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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그들을 포기하지 않으셨다 (마 17:1-13 )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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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그들을 포기하지 않으셨다 (마 17:1-13 )

주하인 2010. 2. 18. 11:23

제 17 장 ( Chapter 17, Matthew )

 

 

암울하기만 하던

내 영혼에

그래도

숲으로의 원형을 지키며

살아갈 의미와

희망이 되심었음은

날 사랑하사

날 위해 돌아가시고

날 위해 부활하신

그 주님께서

때마다 철마다

해를 보내시고

구름을 보내시어

위안하시고

위로하시었음이다

 

 창조의 하나님

  -  music by 주하인 + 아크

 

아크..그때 태백재 구름 속에서

깊은 눈 속 차 안에서

제 엄마 품속에서

아가로 자고 있던

그 아이와 같이 부르는 찬양 ^^**.

 

 

 

 


1.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따로 '

  '높은 산'

 

제자 들.

구원 받은 자들 중에서도 선택받은 자.

 

 따로 데리고 가신 자들.

선택 받은 자중 특별한 소수.

 

 높은 산.

상급이 많은 자들.


 
2.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요한 계시록에도

스베덴 보리의 책에도

영화에 보더라도

천사를 상상해도

'흰옷' 은 천국과 순결을 상징하지 않던가?

 

  
3.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로 더불어 말씀하는 것이 저희에게 보이거늘 
  그 중에 가장 선택받은 자들을 sign으로 보여주시는

모세와 엘리야.

그들이 있을 곳은

천국에서도 가장 상급이 높은 장소

로마서인가.. 사도 바울이 '3층천 ' 이야기 하지 않았던가?

논리적으로도 무조건 같은 상급으로 가는 것은 맞지 않고

계시록에도 백보좌 심판은 상급 심판이다.

스베덴 보리는 '3층천'에 대하여 명확히 얘기해 놓으셨다.

 

 하나님은 선택받은 소수에게

예수님이 원래 계시던 그 본향의 가장 높은 자리를

보여 주심으로

'人者' 예수님께는 위안을

선택받은 자 중의 가장 소수 정예 들에게는 '목표'를 

성경을 통해 묵상하고 있는 사모하는 현재의 사람들에게는 '희망'을 주실

이유로 이렇게 보이신 것이 아닌가 한다.

 
 
4.  베드로가 예수께 여짜와 가로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주께서 만일 원하시면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
 베드로가 왜 이랬을까?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로 놀라서 당황스럽게

자신도 모르게 저리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맞다.

그럴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생각지도 못하던 '천국'이 열리니

어느 누가 당황치 않겠던가?

 

묵상 중 느껴지는 것은 이렇다.

'베드로'는 하나님이신 예수님과 동행하는 3년 동안

'세상의 것'에서 '하나님의 나라'에 가치를 전환해 가던

세계관과 우주관의 변화의 대지각을

그 영혼에 경험하고 있던 차이지만

아직도 그는 세상이 그를 붙들고 놓아주지 않는 것이다.

어제 묵상 중 틀림없이 주님이

베드로를 야단치시면서 '하나님의 나라'와 '세상'을 대비시키지 않으셨던가?

그것을 상징적으로 이리 표현하는 것이다.

베드로는 무의식 상태에서

그의 영혼에서 움직이고 있는 가치관의 변화를

마치 프로젝트를 통해 컴퓨터 내부의 영상을 비쳐 내듯이

' 천국'의 계신 그 분 들의 숙소를

이땅위에 짓자고 하는 것이다.

 즉, 그의 가치는 '하늘나라'와 '세상'의 것으로 혼재 되어 있는 것이며

다행인 것은

천국을 인정하고 영혼에 깊이 받아 들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아직 혼란 스러울 뿐이지..

 

 금식 3일 후의 내 모습.

아직도 흔들린다..


 
5.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구름'

 재작년에 '구름 속에서' 라는 제목으로 묵상을 펼친 일이 있다.

구름은 하얗다.

앞이 잘 보이질 않는다.

그렇지만 편안하다.

솜사탕같다.

 

 금식 동안 힘들었지만

순간 순간 주님의 살아계신 흔적을 느낄 때도 있었고

머리 아프고 심장이 심하게 뛰기도 하고

배도 고프기도 다리가 후들거리기도 하면서

그것이 사단의 장난임을 깨달아 알아가며

기도하자마자 맑아지고 아무렇지 않은 체험도 하기도 하고

기도할 엄두조차 내지도 못하고 잠만 자기도 하고

깨닫기도

흔들리기도 했다.

 3일 마치고 아무런 변화가 없는 듯

여전히 내 속에서 감지되는 '비판과 정죄'의 습관

슥.. 하고 올라오려는 짜증의 흔적들이 느껴지고

오히려 허리가 더 아파지기도 하며

좌절이 오려고도 한다.

그러면서도 무엇인가 든든하기도 하다.

너무 기대하고

확.. 하고 한번만에 없어지길 바랬던

내 바램이

믿음이 부족했던 것인지

아니면 ..헷갈린다.

 

구름 속에 있는 기분이다.

하얀 구름.

이전과는 다른 기도제목을 가지고

'소원'을 비교적 뚜렷이 가지고 들어 갔다.

 '하나님의 가치'과 내 '세상적 가치 ' 속에서

아직도 어느 것을 뚜렷이 붙들고 있지 못한 듯하다.

마치 베드로가 헛소리 하듯

지금 그런 느낌이다.

 

  
6.  제자들이 듣고 엎드리어 심히 두려워하니
  제자들은 기뻐할 일 가지고 심히 두려워 한다.

깨어 있지 못해서 일까?

그것이 한계일까?

 

 솔직히 기도제목을 뚜렷이 가지고 가지 못했던 것은

이런 것이 두려워서 였었다.

간절히 바래서 기도에 집중할 열렬함도 부족했지만

혹시.. 안들어 주시면 그나마 조금씩 커지고 있었던

내 믿음의 뿌리가 흔들리지는 않을까.. 하는..

 이전의 아들 대학 문제.

아들의 입영하고 기도하던 문제.

........

온전히 들어진 것이 없던 것에서

자칫 흔들릴 뻔 했던 경험이 있었다.

내 믿음이 이처럼 의심이 많은 소인배의 믿음임을

확인 받아 버릴까봐 그게 두려운 것이었다.

 
 
7.  예수께서 나아와 저희에게 손을 대시며 가라사대 일어나라 두려워 말라 하신대
 예수께서 '두려워 말라' 하신다.

위안하신다.

 

 다행이다.

'주하인아

 두려워 말라' 하시는 것 같다.

아직도

믿음과 의혹
신앙과 불신앙

하나님 나라와 세상의 것 사이에서

가치관이 온전히 정립되지 못하고 흔들리며

두려워 하고 있는 나에게 말씀하시는 것 같다.

 

 
8.  제자들이 눈을 들고 보매 오직 예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더라
  금식기간을 끝내고

밥을 먹고 배가 뿌듯하고

다시 이전처럼 돌아와보니

별로 달라진 것 없어 보인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 만 같다.


 
9.  저희가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께서 명하여 가라사대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기 전에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 
 이들.

아무리 얘기하고

아무리 보여주고

아무리 기적을 행해도

당신이 말씀하시는 '십자가 부활'과 '천국'에 대한 것을

인식할 만한 능력이 없는

무지랭이 같은 자,

주하인 같은 자들에게

정말로 끊임없이도 설명하시고 말씀하신다.

'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그래도 그들을 선택했고

그들 만을 '높은 곳'으로 데려 갔고

그들만에게 '천국'을 보이시고

그들에게 '십자가'와 '부활'을 끊임없이 권면하고 다짐하신다.

 주님은 그들의 결국을 아신다.

결국 그들은 '성령의 오순절 강림'후 완전히 다른 자로 변할 것을 알고 계신다.

결국 그들로 인하여 2010년 2월에

주하인도 비슷하게 무지랭이 소리를 하고는

어쩌면 지금보다는 조금 더 나은 성장을 하실 것을

알고 계시는 것 같다.

 그렇다면 좌절할 것 아니다.

그냥 기다리면 될 것이다.

  위안이 된다.

 

 어제 금식을 마쳤다.

마지막 날 인 그제 저녁에는 후각이 예민해졌는가?
누워 있던 전기 장판에서 올라오는 열기에 섞인 냄새로 인하여

자꾸 토할 것 만 같고 호흡이 답답하고

심장이 빨라지는 것 같아

일어나 기도를 하려해도 머리가 너무 아파 어찌할 바를 모르겠더니

새벽에 어쩔 수 없이 후들거리는 다리를 들어

옷을 갈아 입고 흔들리려면 걷는 코스로 걸었다.

새벽 한시 넘어 바람부는 한 겨울의 개울 바람은

흔들거리는 다리보다 더 고통이었다.

 그 길은 갈대 무리가 하늘 거리는 개울가 정면으로

구름 같이 하얀 십자가가 멋있게 서 있는 교회가 있어서

묵상하며 걷기에 좋은 코스다.

마음이 가라앉고 편하다.

힘이 없는 것을 빼고는..

겨우 돌아와 깊은 잠을 자고

늦게야 일어났다.

일어나는 데 허리가 아프다.

기도했는데.........

마음이 흔들리려 한다.

기도했는데.........

 역시 난 믿음이 부족한가 보다.

아니..  금식기간 동안 기도보다는

금식의 고통으로 부터 벗어나려

누워 있고 잠만 자던 시간이 많아서 인가 보다.

앞으로 어쩌지?

나름대로는 '흉악의 결박을 푸는 금식'을 어떤 내 성장의 발판으로 삼으려고 했었고

그 결단의 시간을 자연스레이 말씀 인도따라 했는데

이게 무엇인가..하는 부담감이 없지 않다.

 돌아보면 얻은 것이 없지 않다.

세밀한 주님의 흔적을 발견하고

금식을 시작하자 마자 이해키 어려운 육신의 금단증상이 나오고

그처럼 힘들어도 기도하면 

두통 등 고통 이 순식간에 사라지는 것을 보아

사단이 방해하는 것임을 좀더 뚜렷이 믿게 되었다는 점.

 그래도 처음으로 소원을 뚜렷이 하여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다는 점.

이전 금식보다 훨씬 힘들었다는 게

주님이 기뻐하실 금식이 맞다는 것을 알게 된점.

 전적으로 결단한 적이 없는 금식.

그 금식의 시간도 주님이 알아서 인도하시고

말씀에 맞추어 그냥 따라가다 보니 3일 금식하게 되고

정확히 구정에 맞추어 당직서게 하시고

그 시간에 맞추어 큰 두려움없이 임하시게 하신 점...

그것으로 보아 조금은 성숙된 믿음을 가진 것은 아닌가...하는 점등

얻은 것이 없지 않다.

 그래도 흔들리는 것은 사실이다.

 

 그 흔들림.

흔들리게 하는 관점 두가지를 정리 해보면

'하나님 나라의 가치'와 '세상적인 가치'다.

 하나님 나라 가치로 세상의 가치를 전적으로 대치해버리고픈 계기가

금식의 시점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오늘 묵상과

비교적 일치하는 것 같다.

 

 베드로 일행 만을

따로 데리시고

높은 산'에 오르신 예수님.

 그리고 천국의 모습을 보이신 예수님.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 주셨음에도

아직 '땅'의 관점으로만 그 나라를 끌어 내려 이해하려는

베드로의 어리 숙함.

 그 모호한 인식을 암시하는 '구름'

그리고 구름마져 사라지고

다시 땅의 인식체계, 현실로 돌아온 그들.

그러면서도 아직 '십자가'니 '부활'이니 '생명'이니

'예수님의 우리를 위해 돌아가시는 그 돌아가심'이니

전혀 인식하지 못할 그들을

아직도 포기하지 않으시고 또 설명하시는 예수님.

모든게 나와 연결되어 있다.

 금식을 하는 것

금식을 하는 시기 마져 주님이 말씀을 통하여 다 인도하시더니

그 시간 중에 '천국의 모습'을 '세밀한 흔적'으로 계속 보이셨음에도

금식의 증상 만을 이겨내려고 기도 조차 제대로 못하는 내 어리숙함.

그리고는 그 귀한 시간을 죽도록 기도하고 주님을 더 만나야 함에도 불구하고

기도하는 것도 쉬는 것도 아닌 모호한 구름 처럼 지냈던 '주하인'

그리고는 금식 끝낸 것을 무슨 무용담처럼 생각하고 싶어하는 내 肉性.

 그리고 혼란 스러워 하는 내 마음.

모든 것이 닮아 있다.

 

하지만 오늘 묵상에서 난 하나 더 깨달은 게 있다.

'위안'이시다.

주님은 그런 것 조차 다 아신다는 점이시다.

그 분은 미리 아심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데리고 더 높은 산에 올라가시고

보이시고 체험시키신 후 내려오셔서

또 쉬지 않고 가르치신다.

위안이다.

나에게도 그러신다는 것이시다.

이 어리석은 자를 포기하지 않으신다.

그 분은 포기하지 않으시고 사랑하신다.

그 분은 그런 분이시다.

 

금식의 마지막까지 마무리 해주신다.

 

오늘까지 휴식이다.

눈마져 왔다.

구름과 비슷한 색깔이 주위를 온통 하얗게 만들었다.

 

 

 

 

기도

 

주님

귀하신 주님

구름 속에 있는 느낌입니다.

 모호함.

그러면서도 하얀 순결함.

그게 제 마음입니다.

그 마음을 보이시기라도 하듯

집 주위 개울가와  먼 산모두 눈에 쌓여 있습니다.

주님

위안 감사하나이다.

이 어리석고 변함없는 모습이

당혹스러웠었는데

주님 아시고 이리 위로 하십니다.

기다리겠습니다.

아직 변화없지만

지금껏 내 안타까움으로 이루어진 일 없었고

내 몸부림으로 된일 별로 없음을 알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주님의 뜻이시고

모든 것이 주님의 계획하에 있었음을 압니다.

돌아보면 그때 그게 주님의 뜻이었음을 알수 있었습니다.

주님.

주님 앞에 모든 판단과 생각을 내려 놓습니다.

주님 인도하옵소서.

주님께 내 의지와 삶 모두 남겨 놓습니다.

내려놓습니다.

인도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감사감사 하며 기도합니다

아멘

 

 

 

 ----------------------------------------------

 구름 속에서 ( 눅 9:29-36 )

2008-01-31

 

그때

그 시간

변화산 중에

저런 구름이

뜬금없이

쏟아져 내려

몰려들지는 않았을까?

 


 
 
29.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 
31.  영광 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씀할새 
 주님은

새벽까지 홀로 기도 하셨다

때로는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났고

- 형광색으로 투명하게 빛이 나셨을 것이다. 

  눈에 선명히 그려진다 -

때로는

피가 땀에 흐를 정도로

때로는

무아지경에 빠져 기도하셨다.

 그때

기도의 내용은 무엇이었을까?

틀림없이

피가 땀이 되는 기도는

'자신에 대한 기도'이시다.

물론,

그 자신에 대한 기도조차

온 세상을 위한 십자가에 대한 것이지만

어쨋든 겪으실 수 밖에 없던 고난에 대한

개인적 두려움을 기도하신 것은 사실이시다.

 오늘

형광의 기도는

무슨 기도셨을까?

 아마도

남을 위한 깊은 기도

세상에 대한 주님의 뜻을 잊지 않으시기 위한 기도는 아니셨을까?

차분한 모습의 무아의 기도는

주님의 사랑을 퍼부움 받기 위한

관상의 기도셨을 듯 싶다.

 

피와

형광빛

무아의 경지

 

그로 대변되는

주님 예수님의 기도의 깊이를 닮고 싶다.

주님 예수님의 기도의 방향을 닮고 싶다.

이제

소아적 기도에서 벗어나

진심으로

투명한 형광을 발할 정도로

하나님과 이웃을 향한 절대의 기도를 하고 싶다.

주님이 주시는

놀라운 에너지를 받고 싶다.

 

   
34.  이 말 할 즈음에 구름이 와서 저희를 덮는지라 구름 속으로 들어갈 때에 저희가 무서워하더니  
35.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산부인과 의사라서

군대 대신  대위 신분으로 무의촌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근무지였던 무의촌은

강원도 사북인데,

탄광촌으로 아주 유명한 곳이다.

 강원도 산중이라서

아주 고지대의 '재'가 많았는데

그중 태백을 가려면 '싸리재'라고 국내에서 가장 높은 재를 넘어야 만 한다.

이 곳은 1268m 해발-맞나 ? ^^;;- 로 지나다 보면 구름 속을 지날 때가 많다.

 한 겨울에는 내리는 폭설과 더불어 안개보다 짙은 구름 속을 통과하게 될 때는

정말 섬뜩 섬뜩할 때가 있다.

 온통 어두움과 하얀 안개같은 구름으로 덮히면 두렵기 그지 없다.

사람에게 갑자기 앞이 안보이인다는 사실이 얼마나 두려울 것이라는 것이 이해가 간다.

 

 아직 잠이 덜깨어

헛소리를 하고 있는 베드로 일행에게

하늘로 부터 쏟아져 내려오는

구름은

아마도 태백 싸리재의 그 구름보다 훨씬 짙어서

하얀 솜 같은 색으로

온 전신을 다 휘감지 않았을까 싶다.

그 안에서

하얗고 투명하게 바뀌신 예수님은

베드로의 가시권에서 사라져 보이셨을 것이고

어두운 밤

갑자기 하얀 운무에 쌓인 그 베드로는

겁이 덜컥 났을 것이다.

 

 어느 땐가

싸리재에서 폭설로 눈이 뒤덮혀

이곳 저곳에 차들이 도랑에 빠져서

차가 막혀 가지 못하다가

올라가려는 경사는 헛 바퀴 돌 수 밖에 없어

그 진한 안개 속에 라이트를 켜놓고

체인을 감으러

가시 거리가 1미터 갓 넘는

그 구름 속 도로로 나갔다.

바람은 내 몸 - 이 85키로가 넘는 육중한 몸-을 천길 낭떠러지로

밀어내리기 시작했다.

정말 두려웠다.

밖에나가서 쳐다본 

 하얀 색 내 차는

내리는 눈 속에서

구름 속에서

흔적을 숨겨가고 있었다.

그나마  켜놓은 실내등 불 속의

우리 식구들이 보이기에 그 나마 덜 두렵지,

나를 천길 낭떠러지로 밀어내는

그 강풍은 공포 그 자체였다.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뒤 트렁크로 가서 체인을 꺼내어

그 어두운 흰 대기 속에 쭈구려 앉아

체인을 바퀴에 감는 동안

불신자였던 당시의  나는 아내와 애들이 없었다면 

그 두려움 속에서 체인 작업을 마치고 무사히

싸리재를 넘어갈 수가 없었을 것이 틀림없었다.

떨며 차 안에서 앉아 있을 수 밖에...

 얼마나 두렵고 춥던지

나가서 체인을 잡는 순간 부터

지금까지 흘려본 콧물 중에

아직도 그리 길고 큰 콧물이

줄기차게 나와본 적이 없을 정도로 대단했었다. ㅎㅎ

 체인 친 차도 '덜덜덜'

 운전하는 나도'덜덜덜'

구름속의 그 고생은 지금도 기억이 선연하다.

 

베드로가

정신 못차리고 맞은 그 구름은 두려움 그 자체였을 것이다.

나는

흰눈 속에 하얀 차의 실루엣 안에 포근한 아내의 눈빛이 보여지기라도 했지,

저 당시의 온전한 깜깜함과

아주 하얀 구름은 겁이 나기에 틀림이 없었을 것 같다.

 

 그런데

글을 쓰는 동안

그 구름 속이 포근한 느낌이 든다.

아내의 눈빛과 아이들이 나를 믿고 잠든 뒷 자석,

온 세상이 하얗고 까만 상태에서

그 차안 만 따사롭게 날 비춰주는 연상을 하니..

그때는 불신자였다.

하지만 예수님 믿었더라면

아마 떨면서 콧노래라도 했을 것이다.

'나~~아~~아~~가~~~트트트~~은

죄~~죄죄죄~~이 ~~이히히히인~사~~아아아아알리~비~~비비 ~~시~~인~~

그 ~~~으으으 ~~으은혜에에에~~노~오오오~~ㄹ~~라~바바바바바~~♪ '

(혹시 모를 분을 위해 곡명을 말하자면  '나같은 죄인 살리신- 405장' ㅎㅎㅎ )

 

 베드로도 그랬을 것이다.

정신을 차리고 있었더라면

그 구름이

지금의 미세먼지로 오염되어

깊이 들이마시기에

폐속이 아린 것 같은

공해의 안개가 아님을 금새 알았을 것이고

그렇다면

그 구름은 천상에서 내려오는 천국의 구름이고

그것은 깊이 폐부까지 들여 마시면

너무나도 좋은 것일 것이고

눈 앞에 펼쳐지는

온통 하이얌은

두려움이 아니고

포근함임을

아주 금방 알 수가 있었을 것이다.

 주님은 흰 안개 속에 모습을 감추신 것이 아니고

흰색 포근함 속에

그 분의 투명한 존재가 녹아들어

온 천지

마시는 모든 대기 안에 그 분이 계심을

눈으로가 아닌

폐부로

육체가 아닌 영혼으로

느낄 수가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황홀이지

결코 두려움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일상에서

우리는 안그런가?

주님의 계심을

구름 속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다고

현실의 일에 혼란 스러워 하고

낭떠러지로 떨어질 것만 생각하고 있지는 않지 않은가?

 주님은 어디에도 계시다.

보이지 않는 속에 스며 계시다.

그 보이지 않음은 두려움이 아니고

따스함이다.

포근함이다.

기회다 .

그 분은 눈으로 보고

육체로 느끼지 않아도

들이시는 숨에 계시고

내 영혼에 스며 계시다.

 

적용

 

1. 주님의 기도를 닮자

 주님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기도를 한다.

형광색 투명함은 '중보기도'와 '주님의 뜻에 순종코자 하는 결단'의 기도 이고

피땀을 흘리는 기도는 자신의 문제에 최선을 다해 주님께 내려 놓는 기도고

무아지경의 묵상의 기도는 주부적 관상기도이다.

주님과 함께하는 기도이다.

 

2. 구름 속

 시야가 보이지 않는 때가 생겨도

그것은 두려움이 아니다.

주님은 어디에도 계시고

주님이 어디에도 계심을 늘 상기하는 게

지금까지의 나고

그렇다면

그 분은 내 폐속에도 , 눈 속에도, 어디에도 계신다.

난 어디에 있더라도

안전하고 자유롭다.

난 그걸을 믿는다.

깊이 들이키며

난 주님을 묵상한다.

아..

감사하다.

흰 구름 속

포근한 담요 속...

 

3. 성경 여섯 장 읽겠다.

 

4. 전인치유 최선을 다해 주님을 만난다.

아침 부터 목이 아프고 감기 기운이 있다.

소리가 안나온다.

주님에게 맡길 준비가 되었다

몇 년간의 경험이다.

 

5. 기도한다.

주님을 닮은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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