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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점점 의롭다 ( 욥27:5-11 ) 본문

구약 QT

나는 점점 의롭다 ( 욥27:5-11 )

주하인 2008. 10. 14. 10:42

제 27 장 ( Chapter 27, Job )

 

 

 

 

주님으로 인한 평강은

이런 듯 합니다.

외부적 조건과 상관없는

내적인 고요.....

 

 푸른 하늘의 일렁임과

노란색 꽃의 하늘거림과

내려 쬐는 가을 양광이

주는

이같은 유형의 

가슴 떨리는 평화 말입니다.  

 

 

 
5.  나는 단정코 너희를 옳다 하지 아니하겠고 죽기 전에는 나의 순전함 버리지 않을 것이라  
6. 
내가 내 의 굳게 잡고 놓지 아니하리니 일평생 내 마음이 나를 책망치 아니하리라  
7.  나의 대적은 악인 같이 되고 일어나 나를 치는 자는 불의한 자같이 되기를 원하노라  
8.  사곡한 자가 이익을 얻었으나 하나님이 그 영혼을 취하실 때에는 무슨 소망이 있으랴  
9.  환난이 그에게 임할 때에 하나님이 어찌 그 부르짖음을 들으시랴 
10. 
그가 어찌 전능자를 기뻐하겠느냐 항상 하나님께 불러 아뢰겠느냐  
11.  하나님의 하시는 일 내가 너희에게 가르칠 것이요 전능자의 뜻 내가 숨기지 아니하리라

 

 욥..

대단한 '기'다.

친구들이 그렇게 공격해도

자신은 끝까지 옳다고 한다.

'나의 순전함'이라고 한다.

'나의 의'라고 한다.

 

 전에는

욥기를 보고 이들의 싸움을 볼때마다

속에서 욕이 나오려 했었다.ㅎ

그러면서

욥의 순전함 주장을 보면서

이것은 아닌데.. 하면서도

성경에 나온 이야기기에 무엇인가 뜻이 있을거란 생각을 하며

이런 쓸데없는 소모전

'네가 틀렸다 .. 내가 옳다'고 하는 데

너무 많은 지면을 할애 하는 데

자칫 시험이 들을 라고 해서 ㅎㅎ

얼른 얼른 넘어 뛰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두달간 원치 않게 '욥'을 묵상하면서

가만히 가만히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생각하려 하니

속상하고 속이 근질 거리는 반감보다는

그의 마음이 읽혀지고

친구들의 생각의 폭이 읽어지고

사람은 시대를 넘어서도

변치 않는 '관점'의 틀 안에서

살 수 밖에 없는 것이란 것이 읽혀져

조금은 욥과 친구들에 대하여

애정이 생김이 사실이다.

 

 

 

우리는 그래서..

독서를 해야 합니다.ㅎㅎ

천진암의 그 넓은 가을 광장에서

독서에 열중하는 청년이

참 아름답습니다.

 

 

 그런데

욥의

자신을 보는

그 기본 시선에 대하여

어찌 생각할 것인가?

이게 오늘 주님이 나에게 주시는

묵상거리 일 듯 싶어

예외롭지 않게

짧은 기도와 더불어

블로그에 들어와 앉았다.

 

 '자신의 순전함'

그 생각이 주는 이익이 무엇일까?

자신이 온전하다는 생각

순전하다는 생각은

일단은 '죄책감'이 없는 상태이다.

그리고 무엇을 해도 옳다는

기본 개념을 가지고 들어가기에

'힘'이 있을 수 밖에 없다.

내적인 갈등이 없기에

심리적 갈등이나 고통이 없어

참으로 편안한 생활이 될 것이다.

갈등으로 소모될

심리적 에너지의 누수가 없기에

기억력이 더 늘어나 공부는 더 잘될 것이고

긍정적으로 되기 때문에

주위에 사람이 따르게 될 것이고

그것은 일상에서

'성공'을 의미하는 것이 된다.

그게 욥으로 하여금

동방의 의인이자 대 부호가 되는 길이 되었을 수도 있다.,

주님의 직접적 물질 축복과 더불어..

실제로 성공한 사람들의 심리에는

'난 할수 있다'는 자기 확신이 강한사람들이 많다.

 

  소위 말하는 '기'가 세다는 현상으로 읽혀질 수 있는

이들 '자기 확신'이 강한 자들의 인생이

모두 옳은 것인가?

 죄책감이 없는 사람이 모두 옳은가?

 절대로 아니다.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중

인생 속에서 이루어놓은 업적을 기준으로

자신의 옳음을 판단하는 자가 있을 수도 있다.

 깊은 상처를 숨기기 위한

반동 현상으로

오히려 오버하는 경우가 있다.

'과대 망상'도 그 일종이긴 하다.

그러한 사람들은 겉으로 보기에

모두 기가 센 사람들이다.

행복해 보인다.

 일단의 '이단 종교'에서

한쪽의 과도한 추구의 방향 중 하나로

'죄책감'의 벗어남으로 인한

망각의 증상으로 나오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내가 옳다'는 자기 확신의

나쁜 면, 아니 위험한 면은 어떠한가?

 잘못된 판단은

자신 뿐 아니라 남에게 까지 해를 끼칠 위험이 있다.

더구나,

사회의 지도층에 있는 사람들의 그것은

놀라울 정도로 큰 해를 가져온다.

그러기에 주님은

율법을 아는 자의 잘못된 행위는 죄라고 했다.

율법이 죄를 불러 왔다고 하셨다.

 옳지 못한 자기 확신의 더 커다란 해악은

나이가 들어가며

육신의 능력이 쇠해갈 때

주님의 허락하신 양심과

잘못임을 아는 무의식의 인지능력의 사이의 갈등이

온갖 괴로운 심적 고통을 가져오게 되고

결국을 자신을 파멸로 가져 가게 된다.

현대인의 우울증이 많음은

헛된 자신감과

주관적 감각이 옿다는 사회 현상이 가져오는

증거이다.

 

그렇다면

어찌 해야 하는가?

어찌 해야 구분이 가능한가?

옳고 그른 '자기 확신'에 대하여...

그리고

오랫 동안 'under dog'

즉, 세파트가 치와와를 무서워하는

이치에 맞지 않는  '자기 비하'

자존감 낮음은

잊으려 노력하다가 결국 반대 현상이

과대 망상으로 밖에 갈 길이 없는가?...등이

드는 많은 생각 중 일부이다.

 

 인간은 깡통같은

아니, 백지 같은 존재이다.

그 깡통에 채워지거나

종이에 그려지는 조건에 의하여

자신을 바라보고(자아상)

외부를 바라보는

안경이 하나 씌워지는 것이다.

 아담 이브의 타락 사건 이후

주님이 허락하신 이 순전한 안경은 심히 왜곡되었다

 흔들리는 화상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고 자신을 바라보며

파생되는 수많은 상처와 고통이

이 세상에 난무하게 되며

고통과 상처는 또다른 편안함을 찾아

갈등을 느끼고 갈구하게 만든다.

주님은 멀리 계시는 듯하고

세상은 가깝다.

죄는 죄를 낳고

상처는 염증을 더욱 크게 키운다.

그러다 보면 비슷한 자들끼리 모여

자신들의 원죄와 그로 부터 파생되는 자범죄,

그리고

주님을 떠난 자로서 느낄 수 밖에 없는

영혼의 본능적 허탈감은

사람 들로 하여금

그 빈곳을 채우려고 갖은 방법을 다 동원하게 만든다.

그것은 눈에 보이는 성공, 물질, 명예........

온갖 주님의 대체물이 동원된다.

그러다가도 견딜 수 없는

몇몇 소외자들은

이 영혼의 공허감으로 부터 오는

죄책감, 아픔..을 벗어나기 위하여

중독성 현상에 빠져 들기도 한다.

거기에는

이단 사이비 종교, 마약, 술, 담배, 섹스, 도박.......온갖 것이 포함된다.

특별히

구원파 나 종말론자들의

죄책감 사해줌을 빌미로 한

어이없는 이단행각에 사람들이 쉽게 빠져드는 이유가

현 상황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러한 자기 확신이 옳고 그름은

어찌 자신이 알 수 있는가?

 난 ,

이리 정리를 하고 싶다.

     '지혜'를 쌓아야 한다.

세상의 지혜도 분별력에 도움을 준다.

많은 양의 양서를 읽음은

지혜의 흐름에 기틀을 마련해 준다.

사도 바울은 많이 배운자이다.

그는 크게 사용되었다.

자신의 인격의 대 변화를 가져오고

대 사도로 변화되는 결정적인 틀은

지혜의 훈련이었다.

     또 '좋은 만남'이 있어야 한다.

 무엇보다 확실하고 필수 불가결한 것은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남'이다.

주님을 앎 차원을 넘어선다.

그 분이 어떤 분이라는 것을 머리로만 알아서는 안된다.

욥은 늘 주님과 동행하던 체험을 가진 자다.

그러기에 그 분은

사단의 대리자로서의 친구들의

헷갈리는 논리적 공박과

만성적 고통 안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자기 확신을 유지하고

어렵지만 놀라운 고백을 할 수 가 있었다.

'나는 옳고

 나는 순전하다.

 나는 의롭다.' 라는 자기 확신에 도달할 수 가 있었던 것이다.

거기에는 의미하는 바가 있다.  

 세상의 노력에 의한 지혜나 확신은

반드시 흔들리게 되어 있다.

의학도 마찬가지다.

어떤 분의 'T세포'이론도

놀라운 치료 방법도 시간이 지나면 다 엉터리로 변하기도 한다.

레이져 (전기 ) 수술법은 1930년대에 미친 과학자가 주장했다고

모진 공격을 받았지만

현대는 모든 수술이 전기에 의한 방법이 없으면 힘들다.

 하지만,

주님의 그것은 절대로 변개치 않다.

주님으로 부터 나오는

사랑의 결과 ,

주님께 자기가 가진 모든 어려움을 내려 놓고

받게 된 축복의 결과,

주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된 바

그 분의 나를 쳐다보는 놀라운 시선으로 부터 나오는

놀라운 치유의 결과

그래서 생기는 자신에 대한

그 분의 반향으로 얻어지는 고운

자기 이미지의 개선의 결과는

정말 옳은

자기 확신의 방법이다.

이것 만이 옳다.

 

 그렇다면

종교 지도자들은 모두 옳은가?

과거에 경험된 위의 자기 확신은 모두 옳은가

어찌해야 옳은 길과 구분할 수 있는가?

증상으로 몇가지 있을 수 있다.

우선,

자기에 대하여 선한 생각을 가짐은 말할 것 없지만

자신의 확신의 결과로 나오는 일이

타인에게 짐이되거나 해가 되면

그것은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다.

무리가 되면 돌아가야 한다.  

주님도 돌아서 사마리아로 들어가셨다.

때가 되기 전에는 숨어 다니시기도 했다.

남에게 해가 될

자기 확신의 결과는 포기 해야 한다.

 

또,

욥은 어떻게 저리 자기 순전함의 확신을

유지할 수 있었겠는가?

그것은 날마다 말씀 묵상에 있다.

주님과 동행에 있다.

절대 주님을 잊는 시간이 없어야 한다.

삶과 하나님의 생각이 분리 되어서는 안된다.

그게

이 땅을 옳게 살다가

주님 앞에 가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욥 ,

그는

지은죄가 왜 없겠는가?

그가 자신이 순전하다는게

율법을 다 지켜서

자신의 의가 최고조로 커져서

가지는 '자기 교만'일 것인가?

아니다.

그는 지은 죄가 있을 지라도

주님으로 인하여

날로 새롭게 되고

깨끗해 지는 영혼을 유지할 수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결론으로

주님으로 부터 오는

날마다 깨끗이 씻어지는

죄씻김으로 인하여

우리의 영혼이 매일 새로와지고

그럼으로 우리 스스로

주님의 사랑 받는 자로서

사랑스러운 자신을 받아들이게 되는

이러한 '의로운 자'로서의

아니,

의로울 자로서의 자신을 확신하게 되는 것이

행복의 길이다.

그 길이 진리의 길이다.

이런

자신이 되어야

자신 뿐 아니라

이 세상이 주님이 원하시는 천국이

이 땅에 회복되는 방법이다.

그것은

다시 말하지만

자신의 노력으로 '만' 도덕적 삶을 살아서 이루어지는 것은

절대로 아니라는 것이다.

도덕적 행위로서의 '선한 행동'은

노력해서 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구원해주시고 동행해주심이

감격스러워지고

점차로 '의로운 자신'을 발견함이

너무도 놀라워

점점 죄로 부터 멀어지고

종국에는 죄를 지을 줄 모르는 상황이 되는 데 있다.

물론,

의지를 결코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노력도 필요하다.

어느 순간에는................

 

 

 

적용

1. 나는 의롭다.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날마다 사모하고

매일 주님앞에 묵상을 하는 한

나는 의롭다.

어제 것은 다 지나갔다.

그것을 믿는다.

 

2. 교만도 필요없다.

주님이 주시는 의로움은

교만하지 말아야지 .. 하는 경계도 필요없다.

거기에는

놀라운 평강의 차분함과

알지 모르는 확신이 든든하게 따라올  뿐이다.

 

3. 이 원리를 남들에게 전한다.

 한분이라도 전도하겠다.

 

4. 흔들릴 때마다 주님의 죄사해 주시었음을 믿는다.

 

5. 성경 여섯 장 읽겠다.

 

기도

 

 

주님

난 아직 그렇습니다.

자신이 없습니다.

부끄러움이 많습니다.

그러면서도

반동작용인지 교만한 것도 많습니다.

가만히 보면

이 모든 갈등과 괴리가

자신을 사랑할 줄 몰랐고

자신의 옳음을 인정하지 못한

결과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것은 다시 말하면

내 안에 주님이 온전히 자리 잡지 못하시게 하였던

어리석음의 결과임을 고백합니다.

주님

그 놀라우신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과

날마다 날 지키시는 성령의 운행하심을

습관적으로 이해하지 못하게 했던

내 의의 가로막음이 아니었던가 합니다.

이제

욥님의 놀라운 자기 확신을 보면서

살아계신 주님을

인정하고 느끼고 체험하고 사는 자의

천국같은 삶을 알게 됩니다.

주여

부디 닮게 하소서.

잊지 않게 하시고

물흐르듯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길 원합니다.

주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회개하고

주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자유를 누리고

주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의로운 자로서의 권리를 누리길 원합니다.

이 땅을 살되

천국을 살 수 있길 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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