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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그리하셨다[마27:45-56]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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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그리하셨다[마27:45-56]

주하인 2019. 4. 19. 07:31



45.제육시로부터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되더니 
 온 땅에

온 세계에

온 나라에

온 마음에.....

어둠이 임하는 듯하다.

 요새


현시대

현재 ...말이다... ㅠ.ㅠ;



46.제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어찌 이 예수님의 고통을

우리가 짐작이나 할 수 있을까?

어둠으로 표현되고

주님의 부르짖음 (아.. 한마디도 안하시던 분께서 얼마나 힘드셨으면.. )을 통해

겨우 가슴이 흔들리지만 ......말이다



51.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그러나

그 어둠은

'사망','마지막', '절망', '사막' '황폐' '스러짐' ,소실.............의

고통이나 어둠이 아니다


 땅과 하늘을 이어주고

지옥과 천국의 구분을 모호하게 하신다 .

그 경계마져 부수신다.

그 의미는 '우주적 의미'를 지으시고 관장하시는 분은 주님이시란 이야기시다.


 절망과 소망의 차이가 없으며

죽음과 삶의 경계도 의미가 없어지고

약함과 강함의 차이도 별게 아니게 되고

슬픔과 기쁨

행복과 절망....

그 의미..

그 이전의 의미..

아.. 육신에 갇혀만 살던 존재들에게

3차원 세계의 의미만 가지던 자들에게

이제 새로운 길을 열어 놓았다는 것이고

차원을 넘어 점핑하는 자격을 부여 하셨다는 의미이기도 하시다.


그것...

예수님을 믿음으로

모든 우리의 규정짓던 존재들의 그러함은 사라지고

이제.......

주님이 허락하실

새로움

새 생명의 원리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음을 이야기 하시는 것이다 .



52.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보라.

세상에서 일어날 수 없는 일들이 이렇게 일어나지 않던가?


도저히 어찌할 수 없을

존재의 끝이라 생각했던 것..

사망이

찢어지고 갈라져

부활한 자들이 많아졌다 한다. ..


 그것.

상식은 '3차원' 우리세계,

육신, 물질계에 고착된 우리의 관념일 뿐이다.


그렇다 .

예수님 믿지 않고는

어둠은 어둠일 뿐이고

어둠은 사망이며

어둠은 끝이다.


그것을 두려워함.. 불안해 함은

하나님 안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 .


예수님이

그 것을

찢으셨다 .

할렐루야다.




55.예수를 섬기며 갈릴리에서부터 따라온 많은 여자가 거기 있어 멀리서 바라보고 있으니 
 이 구절이 눈에 뜨인다.


'멀리서 바라보다'

멀리서 바라보면

기적을 보긴 보되

그것은 기적같은 이야기일 뿐 .. 또 스러져 버린다.


더 가까이 가야 한다 .

주님 앞으로 말이다.



  참 오랫동안..

사순절 되면

그렇잖아도 암담했던 인생들이

왜 그리 어려운 일들이 많이 생기는 지

숨도 쉴 수 없는 경우가 많았다 .

어떤 경우는 너무 힘들어 '죽고 싶기'만 한.....경우 투성이였다 .

그거.. .

내 마음의 어두움 탓이 더 강했을지도 모르지만

어찌되었든.. 그랬다 .

 지난해도 사순절 기간 동안...

참.. 힘들었다.

많이...

현실적으로..


그래도 이전 불신자 시절의 극도의 낙망이나

초심자 시절의 부침이 심하게 웃고 울던 시절을 지나

점차로 소망이 생겨남은

그래도 예수께서 점차로 내 마음 깊이 다가오시면서 ,

아.. 내 믿음이 그래도 조금씩 성장해감 따라였겠지만...

어찌 되었든

난... 그럴 때마다  경험과 체험이 쌓이면서

부활 신앙의 어떠함,

곤란과 힘듦의 말씀적 원리, 로고스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게 되면서

주님 앞에

멀리 서서 보던 자에서

서서히 가까이 다가오는 자로 바뀌어 가게 됨을 느낀다 .^^*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고난은 힘들고 고통은 피하고만 싶다 .

불안할 때는 적어졌지만도 아직도 암담함에 빠지게 하려한다 .


그렇다

빠지게 하려 한다가 맞다.

그러함을

말씀에서...

주님의 은혜로 인하여

또 이렇게 깨닫게 하시니

귀하고 감사하다.



 주님

귀하신 주님의 고통이

이제야 끝나셨군요.


주여.

주님의 보이신 본을 따라

저도 다시 세상을 보려 노력합니다.

더 가까이 보려 합니다.


그냥 멀리서서 바라보던 자가 아닌

가까이서 말입니다.


주여.

묵상하다보니 깨닫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작은 땅,

이 작은 육신에 갇혀

물질의 눈으로 만 바라보려하던 모든 것들...

아주 오래전.. 수천년 전에 벌써

주께서 다 찢으시고 열어 놓으셨던 것을

또 미련한 우리..

가련한 저 주하인은

다시 제 육신 속으로 들어가

불안에 떨고

좌절에 넘어지려 하고 있었음을 말입니다.


주여.

간구하옵건데

멀리서 바라보지 못하게 하소서.

주님의 그러하심을

더 가까이서 보고 믿어

내 일상의 삶이

오직 주님예수님으로만

더 강하게 바라보고 생각하게 하소서.

내 주여.

주님..

믿습니다.


부활하실 주님을 기대합니다.

그, 부활이 내게도 다시 깊고 가깝고 큰 의미가 되게 하소서.

내 주 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거룩하시고 귀하신 그 이름을 들어 기도하였습니다.





--------------- 2014.04.18 묵상   (참조하셔도 좋으실 듯합니다. ^^*)



     극단의 절망 가운데 


45 제육시로부터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되더니
46 제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몇시간을 어둠이 계속된 후

예수께서 갑자기 큰 소리를 지르셨다.

'엘리엘리 라마 사박다니'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50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니다
 다시 한번 크게~~ 소리 지르고

돌아가셨다.  

 

 여기서 내 의식에 걸려 들어오는 몇가지가 있다 .

 

 우선 '어두움이 계속 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 분이

그 고통을 받으심을

하나님의 뜻이지만 하나님은 마음이 편하실까?

아니시다.

당신의 어쩔 수 없는 마음이

천지를 움직이셔 세상이 어두워진 것이시다.

그 근원을 알 수없는 사랑의 마음으로

당신 아드님을 세상에 '속죄제물'로 보내셨지만

그 찢어지는 아픔이 저렇게 드러나신 거라 보이신다.

우리.

이 조그마하기가 우주에서 티끌만한 지구

그 안에서 사는, 티끌보다 더 미세한 존재들의 머리로

어찌 그 심사를 짐작하기나 가능할지 모르지만

'성경'을 통하여 이제 '알기라도' 하지 않은가?

아는 우리에게 하나님은 '어두움'으로 그 분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미루어 짐작하게는 하신다.

 지금 온통 세상의 관심은 '세월호'에 쏠려 있다.

그 아수라장..

그 어두움의 질곡과 그 안에 서려진 비통과 참혹함을

우리는 어찌 이해할 수 있을까?

애꿎은 아이들이 죽어나가는

그 어이없는 일들을 어찌 이해할 수 있을까?

 오늘의 세상의 어두워짐..

그 비통함을 어찌 짐작이나 할까...

부디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지만

그 가슴 아픔이 하나님의 침통하심 안에서

조금이라도 어루만져 졌으면 하는 마음이다.

알지 못하지만 자꾸 기도가 된다.

 

 또 , 예수님의 외치심이다.

'엘리 엘리 .. '

너무나 유명하신 구절.

그냥 예수님이 외치시기에 당연히도 '선할 수 밖에 없다'고 믿고

받아 들이고 스쳐 지나가려 하지만

내용을 보면

'하나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이다.

 보면서 드는 마음은

우선은 '그 비할데 없이 고통스러운 힘듦'이다.

얼마나 힘드시면 저리 외치실까?

인간의 고통의 극을 경험하고 계심이시다.

 세월호를 자꾸 언급하여 연루 시키고 싶지는 않다 .

그들을 성경에 이용하고 싶은 마음도 없다.

단..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세상의 일들

극단의 고통을 예수님은 짊어지고 가셨음이다.

지금 이 세상 현상에 눈이 고정되고

육신의 삶이 모두라 생각하면

더 이상의 '답',

인생과 죽음과 .... 그 어떤 것도 답을 찾을 수없는 절망 뿐임을 말하고 있다 .

 예수께서 겪으시는 저 극심한 고통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있음을 짐작하고 있음이고

그 뜻 가운데의 가장 중심에

예수 '십자가'가 있음을 보고 있음이다.

 그리고

그 이해하기 어려운 '마치 하나님을 비난하는 듯한' 어조의 이유는

아래에 옮겨 놓았다 .

'아사셀을 위한 속죄제물'역할을 감당하시는 순간이시다.

우리의 모든 죄를

영문 밖에 수염소에 전가시켜 제물로 바치는 구약 행위의

실제적 '제사'제물.

 

 그리고 또한 걸리는 세번째 문제.

그것은 그 지독한 고통 후 뜨거운 열사의 지방에서

십자가에 매달린 열 몇시간 ,

그것도 피흘리시면서 매달린 그 긴 시간 동안

'통증성 쇼크'는 차치하고라도

'탈수'가 불가피할 것임에도

저처럼 '큰 외침'을 외치시는 게

의학적으로 가능할 것인가?

불가능할 것이다.

 의학적으로 가능하지 않은 것을 하심은

당연히도 '육신'을 입으셨지만 하나님이시신 예수님이기에 가능하셨다지만

그 가능한 것을 굳이 하신 이유는?

그것도 두번씩이나 '큰 소리'를 외치신 이유는 무엇일까?

설령 가능하다 하시고 뜻이 있으시다 가정하여도

고통에 찬 몸부림이라면

힘이 남으신 동안 하시는게 논리적으로 훨씬 더 타당한 이유지

왜 하필이면 돌아가시기 전 그러셨을까?

 또한 그 내용의 '불경스러운 ^^;; 듯함'이다.

하나님을 원망하는 듯한...

 

무엇 때문일까?

 그것.

우선 , 극한 달한 인간들이 발할 수있는

극단의 실존을 표현하는 것은 아닐까?

성경은 그래서 살아 있다.

삶과 절대로 괴리 되어 있지 않다 .

하나님이시지만 예수께서는 육신을 입은 자로서의

극단의 고통을 외치시는 것이다.

 

 또한, 다른 추론으로는

마지막까지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주변을 맴도는 자들을 배려하심이시다.

단 하나라도 '극적'인 상황을 연출하시며

(장막이 찢어지고 무덤이 .. 어두움... )

불신과 믿음 사이에서 왔다갔다 하는

수많은 가련한 자들을 배려하시는

마지막 배려심은 아니실까?

그렇게 따지면

그 예수님의 인간이자 인간의 극한을 넘어서는

그 사랑의 끝을

감동으로 받아들이지 않고는 안되지 않겠는가?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일이

이 주인 없이 이리저리 방황하고 있는  

이 세상, 그것도 대한민국에서 버젓이 일어나 버리고 말았고

그러함은 모두에게 진실,

이 주인없이 방황하는 세대에

모래성 처럼 무너질 현실을 보여주고 있음이다.

이때에

우리의 불가지 영역들을 가지고

이리저리 방황함은 답없는 일일 뿐이다.

오늘..

예수님의 이해하기 어려운

너무도 답답한 현상에 대하여

잠시 묵상해보면서

그래도 붙들어야 할 것은

예수님 , 하나님 , 성령님... 뿐이고

천국과 영생을 고려하여 확장해야만

그나마 이해가 됨을 알 수있음이다.

 

아..

오늘도

조금은 더 예수 십자가와

그 어두움과

그 고통의 외치심과

그러하심에도 우리에게 주시려는 교훈의 그 세심하심과

그 더할 나위없는 사랑과

절망 중에서도 오직 붙들것은

예수님 십자가 뿐임을

다시한번 상기해 본다 .

 

 

주님.

참 .. 어이없는 일들이

매일 같이 벌어지고 있고

그 어이없음이 상시화 되다보니

드디어 세월 호 같은 인재까지 벌어지고 잇습니다.

참으로 가슴아파

저도 모르게 기도가 나옵니다.

주여.

저 피지 못하는 가련한 영혼들을 받아 주시고

그들을 아파하는 식구들의 영혼을 위로하소서.

온 세상이

마치 어두움으로 그득찬 듯하여

자칫 절망 만이 세상을 뒤집어 엎을 듯한 이때

사단들은 자신들이 세상의 권세를 잡은듯 기세등등하겠지만

그래도 우리는 십자가의 그 엄청난 사역으로

승리하게 됨을 기억하게 하소서.

부활의 승리를 잊지 않게 하시고

절망 가운데서도

소망으로 붙들어 주소서.

주여.

 

오늘 주님의 극한 상황에서

자칫 이해하지 못할 몇가지 상황을 묵상함으로

이 극단의 절망 가운데서도

오직 소망은 예수님 십자가와

휘장이 찢어지고 무덤이 갈라짐으로

죽음과 삶을 넘나드시는 하나님의 그 무한하신 능력을 다시 의지하게 하사

소망없는 세상에

오직 주님 만이 소망이고 희망되게 하소서.

저들...

저희..

모두 불쌍하게 여기소서.

내 주님.

주님의 그 십자가 고난,

그 엄청난 고통을 인내하심을 인하여

저희가 살았습니다.

내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 속죄 제물로서의 예수님 )

 

십자가 II (모형적 제사)
                     http://blog.daum.net/kbclmy/6564049

 

십자가 III (실제적 제사 - 예수님)
                     http://blog.daum.net/kbclmy/6564261

 

 

 

 레 16:5~10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희생 당해야 할 속죄제물로 숫염소 두 마리를 준비한다.  

 두 마리 수 염소 중에 한 마리는 여호와를 위한 속죄제물이고 다른 한 마리는 아사셀을 위한 속죄제물이다.    이 두 마리는 모두 흠이 없고 온전해야만 한다.  

 

 

속죄제물은 흠없는 수 염소 두 마리라고 하였는데 실제적 속죄제물이 되신 예수님은 한 분이시라는 것에 대하여 어떻게 이해해야 되겠는가?  

그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 일인 이역 즉 두 마리 수 염소의 역할을 감당하신 것이다.   
 아사셀을 위한 속죄제물로서는 십자가 위에서 고통을 참으시며 산채로 버림 받으신 것이었고 여호와를 위한 속죄제물로서는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시고 죽으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십자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즉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하시면서 버림 당하셨을 때 아사셀을 위한 속죄제물의 사명을 감당하셨고 옆구리를 창에 찔려 피를 흘리시며 죽으실 때 여호와를 위한 속죄제물의 사명을 감당하신 것이다.

 

여기에서 아사셀이란 무엇인가?  
아사셀이란 말은 모세 당시에 민간신화 가운데 나오는 귀신의 일종을 가리켜 말한다.   
이 속죄하는 제사를 드릴 때의 아사셀이란 악령세계의 최고 통치자 즉 사단 곧 지옥의 왕을 상징하는 것이다.   
따라서 아사셀을 위한 속죄제물은 곧 사단을 만족시키는 제물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실제적 속죄하는 제사를 드릴 때 아사셀 즉 사단을 만족시키는 제물을 바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에덴낙원에서 타락한 후 원죄와 자범죄를 가지고 있으므로 필연적으로 지옥에 들어갈 수밖에 없는 인간을 대신하여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산 채로 버림받는 고통을 당하심으로써  지옥형벌을 받아 주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예수님께서 대신 지옥 형벌을 받아주셨기 때문에 지옥형벌을 면제 받게 된 것이다.  
 그리고 피 흘리는 속죄제물 즉 여호와를 위한 속죄제물이 피를 흘린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면서 피를 모두 흘려 주신 것을  상징한다.     
  이상과 같이 예수님께서는 두 가지  속죄제물의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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