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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지 않고 살아내기[요이1:7-13] 본문

신약 QT

속지 않고 살아내기[요이1:7-13]

주하인 2022. 12. 29. 06:51

(펌) 말구유에 육화(肉化, 성육신聖肉身, incarnation)하여 내려오신 하나님이신 예수님

그분께서는

그 자리를 놓으시고

이 땅에 오실 바로 그 순간 부터

고난이시고 고생이셨다

 

저 작은 육신에 갇히시고

산고(産苦)를 같이 느끼시었으며

살아계시는 내내

우리네 인생들의

모든 갈등을 다 체휼하셨다.

 

이 주하인의 고통을 

당연히도 

다 아신다는 이야기시다.

 

아..

거기에 더해

육신을 통해 쏟아져 들어오는

십자가의 고통을 또한다 체휼하셨고

그러함에 더해지는

무지한 인생들의 '비아냥'의 어이없음과

작렬하는 중동 대낮의 태양의 매서움도 .

다 그러하셨다 

 

왜 그러셨을까

왜 그리하시고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시어

부활하시고 

보혜사를 보내시었으며

왜 또 다시 

재림의 약속을 하셔야만 했던가?

 

나를 사랑하셔서 그랬다시는

그 믿어지지 않는 말씀이

어찌 더 이상

그 유일한 논리로 

이해되지 않을수 있단 말인가?

어찌..............

 

오...... 

주님.....

사랑의 예수님

사랑하시는 하나님......

 

이 진리가 없는 시대

이 모든 게 진리라는 거짓의 시대.

오직 

육신을 입고 이땅에 오신

우리 주 예수님 만이 

유일한 진실이고 답임을

다시한번 

통렬히 깨닫는 아침입니다. 

 

주여

홀로 영광 받으소서

그러기에 

너무나도 합당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다시한번 기도올립니다. 

아멘

 

 

미혹하는 자가 세상에 많이 나왔나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심을

    부인하는 자라 이런 자가 미혹하는 자요 적그리스도니
10 누구든지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 미혹하는 자'

NIV에서는 deceivers(속이는 자들) 이라 나온다.

 

 '속지 말자'가 말씀을 보면서 

순간 드는 생각이다. 

그렇다. 

얼마나 많은 가치가 세상에 휘몰아치는가?
다 옳다. 

다 옳으니 다 틀리다. 

가치를 조금만 비틀면 그것도 옳은 것같다. 

논리를 적용하며 틀림을 증명해내어 가슴에 확신 하려 하기도 전에

다른 옳은 이유가 또 내 앞에 대기하고 또 대기한다. 

 한마디로 광풍이다. 

이 포스트 모더니즘의 세계

.이 죄악 세상.

이 물질 세상.

이 겨우 3차원의 물질계... 

세상의 권세 잡은 자의 잠시 허락받은 이 현재의 세상.

 

무엇이 옳고 그륾을 따질 수도 없게 한다. 

따지려 하고 맞추어 정리 하려는 순간

이 '참'을 가장한 '거짓'들.. 

'미혹하는 자'들.. 

이 deceiver들이 마구 휘몰아쳐 정신을 차리지 못하게 한다.

 '미혹하는 자가 세상에 많이 나왔나니'... 한다.

 

마음이 뒤죽박죽 곤죽이다. 

잠시 흔들렸다.

흔들린 틈을 타고 여지 없이 '질타'하는 소리들이

내 속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게 광풍처럼 몰려오려 한다.

마음을 다잡기 힘들어서 겨우 힘내어 붙들었다.

심지어는 결국 그 끝에 '이러다 망하지.. 이런 증상 때문.. ' 하는 것 처럼 느껴지려 한다 '

 

 아직도 온전하지 않은 감기^^;; 로 부터의 회복과 더불어 가해지는

마음의 불안정함이 싫어서

일찍 잠으로 도피하려 했으나

멀뚱 멀뚱 해지며 머리가 멍하려 하여 새벽 늦게까지

영상(ㅇㅌㅂ,....)에 푹 빠지다가 새벽늦게야 잠들었다.

 

 아침에 여지없이 알람이 울리는데

몸이 천근만근이다.

거의 반 정신이 깨워지지 않는다.

오랜 습관으로 이제 몸이 안따라도

정신은 아주 맑아짐이 대부분이었는데...

 

 아.. 이 죄.

나를 놓기 싫어하는 '죄'의 강공들이 어찌하여도 

날 붙들려 애쓰는 모양이다. 

그래도 얼른.. 일어났다. 

어제 자기전 들여다 보고 잔 말씀 구절이 다행이도 '짧~다' ...ㅠ.ㅠ

이럴 때 긴 ... 제사..혹은 묵시록의 구약 구절이라도 대기하면

난.. 포기하고 말았을지 모를 이 미천한 믿음의 소유자가 나다. 

 

 정말 무거운 몸을 끌고 일어난 것은

즐겨 외우는 시56:4에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말씀을 찬송하올지라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즉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혈육을 가진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이까"라시는 구절이다. 

난... 두렵다. 

머리가 복잡한 것도 두렵고 

내가 이해하지 못할 

그리고 감당하지 못할 정황이 두렵다. 

그래서 내 .. 잘 잡아가는 삶의 패턴이 흔들리는 것도 두렵다. 

내 '악한 본성(아주 오래된 내 안의 왜곡된 자아심상, 오래된 상처의 흔적 ㅠ.ㅠ;;;)이 마주 되는게 

정말 너무 싫다. ㅠ.ㅠ;

 

그래서 하나님이 날 만나주지 않을 것 같은 것이 심히 두렵다. 

 

나..

말씀 구절이 없었더라면 그냥 확 무너져 버렸을 수도 있다. 

위의 말씀 구절을 근거로

'십자가 찬양'을 틀어 놓고 그냥 찬양으로 '말씀 묵상'을 대치하다 가려 했다. 

 '십자가 보혈' 이외 이런 류를 이겨낼 수 있으랴... 

말씀대로 '말씀을 근거로 한 찬양'을 올리는 것이 

날.. 두렵게 하는 

나도 모르는 깊은 이유.. 아직 마주하지 못하고 있는 

그 근저의 '영적' 존재들에 대한 승리하는 방법임을 확신하고 그랬다. 

 

찬양대로 따라 소리마져 나오지 않게 눌려진 목소리를 

억지로 억지로 내어 따라 했더니 

마음이 풀린다. 

그 상황을 연상하며 그랬다. 

내가 이겨내려 어떤 노력도 안했다. 

그냥... 마음이 편해지며

아무리 들여다 보아도 모를게 당연했던 오늘 말씀 구절.. 

아니, 너무도 잘알아 여기서 무슨 '레마'가 나올까..하는 

그러한 저항의 생각으로 

오늘 말씀 묵상을 건너띄려던 것이 

불현듯 깨달아 지며 

글을 쓰고 싶어졌다. 

 

 다시 들여다보자 마자. .. '미혹하는 자들'.. 거짓말하는 자들.. 이란 단어가 눈에 들어온다. 

그렇다. 

거짓 영들이 거짓의 소리로

너무도 익숙한 논리로 날 누르려 했던 것이다. 

알면서도 속절없이 마음이 고꾸라짐은

내 홀로 감당하기 어려움이다. 

 그런 것을 '말씀'으로 

말씀이신 

로고스 하나님께서 다가오셔서

말씀대로만 집중하려는 결심을 보고 

이리 순간 깨닫게 하신 것이다.

 

 

 그렇다. 

어떤 세상의 '논리'들... 

그럴듯한 이유를 가지고 거부할수조차 없게 만들던 

그 오래된 거짓논리들.. 거기에서 파생된 다양한 옳는 듯한 소리들을 뚫고

오직 '말씀'이 힘을 주기 시작하시고는

마침내는 내 마음을 평정하신다. 

 

 말씀의 내용이 이러시다. 

"예수 그리스도 께서 '육신'으로 오셨다'

오직 순종함으로 '십자가 사역'을 감당하심으로 

모든 '죄'를 가져가셨다.

그래서 오늘 '내'가 , '주하인'이 

지금 여기 이 자리에 이렇게 서 있을 수 있음이고 

그리함으로 난... 천국 백성으로 

영생을 살아가게 된 것이다. 

무엇을 흔들리는가?

네 죄를 위하여  '육화'하신 예수그리스도께서 

내 죄를 다 체휼하시고 

내 죄를 십자가에서 다 가져가신 것이시다. 

 이제 네 할일은 육신으로 오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앞으로 

모든 죄를 가져와 내려놓고 회개하는 것이다. 

그리고 허락되어진 성령의 은혜를 입어 또 새롭게 가거라"... 

아.. 

당연하다. 

당연하신 '십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이 있으셨다. 

부활의 예수 그리스도가 있으셨다. 

 

그것을 잠깐 잊었었다. 

 

마음이 평화로와진다. 

감사하다. 

또 잊고 또 다시 출발하리라. 

 

 

주님.

제 질기고 붉은 죄가

이렇게나 오래 절 흔들고 있습니다. 

심지어 그 죄가 얼마나 강렬한지 

또 익숙한 옛날의 그 어둠의 무게로 절 끌어내리려 했습니다. 

그 미혹하는 자들,

그 거짓의 영들이

세상의 모든 옳은 것들이 잇는데

네 믿는 하나님 만 옳냐... 하는 듯.. 

하나님이 생각나지도 않으려 했고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 땅에 내려오셔서 내 모든 것 다 체휼하심,

부활하심.. 

그리고 허락되어지는 '성령' 하나님의 은혜 마져 

다 옳아... 다 옳아.. .그러기에 별의미가 있을까.... 하려는 것 같이

제 모든 가지고 있던 확신 조차 흐리려 하는 듯했습니다. 

그래서 ... 절 깊은 웅덩이에 빠드리려 하는 듯했습니다. 

두려워지려 했습니다. 

무거워지려 했습니다. 

 

주여.

하지만... 말씀을 붙들어 또 일어났습니다. 

제 발의 등을 밝히시고 

제 하루의 길을 밝히소서.

감사합니다. 

내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오직 말씀에 순종하셔서 

육신으로 이땅에 오시어 

제 죄와 미련한 모든 것들을 체휼하시고 짊어지고 가신

십자가 예수 그리스도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합니다. 

오직 예수 .

오직 십자가

오직 부활...

오직 은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참조 (포스트 모더니즘에 대하여)

(펌)

 

 

권수경 (고려신학대학원 초빙교수)

 

영화 트루먼쇼 中

 

너도 옳고 나도 옳고

20세기 중반부터 문학, 철학, 예술에 등장하던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개념이 지난 수십 년 어간에 우리 삶 깊은 곳까지 파고들었습니다. 21세기의 시대정신으로 자리 잡은 이 사상은 초고속 문화 매체를 통해 우리의 사고방식, 인간관계, 심지어 사회구조까지 금방 장악할 태세입니다. 그리스도인인 우리도 이 흐름을 벗어나기 쉽지 않습니다. 교회에서도 벌써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이 감지되고 있습니다. 게다가 우리 자녀들은 휴대폰이나 SNS 등을 통해 더 큰 영향을 받고 있으므로 이 사조의 실체를 정확하게 파악하여 지혜롭게 대처할 필요가 있습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기본 틀은 ‘상대주의’입니다. 나도 옳고 너도 옳고 모두가 옳다는 입장으로 무척이나 포용적인 태도입니다. 조선 시대의 일화 하나가 포스트모더니즘을 잘 보여줍니다. 황희 정승 집안의 종 두 사람이 서로 자기가 옳다며 말다툼을 벌이다가 결론이 안 나 황 정승에게 왔습니다. 황희가 한 종의 말을 다 듣더니 “네 말이 옳구나” 했습니다. 곧이어 다른 종도 제 입장을 서둘러 설명했고 말을 다 들은 황희는 “네 말도 옳구나” 했습니다. 그러자 곁에서 지켜보던 황 정승 부인이 한마디 거들었습니다. “이 아이 말도 옳다 하시고 저 아이 말도 옳다 하시면 옳고 그름을 어떻게 가릴 수 있겠습니까?” 그랬더니 황희 정승은 “듣고 보니 부인 말씀도 옳구려!” 했습니다.

이게 바로 포스트모더니즘입니다. 서로 맞지 않는 종 두 사람의 말도 다 옳아야 하고 이 둘이 다 옳다 한 황 정승의 말도 옳아야 합니다. 심지어 황 정승이 틀렸다고 지적하는 부인의 말까지도 옳아야 하는 것이 포스트모더니즘입니다. 이런 상대적 포용 주의에는 두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는 누가 ‘진짜’ 옳은지는 관심이 없다는 점입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든 것을 수용하기 위해 객관적 진리, 절대 진리는 온몸으로 거부합니다. 따라서 진리와 거짓이 같아져 버리고 바른말을 한 종의 억울함도 그대로 묻히고 맙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절대 기준이 없으므로 어떤 문제나 모순도 해결하지 못하고 그냥 덮어 둘 수밖에 없습니다.

둘째는 모든 것이 ‘나’를 중심으로 돌아간다는 점입니다. 이 종도 옳고 저 종도 옳다 한 사람은 황 정승입니다. 내가 틀렸다는 부인의 말도 내가 옳다 선언했으니 옳습니다. 모두를 옳다 보아주는 포스트모더니즘의 너그러움은 결국 나 자신은 언제나 옳다는 자기중심주의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내 생각에 옳은 대로

포스트모던 시대에는 ‘모두에게 옳은 진리’는 없습니다. 개인 각자가 자신의 삶을 바탕으로 이해한 그게 진리입니다. 내가 진리라 믿는 것이 남에게도 진리일 것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옳음은 옳음인데 절대 기준에 따르는 옳음이 아니라 너와 나의 관계에 맞춘 옳음이고 특정 상황에서만 적용되는 상대적인 옳음입니다. 부엌에서는 며느리가 옳지만, 안방에 가면 시어머니가 진리입니다. 서로 맞지 않는 종 두 사람의 말도 동시에 진리로 수용합니다.

이런 상대주의는 불가지론과 통합니다. 사람이 진리 그 자체를 아는 건 불가능하다는 겸손?한 태도입니다. 하지만 단순히 아는 능력만 부인하던 옛날과 달리 포스트모더니즘은 절대 진리의 존재 자체를 거부하는 교만함을 뒤에 숨기고 있습니다. 옳고 그름 자체를 따질 수 없게 된 우리 시대는 겉으로는 너도나도 다 옳다 하지만 남편의 무책임함을 지적하는 황 정승 부인의 입장은 폭력이라 부르며 거부합니다.

해 아래 무슨 새로운 것이 있겠습니까? 포스트모더니즘이 주도하는 우리 시대는 오래전 이스라엘 백성이 겪었던 사사 시대와 잘 통합니다. 왕이 없던 그 시대에 사람들은 풍요를 위해 우상을 섬기다가 고통을 당하면 여호와를 찾았습니다. 제사장이 축첩을 하고 손님을 동성애의 대상으로 이용하려 하고 여인을 집단 강간하여 죽게 만드는 윤리적 타락도 보여주었습니다. 사사기는 이 모든 악행과 그릇됨의 원인이 왕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분석합니다(삿 17:6; 21:25). 오늘도 성적 타락, 경제적인 불평등, 갖가지 폭력 등 삶의 양상은 비슷해졌습니다. 이것 역시 왕의 부재에서 오는 혼란이지만 우리 시대는 그것을 혼란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랜 세월 소외되었던 것들을 무차별 수용할 뿐 아니라 그것의 옳고 그름을 판단할 왕의 도래를 강력하게 거부하고 있습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기본 틀은 기독교와 반대입니다. 절대적인 것에 대한 무관심, 객관적 진리에 대한 거부는 서구 문화의 중심이었던 기독교 신앙에 대한 배척으로 이어집니다. 상대주의 자체가 이미 기독교 복음의 절대성에 대한 도전이요 길, 진리,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공격이 됩니다. 그 외에도 신앙의 개념, 성경의 의미, 자아의 역할 등 기독교 진리의 여러 요소에 대해 의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포스트모더니즘은 한 마디로 설명하기 어려운 복잡한 사상입니다. 그 사상의 다양한 요소들 가운데 긍정적인 것도 적지 않고 그것들을 배워 활용하려는 기독 학자들도 꽤 많습니다. 비방하는 자들을 통해서도 전파되는 것이 복음일진대 우리 시대를 온통 장악하고 있는 이 거대한 사상에서도 배울 점은 얼마든지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앞으로 몇 회에 걸쳐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해 살피려 합니다. 오늘 첫 글에서는 포스트모더니즘의 부정적 측면을 부각했습니다만 앞으로 하나씩 알아가는 가운데 조심해야 할 것들뿐 아니라 무엇을 어떻게 배워 활용할 것인지도 함께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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