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칙한 QT
질투에 대하여 [창4:1-26] 본문
3.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4.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5.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세월이 지난 후"라 시작한다.
일정기간의 조용하고 어쩌면 평안한 시간이 흐른 후..다.
평온하고 조용한 시간이 계속됨이 반드시 축복은 아닐 수 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평온한 시간'이 축복이다.
가인은 그래도 제사 드리는 '신앙의식'은 계속했다.
기특해야 하다할 수 있지만
그것은 동생 아벨이 '양'의 '첫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리는
온전한 제사와는 다르다.
그랬다.
그것을 몰랐었다.
어쩌면 새해를 맞이 하여 나를 돌아보라 하심이 아니실까 싶게 느껴졌다.
괜히 흔들리는 연말 연초...
다시금 마음이 조용해지고 깨달아지는 바가 있어온다.
내 ..알게 모르게 평화와 조용한 매일이
내 잘나간다 생각하던 '신앙생활'이나 일상의 흐름에
어쩌면 회개할 부분이 없지 않나 싶어서 그렇다.
하나님께서
그러니 단호히도 '아벨'의 제사는 받으시되
가인의 것은 거부하셨다.
그러니 ,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했다..라고 나온다.
이것.
'하나님을 대적'하는
아주 나쁜 , 극도로 나쁜 ㅠ.ㅠ;; 태도다.
서운할 수는 있다.
그러나, 분하다 함은 어찌된 표현이고, 상태이던가?
하나님을 대하여 존경이나 존중의 마음이 전혀 있지않고
그분을 마치 '같은 레벨'로 낮추어 놓음의 상태는 아니던가?
그게 '불신앙'이지 않는가?
제사의 행위는 하되 마음은 아주 불경한 상태.
거기에
얼굴이 변했다 함은
'분'은 느껴도 '노'는 발하지 말라시는
주변과의 관계에 대하여서도
최소한 그렇게 되어야 함이 맞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대하여
그리 됨은
불경을 넘어서는 악독한 마음의 상태가 아닐런가?
비록 그게 자신도 모르고 누구도 모르게
제사의 행위, 신앙인 같은 행위를 하지만
그 내면 안의 모든 것을 다 아시는
하나님께는 그대로 보이심이시다. ㅠ.ㅠ;;
난,
믿는다는우리는?
과연 지금의 카인과 다른가?
그렇다면
그러한 '분노'의 근거는 과연 무엇인가?
한 단어로?
"질투"다.
회개하지 않는 자의
걸러지지 않는 거친 영혼의 발로.
아..
'영적 게으름' 이나
'무지'
'포악' ..
이런 것은 일단 건너 뛰자.
오늘 보게 하시는 내면의 그러함,
현재 우리와
지금의 나와
어쩌면 하등 다름없을 ,
어쩌면 깨닫지 못하고 있다가 발걸려 넘어질지 모를
그래서 드러나 보이게 하셔서
오늘 내게 말씀하시고자 하는 부분이
'질투'다.
그를 근거로 한
얽히고 얽힘.. 이다.
그리고 그로 인한
가인 내면의 죽 끓듯이 끓고 있는
'죄'들의 부글거림과
결과로 오는 마음의 갈등,
그 갈등의 괴로운 폭팔, '怒' 가
너무도 아프고 무섭게 다가온다.
6.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하나님께서
그 내면을 읽어준다.
혼자서는 전혀 알수 없을 그 마음의 지옥같은 고통을
주께서는 '분'하냐, 안색이 어찌 변함이냐.. 고 물어 주신다.
공감이고 마음을 읽어주심이 아니던가?
자기 잘못을 돌아보라는..
내 죄는 없던가?
그 죄가 정체가 무엇이던가?
질투는 아니던가?
하나님에 대한 불경은 아니던가?
만일 '질투'라면
거기에 내 '올바르지 ' 못한 죄는 없던가?
질투의 무서운 점은
자신을 파멸시키고
주변을 파멸시키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그렇게 만드는게 무서운 점이다.
자신을 파괴한 다는 것은
'평화' , 평강이 무너지고 잔인한 복수의 쾌감 만 들어차고
주변에 대하여 무서운 '노'의 불을 발할 이유가 되게 하며
하나님께 대한 불경조차 무섭지 않게 만들어
돌이키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다.
'질투'.
남자는 질투하면 안되.. 라는 강박관념이 있어서이고
질투는 어쩌면 여자의 특권이라는 묘한 허술함이 있어서이기도 하여
그 내면의 절제되지 못하는
사단의 특성들의 날뜀.. (아.. 질투할 때 버글 거리는 내면의 소리들.. )
7.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질투는
낯을 들지 못하게 한다
땅을 보게 하며
그 질투의 불은 자신을 불사르고
이웃을 불사르며
심지어는 하나님을 향해서도 폭팔시킨다.
가인처럼..
주께서는
그것을 아시고
이렇듯, 말을 들어주시고
'죄가 문 앞에 있'다는 그 위기를 절명의 위기로 표현하실 만큼
질투의 죄는
그 자체라기 보다
다른 죄, 특히 포악과 상대적 교만의 죄를 몰고와
그 끝을 알수 없을 위험에 빠지게 한다.
그러기에
'너는'
오늘
질투의
'죄를 다스리라'시며
특별히 말씀하신다.
내게는 없던가?
혹여
지금껏 내 인생을 이처럼 얽히고 섥히며
아직도 버겁게 만드는 부분이 있음은
내 안에 '질투'의 죄가
도사리고
한번씩
내 영혼 성전의 문을 긁고 있음은 아니던가?:
그렇다면
내 '질투의 죄' , 내 오늘의 지을 수 있는 질투의 죄,
내 평생을 괴롭혀온 그 근거의 죄를
어떻게
금새 그리 직면할 수 있단 말인가?
' 죄를 다스리라'고
오늘 말씀하지 않으시던가?
말씀으로 말씀하시는 로고스 하나님이
내 안에서
오늘도 말씀하시니
난.. 그냥 '질투'가 내 안에 또 슬그머니 용트림 하고 있으며
그 질투를
주님과 함께 직면하고
질투임을 인정하고
주님이 다스리라시니
다스려 주실 것을 또 믿고
그냥 다스리면 되리라.
또 그러시면 이전에
늘
그러하셧듯
또 '죄를 다스리게 해주실 것'이다.
그렇다면
'질투'를 다스리는
원리는 무엇인가?
일단
내 , 그동안 그리고 오늘의 어쩌면 있을 버거움은
질투에 근거한 것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내 질투의 소리들 중
드러나는 것을 마주하면 된다.
무엇인가?
내 근본적, 근원적 어려움을 자극하는 질투의 사단의 소리는?
안다...
난..
그러나 여기서 다 표시할 수는 없다 .^^;
그것을
주님이 말씀하신 바대로
어렵고 힘들지만
널려놓고 펴 놓아
말씀의 빛 앞에 다시 마주하리라.
그리고 또
중요한 것은
'질투'의 근거로 인한
내 죄됨을 인정하는 것이고 회개해야 하는 것이다.
너무도 당연하지만
소경의 지팡이처럼 (죄송, 표현이 어쩌면 시각장애인 분들에게.. ㅠ.ㅠ;;)
내려 놓고 있지 못하고 있어서 (안해서 그럼이 아니다. . ..무서워서다.. )
내 무의식 깊숙이 눌려 놓고 있지
난..
가인이 게으르면서도 자신이 제사를 잘 드리는 데
주님이 안받으신 것처럼 오해하는
그런 미련한 죄,
거기에 그 죄에서 파생된 '타인'을 , 자신을 해꼬지 하는 죄
하나님 앞에 회개하지 않은 불경한 죄.. 등을
눌러 눌러 눌러 놓고
지금 이 시간까지 담아 가지고 다니며
내 속의 자기 연민과 어울려
날 그토록 스스로 오랫동안
죄를 완전히 벗어내지 못하고
주님의 온전한 자유 안에서 숨쉬지 못함인 듯함을
다시금 깨달았다 .
그렇다.
내 잘못을 회개하여야 한다.
먼저 인정하고 받아 들인 후 주님 앞에 가져가야 한다 .
말씀이 '죄를 다스리라'시니
그 기회를 잡아 얼른 그래야 한다.
그리고는
내 이후의 삶의 태도 (타인을 질타하던, 스스로 정색하던... ㅠ.ㅠ.;;) 를
어색하지만 주께서 인도하시어 자연스레이 할 것임을
기대하고 그래야 한다.
그리고는
기도해야 한다.
더 깊이
더 자유를 위해서.
나머지는
주님께 맡기면 된다.
그 후의 내 삶의 태도 .. 결과.. 말이다.
내가 더 이상 하지 못할 것은 안하고 말이다.
일단 기도하고
스스로 해결했으니
그 ~~ 나머지 부분 말이다.
감사하다.
주여.
깨닫습니다.
인정하고 받아 들입니다.
주여.
가볍습니다.
홀로 영광 받으실 내 아버지 하나님의
그 살아계심을 찬양합니다.
주여.
질투..
벗어나게 하소서.
올해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들어 감사하며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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