- 이루어지게
하는 것이 스스로도 놀라운 일이고
이전의 나를 생각해보면 배우는 것에 굉장한 두려움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에 비해 놀라운 일이며
또한, 시간을 내서 어디로 저러한 모든 것을 배우러 간 일이 없다는 사실도 그렇다.
그냥 내 하루를 생활인으로 살면서 하나하나
말씀과 감동으로 주신 것을 조금씩 조금씩 적용하다 보니
나누고 싶어지고
타인에게 선한 영향을 주고 싶다는 생각으로 그리되어 온 것이다.
난, 말하고 싶다.
난 부흥의 도구가 되고 싶다고 언젠가 주님께 고한 적이 있다.
한두번..
그게 이루어져 가는 것이고
난 자랑처럼 말하는 이 내 변화가
절대로 내 자랑이 아님을 이야기 하고 싶다.
모두 주님이 주신 것이다.
진짜다.
돌아보면 위의 고백처럼 단 하나도 현실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것들이 아니다.
특별히 이전의 나는 너무도 부정적이어서
이러한 것을 너에게 이루어 주실 것이다.. 라고 주님의 말씀이 있었다면
오그라 들어서 그런 것 불가능하다고 도망갔을 그런 유형 들이다.
하지만 주님이 감동으로 날 채우시더니
나에게 이처럼 많은 변화를 가져오셨다.
불가능한 일의 이루어짐.
심지어는 '진료 영역' , 내 삶의 방편조차도
이렇게 완전히 패러다임을 바꾸어 버리셔서
이 어려운 시대에 '중년 남자 산부인과의사'를 세워주심이 놀랍도록 감사하다.
난..
말씀 앞에 서고
감동으로 날 채우심을 받고
그 감동으로 하루 한가지라도 적용하려는
나도 모르는 시도를 했고
그 와중에 다가오는 현실적 제약을
주님이 인도하심을 하나하나 깨닫고
조금씩 조금씩 오게 된 것이다.
솔직히 이들 이스라엘 백성들의 그 퍼다 받치는
어찌보면 세상의 관점에서 보면 미친 것 같이는 하지 못했지만
예전의 내가 생각하면 미친 것 같은 공여를
'하나님의 감동'으로 몇 차례 순종한 적은 있다.
아마도 그것도 주님이 주시는 내 부흥의 한 증상이다.
그리고 그렇게 하고 나서는
난, 내가 대견하다거나 그들에게 우월하다는 생각은 많이 들지 않았다는 것이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내 삶의 방향이 그리 틀리지만은 않고
주님이 살아계셔서 나에게 임하시는 증거임을
세미하게 깨달아 가고 있다.
그렇다.
세상은 모른다.
그들은 절대로 알수가 없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지 못하는 자들은
아무리 이야기 해도 이해할 수 없다.
성경에서 어차피 이해하게 하는 것도
주님의 영역이라 하셨다.
그럼에도 이리 길게 쓰게 되는 것은
그것도 주님의 감동으로 그렇게 하는 것이고
이 글을 따라 읽는
나와 같이 조금이라도 주님을 감동하고
그 안에 '여운'이 남아 있는 소수자들에게
같이 내 경험을 나누고
내가 이해하고 있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아 이런 방향으로도 주님은 인도하시는 구나'라는
공감을 나누게 하기 위한 것이다.
난.
부흥의 길에 서 있다.
기도
주님
참 감사합니다.
주님의 인도하심으로 여기까지 허덕 거리며 왔습니다.
이제 부흥하는 모습을 온전히 보여주신 하나님
그 부흥의 길에서
내 내적인 과실을 맺을 수 있기를 원합니다.
좀더 지혜롭게 하시고
좀더 영감있게 하시고
좀더 감동있게 하시어
이웃에게 지혜로운 자가 되게 하시고
열심이 있는 자가 되게 하시고
주님의 일이라면 나도 모를 힘이 나게 하소서.
지금까지 잘 이끌어 주셨습니다.
이제 만개하게 하소서.
막힌 것 없게 하시사
주님의 영광드러낼 수 있는 길 을 주소서.
부흥을 허락하소서.
나뿐 아니라
내 가족이 그리하게 하시고
내 직장이 그리하게 하시고
내 교회와 모든 교회가 그리하게 하시고
내 나라가 그리하게 하시고
이 세상이 그리하게 하소서.
주님의 성령이여
온 땅에 강하게 흐르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감사하며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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