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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께서 함께 하시니 그러면 되었습니다[암7:10-17]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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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께서 함께 하시니 그러면 되었습니다[암7:10-17]

주하인 2024. 12. 13. 00:18

부제) 비아냥과 조롱으로부터의 자유로움은 하나님께로 부터 

      내 존재의 가치감은 모두 주님에게서 나온다

(펌)

쏘아보는 눈

혼내는 눈

조롱의 눈

두려운 눈

질투의 눈

차단의 눈

관찰의 눈

...

귀여운 눈

당당한 눈

어둠을 밝히는 눈

멋진 눈

...

 

그 차이

 

어쩌면

내면에 투영되어 

한번 걸러진 탓아닐까?

 

그리고 그러함은

영혼의 든든함과

그렇지 못함을

상징함은 또 아니던가

 

영혼의 완전함

 

주께서 함께 하시니

그러면 되었습니다라는 고백

더 온전한 든든한 항상성

과연 

어디에서 올수 있을까?

 

할렐루야 

내 당당함과 

내 자유로움과

내 흐름의

원리이고 이유이시며

내 안에 늘 함께 계시며

나와 동행하시는

우리 주님을 찬양합니다

 


10 때에 벧엘의 제사장 아마샤이스라엘의 왕 여로보암에게 보내어 이르되 이스라엘 족속 중에 아모스가 왕을 모반하나니 그 모든 말을 이 땅이 견딜 수 없나이다

 '벧엘'

그곳의 '제사장' 아마샤.

'이스라엘의 왕'

정치적으로 안정을 구가하게 했던 세상적으로 성공한 '왕'..여로보암.

그들이 

'아모스님'을 질투한다.ㅠ.ㅠ

 

12 아마샤가 또 아모스에게 이르되 선견자야 너는 유다 땅으로 도망하여 가서 거기에서나 떡을 먹으며 거기에서나 예언하고
13 다시는 벧엘에서 예언하지 말라 이는 왕의 성소요 나라의 궁궐임이니라

 그리고는 '선견자야..' 라며 조롱하듯 

아모스님을 찾아와 질타하기 시작한다. 

"유다땅으로 도망가서 

거기에서나 ㅠ.ㅠ 떡을 먹으며

거기에서나 예언하고

다시는

벧엘에서(는.. 이 넣어지면 더 정확한 뉘앙스가 되어지지 않았을까?)

다시는

예언하지 말라.

여기는 너같이 부족한 자가 함부로 예언할만한 곳이 아니다 .

여기는 벧엘이란 말이다. 

왕의 성소요.

나라의 궁궐이 아닌가?"... 라며

비아냥 대며 

질타해댄다. 

 

 마치 ㅇㅅㄹ의 뜬금없는 ㄱㅇ과

그 내면의 폭풍우치듯한 '사단의 횡행, 폭주'가 생각난다. 

비록 그는 '불신자'이지만...ㅠ.ㅠ

 

14 아모스가 아마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선지자가 아니며 선지자의 아들도 아니라 나는 목자요 뽕나무를 재배하는 자로서

 그러자 '아모스님'이 대답한다. 

당당하다. 

거침이 없다. 

"나는 선지자가 아니'다. 

맞다

심지어 선지자의아들도 아니다.

 나는

목자요  뽕나무 -ㅎㅎ 뽕나무 밭.. 뽕.. ^^;- 를 재배하는 자임이 맞다. 

이게 소망이다

이 ㅇㅅㄹ 내란수괴 들로 대표되는 불신자 내면의 끝은

결국 자신을 의지하고 도피하고 각양 홀로의 모습으로 

'영적 벧엘', '영적여로보암'만 의지하다가

결국 저 멸망의 끝으로 자신과 이웃을 파멸시키는

끝없는 '절망'이지만

우리 '믿는 자'.. 

아모스님처럼 

모든 인생에

'하나님이 이유가 되심을

확실히 깨달은 자 들^^*'은 

'뽕나무'를 심는 하찮은 자 이든

목자로 평범한 자이든

아무 걸림이 없음이다.

 

 하나님이 부르시고

하나님께서 가르치심 속에서 살기 때문이다. 

 

나.

잠시 흔들린다. 

내 오래된 흔들림, 요동이 

또 날..그런다. 

그렇지만 말씀이 이리 미리 있으시니

나 또 살아난다. 

 조롱이 있어라.

난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시고 

그 하나님께서 또 이리 깨닫게 하시니

나 족하다.... 싶다.

할렐루야다. 

 

그런데 

그런자로서 -투잡러 ^^ ㅎ-

 

 

15 양 떼를 따를 때에 여호와께서 나를 데려다가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기를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예언하라 하셨나니

 양떼를 따를 때 -본업에 충실하고 있을때.. 최선을 다하는 ^^* 바로 그때에-  '여화와께서 나를데려다가'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기를' 

'예언하라' 하셨기에 

이리 하고 있을 뿐이다" 라 선언하고 있다. 

 

 무엇인가?

너무도 익숙한 상황.

같이 10년 이상을 같은 병원에서 

미션 병원이라는 테두리에서 

같이 '산부인과' 의사 하면서

같이 ' Silk R.'라는 중창팀에 있던 

C가 아마샤와 비슷한 일을 ...ㅠ.ㅠ

나.

그때 바야흐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외적'으로는 '복강ㄱ'을 정착시키고 논문을써대고 -갑자기 40대 후반에 시작된 하나님의 철저하신 인도하심으로... 내 간증거리다. - 사진, 시, ......뜨거움.......으로

아마도 '아마샤'와 '여로보암'의 저 두려움과 힘듦이 자극이 되었던 거 같았다. 

그래서 그후 말도 안되는 이유로

직접.. 저러한 '벧엘 '- 왜곡되어가기 시작하는 미션의 이름...ㅠ.ㅠ .. - 에서 떠나라는 현실적 , 직접적 압력 후 

여기까지.. 오게 된 ......

꼭 그때가 생각이 나는 것은 웬일인가?

 

 그때의 나는

'목자'였을 뿐이고 

뽕나무 재배자 였을 뿐'으로 

열등감과 하나님의 허락하신 은혜 때의 넘치는 자존심 사이에서

왔다갔다 하던 자.........

 

 수없이 많은 시간들을 지내고

드디어는

'여호와께서 나를 데려다가'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기를' .. 이라시는

저 아모스님의 고백이 

내 속에서도 흔들림 없이 -그렇다.. 함께 하시는 주님의 존재로 인한 밤바다 풍랑 뱃속의 든든함 .. 그것을 주께서는 그 시간동안 자라게 허락하셨다. 할렐루야 -  내 고백이 되어가게 하시는 과정 중에 있음을

이제는 

난 확실히 안다. 

 

 내 인생.

비아냥

조롱

현실적 압력.. 

그 어떤 것이 있더라도 

이제는 

당당할 수 있음은

내 현재, 

내 과거의 어떠함에 대하여도

그 모든 것 

하나님께서 '나를 데려다가'

'하나님께서 내게 이르시는 ' 인생을 

힘있게 걷게 하셔서

 

16 이제 너는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니라 네가 이르기를 이스라엘에 대하여 예언하지 말며 이삭의 집을 향하여 경고하지 말라 하므로

'여호와의 말씀을 '

세상이 듣게 하시는 매개체로 , 

쓰시는 도구로 

난.. 쓰임을 받고 있음...

그러한 자가 바로 나임을 

이 '일상'.. 양떼를 치고 있는 이 삶을 통하여서도 

그러하고 있는 자가 

바로 나 임을 

이제는 확실히 안다. 

 

그러기에

그 곳이 벧엘이던

양떼 치는 초장이든

뽕나무 밭이던.. 

하나님이 내게 계시는 사실... 

그 분을 아직도 놓치지 않고 있음을 확인되는 순간.. 

난.. 당당할 수 있음이다. 

내 인생에 흔들림이 없음이다. 

 

감사하다.

 

 주님.

그러셨습니다. 

제 수없이 많은 어려움들...

그것은 모두 '아마샤의 손가락질'에 

'내 뽕나무 밭, 양떼 초장의 존재'를 비교하며

그들의 조롱과 비아냥에 

내 영혼을 맡기고 휘둘렸던 탓이었습니다. 

이제는 다릅니다. 

주여... 

 

 

주님의 부르심.

주님의 인도하심

주님이 말씀하시는 대로 

살아가는 자.. 

그것이 저임을 알게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이 나와 함께 계시니

그러하심을 내가 아오니

그것으로 족합니다. 

그게 제 고백이 되게 하셔서 감사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선견자와 선지자의 차이, 12절의 의미)

선지자와 선견자의 차이는 주로 그 역할과 강조점에 있습니다.

1. 선지자와 선견자의 차이

선지자(Prophet)
히브리어로 "나비"(נָבִיא)라고 하며,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자'를 의미합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백성에게 전하고, 때로는 책망이나 심판, 위로의 메시지를 전합니다.
주요 역할: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며 백성을 교훈하고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것.

선견자(Seer)
히브리어로 "호제"(חֹזֶה) 또는 "로에"(רֹאֶה)라고 하며, 이는 '보는 자'를 의미합니다. 선견자는 주로 하나님께로부터 환상이나 이상(비전)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이를 전달합니다.
주요 역할: 미래에 일어날 일이나 하나님의 계획을 환상을 통해 파악하고 이를 알리는 것.


차이점: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데 중점을 두는 반면, 선견자는 하나님으로부터 보여지는 비전(환상)에 더 중점을 둡니다.

두 역할은 서로 겹치기도 하며, 한 사람이 선지자이자 선견자인 경우도 많습니다. 예를 들어, 사무엘은 선지자이자 선견자였습니다(사무엘상 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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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아모스 7장에서 아모스를 향한 아마샤의 '선견자'라는 지칭

아모스와 아마샤의 대화 배경
아모스 7장에서 아모스는 북이스라엘의 죄악과 멸망을 예언합니다. 이 예언은 베델 성소의 제사장이었던 아마샤의 반감을 샀습니다. 아마샤는 아모스에게 "선견자여, 유다 땅으로 도망하여 거기에서나 예언하고" (아모스 7:12)라고 말하며 그의 활동을 멈추라고 요구합니다.

아마샤가 '선견자'라고 부른 이유
아마샤가 아모스를 '선견자'라고 부른 것은 다음과 같은 의도가 있었을 수 있습니다:

1. 조롱의 의미
아마샤는 아모스가 예언자적 권위를 가진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점을 인정하지 않았고, 그를 조롱하거나 경멸적인 뉘앙스로 "선견자"라고 불렀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는 아모스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태도를 보여줍니다.


2. 아모스의 비전 중심 사역에 초점
아모스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상(비전)으로 받는 경우가 많았습니다(예: 메뚜기 환상, 불 환상, 다림줄 환상 등). 아마샤는 이를 알고 아모스를 "선견자"로 부른 것일 수 있습니다.


3. 직업적 선지자와 구별
아마샤는 아모스가 북이스라엘에서 활동하던 제도적/직업적 선지자와 다르다는 점을 강조했을 수도 있습니다. 당시 직업적 선지자들은 왕이나 제사장과 협력하며 권력을 지지하는 경우가 많았으나, 아모스는 목자 출신의 독립적 선지자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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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신학적 해석

아마샤의 오해
아모스는 자신을 직업적 선지자나 왕실의 선견자로 간주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평범한 목자이자 뽕나무를 재배하던 사람이었습니다(아모스 7:14-15). 그는 스스로를 선지자라 부르기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명을 감당하는 도구로 여겼습니다.

'선견자'라는 지칭의 의도와 오류
아마샤는 아모스를 제도권의 선지자로 몰아가며, 그의 예언이 개인적 이익이나 지역적 한계(유다에서 활동하라는 요구)로 국한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아모스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북이스라엘에 심판을 선포해야 했습니다.


결론:
아마샤가 아모스를 "선견자"라고 부른 것은 그의 사명을 폄하하거나 경계하려는 의도로 보입니다. 그러나 아모스는 단순한 선견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며, 하나님께서 보내신 독립적 선지자로 활동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예언이 사람의 직업적 위치나 배경에 의해 제한되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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