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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바라보는 가버나움(요6:16-31 )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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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바라보는 가버나움(요6:16-31 )

주하인 2008. 11. 17. 13:57

제 6 장 ( Chapter 6, John )

 

 

조숙한 ^^* 꼬마가

무얼 그리 보고 있는가?

 

설마

제 살아갈 인생에 대해

고민하는 것은 아닐 것이고..

ㅎㅎ

 

 

 

 

 

 


16.  저물매 제자들이 바다에 내려가서  
17.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가버나움으로 가는데 이미 어두웠고 예수는 아직 저희에게 오시지 아니하셨더니  18.  큰 바람이 불어 파도가 일어나더라  
19.  제자들이 노를 저어 십여리쯤 가다가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 배에 가까이 오심을 보고 두려워하거늘  
20.  가라사대 내니 두려워 말라 하신대  
21.  이에 기뻐서 배로 영접하니 배는 곧 저희의 가려던 땅에 이르렀더라 
 
   마태 복음에는 수천명의 군중이 3일 굶다가 길 갈 것이 안타까우셔서

기적으로 식사를 마치게 하신 후

제자들 먼저 서둘러서 배타고 가버나움으로 가게 하시고

예수님께서 군중들을 해산 시킨 후

혼자 산으로 올라가 기도하신 후 쫓아가시는 것으로 나온다.

 

 어찌되셨던 간에

제자들은 확실히 갈 곳을 알고 갔다.

그 갈곳은 목표다.

목표는 '가버나움'이다.

 이번 만의 목표다.

다음은 또  예수님이 가르쳐 주실 것을 알고 있다.

고민하고 갈곳 몰라 방황할 일은 최소한 없다.

하지만, 그 곳에도 환란과 풍파는 있고

어두움도 있다.

 그러나,

주님을 믿는 제자들에게는 '길'이 있다.

주님이시다.

어두운 격랑의 물을 뚫고

주님이 오신다.

그리고 그 분이 '나다. .. 두려워할 것 없다.'하고

손내미실 것이다.

 결국은 안전한 포구에 달하게 될 것은 물론이다. 

 

 


 
24.  무리가 거기 예수도 없으시고 제자들도 없음을 보고 곧 배들을 타고 예수를 찾으러 가버나움으로 가서 
26.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세상 사람들도 갈 길은 있다.

같은 가버나움이다.

하지만 그들이 가는 곳은

예수님이 인도하시는 곳이 아니다.

그들의 병을 고치기 위하여 따라가다 보니

우연히도 도달하게 되는 곳이 '가버나움'이다.

 

 제자들과 같은 곳을 가되

다른 이유다.

제자들은 목표가 있되 그들은 이유가 있을 뿐이다.
  

 
29.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30.  저희가 묻되 그러면 우리로 보고 당신을 믿게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 하시는 일이 무엇이니이까 
 

 주님 예수님

그 분 그 자체

그 열정이자 기쁨이자 평안이자 평강이자

사랑 그 자체이신 그 분,

그 분을 믿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일'이란다.

그것이

인생의 최선 최후의 목표다.

 

 

  

 

 

 

 

아름다움을

아름다움으로 볼

눈이 있는가?

아름다움을

꽃의 겉모습으로 만 보는 것 보다는

그 뒤에 계시는

놀라운 주님의 흔적을 볼

영적인 눈은

나에게는 있는가?

과연?

 

 

 

 난 분명한 목표를 가지게 되고 있다.

말은 묘하지만...

 예수님을 믿고 나서 한참 한참 걸린 후 - 제자들이 시간이 걸려서야 가버나움에 가라하면 간 것처럼.. - 에야

조금 덜 흔들리는 목표가 생겨간다.

내 달란트를 가지고

주님이 시키시는 대로 하루하루 인도하심 받아가는 그것이다.

그러다가, 조금은 더 긴 후의 목표를 서서히 가지고 있다.

남들에게

특히 성공하는 자들에게는 아무 것도 아닌

이 인생의 목표는,

나에겐 불가능한 이야기였다.

부정적이었다.

삶 자체가 의욕을 보일 것이 아니었었다.

어려서 부터........

더구나, 커오는 과정의 우리 아버지께서는 '네가 뭘 아느냐...'가 십팔번 이었다.

내 팔다리의 힘이 빠지고 시키는 대로만 하다보니

별로 내 힘대로 해볼 목표가 없었다.

 

 오늘 두 부류의 목표를 보고 있고

각각의 목표 중에서도

단기간의 목표와 종국의 목표를 보고 있다.

 

 두 부류라 함은

제자와 군중이다.

 

제자들은 당연히도 예수님의 인도하심대로 살아가는 목표를 익혀가고 있다.

내일일은 난 모른다.

그냥 하루하루 살 뿐이다. ..가 그들의 목표다.

하지만, 주님이 하라시기에 아무생각 없다.

그렇지만 가버나움에 가라시니

그 곳이 목표가 된다.

단순하고 명료하다.

거기에 다른 끼어들 '사사로움'이 없다.

단, 육신적 이득은 없는 듯 하다.

무엇인가 이루어 보려는 자신의 '자아'를 움직이기 시작하면

하나도 만족스러운 것이 없다.

하지만, 머리는 편하고 영혼은 뿌듯하다.

아직은 그들이 옳게 잡지 못하고는 있지만

그 분 예수님을 따라 다니면 확실한 '자리'가 보장이 될 것이란 막연한 기대가 있다.

가르치심이 흐뭇하다.

가끔은 '배'의 고물이나 이물에 팔베게 하고 누워

다리를 올리고

입에는 갈대 하나 베어 물고 흥얼거리다

하늘에 내려앉는 석양이 비추는

둥실 떠다니는 채색 구름을 보며

만족스러운 깊은 흡기 호흡이나 한번 하다가

입가에 미소를 지우지도 못한채 잠이 들기도 한다.

여유롭다.

인생의 고민이 없다.

 

 반면

군중들의 목표도 '가버나움'이기는 하다.

그들은 확고 부동한 자기 목표가 있다.

육신의 회복

기적의 체험.........

예수라는 선지자가 그리 간다니까 나도 간다...다.

누구보다 빨리 가서 자리 잡아야 하니

경쟁심에 가슴이 타기도 한다.

어쩌면 이들의 '목표'가 훨씬 명쾌하고 가슴 떨리는 흥분이 있는 듯도 하다.

그러다가 예수님의 손길이 닿기라도 하거나

하다 못해 그 분의 옷자락 한줌이라도 스치기라도 하는 날에는

오랜 숙원을 이루어 내는

이룸이 있을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후는......................?

 

 제자들도  가버나움 이후의 목표는 ?

그들 인생 장기 목표는 ?

인생의 의미는?

 

 

11.15  토요일.

 지난 추석.

불신자 어머니 아버지 앞에서 큰 맘 먹고

찬양으로 그 분들을 감동 시켰다.

 강골 아버지는 눈물을 머금으시고

어머니께서 다음날인 '일요일'에 교회에 나가심을 허락하셨다.

조건이 물론 있었다.

11.15에 당신의 친우들 모임에 와서 '형, 동생, 우리 가족 '모두 와서

위문 공연- 찬송가 배제 하라는 신신당부와 함께..ㅎ- 으로 당신 들의 위신을 세워주시길

그리도 바라셨다.

그래서 그랬다.

마침 여동생 시아버님께서 '소천'하셔서 동생부부는 참가하지 못한 가운데지만

휴가를 내 놓고 부리나케 내려가

그래도 만족스럽게 찬양을 불렀다. ㅎㅎ

그 분들은 생전 들어보지 못한 ,

마치 유행가 같은 찬양을 섞어 넣고

최백호의 '낭만에 대하여'를 앵콜곡으로 부르면서 까지

내 달란트를 발휘해 드렸다.

오신 분들 거의 대 부분이 '불교신자'였다.

난,

내 달란트를

주님을 위하여

부모님의 만족하심 - 그토록 버거웠던 그 분들..-을 채워드린다는

목표로

최선을 다해 드렸다.

 그래, 난 짧은 앞,

하루하루 앞의 목표를 이리 이리 잡아 가고 있다.

아내와 나, 시험 바로 끝난 우리 둘째 엉터리 털아들.ㅎㅎ..과 열심히 공연을 하고

올라오는 길에 '장례식장'에 들러

동생네 시아버님 조문을 하고 왔다.

 지방 방송국 보도국장,

장학사를 식구로 둔 가족 답게 '조문객'들이 엄청났다는 얘기가 들린다.

꽃이 끝없다.

 마치고 올라오면서 묘한 마음이 든다.

참 잘사는 것 같은데

명쾌하고 단순하게

그리고 순수하게 살려고

인생의 후반을 주님 안에서 명심하고 명심했었는데

조금은 다른 목표를 가진 식구들의 조문 객들이

화려하고 힘이 있어 보임이

조금은 날 흔들리게 하고 있다.

 

 최근 몇달

너무 너무 바빳다.

열심을 다하려 노력했지만

어느새 난, 게을러 지고 있어서 였던 것만 같다.

주님의 말씀에 할애되는 시간이 줄어들고 줄어들면서

자꾸만 주님이 뒤로 밀리나?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함을 난 느낀다.

 

 풍랑에 갑자기 흔들리는 제자들이

우왕좌왕하는게

마침 내 마음이랑 어찌 그리 비슷하게 느껴지는가?

오늘 아침은 마음 먹고 일찍 일어나 묵상을 진행했다.

너무 똑같다.

 죽겠다고 소리친다.

바로 전에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고

주님이 마중해 , 군중들보다 먼저 탈출하여 배를 타고 즐기는 여유가운데

이리 주님의 살아계심을 까마득히 잊고 있다.

그들은 그 와중에 나타나시는

바다위의 '예수님 '조차

귀신으로 오인하는 영적인 나태함을 보이고 있다.

 

 이것을 보면서

얼마나 더 가야

내 인생이 흔들리지 않는 목표로 잡을 수 있을 까 하는 당혹감이 든다.

 

하지만,

주님은 이어지는 말씀에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믿는 것'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라고 군중들에게 말씀하신다.

 

사는 것.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냥 예수님 그 자체를 깊이 만나고 믿는 것이야 말로

그러다가 주님이 부르시면 가는 게

바로 인생의 목표가 아닌가?

무얼 크게 생각하는 가?

그러다가 삶의 결과물로 주어지는

자식과

재물과

명예나

사랑이나

그들의 화목한 웃음이 혹여 있으면

그게 사는 것이지......................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올바로 '실체적'으로 믿고 있는가?

어제 교회에서 '찬양 인도'를 하다가

불현듯 '실체적 진실'이란 단어가 푹하고 내 입에서 튀어 나왔다.

맞나?

예수님을 막연한 분,

그냥 따라다니가 시키는 대로 쫓아다니는 귀한 분,

내 영적 육적 치료자.

십자가에서 피흘려 돌아가신 사랑이 많으신 분..으로

내 뇌리속에 강제로 집어 넣고

규격화 시키는 것은 아닌가.. 하고...

 

 주님을 실체적으로 만나고

그 분과 동행하며

그 분의 임재감 가운데 늘 사는 것....

그러다가 주님 곁으로 가서 실제로 만나는 것 만이

'인생의 유일한 목적'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주님..

제 인생에 오소서.

제 삶속에 들어오소서.

그리하여 제 삶을 간섭하소서.

굳이 그게

남들처럼 놀라운 선교가 아니어도

모 수녀님 처럼 엄청난 봉사의 열매가 아니어도

주님

부족한 저이지만

부족한 절 끌어안아 주시고

날 인도해 주시는

그 주님.........을 만나길 원합니다.

주여.

뚜렷하지는 않지만

예수님을 온전히 만나 뵐 수 있길 원합니다.

부수적 인생의 건덕지 물이

내 삶의 목표가 되지 않게 하시고

그들의 바라보는

가버나움과는 다른

가버나움을 쳐다볼 수 있길 원합니다.

부디 주여.

그럼에도 간간히 불어오는 밤 바다 풍랑에

흔들리 때는 있지만

그때마다 '내니 두려워 마라'라 하여 주소서.

그러다 보면

정말 주님이 그런 소리 하지 않으셔도

주님을 믿는 믿음 때문에 '두려워 하지 않게 되길 ' 원합니다.

주여.

힘을 주소서.

제가 확실히 이해하지도 못하고 발하고 있는 이러한

글과 기도문이

주님 예수님을 실체적으로 만남으로

제 삶의 그것이 온전히 굳건하게 하게 하소서.

주님 예수님을 믿고 아는 것 만이

인생의 유일한 힘이고

기쁨이고 목표이지

그 이외의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게 하소서.

아울러 바라옵기는

고인이 되신 사돈의 영혼이 옥에서지만

주님을 받아들이게 하소서.

그리하여 구원 얻을수 있으시길 간절히 빕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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