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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의 삶 (시105:24-45 ) 본문

구약 QT

깨달음의 삶 (시105:24-45 )

주하인 2011. 4. 27. 12:17

 제 105 장 ( Chapter 105, Psalm )

 

눈을 가리는

어두움 속에 있어도

그게 꼭

실패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고난이

겹쳐 다가와도

그것으로 그렇게

좌절하고 있을 일만도

아닙니다

 

주님

제 곁에 계시고

말씀으로 밝혀 주시고

성령으로 인도하시니

 

제 삶은

이제

오히려

깨달음의 삶이 맞습니다

 

어둡지만 밝습니다

어렵지만 힘이 납니다

고난이지만 기쁩니다

 

주님

사랑합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25.  또 저희 마음을 변하여 그 백성을 미워하게 하시며 그 종들에게 교활히 행하게 하셨도다 
 
  주님은 '애굽 왕'의 마음 마져 변하게 하신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미워하도록 만드시는 분이시다.

그리하여 그 백성들로 하여금 '연단'에 들어가게 하신다.

고난을 허락하심으로 깨끗하게 되도록 배려하신다.

 

 

  야베스님이 답글을 남기셨다.

방금 목적이 이끄는 삶 중 삶은 일시적인 것이다라는 챕터를 요약 하는데 이런 글이 실려 있네요. 함께 나누고 싶어서 옮겨봅니다.

이 땅이 우리의 궁극적인 집이 아니라는 사실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예수님의 제자로서 왜 어려움과 슬픔 그리고 거절을 경험하게 되는지 그 이유를 설명해 준다. 또한 왜 때로는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지 않는지 왜 기도에 응답받지 못하는지 왜 어떤 상황들은 불공평해 보이는지에 대한 이유가 되기도 한다. 이 세상이 삶의 끝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세상을 너무 사랑하지 않게 하시려고 하나님은 삶에서 상당한 정도의 불만 요소를 갖게 하신다. 이 세상에서 채워질 수 없는 갈망을 느끼게 하신다. 우리가 이곳에서 완벽하게 행복하지 않은 것은 그래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이곳은 우리의 영원한 가정이 아니다. 우리는 훨씬 나은 것을 위해 창조 되었다.

삶이 힘들어지고 의심의 구름이 몰려오며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이 과연 가치가 있을까 고민하게 될 때 우리는 아직 집에 온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하라. 죽음이란 우리가 집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진짜 집으로 가는 것을 의미한다. 

 맞지 않는가?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본향인 천국이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이고

영생이 하나님이 허락하신 진정한 선물이기에

이 땅,

이 짧은 인생이란 이름의 육신 속의 삶은

그 영원한 생명으로 누리기 위한 잠시 거쳐가는 과정이며

그 과정은 '아마도' 하나님의 기쁨을 위하여 창조된

우리가 마땅히 '정결화' 되어 가야 하고

따라서 ' 고난'은 허락된 것이라는 것이 당연하다.

고난은 이 아주 아주 유한한 육신의 삶동안

당연히도 정결화되어야 할 '죄'를 씻는 과정이고

우리에게는 그 이후의 온전한 영생이 관심이 되어야 하고

그러기만 하면 이 잠시의 삶 속의 약간의 혼란은

기쁨으로 이겨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가?

 나.

안다.

이처럼 한 줄에 '주루륵'하고 내려 쓸 수 있을 만큼

잘 안다.

그러나, 그것은 '총론'이고 '각론'에 들어가면 어떤가?

매사에 흔들리고 넘어지고

약간의 자극에도 세상이 다 어두워진 것처럼 '좌절'하고 있으려 한다.

이게 과연 무엇이  문제던가?

'인식'과 '현실'과의 차이는 무엇이 문제던가?

정말 '진실'이고 '진리'인 것이 위에 열거한 바가 아니던가?

그런데도 왜 끄덕하면 거짓의.. 허상의 세상에서 이처럼 '푹~'하고 주저 앉던가?

나만이 그런가?

육신을 가진 그 누구도 지속되는 이 세상의 환란에

진리만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깨달아 나갈 자 있던가?

홀로?

자신의 힘으로만?

 아니다.

 오직 주님의 도우심으로야만 가능하다.

 그러기에 그것을 위하여 '예수'께서 말라기서 이후의 사백년의 장고 끝에

드디어 인간의 세상에 '육신'을 입고 내려 오셔서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신 후

성령을 보내심으로

철저히 우리, 이 연약한 당신의 백성들을 보호하고 인도하심이 아니시던가?

 

그렇다면 이 일생을 개미처럼

이땅에 붙어 살아가면서도

기회만 되면 되풀이 되고 또 되풀이 되는

이 어리석은 변화되지 않는 어리석음을 벗어나

눈을 들어 '진리'를 바라보는

깨달음의 을 살수가 있던가?

이 어리석은 '감정'의 회오리 안에서 어찌 벗어나야 하는가?

혼란,

곤란,

외로움,

좌절,

우울,

짜증..................

 

 오늘 묵상 구절에 답이 나온다.

' 감정'마져 바꾸시는 온전하신 하나님.

그 하나님이 그러시기 위해 '부활'하시고 '성령님'을 보내시지 않으셨던가?

새로운 생명.

부활.

..

너무 거창하던가?

 

'깨달음의 삶.'

그렇다.

말씀을 묵상하며 난 정말 많은 체험을 해왔다.

그 중에서도 난 감정의 변화를 직접 제어하여 평강을 유지하려 했었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감정과의 싸움 하나하나는 성령 충만할 때 기도로 이겨낼 수 있었지만

근원적인 것은 아니었다.

생각이었다.

많은 불신의 시절을 거치며 왜곡되었던 생각이

주님 말씀으로 하나하나 잡혀가면서

그때마다 놀라운 '평강'의 감동이 날 채우고

그 평강은 나로 하여금 순수한 감성이 살아나

참으로 기쁘고 감동적이고 놀라운 체험을 많이 하도록 하게 하셨다.

그렇다.

오늘 하나님이 말씀으로 ' 감정'까지 변화시키셨다.

하나님의 말씀이 모든 피조물의 생각까지 변화시키고

그들의 감정까지 원하시는 대로 변화를 허락하셨다.

 

나.

다시 이 땅의 유한한 삶을 사는 동안 허락된

환란과 고통의 문제와

그를 한걸음 벗어나

진실와 진리는 ' 천국의 삶'을 위해 허락된 잠깐의 연단과정에 있음을 기억해

어렵되 어렵지 않고

고통스럽되 고통스럽지 않고

허무하되 생명력있는....

그러한 '깨달음의 삶' 을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도우심,

성령의 충만함이 필수다.

그러기 위해서는 더욱 말씀 앞에 서야 한다.

기도해야 한다.

깨어 있어야 한다.

 이제는

이 살아가는 목표가  '조금 더 얻기 위해' , '조금 더 편하기 위해' ........ 가 아니어야 한다.

살아가는 중의 거치는 어려움이 반드시 몸부림쳐 빠져나가고

감정적 안정감 만이 목표가 되어서는 안된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모든 것임을 인식하게 되어야 한다.

고난은 언젠가는 지나갈 것이고

그 마져도 내 유익을 위하여 허락된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그래도 어려우면 주님이 날 깨닫게 하시길 기도해야 한다.

어려움이 혼란스러우면

그 감정 마져 바꾸시길 기도하고 기다리고 기대해야 한다.

그마져 바꾸신다고 오늘 묵상에 나오신다.

난.. 많은 경험을 가지고 있다.

참 어리석어서...

예수님 구원하신 후 한참 지나서야 이제야 믿게 되었다.

이제라도 알게 되니 참 다행이긴 하지만...   
  

적용

1.  깨달음의 삶...을 명심하자.

 

 몇개월을 무월경 있던 분이 지금 다녀 가셨다.

검사를 해보니 특이 이상 소견이 없음에도 그렇다.

몇가지 피검사를 하고서는 다음 약속을 하고 나가시려는 분께 그랬다.

'살찌거나 스트레스 받을 일은 없었어요?'

그러니 실은 불면증으로 신경정신과 약 드시기 시작했다 한다.

다시 앉혔다 .

'내가요..  38 살에 예수님 영접하기 바로 직전에요.

 불면증.. 담배.. 고혈압...... 그러다가 . ..불면증은 나가는 날 즉시,

 담배는 3년 만에 끊겼어요.. . 고혈압 .. 정상으로 잘 유지 되지요....

 . ................................'

 솔깃해 하신다.

말을 막이어나갔다.

'이제와 돌이켜 생각하니요.

그 모든 어려움이 예수님을 영접하게 하시기 위한 어려움이었고요..

 내 감정적 안정을 위함이었어요.

 아.. 세상이 완전히 다른 모습예요.

 불신의 시절에는 '나' 밖에 몰랐어요. .. 내 기분... 내 성공... 나... 나..

 이제는 다르지요.

 평안이 있고... 기쁘고 ...안정감이 있어요.

 세상이 달라진 것이지요.

 어머니도요.      어려움요... .. 다 뜻이 있으신 겁니다.

 우리는 그것을 부르신다 표현해요.

 진리로 부르심.

 오늘 묵상에 '감정'마져 바꾼다 나오네요....'

 어머니도 때가 되신 거 같아요.

 나에게 오셔서... 주님이 부르셔서 새로운 세상을 보게 하시기 위한 것..

 우리교회 안나오셔도 되는데 제가 이리 열정적으로 말함은

 깨달은 자의 안타까움이거든요?    교회나가세요.. 아시지요?'

그러신다신다.

 

 주님.. 그 감정마져 바꾸소서.

그게 깨달음이 아니던가?

 불신에서 믿음의 , 진리의 삶으로...

  믿는 자들의 깨달음은 '고난'조차도 하나님의 영생을 위한 것임을 잊지 않음이다.

 

2. 힘주소서.  .. 기도한다.

 성령이 아니시고는 세상 속에서 깨달음을 유지할 능력이 없다.

 알되 잊는다.

 잊고는 당혹하고 죄의 무게로 다시 눌린다.

 고난에 파묻혀 탈출하려 몸부림만 친다.

 그러나, 영원 속의 한줌의 시간에 주님의 뜻을 생각할 수만 있다면

 고난이 유익이 될 수 있다.

 약함이 강함이 될 수 있다.

 그게 깨달음의 힘이다.

 주님.. 힘주소서.

 

3. 마음 마져 바꾸시는 주님을 믿는다.

 성령을 사모한다.

 부활의 경험을 기억한다.

 

4. 말씀 세장 읽겠다.

 

5. 깨닫는 자로서 타인을 위하여 행동을 바꾼다.

  환우와 상담 중 밖에서 큰 소리가 들린다.

 오후 세시.

 옆 진료실의 선생님 환자.

 수술이 많아서인지 순서가 바뀌었다고 간호사에게 소리소리 굉음을 낸다.

 화를 내어 조용히 시킬 것인가?

 그마져 허락하신 뜻 가운데 깨달은 삶의 행동을 할 것인가?

 당연히 후자다.

 그렇다면 어찌 해야 하는가?

 내 환우를 보내고 나서 나가서 간호사에게 '무슨 일이냐 ' 물어 보았다.

 그러니.. 순서가 바뀌어서 그러신다면서 병동에서 충분한 설명이 없었던 모양이라 한다.

 듣고 보니 그거.. 불쾌한 일이고 불안한 환우의 입장에서는 그럴 수  밖에 없는 일이란 생각이 든다.

 그래서 ... 보호자 분의 얼굴을 보며.. ' 정말 화나실 만 하네요.. ' 하니까

 금방 사자 같던 얼굴이 풀어지면서 화가 급속도로 가라앉는 것이 보인다.

 '공감'의 힘이다.

 정말, 아내의 수술을 국내 굴지의 S병원에서 진행하면서 일체의 설명 없이

 수술 스케쥴을 바꾸니 많이 당혹이 되면서 화가 나던것이 사실이다.

 그렇잖아도 불안해 있던 상황에 조그마한 배려의 부족에 대한

 불편한 감정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래서 그 분의 입장에서 감정을 읽어 드렸다.

 '선생님.. 정말 이 분의 입장에서는 많이 화가 날 만해요.

 얼른 병동에 전화해서 어찌 된 것인지 알아서 설명드리라 하세요.. ' 하고

 잠시 볼일 보고 돌아오니 조용하다.

 어찌 된지 물어보았더니 금새 화풀리셔서 올라가셨다 한다.

   ( 하나님의 은혜 )

 

 그렇다.

 내가 내 고집대로 , 의사로서의 자존심을 내세우며

 이전처럼 고압적인 태도를 취했더라면

 지금까지 소리가 줄지 않았을 것이고 어쩌면.. 아이구..ㅎ

 하나님은 내 일거수 일투족에 감동을 더하신다.

 날 사랑하시는 내 하나님..ㅎ

 

기도

 

 주님.

그렇습니다.

주님은 감정까지 바꾸십니다.

그 감정이 불신자의 것임에 도 그렇습니다.

너무나도 당연하지만 그런 당연함을 잊고 사는 것이 저의 미련함이 아니었던가 싶습니다.

죄송하고 깨닫게 해주심이 감사합니다.

그러하심으로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게 함이십니다.

저에게 당연한 선은

'이 땅의 짧은 생을 통하여 영생을 준비시키시려는 ' 하나님의 귀한 뜻임이고

그 뜻 가운데 고난을 기쁘게 인정하고 받아 들이고

날 변화시키려는 적극적인 태도를 취함으로

성령의 귀하신 도우심을 얻음으로

세상을 살되 천국을 사는 것을

제 인생의 방향으로 삼아야 함에도

자꾸 자꾸 잊고 만 살게 되었었습니다.

그 어리석음 마져

주님의 온유하심과 오래참으심은

지금껏 저에게 또 발휘되사 기다리고 인내 하셨습니다.

이제 다시금 불현듯 깨닫게 됩니다.

그 깨달음을 삶의 각론 속에서 잊지 않게 도우소서.

깨달음이 적용되게 하소서.

잊지 않게 하소서.

그래서 더욱 온유하고 여유롭고 매사에 흔들리지 않고

아무것도 거침이 없는자 되게 하소서.

주여.

제 깨달음.. 제 자식과 제 아내와 제 가족과

모든 아시는 분들에게 선한 모범이 되도록 도우소서.

자유로움을 만끽하게 하소서.

율법보다 더욱 깊게

만용보다 더욱 청명하게

그리 중용의 모습을 살되

더욱 깊고 은혜로운 주님의 종이 되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시여.

감사하며 감사하며 또 감사며

우리 거룩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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