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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손하신 분이 내 왕이시다[마21:1-11]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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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손하신 분이 내 왕이시다[마21:1-11]

주하인 2019. 3. 26. 07:16


 


2.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하면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라 
  안보시고도

이렇게 천리 밖을 다 알 수 있으신 능력의 하나님께서

그 능력을 다 안쓰시고 ( 나 같으면 손오공 구름 타듯 구름에 오색찬란하게 해서 타고 다닐 텐데... 이구..ㅎ)

저리 나귀 '새끼' (겨우 새끼시다.. 그것도...^^;;) 를 데리고 오라고 하신다.

 

 가장 귀한 분이

가장 능력있으신 분이 (온 우주를 말로 만드신....창조주께서 ......)

모든 할 수 있음을 자제하고는

'제자'들에게 가장 쉬운 명령으로

그래도 말씀에 있으신 바 대로 (오늘 말씀, 5절에 나오지 않는가?)

그냥 가장 최소한의 것 만을 취하신다.


그것도

십자가에 달리실

그 우주적 순종을 위한

가장 적은 세리모니시다.

 아..

이 겸손.

이 순종

이.......이..........

무어라 형용하기 어려우신 분이시다.

우리 주 , 예수 께서는 .......




5.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그 분이 그러신다.

'네 왕이 네게 임하신다'


그렇다.

난...

그 분을 왕으로 모시며

매일을 사는

주님의 종, 주하인이다.

그게 .. 내 존재의 사실이다.

나는 주님을 왕으로 모시고

그 분이 매일 내게 임하시는

그래서 주님의 말씀대로

하루 하루 살아가는

주하인.

그게 바로 나다.


그런데

앞에서 보이신 대로

그 분은

나귀를 타실 만큼

'겸손' 하신 분이시다.

윗구절에 늘어 놓은 바를

다시 한번 상기 시키신다.

'겸손하여'


겸손한 분이 내 하나님이시다.

겸손하신 분이 내 주님이시고

겸손하신 분이 내 주 예수시다.

겸손하신 그 분이 내 '왕'이시어

겸손하게 날 이끌어 가길 바라신다.


오늘 내게 주시는 말씀.


넌 홀로가 아니다

왕인 주께서 매일 인도하신다.

겸손하길 바란다.

주하인아..

기대하고 기도하고 기다려라..

매일 매일 눈을 뜨고 왕께서 말씀하시는 대로 살려 노력하거라.

오늘 주시는 말씀이

겸손하라.. 시다.


예..

그러지요.

주님.

주님이 나의 왕이시고

난 매일 같이

주님을 모시며

주님이 말씀하시는 대로 듣고 따르며

주님이 보이시는 모본대로 닮아가는 자 올시다 .


난..

절대로 홀로 놓여진 자 ..

외로울 자가 아님을 다시한번 깨닫습니다.

주님이

내 왕으로 내 곁에서

내게 매일 이렇게 말씀을 주시고

모델링 하시는데..

어찌 제가 그렇겠습니까?

내 주여.

그게 너무나도 감사합니다.


주님이 내 왕이십니다.

겸손하신 주님이 내 왕이십니다.

주여.

홀로 영광 받으소서.

내 찬미 받으소서.

나를 주님 닮게 하소서.

주님을 닮아 겸손한 주하인이 되게 하소서.

내 주 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그 거룩하신 이름 받들어 감사하며 기도합니다.

아멘




.



---------------- 읽어보실 분 만 읽어 보세요^^* ..과거 묵상


1.  2010.03.03 묵상            드러나지 않아도 기뻐하다

어느새

봄은 가까이 왔습니다

 

우리가 노력하지 않아도

봄은

바로 근처에 있었습니다

 

칭찬

받으려 노력하지 않아도

주님은

아시고 계시리라 압니다

 

내 사랑

주님

그 놀라운 분에 대한

나의

순종의 마음을 말입니다

 

주님

당신의 인도하심 따라

더 인내하고

더 기뻐하게 하소서

 

나도 모르는

내 겸손이

당신의 향기를

드러내는 하루가 될 수 있길

간절히 바랍니다

 

 

 

1.  저희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감람산 벳바게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두 제자를 보내시며 
2.  이르시되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너라

  예루살렘성.

제자들의 환상적인 기대에 의하면

멋진 입성이 기대될 바..

 드디어 예수님, 그 위대한 스승께서 입성 준비를 위하여

제자 둘 - 왜 둘인지 잘 모르겠다 .     한분이면 충분할 일을... - 을 보내서

타고 멋지게 들어가실 '말.................' 이 아니고

'나귀..............' 를 끌고 오라 명하신다.

 

 두제자.. 명령을 듣고 가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기왕이면 나귀보다는

 백말을 가져오라 시면 낫지 않으실까?'

'그래도 주님은 무슨 뜻이신가 있겠지..

 설마 ...'

 

 

 나귀와 나귀 새끼.

묶여 있는 나귀와

곁에 놀고 있는 나귀 새끼'

 나귀를 끌고오면 나귀 새끼가 따라 올 것이다.

구약의 '궤'를 지고 오는 암소와 새끼가 생각이 난다.

 분위기가 잘 맞지 않는 나귀.

거기에 묶여 있는 나귀와 그 새끼.

 

 
3.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하시니
  분위기 상

내용의 진행상 잘 맞지 않는 이야기가 또 있다.

 

 얼굴이 들어나지 않는

나귀의 주인.

갑자기 나타난 두 남자로 부터

나귀와 나귀새끼를 강탈 - 강탈당하는 분위기가 맞다 ^^;;- 당하자

그것을 만류하고 제지하려 할 것이고

그러자 두 사람이 '주가 쓰시겠다' 하자

온몸에 힘을 풀고 그냥 보내는...

 

 어떤 일이 그 사내에게 있었을까?

아마도 지난 밤 꿈에 천사나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내일 모시에 네 나귀를 끌고가려는 두 남자......주께서.... 하면  그냥 두말하지 말고....'

 하지 않으셨을까?

그리고 나서는 꿈을 깨고는

참 희한한 꿈이라 생각하고 있던 차

똑같은 일이 벌어지자 그냥 자신도 모르게 전율하면서

따를 수 밖에 없었을까?

 아니면 기도 중에 환상이 보여서 그랬을까?

 어찌 되었던 간에

나귀와 나귀새끼는 그 사람에게는 꽤 값나가는 자산이었을 것을

두말하지 않고 준 것으로 보아

그 분의 믿음내지 순종도 참으로 놀랍다.

 

 보이지 않는 순종자의 순종

보이지 않는 나귀 주인의 믿음이 놀랍다.

누구에게도 그가 누군지 알려지지 않았어도

그는 아마도 주님께 칭찬을 많이 받았을 것이 틀림이 없다.

 

  
5.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또 하나 걸리는 부분이 있다.

주님은 '나귀'를 두고 '나귀 새끼'를 타셨다.

왜 이실까?

겸손.

더 낮아지는 모습을 보이시기 위함이긴 해도

어미를 두고 굳이 새끼를 탄 것은

나귀 새끼에게는 너무 과도한 부하가 걸리는 상태가 아닌가?

 

예루살렘 입성을 앞두고

예수님의 행적은

겸손과 순종이라는 측면에서

교육의 목적도 있으시고

이해가 되지만

걸리는 부분이 위의 논리처럼 없지 않아 있어 보인다.

늘 그렇지만

이런 막히는 부분이 '묵상'의 포인트가 맞는 듯하다.

 

 나타나지 않는 나귀 주인.

그가 나귀를 빌려 줄 때 어떤 마음이었을까?

철저한 기쁨이었을까?

베일에 쌓인 그는 아까워 하기 보다는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는

영적으로 뛰어난 분이셨을까?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

특별히 오늘 날은 서로 자신의 이름을 나타내기 위해

나라를 볼모로 잡고 무한 투쟁하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이고

종교계에서도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갖은 악을 불사하는 세대인데...

 젊은 이들은 이뻐보이기 위해

성형을 마치 유행처럼 하는 세대고

이뻐보이기 위해

'안구 미백'수술까지 유행처럼하는 세대다.

그러한 사람들

자신의 이름이 들어나지 않으면

아무리 고상한 이유를 들이대도

선뜻 나서지 않는

이 자아 중흥의 세대에

드러나지 않는 나귀 주인의 순종을

어찌 감당할 수 있던가?

 

 

 업무가 끝나고

여성회관 내 장애인 복지관의 수영장으로

자유수영을 다닌다.

하루당 2500원이라 부담도 적고

아무 때나 시간이 되는 날 갈 수 있는데

바로 걸어서 20여분 거리라서 편하고 좋다.

10년도 전에 배워둔 수영이라서

이제 서서히 폼이 익혀지려하니

자꾸 경쟁심이 솟아나려 한다.

옆레인에 상급코스에서

치고 나갈 때는 나도 모르게 몸에 힘이 들어가고

자꾸만 잡혔던 폼이 무너짐을 느낀다.

물도 몇번씩 들이키고.ㅎㅎ

그러다,

아차 한다.

나이 51.

젊은이들과 비교하여 '호승심'내지 '경쟁심'을 발하는 자체가

참으로 우스운 일인데도

내 마음은 지기 싫어해서

나도 모르게 팔다리에 힘이 들어가다 보면

폼은 여지없이 무너지고 지치기 쉽상이다.

누가 옆에서 '잘한다' , '폼좋다' 하면

나도 모르게 마음이 부풀고 ..

이 바보 같은 자아의 드러남을 느끼며

내가 바로 영적 장애인임을 깨닫고는

씁슬한 웃음을 짓는 경우가 한 두번이 아니다.

그래서 물 속에서 자꾸만

예수님을 그려보려 노력한다.

손을 움직여 가며 레인 바닥 앞에

어디에나 계신 예수님을 상상하며 집중하면

그나마 마음이 차분해지고

그러한 헛된 경쟁심이나 비교 질투에서

조금은 차분하게 된다.

그러한 나.

벌써 살만큼 살 나이인 나.

육신에서 젊음이란 빠져나간 나이의 나도

아직도 그들 젊은이들을 이겨내려는 게

스스로 생각해도 얼마나 가소로운지..

그러함에도 정신을 놓고 있으면

어느새 속상한 나, 부족한 나를 발견한다.

 

 나귀 주인.

손해를 보면서도

이름하나드러나지 않고

성별이 누구인지도 알려지지 않은 그는

순종의 참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아마도

그 분은 그러하신 분이시기에

주님은 그러한 그를 더욱 귀히 생각하고

천국에서 그의 상급 높이시려

이름 드러내주지 않으신 듯 싶다.

 

 나귀.

새끼가 예수님을 업었다.

새끼는 새끼대로 영광이지만

힘이 적잖이 들었을 것이고

어미 ,

아무리 미물이지만

어미는 어미로서 가슴이 아팠을 것이다.

그러나, 주님 예수님을 업었다.

그들은 영광이고

아마도 알지 모르는 놀라운 힘이

새끼의 팔다리에 넘쳤을 것이고

그러한 위용을 보는 어미의 눈에는

이해할 수 없는 기쁨이 있을 것이다.

 

겸손.

순종.

드러나지 않음.

그러한 그들을 더 기뻐하시는 예수님.

 

아마도 이게 주님이 오늘 나에게 주시려는 메시지 가 아닐까 싶다.

 

 

기도

 

주님

감사합니다.

순종과 겸손

주님 뜻대로 받아 들이길 원합니다.

그리고 그보다 더.

나타나지 않는 자의 외로움을

주님 예수님이 기뻐하시는 것으로

대신 채워

더욱 성숙한 하루가 되길 소원합니다.

그리 하게 하소서.

드러나지 않아도 기뻐할 수 있도록

깨어 있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2. 2010.03.03 추가 묵상    당나귀 아들 들

 

그들은

나귀가 아니다

 

더더구나

그들은

나귀 새끼는 아니다

 

그들은

아직

주님을 업지 않은

어린 영혼일 뿐이었다

 

그들은

주님을 모시면

백마가 되고

기사가 될

주님의 재목들이다

 

그렇다

주님 만이

답이시다

 

그렇다

주님을 모셔들이고

주님의 임재를 사모함 만이

우리가 해야할

유일한 삶의 태도이다

 

그들은

사랑하는

내 아들들이다

 

그들은

주님이 허락하신

둘도 없이 귀한

가족이다

 

 

 

 오늘은 바빳습니다.

바쁜 반면 마음은 게을렀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말씀에

깊이 고착하지 못했습니다.

문제는

그럼에도 별 마음의 부담이 없다는 게 문제입니다.

난,

주님의 말씀을

죽도록 붙들기를

간절히 바랬거든요.

그리고 그러기를

나름

서언했었습니다..

아.

다짐했었습니다.

그럼에도

이런 어리석음이

이런 게으름이

날 사로잡기 시작한 것입니다.

굴곡이 없는 자

오르막과 내리막이 없는 자

파동이 없는 세상이 어디 있겠느냐 마는

그럼에도 말씀 앞에 섬은

달라야 한다는 걸

알고 있는 내가 그런게

난  당혹스럽습니다.

 그렇습니다.

그것마져 내려놓고

주님이 회개시켜 주시면 따르고

다시 일어서면 되는 원리는 알지만

그럼에도

발전은 계속되어야 한다는 것도 압니다.

쉬는 것은 죽는 것입니다.

넘어지면 일어날 수 있지만

게을러 지는 것은 어쩌면

일어나기 어려운 위험일 수 있습니다.

 

게으르게 겨우 마친 묵상글을

두서없이 정리하고

기도 글 올리고

얼른 '수영장'으로 향했습니다.

 열심히 폼을 익히고

쉬지 않고

자유영, 평영, 접영을 마치고 나니

온몸의 근육이 느슨해지고 나른해짐을 느낍니다.

오늘이 수요일.

수요예배 있는 지 알지만

그 마져도 부담이 적습니다.

게으른 것 맞습니다.

게으른 영혼은 여지없이 낮에 고백한

비교의 마음

평가의 마음

늙은 나의 육신의 능력이 떨어짐의 속상함......

다양한 어리석음이 감지 되려 합니다.

어찌되었든

천천히 마치고 나오니

기분좋은 육체의 나른함이 몰려옵니다.

늘어져 가는 근육에 소롯이 힘이 올라오는게

마침 봄 나무 가지에 물오르는 느낌같습니다.

 육신이 편하니 잠이 오려 합니다.

기도원으로 가야겠다는 마음에

걱정이 앞서게 됩니다.

가서 졸면 어쩌지?

오늘만 잘까..

 

 그러나 올라갔습니다.

올라가는 길은

역시나

날 기다렸다는 듯이

내 기분을 어루 만집니다.

마침 올라가니 예배가 끝나고

사람들이 몰려 나옵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기도회가 시작이 될 시간입니다.

집중이 안될 것을 걱정했던것과는 달리

내내 난 기도에 푹빠졌습니다.

참으로 다양하게 기도했습니다.

'찬감자 중간'

언젠가 목사님 설교 중에

찬양 찬미

감사

자백

중보

간구...순으로 하라던 대로

그리했습니다.

간구는 말씀구절에 맞추어 했습니다.

아닙니다.

그대로 되었습니다.

주님의 성령이 이끄심을 난 절절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전혀 피곤치 않았습니다.

아니

잊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얼마나 내 생각을 넘어서시는 지요.

주님은 나의 기도와

나의 예배를 기뻐 받으십니다.

 단 한번도,

그러고 보니 정말이네요....

단 한번도

나는 내가 피곤했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못했었습니다.

그렇다고 열렬히 기적적인 체험을 했거나

둥둥 떠다니는 엑스타시는 없었습니다.

그냥 줄줄히 기도가 되었습니다.

 

오늘 말씀을 기억나게 하셨습니다.

이해가 가지 않던 부분.

나귀가 나귀새끼를 바라보면서

느꼈을 모성의 충격을 불문하고

예수님이

겨우 젖떼었을 그 나귀새끼를 타신 일 .. 말입니다.

 그것은 내 '기우'였었습니다.

주님은 주님의 영광으로 새끼를 북돋아 주셨습니다.

새끼는 처음이지만

생전 처음 느끼는 힘이

연약한 팔다리와 힘없는 어린 관절에 모여짐을

느꼈습니다.

아마도 그 나귀새끼가 느꼈을 感은 은혜가 충만할 때,

아.. 오늘 내가 전혀 피곤치 않은 

그러면서 내가 피곤치 않은게 이상하다는 사실을 인지하지도 못하고

그냥 은혜 받지 않은 것처럼 은혜가 넘치는

이러한 현상이

이 미물 나귀새끼의 팔다리에 오르지 안 했을까요?

 어쩌면 나귀새끼의 주위로 하나님의 오라(aura)가

휘황히도 뒤덮었을 지도 모릅니다.

 그 모습을 보는 어미 나귀는

본능적 모성의 걱정을 내려 놓고

눈을 지긋이 뜨고는

터덜터덜 예수님 태운 새끼의 뒤를 따라갔을지도 모릅니다.

 전혀 영적이지 않은 사람들의 눈으로 보면

어쩌면 그 모습은

우리의 어린 시절 국민학교 도덕책에 나오는

아버지와 아들과 당나귀의 모습처럼

어이없이 보였을 지도 모릅니다.

 이것은 어쩌면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고

세세한 기적

세밀한 주님의 흔적

그 안의 평강 속에서

주님께 모든 것을 내려 놓고 살아가는 자들이

세상사람들의 눈으로 보면 어리석어 보이는 것과

비슷할 지도 모릅니다.

 어렸을 적부터 아이들을 위해 전력투구하는

세상의 교육법으로 보면

시험 전날 주일에도 '기도'하고 '예배'드리러

교회에 나오게 하는

신실한 기독교인 가정의 모습을 보며

이상하게 보는 것과 어찌보면 다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이런 식의 시선 말이지요 ..

 

 그러다가 갑자기

난,

나귀 새끼가

내 자식들 같다는 느낌이 '팍~'하고 들었습니다.

아직도 어리석어 보이는 그들.

발길질 하는 게

어리석은 나귀같이 보이는 그들.

삶의 방편이 세상의 경쟁 속에 비교하면

어이없어 보이는 저들.

 난, 삶이라는 끈에 묶여

아직도 깨닫지 못하는 무지의 끈에 묶여 있는

나귀고

그들은 아직도 날 독립하지 못하는

어린 나귀 새끼..

 그러나,

주님이 부르시어

주님, 그 거대하신 분이 타겠다하면

내 눈에 그것은 경약을 금할 만큼 충격일 수도 있겠다는...

어쩌면 그런 마음으로

아이들에 대하여 깊이 기도하지 못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던가

하는 깨달음이 왔습니다.

 그러다가

그 부러질 것 같이 약하고 가녀린 영혼의 그들 등에

주님이 타시어도

그들은 거뜬히 주님을 태울수도 있겠다..는...

주님이 주시는 힘이지

결코 내 육신의 유전의 힘과

세월의 힘이 아님을 깨달았습니다.

 

기뻣습니다.

이제 조금 풀린 것 같습니다.

지난 금식 후 아무것도 변화 없을 것만 같았던

내 영혼이 알게 모르게 조금은 깨달음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믿음.

늘,.의혹이 많아서 잘 믿지 못했던 자.

 수술 후 회복이 더디던 분을 놓고

마음이 불편했었다.

기도로 맡긴지 며칠.

아침에 만난 신경외과 닥터가 의외의 이야기를 한다.

'많이 좋아졌어요'

아니 그 며칠 전 만 해도 더 나빠졌다 하지 않던가?

할렐루야.

난 믿음의 기도를 했기에 이루어졌음을

직관적으로 알았다.

 

나귀새끼 아들 들.

그것은 내 눈이었다.

아직도 혼자 서지 못할 것이지 않을까

아직도 어리석다 생각하는

내 의심어린 눈이고

내 부정적인 눈이었다.

 주님이 하시면

주님을 업으면

그들은 '하나님의 백마'인 것을..

왜 늘 나는

내 경험의 틀 속에서

그 어두운 경험의 폭이 얼마나 된다고

그 안에서만 모든 것을 제한하려 하던가?

 

주님이 타시면

주님을 모시면

그들은

그들이 아니다.

그들은

주님의 그들이다.

그들은

나귀가 아니다.

그들은

나귀의 새끼에 불과하지 않았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마다.

그들은

하나님의 기사다.

 죽도록

주님을 놓지 않으면....................

죽을 때까지

주님 말씀을 놓치지 않는 다면...

 

 

 


3. 2014.03.19 묵상   자연스러움 & 자유

 춥지요

높으니 어지럽지요

가진 것 없으니 슬프지요

아무도 없으니 서럽지요

 

나귀새끼 타신 예수님

그분의 초췌함 만을 보면

제 일상의 현상과

어찌 그리 닮았는지요

 

하지만

높으니 시원하고

가진 것 없으니 맑고

아무도 없으니 걸릴 것 없고

하늘을 배경으로하니

주여

아름답기 까지 하네요

 

주 안에서 바라본 나는

어떤 것도 자연스럽고

어느 것도 아름답습니다

 

그렇습니다

자유롭습니다

그게

자유가 맞는 듯 합니다

 

간구하옵기는

매일 그렇고

매시 그렇고

늘 그렇길 원하오니

 주여

저를

성령으로 강하게 붙드소서

 

 

 

1 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감람 산 벳바게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두 제자를 보내시며 
 예수님도 제자들 중에서도 '편애'하는 선택받은 '소수'가 있으시다.

 

2 이르시되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라
 그런데 그들에게 원하시는 것은

큰 것이 아니다.

의무를 지워 주시는 것도 '큰 '것이 아니시고

(큰 의무는 큰 성령의 도우심이 있으시지만....)

예수님 자신이 받으시는 것도

'큰 것' 이 아니시다.

나귀 새끼시다.

 

3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하시니 
 그 적으신 원하심.

그 소박하고 겸손하심.

그 마져 '즉시' 순종 하지 못함은

우리에게 문제가 있다.

하나님 나라를 너무 우리의 의식으로 왜곡시켜 기대하거나

주님의 말씀을 너무 큰 다른 기대를 가지고 봄은

아무 볼것없는

인간들의 인식의 오류일 뿐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방식대로 임하시고 원하신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뜻에 따르셔

하나님의 방식대로 임하시는 나라이시며

거기에는 세상의 큰 부요도 상관없고

수도자나 과도한 청빈 주의자의 기대도맞지 않으신다.

 

 

6 제자들이 가서 예수의 명하신대로 하여 
 우리.

특별히 '내'가 해야 할 일은

모든 내 나름의 기대와 예측과

가지고 있는 기대치를 내려 놓고

그리고 또 하나,

자신의 특질, 특성, 성격이라 안된다 포기하지 말고

마음을 깍아 내리는 각고의 노력이 필요하더라도

예수님의 명하신 대로

( 그 명하심은 성경의 말씀 가운데 임하시는 성령의 운행으로 받아 진다.

 레마로..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 )

그냥 흐르듯 받아 들이는 것...

그냥 순종하는 것....

그것이 필요하다.

 

 

7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으매 예수께서 그 위에 타시니
보라 .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나귀 새끼를 타시고 가셨다.

안타셔도 무방하시지만

 

8 무리의 대다수는 그들의 겉옷을 길에 펴고 다른 이들은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
세상은 그들이 메시아라 원하시는 분께

최선을 다한 모습을 보이고 싶어한다.

겉옷을 펴고 나뭇가지를 잘라서라도 그들이 가진 방법으로 존경을 표하길 원했다.

그것을 더 멋진 황금마차로 하지는 아니하시더라도

새끼 나귀로 그들의 바램에 맞추어 주셨다는 것이다 .

 

 

9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 높여 이르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보라.

호산나..호산나..

온 예루살렘이 떠나가듯 호들갑을 떠는 것을

그 분은 그냥 받으셨다.

 

그렇다.

예수님은 '소박하고 가장 검소하고 겸손'한 모습을 띄었지만

나귀를 타심으로 그들을 존중하셧고

그들의 '호산나'하고 반기는 메시야 기대하는 축제의 마음에 거부하지도 않으셨다.

 

 또한 세상은 예수님이 비록 이해할 수 없는 낮은 모습이어도

그 분을 '호산나' 호산나 예수로 받아 열광하기에

아무 지장이 없었다.

 

그렇다.

하나님은 내게 '큰 '것을 원하지도 않으시고

점점 더 겸손하고 낮아지기를 원하시지만

세상의 것도

걱정하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방법대로 받을 영광 받을 것임을 보여주신다.

 

그렇다.

하나님은 '자연스러움'이시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닮길 원하신다.

하나님의 특별한 소수들에게는 특히 그러신다.

그래도 그들에게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영광의 날들은 있을 것이다.

 

 

자꾸만 세상의 신문을 들여다보고 주위를 바라보면

노후에대한 걱정들이 산더미처럼 밀려옴을 본다.

준비...

의사지만 해야할 일들이 아직도 산더미처럼 남아

자식들을 여의고

내 지금 , 아주 최소한의 것으로 지금도 살아가지만..(술도 안먹고,차도 없고, 골프도 중단하고...ㅎ..)

준비할 것을 준비하려면

아마도 최소한 10년은 더 지금처럼 열심히 살아야 할 것만 같다.

그럼에도 내 육신은 버걱거리기 시작한다.

나름 그리 생각지도 않았지만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시간 안에서

아주아주 자연스럽게 수영도, 자전거도 타게되어

과식과 일정치 않은 수면을 취함에도 (산부인과 의사의 특질상 굳어버린... 거기에 예술적인 감성이 있어서 밤을 좋아하는..ㅎ ) 나름 잘 갖추어진 체력을 허락받았음에도

이전보다 훨씬 피곤함을 느낀다.

회복도 잘되긴 하지만..

거기에 의업환경 마져 최근의 의사파업을 유발할 정도의

극단 상황까지 이르르며

오래전 부터 힘들어 오던 남자 산부인과 의사들의 입지들을 생각하면

10년의 변화없는 유지.......????........

그리 기대하기 힘들 수도 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지내온 예수님과의 동행기간을 보면

내가 예상하지 못했던 부분들을 이끌어오셔서

때로는 활짝, 때로는 시원하게 때로는 그대로, 때로는 힘들게......도

지금까지 이 자리에서 굳건히 잇게하심을 보면서

앞으로도 그럴 수 있음을 믿게 된다.

 그러면서 오늘 말씀에

예수님이 보이시는 모습은

내가 바라는 '호산나의 탄성과 축제와 멋진........' 의 성대함 속에서도

진실을 보는 자들의 눈에만 보이는

'나귀새끼 타신 예수님의 성결함, 청빈함'이 그것이시다.

 

그렇다.

어쩌면 내 삶은 '나귀새끼 ' 타듯 점차로 낮아지고 약해지고 가난해질 수 있다.

하지만 그것과 상관없이 세상은 나를 보면서

대단하다 멋지다.. 할 수 있다.

그러할 때 내가 해야 할 것은

이 이해할 수없는 두 극단의 괴리에 당황해 할 이유도 없고

세상의 호산나에 얼굴 벌겋게 붉히며 가슴 뛰며 같이 흥분할 이유도 없을 것이고

없는 자신의 모습에 그리 당혹해 할 일도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연스러움이시다.

그러면서도 그 안에서 자유시다.

그분은 소유를 낮추심으로 '청빈함'의 자유를 누리셨고

타인의 자신에 대한 기대에 대하여 자르고 가르치시는 대신

그들의 호산나 외침, 메시야 기대 축제의 감성에 부응하셔서

그들을 잠시나마 이 세상에서 희망을 가지게 하시는

온전한 '배려'의 마음으로 대하셨다.

그것.

어느하나 막힘이 없이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사이에서 자연스레이 흐르심이시다.

그것이 자유다.

비록 '곧 당신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운명'이심을 절대로 '아시는' 분이심에도 그러하셨다.

그것은 인간으로 가능치 않은 심성이시다.

난.. 그분의 이러한 이율배반적, 도저히 양립하실 수 없는 감성이

그 분 안에서 공존하시면서도

그 들이 내 생각, 일반적인 인간의 감성으로 가능치 않은

절대의 흐름, 막히지 않고 물흐르듯 흐르심을 보면서

그것만 가지고도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미루어 짐작하는 계기가 된다 .

 

나.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오늘 모습을 보이시며

당신의 그것을 사모하고 닮으라 하시는 것 같으니 ( 더 바라기는 ' 닮으라시니.. ' 라고 표현하는 내가 되길 원한다 ) 그것을 레마로 받아

오늘 그리 될 수있길 원한다.

 

갈등 ,

세상과 세상

세상과 하나님 나라.

나와 타인.........속에서의 가치의 충돌.

비교적 하나님 나라 쪽으로 더 커진 비중이라 느끼지만 ^^**

아직도 내 안에 상존하고 있는 양 극의 가치들의 충돌 속에서

오늘은 더

하나님의 원리

'예수님의 자연스러운 자유'를 닮길 간절히 기대하고 기도해 본다.

 

 

 하나님.

주님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의 모든 겪으신 갈등을 제가 질 십자가로 달게 받기로 결심하면서도

상황에 부딪치면 여지없이 아니라 몸부림치며

십자가를 발로 차서 멀리 떨구는

그런 연약함, 악함이 제 안에 아직도 상존합니다.

주여.

그런 나를 보시며 오늘 아침..

이 양극의 대칭에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

하나님이 십자가를 지시라 명령하심으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면서 보이시는

그 모습을 저에게 보이십니다.

아..

감탄입니다.

어찌 예수님은 그 최저로 낮아지시는 나귀새끼 타심과

호산나의 그 열기, 그 땅에 깔아대는 겉옷의 과도한 충성을

아무 얼굴 변화없이 받아내시는 지요..

그들의 심성이 곧 십자가에 예수께서 달리시면

180도 표변해서 '죽이라' 손짓하고 달려들 아귀같은 모습들임을

하나님이신 예수께서 다 아실 것이시면서도

그들의 그 양극의 죄들을 다 아무렇지 않게 받아내실 수 있으셨던지요.

 

전 오직 그것 만 가지고도

하나님의 뜻 때문에 그러실 수 밖에 없는 예수님

하나님이시기에 무조건 사랑이실 수 밖에 없으신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주여.

'제가 그랬습니다.

지난 밤.. 조그만 말 실수에도 자르르 반응을 하며

욱하는 마음이 올라왔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가지고 마음 흔들리고 있습니다.

제 어이없음을 .. 타인의 어이없음을

제 마음은 쥐어 뜯으려하고

저 스스로를 핍박하려 하고 있음을 또잠시 느꼈습니다.

그렇지만, 오늘 하나님은 말씀을 통하여

두 양극에서 자연스럽게 흐르시는 예수님을 대비시키시며

그 자유가

오직 예수님의 철저한 하나님이신 품성과

절대의 하나님을 믿으신 믿음과

그 분의 천국의 품성의 향기 탓임을

가만히 있어도 느끼게 해주시며

그 모든 것이

제게 곧 허락될 감성들,

너무도선한 감성,

이땅에서 예수님의 향기를 대신 뿜어낼 제자신의 운명 ^^* 임을

제가 오늘 레마로 깨닫고 받습니다.

주여.

제게 힘을 주시어서

주신 말씀 붙들고 살게하시고

제 죄 , 주님 닮지 못한 죄

그것을 선택한 죄를 용서하소서.

내 주 예수

모든 가장 본받아야할 것의 가장 근본 적인 것을 가르치시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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