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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쌍한 것 불쌍히 여겨야 불쌍히 여김 받는다[마20:17-34] 본문

신약 QT

불쌍한 것 불쌍히 여겨야 불쌍히 여김 받는다[마20:17-34]

주하인 2019. 3. 25. 07:27

 

 

22.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그들이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정말..

내가 구하고 몸부림 치는 것.

오늘 내가 눈뜨고 고민하고 기도하려 하는 대상.

그것이

주님이 원하심이 분명 맞는가?


 사순절.

주께서 십자가 달리시면서 까지

내게 주시려는 것.

내게 바라시는 것...에 맞게

내가 주께

진정으로 바라고 있던가?

 
 


30.맹인 두 사람이 길 가에 앉았다가 예수께서 지나가신다 함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니 
 

 아.. 그전에

난.. 기도 제대로 하던가?

이들처럼..

비록 세상 것이지만

주께

절절히

'불쌍히 여기실 것'을 바라면서

매달려는 보았던가?

 



34.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그들의 눈을 만지시니 곧 보게 되어 그들이 예수를 따르니라 
  그게 비록

십자가에 곧 달리실 예수.. 

그 분의 그러하시는 이유인

영적성화, 하나님 앞에 올바로 섬.........의 진정한 방향에는 합당치 않아

비록

그 분의 그 가쁜 가슴에 더 부담을 드리게는 되겠지만 (죄송하다 ^^;;)

이들은 알지 못하기에

아니.. 그들의 삶을 너무 절박히 만들기에

예수께서는

그 어려움을 넘어서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사' 눈을 만져 주셨다.. 는 이야기다.


 그렇다.

내가 오늘 하루 살아갈 방향이다.

살아가는 마음가짐 말이다 .


 나..

절절히 기도하는 자 인가 돌아보아야 한다.

그리고 그 방향성이다.

내 가슴에 맺힌 것.

아직 풀리지 않아 절절한 것이 있다면

더 '불쌍히 여기시라'고 매달려도 된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불쌍히 여기심.. 그래서 날 위해 그리하셔서 십자가에 달리셨듯

내 마음도 그리 방향성을 맞추게 되어야 한다는 게

진정 중요한 일이다 .


전자의 기도는 ' 덜 성장'한 자..

아니.. 어쩌면 더욱 절박한 것이 있으면 그리 기도해도 되지만

후자의 기도로

우리의 방향성을 바꾸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생에

이 즉물적인 세상에 살면서

어찌.. 그럴 수 있을까?


그럴 수 있음을

알아 차릴 수 있는 깨달음 주시고

잊지 않고 유지할 수 있는 깨어 있음을 주시며

불쌍히 여길 '긍휼함' 허락하시길

간절히 비는 하루가 되어야 겠다.



주님.

놀라우신 내 하나님.

불쌍히 여기시사 저를 이리 구원하시었는데

그리 하시기 위하여 그 모진 수모와 십자가 고통을 감내 하셨음에도

주님.. .

이 미련하고 악한 자..

주님원하시는 바대로 용서하고 불쌍히 여기는 삶을 살지 못했습니다.

아니.. .

그보다 더 미련한 것은

오히려 '나'만 불쌍히 여겨달라고 떼쓰듯 하는 기도였습니다.


주여.

이제... 깨달았습니다.

제가 제 속의 문제로 인하여

그 문제를 핑계로

주님의 말씀, 주님의 내게 원하심

주님이 나를 그토록 가게 하길 바라시는 방향과는 반대로

내 마음의 움직임이

주님의 말씀, 주님의 원하심을 우선하는

그런 패악을 저질러 왔었습니다.

주여.

이제 깨닫게 하셨사오니

무슨 일이 있어도 잊지 않게 하시사

주님의 원리를 앞서는

그 어떤 유혹의 생각도 하지 못하게 하시어

주여..

오직 주님의 원리인

불쌍히 여기게 하시사

불쌍히 여기게 되는

그런 긍휼이 넘치는 자 되게 하소서.

내 주여.


 사순절.

이 귀하고 감사한 시간에

특별히 제 잘못되었던 논리의 오류..

주님을 앞서

제 상처와 그로 비롯되었던 즉각적 반응에 숨어서 반응케 했던

그 숨겨진 죄를 드러내시사

불쌍히 여길 자

주님의 말씀이 있으시니

먼저 불쌍히 여길

당연하지만 너무도 오래 묻혀있던

품성을 붙들어 주소서.

잡아 주소서.

긍휼하게 여기게 하소서.

주님의 말씀이 있으시니

어떤 이유든 그리하소서.


주여.

그러한 다음.. .

저..

그러한 미련함을  불쌍히 여기시사

제게도 힘을 주소서.

능력을 주소서.

주님 뜻에 맡는 기도가

바로 그것임을 인식하고

더 기도하고 더 열렬히 기도하는 자 되게 하소서.

내 주여.

모든게 주님의 말씀으로 부터 시작하고

주님 예수 십자가로 가능하며

성령님의 은혜로 이어지게 하사

하나님의 긍휼하심에 들어가게 하소서.

내 주여.

믿습니다.

길게 늘어썼지만

그 안에 있는

제 간절함을 보시사

바르다며

반드시

이루어 주소서

불쌍히 여길 자..

불쌍히 여길 나를

불쌍히 여길 수 있게 하시고

불쌍히 여겨주소서.

내 주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받들어 감사하며 기도합니다.

아멘




-----------------  2010.03.07        어느 길위에 서 있는가  


 

어디로 가고 있는가

어느 길목에 서 있는가

 

내 가는 길에

주님

같이 하시던가

  

그 길 비록

추울지 모르고

그길 비록

좁고  외로울 지 모르지만

주님 예수님께서 

내 손 잡아 주시면 

내 영혼에

개나리 피는 것을

볼 수 있으며

따스한

봄이 온 것을

느낄 수 있게 되리라 

 

 


17.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 하실 때에 열 두 제자를 따로 데리시고 길에서 이르시되
   예수님께서

선택된 소수

열두제자들을 데리고 가시다가

십자가 사건,

그 고난의 길이자

영광의 길이며

좁은 길인

천국을 향한 지름길에 대하여 말씀하시길 원하시며

불현듯 가시던 발걸음을 멈추시고

'길에서' 말씀하시는 데  
  
20.  그 때에 세베대의 아들의 어미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니 
 제자들의 어머니가 따라오셨던가?

치맛바람을 일으키시며

세상적 이야기를 하신다. 

예수님과 함께  서 있는

그 '천국의 길에서'

제자들과 모친은

'사람의 길'을 이야기 한다.


 
24.  열 제자가 듣고 그 두 형제에 대하여 분히 여기거늘 

26.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주님의 길은

고난의 길이고 좁은 길인 십자가의 길이나

천국을 향하는 길이지만

이들
사람의 길은 

육신적이고

물질적 세상적 성공을 향한 길이며

편하고 넓은 길이지만

비교

질투

분노......지옥의 정서가 끼어들 여지가 다분하다.

이게  

세상의 길이다.

 

 난 누구던가?

선택받은 소수가 맞던가?

어느 길에 서 있던가?

 

그나마 다행이던 것은

그들, 그 열두제자조차

아직은 저런 흔들림이 있어서

그보다 훨씬 큰 흔들림이 있는 난

조금은 위안이 된다는 사실이다. ^^;; 

 

    
30.  소경 둘이 길 가에 앉았다가 예수께서 지나가신다 함을 듣고 소리질러 가로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니
  소경.

난 눈 뜨고 있지만 진실을 잘 보는 자 맞던가?

그들은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소리를 듣고 있다.

보지는 못하지만 듣고는 있는가?

무엇에 대하여 듣는가?

세상을 듣던가?

하나님의 세미한 흔적을 들을 수는 있던가?

 

 
31.  무리가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더욱 소리질러 가로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지라

 33.  가라사대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 가로되 주여 우리 눈 뜨기를 원하나이다 
 34.  예수께서 민망히 여기사 저희 눈을 만지시니 곧 보게 되어 저희가 예수를 좇으니라
'불쌍히 여기소서'

'불쌍히 여기소서'

 그들은 자신이 불쌍한 존재임을 잘 알고 있다.

그들은 자신이 보지 못하는 자임을 확실히 알고 있다.

그리고는 자신이 눈을 뜨기를 원함을 정확히 알고 있다.

그리고 주님 예수님 께서 들어 주실 것임을 확실히 알고 있다.

전적으로 매달린다.

그럼직한 분들,

권위와 대단한 위세가 있을 듯한 열두제자들의 막음에도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주님 예수님께서 '다윗의 자손'이 아니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몰랐을지 모를 무식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들이 아는 최대한의 열정으로 경의를 표했다.

더욱 소리 질렀다.

 그들은 '길 가'에서  예수님을 만났다

 그리고는 '영적이지 않은' 소원을 빌었다.

 

천국가는 길에서

세상적인 길의 이야기를 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그것은 그가 '절실'한 소경이고

그것을 스스로 알고

예수님이 그것을 아실 것을 확신하기에 가능한 이야기다.

반면 열두제자는

성장한 소수의 제자들임에도

세상적인 것을

예수님과의 길에서

다투었기에

그들의 모습은 추악히 보이는 것이다.

 

오늘 나는

어떤 길 위에 서 있던가?

예수님과 같이 서 있는 것은 맞던가?

내 원함은 무엇이던가?

난 소경은 아니던가?

소경임을 알고는 있는가?

예수님을 처절히 원하고

그 분이 기적을 베푸실 분임을 알고는 있는가?
난 선택받은 소수자임을 명심하고는 있는가?

내 바램은 무엇이 되어야 할 것인가?

주님과의 길에서...

 

 
 
32.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저희를 불러
 주님은

머물러 서셨다.

그리고는 소경들을 불렀다.

 

주여.

저도 그리하소서.

 

 난 어떤  길위에 서 있던가?

난 누구던가?

선택받은 소수가 맞던가?

눈을 제대로 뜨고 있는자던가?

무엇을 원하는가?

주님이 날 긍휼히 여기실 것을 확신하고는 있는가?
영적인 삶은 사는가?

너무 물질을 제한하고만 있지는 않던가?

주님 안에서 내가 누구인지 확실히 알고

내가 무엇을 바라는지

그것이 이루어질 지는 확실히 알던가?

내 안의 부정적인 , 지옥의 감정은 아직도 날 괴롭히지는 않는가?
난 주님과 대화하고 있는 자던가?

 ......

 

 

 어머님 생신이라 3월 1일 예산에 다녀왔다.

가는 도중 도중

'나를 불쌍히 여기실 것'을 화살기도했다.

역기능 가정의 폐해는 깊고도 오래간다.

상처는 다 아물었다 생각하는 순간

다시 아픔을 호소한다.

아무 일도 아닌 일에

이전의 일을 기억할 상황이 되면 여지없이 긁힌다.ㅜ.ㅜ;;;

너무나도 담대히

주님의 인도하심에 의하여

둘째 , 털 아들이 서울청에 발령 받고 나서

과정에 감사함으로 받아들였던 여러 분들의 도움에

형님의 도움도 끼어 있었고

그것을 감사함으로 받으려는 의도와는 달리

그 분들,  형님을 포함한 내 고향 식구들은

여지 없이 과도한 자화자찬과 더불어

묘한 비틂 -  당해보지 않은 사람들은 알 수 없는..^^;;-으로

늘 그렇듯 내 마음을 흔들었다.

 영적으로 생각해 보았다.

객관적으로 아무 일도 아닐 것을

난 얼마나 오랫동안 아픔으로 느껴왔던가?

 주일 저녁 

십자가 앞에 앉아 참으로 오랫만에

마음을 들여다 보는 묵상기도를 했다.

가슴이 뻥~ 뚫리는 느낌과 더불어 너무 시원했다.

이 실체감을 자주 느낀다.

미움이 사라지고 흔들림이 소실 ~ 정말 소실 되어 버린 체험을 했다.

어제 , 내려 가서 아무 흔들림이 없었다.

내 담담함은 그 역기능을 오십여년간 되풀이 하던 흐름에

제동이 걸리게 했던가?

참으로 맑고 선한 느낌이 사로 잡았다.

 형님.

그 강하신 분이 나중에 전화를 했다.

'고마웠다. '

'뭐가요..?'

'그냥...'

난 안다.

그 속에 담긴 사연을 ..

그 마음을..

나 개인으로 보아도

우리 집 정서를 보아도

악하지 못한 사람들.

그러면서 '언어의 폭력'과  알 수없는 부대낌에 의하여

휘둘려 오면서 겪었을 스스로의 고뇌가

예수님을 믿어가면서 - 참으로 감사하게도

이 형님께서 새벽교회까지 나가시게 되고

어머니가 솔선수범해서 교회를 나가시게 되었다.

은혜라는 단어를 스스럼없이 쓰신다. ^^* -  나름대로 마음에 부담이 되었을 것이다.

얼마나 강팍하신 분인지...ㅜ.ㅜ;;

 

 아침에 일어났다.

잘 견뎌내고 주님의 인도하심에 의하여

길을 잘가고 있다는 느낌으로 뿌듯한 것과는 달리

또 억울한 느낌이 스물거리려 한다.

'아무도 자신들의 잘못을 모른다.

 나 혼자 만 고뇌하고 속상해 왔던게 수십년이다...'라는..^^;;

내가 의도하지 않았다.

물론 동의 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오래된 부정적인 생각의 습관이

또 꼬리를 물려 한다.

 한마디 씩 가서

정확하고 객관적이고 논리적인 이유로

당신들이 잘못했고

그러니 나에게 이러이러한 사과를 해라.. 라고 하고 싶다.

 

 말씀을 들여다 보았다.

'제자'

선택받은 구원의 백성들.

그 중에서도 특별히 더 선택받은 자.

12제자들.

그들에게서 발견되는

'추악한 논리'와 '감정'들.

 예수님 영접하고 13년.

말씀을 묵상하고 감동하길 5년 이상.

주님과 나름대로 열심히 손잡고 왔다고,

아니 손을 안 놓치려 노력하면서

그 분의 철저한 보호와 사랑아래서

여기까지 걸어왔다고 생각했는데,

이 잠시

돌아보는 '회한의 길'위에서

난 여지없이

어리석은 12제자의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들의 잘못.

그들의 잘못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 오류의 삶의 태도.

과거.

그것을 분노해야 무슨 이익이 있는가?

어찌 난 주님의 말씀을 하나도 깨닫지 못하고

주님과 걸어온 세월을

이처럼 허송세월 한것만 같던가?

 마치 '소경'이 바로 나 인거 같다.

어찌 눈을 뜨고 진실을 보지 못하고 있는가?

 아니다.

소경인지도 모르는 영적 장애자가 맞다.

어찌 변하기 위해 몸부림을 치지 못하던가?

어찌 스스로를 불쌍히 여기지 못하는가?

그런 내 자신을 더 깊숙이 가련히 여기지 못하던가?

 자주 깨닫긴 한다.

그러나 더 깊이 주님께 고침을 받길 간구하지 못하였다.

 

오늘.

묵상이 역시 예사롭지 않다.

늘 그러시지만

말씀으로 날 잡으신다.

늘 그러실 것이지만

이 길.

주님과 동행하던 길을

손놓고 다른 길로 들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깨달았은 즉, 돌이켜야 하겠다.

 

 

적용

1. 난 '천국가는 길'  위에 서 있는 자다.

 더욱 영적으로 깊이 깨닫는 자 되어야 겠다.

 

2. 난 혼자 있는 자가 아니다.

 주님 예수님이 늘 함께 계시다.

 그분이 가실 길을 나도 간다.

 성령님이 인도하실 것이다.

 늘 함께 계신다.

 

3. 어리석은 제자들과 그들의 식구들을 닮지 말자.

 미움은 버린다.

 비교도 버린다.

 억울함도 버린다.

 

4.  모든 거 주님 앞에 내려 놓는다.

  주님은 내 기도 제목에 영적인 것 , 세상적인 것 구분하지 않으신다.  

 열렬한 믿음과 간구 만을 기억하신다.

 하지만, 내 수준에 맞는 것임을 기억하실 것이다.

  난 어린이인가?   

  제자가 될 자던가?

 소경이던가?

 소경이 아니던가?..

 

5. 성경 여덟장 읽는다.

 

기도

주님.

늘 함께 하시는 하나님.

늘 내 손을 잡아주시고

내 가는 길 위에 서 계시며 말씀하시는 하나님.

감사드립니다.

이 소경같은 자.

주님께 외칩니다.

'주여 절 불쌍히 여기소서

주여 절 불쌍히 여기소서.

주님은 날 긍휼히 여기실 분 맞습니다.

주님이 날 늘 애뜻한 눈으로 보시는 분임을 잊지 않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 것이 늘 기억되게 하시사

저로 하여 든든한 삶을 이어나가게 하시고

영육간에 왜곡되지 않는 삶을 이어나가게 하시고

자아가 앞서는 기도제목이 되지 않게 하소서.

절 붙드시고

절 인도하소서.

절 불쌍히 여기시고

제 눈뜨게 하소서.

저로 균형잡힌 믿음 유지하게 하소서.

 간절한 간구의 기도를 하게 하소서.

제자식들

제식구 기억하시고

늘 인도하소서.

지구적으로 힘듭니다.

모두 붙드시고

진리이신 주님 안에서

죽을 때까지 인도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2014.03.27    따로 세워주신 길  


가야할 길의 결국이

홀로가 맞고

따로가 분명한데

 

아니라 몸부림치고

타인을 비교함이

그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오늘도

이 어두운 세상

비추시는 밝은 빛 따라

한걸음 한걸음 내 딛다 보면

 

다다르고야 말

거기가 바로

내 쉴 곳

내 영생의 쉼터가 맞을 것을 

 


17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 하실 때에 열두 제자를 따로 데리시고 길에서 이르시되
  열두제자는 '따로' 세우셨다.

군중과는 다른 길이다.

그들은 집에 가서도 잘 수 있고 마음대로 행로를 정할 수 있지만

어차피 제자들로 택해진 그들은

'따로' 가야할 길이 있다.

길 위.

그 위에서 자고 그 위에서 행동하고 그 위에서 배워야 '만' 하는....

 

 따로다.

그렇다.

그들.. 을 포함한 인류 모두에게

인생길은 그들과 그들의 선조가 모두 그랬듯,

어차피 가야할 길이 있다.

죽음.

그리고 그 후의 심판 자리...

어차피 가야할 것 이땅에서 조금 편한 군중의 자리와

그대로 살다가 귀한 자리에 오를 '따로' 의 자리에서

난.. 어느 자리인가?

 

따로를 지향하는 자 아니던가?

그렇다면 그 따로의 '외로움'..

실은 예수님을 더 뚜렷이 볼 수 있다면 외로움보다는 자유로움이겠지만

그 외로움 조차 기뻐해야 하는 것 아니던가?

 


19 이방인들에게 넘겨 주어 그를 조롱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박게 할 것이나 제삼일에 살아나리라 
 주님은 따로 세우신 제자들에게

너무나 귀중한 말씀,

우주의 비밀을 말씀하신다.

십자가와 부활.

복음.

그 핵심에 대하여 그들 따로 세운 자들에게 얘기하신다.

 

 무엇을 기대하셨을까?

당연히도 따로 세움을 받은 자들의 '온전한 이해'와 그로 인한 귀중한 깨달음...

거기에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의 '위로'를 기대함도 없지 않아 있지 않으셨을까?

아........

우리...

아니 특별히 '나'의 이해받고 위로 받고 싶어 하는

이 가녀린 ^^;;

어울리지 않는 심성을

그 분은 불쌍히 여기시고 체휼, 체험하고 대신 십자가에 가져가실 요량으로

그 안타까운 위로의 기대까지 실었을 것이라 짐작해본다. ^^;;

 

 

24 열 제자가 듣고 그 두 형제에 대하여 분히 여기거늘
 그러나, 이 '따로 세움 받은 '

너무나 귀중하고 대단한 '제자'들이

예수님의 그 귀한 , 안스러운, 안타까운 말씀이 끝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하등의 지체없이 ..

천국의 높은 자리에 대하여 말하고

그러함을 미리 말한 자들에 대한 질투로 눈이 벌게지며 분해한다.

 

 이... 어이없음.

예수님의 얼굴을 연상해본다.

나.. 와 같앴을까?

조심스레이 얘기했을 때 과감히 잘려지며 단죄 당하고

오히려 무시 받는 이야기를 받는...............

그리고 자신들의 잘난 이야기만 하는.. ㅜ.ㅜ;;

(너무 익숙한 거부)

거기에 예수님의 얼굴이 나처럼 '헬쓱'해지며 머쓱해하셨을까?

분이 순간 올라왔을까?

 

정말 그 분이 그러셨을까?

그들이 그렇게 반응할 걸 모르고 그러셨을까?

아니라면 왜그러셨을까?

분명코 담담하신 표정이셨을 것이다.

당연히도 내 .. 아니 온 인류의 이 어이없는 원죄적 파생감정을 체험 하시려 그러셨을 것이고

그러함에도 인내하시고 차분하신 당신의 모습을

나에게 배우게 하려 그러셨을 것이 '아주 적은 이유' 라면..

그러한 말씀을 통하여

성경을 건너 뛰어 배울 자에게 배우게 하시는 교육 목적과

복음의 비밀을 '선택받은 자'들에게만 열릴 것임과

그러함에도 선택받은 따로 세움 받은 자들도

이들처럼 오랜시간의 경과 후에 이루어짐을 보게하시사

그렇지 못한 스스로의 연약한 믿음에 탄개하는

선택받은 소수를 사모하는 우리들을 위로하시고자 하는 목적도 잇으셨을 것이며

무엇보다 제자들을 세우려는 마지막까지의 포기하지 않으시는 '교육'의지를 볼 수있다.

참 감사하다.

하나님..

 

 나.

오늘 무엇을 배울 것인가?

무엇을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 같은가?

 

'비교'

그것.

이제 별 의미가 없어짐을 확인 해보라는 말씀이신 거 같다 .

아직도 잘 나가는 사람,

그게 비록 외적이든 영적이든 ..

그들에 비교하여 나를 그렇게 힘들어 하지 않음을 확인하게 하신다.

 

 그리고, 정말 중요한 것은

'따로 세움', 그 세워진 자로서의 나에 대한 당부이신 것 같다.

우선, 외로움이다.

외로운 길이 '망하는 길'임은 세상이 하는 소리다.

하나님 믿는 자들은 힘듦의 길이다.

십자가의 길이고 좁은 길이다.

그리 흔들릴 일이 없음이다.

오히려 따로 세워져 갈곳 없음이 오히려 축복이다.

하나님을 내가 매일 촛점 모아 바라보고 있는 한 그렇다.~~!!

 또한 흔들림..

예수님의 당당함으로 세상을 쳐다보란 이야기다.

그들에게 무슨 기댈 할 것인가?

그냥 바라보자.

그들을 불쌍히 여기고 이해하자.

어떤 불합리도 예수님은 기다리고 기대하셨다.

기도하셧고...

그리까지는 못해도 '오늘 하루 만큼'이라도

예수님의 그 담담함을 닮을 것이다.

그것을 주님이 말씀하시는 듯하다 .

 

 

주님.

난..

따로 세우신 자가 맞습니다.

제가 원튼 원치 않든 하나님이 세우신 길인가 봅니다.

예수님.

저..

주님의 그 모두 체휼하심을 감사함으로  받게 하시고

그 것을 묵상하는 하루 되게하시사

세상의 그 어이없는 미련함에 대하여 분노보다는

예수님의 눈으로 이해할 수 있게하소서.

제 얘기가 완전히 무시되고 전혀 다른 소리하는게

예수님께 대하여, 복음의 귀한 말씀에 대하여도 그랬는데

저 같은 비범한 자들에게는 오죽할 까 하게 하소서.

그리고 그 같은것을 다 체험하신 예수님을 믿사오니

마음 누구러지게 하소서.

 또한 제가 '따로 세움 받은 자'란 생각을 잊지 않게 하시사

외로움과 험난함, 앞이 보이지 않음도

모두 세상의 소리이고 그들의 경우임을 알게 하소서.

주님 인도하시는 대로 참아가며

인내하고 따라가게하소서.

오직 십자가의 비밀과 부활의 중요함을 미리 알아 깨닫고

삶속에서 구현해내가는 자로서

더 깊은 감사와 은혜로 주님 기대하게 하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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