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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후의 착각 & 세상의 끝[왕하10:1-17]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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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후의 착각 & 세상의 끝[왕하10:1-17]

주하인 2024. 9. 21. 07:04

DAL.E3로 그린 예후를 대표로 하는 보편의 우리네 내면^^;

아무리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여도

자신의 자아가 퓨전이되면

거기에는 잔인한 끝이 있을 뿐이다

 

화려한 지옥도.

천국을 가장한 지옥.

멸망으로 향하는 잠시의 부함..말이다

 

오늘 말씀을 보며

인간은 절대로 의지할 존재가 아니며

자신은 스스로도 완전히 믿으면 안된다는 것을

다시한번 깨닫게 된다.

 

이 어려움.

이 좁은 인생광야를 지나는데도

어찌나 그리도 많은 장해가 있는지..

 

이제나 되었을까 싶을 이때

나도 모르는 내 안의

크고도 무서운 자아의 덫이

날 그만 두지 않는구나...

 

아..

그리하여 이제 더욱더

날위해 이땅에 오실 수 밖에 없던

그 예수 그리스도의 크신 사랑의 결단이

새삼 더욱 더 크게 느껴지며

내게 허락되어진 성령의 은혜로

또다시 주님 예수 십자가 안에서

새로운 부활의 존재로

거듭거듭 거두어 주신다는

우리 하나님의 온전하고 완전하신 사랑안에서

거할 수 밖에 없음을 절감하게 된다 .

 

참으로 다행이고

참으로 안심이며

참으로 감사하다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

거할 또하루의 새로운 기회를 허락받음

그리하여 또 다시 부활한 하루를 

눈뜨고 맞이하게 하여 주시니 말이다

 

할렐루야 

그러하신 완전한 주님을 찬양합니다


5 그 왕궁을 책임지는 자와 그 성읍을 책임지는 자와 장로들과 왕자를 교육하는 자들이 예후에게 말을 전하여 이르되 우리는 당신의 종이라 당신이 말하는 모든 것을 우리가 행하고 어떤 사람이든지 왕으로 세우지 아니하리니 당신이 보기에 좋은 대로 행하라 한지라
예후가 다시 그들에게 편지를 부치니 일렀으되 만일 너희가 내 편이 되어 내 말을 너희가 들으려거든 너희 주의 아들된 사람들의 머리를 가지고 내일 이맘때에 이스르엘에 이르러 내게 나아오라 하였더라 왕자 칠십 명이 그 성읍의 귀족들, 곧 그들을 양육하는 자들과 함께 있는 중에
7 편지가 그들에게 이르매 그들이 왕자 칠십 명을 붙잡아 죽이고 그들의 머리를 광주리에 담아 이스르엘 예후에게로 보내니라
8 사자가 와서 예후에게 전하여 이르되 그 무리가 왕자들의 머리를 가지고 왔나이다 이르되 두 무더기로 쌓아 내일 아침까지 문 어귀에 두라 하고

 양육하던 '아이들', '제자들'..

그들에 대한 '사랑'..

'아이들에 대한 불쌍한 마음'...은 

자식들을, 제자들을, 아기들을 보고 기르고 하는

모든 인간에게 공통적으로 있었으리라.. 

특히 저 많은 사람들 중 단 하나라도.. ㅠ.ㅠ

 

 그런데 

그러한 인류의 보편적 감성이라는 

이 귀한 사랑의 감정들은

"당신이 보기 좋은대로 행하라"라는 말에서 느껴지는

'잔인함'...

'자신의 유익 내지 안전을 위하여 인성을 포기한' 매몰참에 의하여

여지없이 무너지는 듯하다. ㅠ.ㅠ

 

아니.. 인간이라는 동물에게 

자신보다 더 귀중한 것이 없음

한없이 초라한 '죄많은 존재들'에게

어이없는 기대를 하던

그 기대가 무너지는 듯하다. 

아니.. 역시.. 하며 허탈하다. ㅠㅠ

 

 거기에다 

'머리'를 두 무더기로 쌓은 저 그림이 ㅠ.ㅠ;;

잔인함의 끝

비정함의 막장을 보고 있는 듯하다. 

 

 비록 '그 시대'의 저러한 잔인함이

현대의 우리와 다른 개념이기는 하지만

그래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과정이 

우리의 가슴에 부담이 되기도 하여 

믿음의 정도에 따라 흔들리는 잣대로 허용되기도 한다 .

 

 그 모든 것 넘어

주님의 뜻으로 받아들여지는 때...

그 때가 '믿음'이 흔들리지 않는 때 아니던가?

 

 각설하고 오늘은 그 잔인함을 넘어서는

'자신의 유익을 위하여 

모든 '인정'을 무베듯이 (아니다 .. 머리 베듯이다.. ㅠ.ㅠ.... ) 잘라버리는

그리고 그를 넘어서

'두 무더기'로 쌓는 

저 '잔악하고 자신 밖에 모르는

세상의 끝'을 보고 있다. 

 

저들에게도 한때는'사제'로서의 사랑과

아가로의 안타까운 사랑이 잇었을 것을ㅜ.ㅜ;

여지없는 공포 속에서 무너지는 인간성을 보고 있다. 

 

 '아합'.

'그 속에서 권세 잡은 자들'

세상.

이 땅.

주님 모르는 세상의

아무리 포장된 아름다움도 그 끝의 실체는

이러함을 여지없이 보여주고 있는 것 같아

속이 뒤집히려 한다. 

 

 그렇다 .

하나님이 심판할 때 

반드시 드러나고야 말

이 지옥도의 참상을 보고 있다. 

온통 거짓으로 뒤덮혀 있고

감언이설로 유혹하지만

이 땅, 이 3차원 유한 세상, 사단이 공중의 권세 잡은

이 현실이라는 내 지금의 실체는

바람 불면 흩어져 버리고 말 '모래의 성'이고

단지 '하나님 뜻'에 따라 허용된

 '광야 연단'의 도구 이하도 이상도 아닐 것임을

아주 적나라이 보여주고 있음이다 .

 

10 그런즉 이제 너희는 알라 곧 여호와께서 아합의 집에 대하여 하신 말씀은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여호와께서 그의 종 엘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제 이루셨도다 하니라
13 예후가 유다의 왕 아하시야의 형제들을 만나 묻되 너희는 누구냐 하니 대답하되 우리는 아하시야의 형제라 이제 왕자들과 태후의 아들들에게 문안하러 내려가노라 하는지라
14 이르되 사로잡으라 하매 곧 사로잡아 목자가 양털 깎는 집 웅덩이 곁에서 죽이니 사십이 명이 하나도 남지 아니하였더라

 그리고 이제 이땅을 

'하나님 말씀'을 들고 살아가는 자들에 대하여

주의 사항을 말씀하시는 듯하다. 

 

 '말씀을 이제 이루셨다'는

예후의 선언.

그 선언은 '자신에게 내려진 명령'을 넘어서는 

'정치적 동기의 살인'에 의미를 부여하며

자신을 정당화 시키고 

스스로 합리화 시키려는 '공허한 외침'처럼 들린다. 

 

15 예후가 거기에서 떠나가다가 자기를 맞이하러 오는 레갑의 아들 여호나답을 만난지라 그의 안부를 묻고 그에게 이르되 내 마음이 네 마음을 향하여 진실함과 같이 네 마음도 진실하냐 하니 여호나답이 대답하되 그러하니이다 이르되 그러면 나와 손을 잡자 손을 잡으니 예후가 끌어 병거에 올리며

 그리고 마침 만나는 -아마도 하나님께서 그럴 기회로 테스트할 이유로 허락되어진 유의미한 ^^; 만남 아닐까? - '레갑'의 아들 여호나답에게

아주 '시적이고 아름다운 듯'한 표현을 한다 .

 "내 마음이 네 마음을 ~ 진실하냐"

 

 솔직히 속이 울렁 거리려 한다. 

토할 거 같다. 

웩~~ ㅜ.ㅜ;

 

온통 마음에 '호승심'..

하나님의 사람으로서의 '끓어넘치는 자부심'..이 뒤섞여

자신의 한계를 넘나드는 행위에 대하여

나름의 " 이것이 아닌가... 어쩌면..."하던 차 

'의미있는 증표' 같은 

레갑자손을 만나니 

'무릎을 탁치며'

하나님의 뜻이 맞을 게다..라 나름 안심의 도장을 찍힌 그 마음에

어쩌면 저런 '시적인 표현'이 나왔을 거다 .

 

그것.

하나님의 뜻이라 생각하고 

자신의 뜻과 퓨전되어 혼돈을 겪고 있던

바로 그 자리에 

사단의 터치가 이루어진 거 아닌가?

 

 

 이 부분..

이 부분을 경계하라고 

우리 주께서 말씀하시는 거 같다 .

 

모두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잘 흘러간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자리에 

내 '교만'내지 '왜곡된 성향'이 자리잡으며 

'하나님의 뜻'으로 포장되어지는 자리의 위험.. 말이다. 

 

그곳에 '파멸'이 시작될 수 있음을 경계하라고 

주께서 말씀하심이시다. 

 

 어차피 세상은 '혐오'스럽다 .

아무리 '인정' , '의무', 애정, 인간애.. 등의 이름으로 포장되어도

자신의 안위와 이익 앞에는 여지 없이 무너지며

지옥이 이런 것일 것임을 

이 땅에서도 쉬이 발견할 수 있는게 

이 땅이다. 

 

이 땅..

이 세상은 

목표를 두고 끝까지 투쟁하며 보존할 수 있는 

그 어떤 가치도 없다 .

아무리 고상한 이유를 들어도

그 깊은 내면엔  반드시 자신의 유익, 

자신의 안전감이 

삶의 유일한 , 최종의 동기일 뿐이다. 

 

그러한 속성은

'믿는 자'라고 무엇이 달라질까?

이 '본질된 죄악' 때문에

예수님이 급기야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마침내 '십자가'에 달리심이 아니시었던가?

 

그리고 

그 강력한 '아담의 죄'.. 

이 영혼의 본질의 죄 때문에 

십자가 보혈을 흘리시고

부활하신 다음

'성령'님을 보혜사로 보내시어

매사 은혜를 허락하시고 

매일의 삶속에서 '번제'를 드릴 때마다

또 '부활하고 다시 부활'하게 되는

그 영적 통로를 마련하신 거구... 

 

이제..

오늘 

나.

'레갑같고 여호나답'같은

하나님의 뜻 같은 듯한 우연의 존재에 

내 정당성을 맞추고

이것이 하나님의 뜻인양 

그대로 , 마음대로 지금을 유지하지 말고

다시금 '예수 십자가 '앞으로 나아와

나를 돌아보고

지금 내 하는 행동들이 

혹시 '예후'의 무자비함.. 

그에 동조하여 제자들을 무차별로 .. 그러하는 세상의 어이없음을 보고

그들보다는 낫다고 안심하거나

하나님의 뜻처럼 보이는

유사 징조인 '영적 레갑'들을 보며 확증하며

지금의 어리석음을 유지하는 

그러한 '예후의 우'를 범치 않도록

돌아보고 또 돌아보아야 겠다. 

 

 

 

주님.

말씀이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알겠습니다. 

 

주여.

어쩌면 지금 하루 하루 

열심히 주님 일을 하고 산다고 생각하는 것이

예후의 착각일 수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주여.

돌아보면 

온통 세상은 냄새나는 죄로 끝없이 달려가고

그를 힘들어 하나님 앞에 서려하지만

그러함조차 어느새 

나도 모르는 '죄'와 또 퓨전되어

어느 것이 옳은 지 모를

나름의 혼란에 와 있습니다. 

 

주여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러기에 

더욱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보혈, 부활, 성령의 은혜, 하나님의 그러하신 안타까우신 긍휼하심' 앞으로 나와야 하겠습니다. 

 

도와주소서.

오늘도 또 '성령의 은혜'를 힘입어 

새로 부활하여 

또 한걸음을 내 딛으려 하오니

주여.. 힘을 주소서

 

이 놀라운 인도하심을 믿고 

또 하루 나아가겠습니다. 

거룩하고 귀하신 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감사하며 기도합니다.

아멘

아멘

 

 

 

-------------(레갑과 여호나답에 대하여)

 

레갑과 여호나답(또는 요나답)은 성경에서 중요한 인물들로, 특히 예레미야서 35장에서 언급됩니다.

**레갑 족속**은 겐 족속의 일파로, 모세의 장인 이드로의 후손으로 알려져 있습니다¹. 이들은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가나안에 들어갔지만, 농사를 짓거나 정착 생활을 하지 않고 유목 생활을 유지했습니다. 이는 정착 생활이 가져다주는 안일함과 우상 숭배의 위험을 피하고, 경건한 삶을 유지하기 위함이었습니다¹.

**여호나답(요나답)**은 레갑의 아들로, 그의 후손들에게 몇 가지 중요한 규칙을 지키도록 명령했습니다. 이 규칙들은 포도주를 마시지 말 것, 농사를 짓지 말 것, 포도원을 소유하지 말 것, 집을 짓지 말고 장막 생활을 할 것 등이었습니다². 이 명령들은 레갑 족속이 경건하고 절제된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예레미야서 35장에서는 하나님이 예레미야를 통해 레갑 족속의 신실함을 칭찬하며, 그들의 삶을 본보기로 들어 유다 백성의 불순종을 책망하십니다². 레갑 족속은 여호나답의 명령을 수백 년 동안 충실히 지켰지만, 유다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듭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레갑 족속의 신앙과 절제된 삶은 오늘날에도 많은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충실히 따르며 경건한 삶을 살았던 모범적인 인물들입니다.

혹시 더 궁금한 점이 있으면 언제든지 물어보세요! 😊

¹: [레갑 족속(Recabites)(예레미야 35:1-19) - 네이버 블로그](https://m.blog.naver.com/lim9217/221428523080)
²: [렘 35:1-19 / 레갑 족속의 신앙 - 네이버 블로그](https://m.blog.naver.com/ydc0923/221715603866)

 

 

-------------(내 마음이 네 마음을 향하여 진실함과 같이 네 마음도 진실하냐의 의미)

 

열왕기하 10장 15절에서 예후가 여호나답에게 "내 마음이 네 마음을 향하여 진실함과 같이 네 마음도 진실하냐"라고 묻는 장면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 구절은 예후가 여호나답의 충성심과 진실성을 확인하는 순간을 보여줍니다.

예후는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바알 숭배를 척결하고 하나님의 율법을 따르려는 열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여호나답이 자신과 같은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습니다¹. 이 질문은 단순히 개인적인 충성심을 묻는 것이 아니라, 여호나답이 예후의 종교 개혁에 동참할 의지가 있는지를 확인하는 것이었습니다².

여호나답이 "그러하니이다"라고 대답함으로써, 그는 예후의 열심과 신앙에 동의하고 함께 행동할 준비가 되어 있음을 나타냈습니다³. 이는 두 사람이 함께 바알 숭배자들을 제거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협력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한 것입니다.

이 구절은 신앙 공동체 내에서 진실한 마음과 협력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예후와 여호나답의 대화는 서로의 신앙과 목표를 확인하고, 함께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협력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혹시 더 궁금한 점이 있으면 언제든지 물어보세요! 😊

¹: [열왕기하 10장 15절-33절 해설](https://www.bible.com/ko/bible/88/2KI.10.15-33.KRV)
²: [열왕기하 10장 본문 해설](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blessings4816&logNo=223020306579&noTrackingCode=true)
³: [열왕기하 10장 12절-27절 묵상](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canticles&logNo=223507879951&noTrackingCode=true)

원본: Copilot과의 대화, 2024. 9. 21.
(1) 열왕기하 10장 18절-36절 큐티: 예후가 바알 선지자들을 모두 죽인 .... https://m.blog.naver.com/jieun0441/221333910792.
(2) 열왕기하 제10장 본문 해설 (3/2): 예후가 아합의 아들들과 바알 .... 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blessings4816&logNo=223020306579&noTrackingCode=true.
(3) 묵상과 기도 - [12월 3일] 열왕기하 10장 - 묵상과 기도. http://nasumchurch.sg/friendship_03/59231.
(4) 열왕기하 10:15-33 예후가 거기서 떠나가다가 레갑의 아들 ... - Bible.com. https://www.bible.com/ko/bible/88/2KI.10.15-33.KRV.
(5) 열왕기하 10장 12절-27절, 진실한 마음과 하나님을 향한 열심 .... 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canticles&logNo=223507879951&noTrackingCode=tr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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